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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깊은 숲에서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면 나무는 나무테를 새깁니다.
공기의 진동이나 공기의 온도나 물리량일 뿐이죠.
이거랑 비슷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전에 이런 공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벌의 시각에 비친 세계와 인간의 시각에 비친 세계는 과연 '동일한' 세계일까요? 이 두 세계가 <동일> 하다면 그 동일성의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요?
원자나 소립자나 쿼크 뭐 이런 것도 결국 인간의 시각에 비취진 관찰 경험을 기초로 인위적으로 구성된 실재 잖아요? 그러니까 벌의 시각을 가지고 인간 이나, 인간 이상의 지성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구성하는 세계와 인간이 구성하는 세계 사이에는 어떤 공약성이랄까, 공통성이라는게 조금이라도 발견될 수 있을까요?
dazzling 님,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 드려요.
제가 판단컨대,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타머스 네이걸)의 1974년 논문 〈What Is it Like to Be a Bat?〉의 핵심 요지에 대한 dazzling 님의 요약글은 대체로 맞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직접 박쥐가 되어 봐야, 박쥐 자신이 느끼는 느낌이 뭔지 알 수 있을 텐데, 우리 인간이 박쥐가 될 수 없으므로, 박쥐의 고유한 느낌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박쥐 대신 다른 어떤 생물/동물을 대입해도 같은 얘기인 것이죠. 논리적으로는 박쥐대신 ‘나’ 아닌 ‘남’ 즉 타인을 대입해도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 인간이 아무리 발전한 (미래의) 과학을 동원해도, 한 주체의 독특한 주관적 경험(the subjective character of experience)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나아가서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객관적 관점으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토머스 네이글의 위 논문은 환원주의(reductionism)와 물리주의(physicalism ≒ materialism ≒ 물질주의)의 한계를 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환원주의와 물리주의/물질주의는 객관성이나 3인칭적 관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1인칭적인 (인간과 박쥐를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의식적인 경험(conscious experience)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네이글이 의도한 것은 환원주의와 물리주의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이글은 환원주의와 물리주의의 궁극적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다만 그 한계만을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은 일종의 신비주의자적 불가지론자(mysterianist agnosticist)의 측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즉 토머스 네이글은 의식(consciousness)의 본질에 대한 파악불가능성을 논증하는 동시에 물리주의적 과학의 성립가능성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덧]
dazzling 님, 토머스 네이글의 해당 논문 제목은 정확히 “What Is It Like to Be a Bat?”이죠. 즉 dazzling 님이 표기한 논문 제목에는 “Like”라는 형용사가 빠져 있습니다. 토머스 네이글의 이 논문에서는 “Like”가 의미하는 내용이 핵심이랄 수 있기 때문에 빼먹어서는 결코 안 되죠.^^
숨쉬는 바람 님, 〈과연 ‘벌-구성-세계’와 ‘인간-구성-세계’ 사이에 어떤 공약성 혹은 공통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라는 문제를 던지셨는데요. 저는 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즉 두 세계를 정보(information) 개념으로 파악할 때, 두 세계 사이에는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공약성/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정보 개념으로 볼 때 벌들과 인간은 의사 소통을 이미 수십만 년 동안 해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 쌍방 간에 그 어떤 공약성이나 공통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쌍방 간의 의사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벌들의 (독)침은 인간(을 포함한 다른 침입자)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독침에 쏘이면 엄청 아프거든. 그니까 우리 벌집 건들지마.” 이런 벌들의 경고 메시지에 대해 인간(을 포함한 다른 침입자)들은 벌집을 건드리지 않거나, 도망가거나, 꿀을 따가지 않을 것처럼 위장 행동을 취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방충망으로 무장하거나 약초 연기를 피워 벌들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반응/응답합니다. 즉 벌들과 인간 쌍방 간에 정보 교환 혹은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정보 교환 형태, 즉 정보의 발신과 수신은 두 세계 사이에 그 어떤 공약성/공통점이 (나아가서 차이성까지)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보 개념에는 유사성(similarities, 공통성)과 차이성(differences)이 핵심적입니다.
위와 같은 벌과 인간의 정보 교환 방식에는 ‘시각(vision)’이 중심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벌침에 쏘였을 때 느끼는 엄청난 통증(pain), 즉 직접적인 감각적 통각, 욱신욱신 쑤시는 듯한 아픈 느낌은 그 정보의 내용이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과연 벌들이 이런 욱신욱신 쑤시는 듯한 통증 감각을 지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벌들이 날카로운 독침으로써 실어나르고자 하는 정보 내용은 아픈 느낌, 통각, 통증 따위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왜냐? 왕팅이한테 한 방 쏘여보면, 절절하게 깨닫게 될 테니까요.
따라서 벌들의 시각으로 구성한 세계와 인간들의 시각으로 구성한 세계는 과학적으로 볼 때 분명 다르게 드러나겠지만, 그럼에도 두 세계 사이에는 한 가지 이상의 공약성/공통점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dazzling 님:
나무 얘기 나온 김에 흥미로운 거 하나.
인간이 나무 근처에서 멀리는 300피트까지 존재하면 이것이 나무에 영향을 끼쳐서 자외선 가스를 뿜어냅니다(Human Stress Syndrome). 인간이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많은 자외선가스를 뿜어내어요. 자외선 가스를 내뿜는 모습을 특수카메라로 찍으면 확인이 가능하죠. 이런 human stressed tree가 더 견고하고 단단해서 실용성이 있다고 해요. 숲 속에서 인간과 동떨어져 자란 나무로 집을 지으면 좀 축축한 편에 재질이 부드러워서 잘 부서진대요. 벌목꾼들이 나무결과 단면의 색깔을 보면 어떤 것이 human stressed tree인지 아닌지 잘 안답니다.
⇒ 위에 인용한 dazzling 님의 글을 읽고서 문득 스컬리와 멀더의 엑스 파일(The X-Files) 시리즈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즉 나무, 자외선 가스, 내뿜는 모습, 벌목꾼, 나무결, 나무 단면, 이런 단어와 이미지들이 꽤 오래전에 보았던 엑스 파일 한 편의 영상을 떠올려주는군요. 그 엑스 파일 편에는 벌목꾼들이 깊은 산중에서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들을 전기톱으로 벌목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런데 전기톱에 잘려나가는 생나무들 (나이테) 속에서 녹색 형광물질처럼 빛나는 정체 모를 수많은 날벌레 떼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벌 같은 녹색 날벌레 떼가 벌목꾼들을 공격하고, 벌목꾼들은 공포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죠.
이 의문의 살인 날벌레 습격 사건을 풀기 위해 스컬리와 멀더가 나서게 되죠. 수사하다가 아마 멀더가 그 녹색 날벌레 떼의 공격을 받게 되죠. 자세한 줄거리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군요.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 아주 신비롭고도 공포스러운 한 편의 SF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 친구와 함께 상상력 부풀리며, 흥미진진한 설렘과 ‘스릴’ 속에서 엑스 파일 시리즈를 매주마다 보던 옛날이 생각나네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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