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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북 서치를 통해 저 셋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를 보이고, 그 셋의 관계에 대한 제 나름의 입장까지를 보이는 댓글이었습니다.
사실, 아이추판다님이 헬름홀츠라는 이름을 거론하시는 것을 보고, 라캉을 읽으면서 그 이름을 읽어봤던 기억이 떠올라서, 구글 북 서치로 검색을 했던 것이고, 저의 입장에서라면 유의미하게 라캉의 입장을 도출해낼 수 있었죠.
저의 댓글을 발췌 인용하면,
라캉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perception-conception system에서, perception과 conception사이의 간극(gap)을 얘기하고, 기억(memory)의 문제를 논의하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을 얘기하겠죠."
"프로이트는 헬름홀츠의 이론을 아주 심각하게 고려하고, 프로이트 자신의 이론을 헬름홀츠의 기계론적 사고(mechanistic ideas)에 맞추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헬름홀츠와 Brucke이 "모든 것을 attraction과 repulsion이라는 물리적 힘들로 환원하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들의 과학주의에 반대해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름이 걸린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죠."
인용 끝.
이러한 입장들은 제가 저 댓글을 달기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추판다님의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댓글에 반응한 것이기도 합니다.
인용시작
"우리의 감각은 원격 자극(distal stimuli)에 의한 근접 자극(proximal stimuli)로부터 촉발되는 것입니다. 지각은 거꾸로 이런 근접 자극으로부터 원격 자극을 추론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망막에 맺히는 상은 2차원에 촛점도 잘 안맞고 게다가 안구의 혈관에 그림자까지 드리워져있지만 우리는 깨끗한 3차원 영상으로 시각적 경험을 합니다. 따라서 감각으로부터 지각에 이르는 과정 사이에서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어떤 정보처리과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죠. 이 정보처리과정은 근접자극으로부터 원격자극을 추측하는데, 이 추측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해서 의식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헬름홀츠의 무의식은 '또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의식과 전혀 다른 것이죠.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헬름홀츠가 제안한 개념이 맞습니다."
인용 끝(강조는 저의 것입니다)
저의 댓글에서 헬름홀츠에 대해 "기계론적 사고," "과학주의"라는 라캉의 평가, 헬름홀츠는 "모든 것을 attraction과 repulsion이라는 물리적 힘들로 환원하려"했다는 라캉의 평가를 논하는 것으로 댓글을 멈추겠다고 댓글을 적었습니다. 심리학, 인지과학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헬름홀츠를 잘 모르는 저로서는, 라캉의 헬름홀츠에 대한 평가 이상을 쓴다는 것은 저의 능력 부족일 뿐만 아니라, 그런한 것들을 공부한다는 것은 저에게 너무 큰 짐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음 백과사전에 있는 헬름홀츠를 읽는 것도 고역이네요).
아이추판다님께선 이런 저의 댓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다셨습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걸고 정신분석학이 왜 과학인지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헬름홀츠부터 시작할 필요는 별로 없습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인용 끝
아이추판다님께선 제가 헬름홀츠에 대해 쓴 것은 일언반구도 없고, 저에게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저 굵은체로 강조된 "증거"가 저를 억누르는군요.
저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댓글을 이미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즉 라캉이 헬름홀츠에 대해 기계론적 사고, 과학주의라고 평가하고, 헬름홀츠가 모든 것을 물리적 힘들로 환원한다라고 평가했다는 것을 이미 썼음에도 불구하고, 님은 저에게 증거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사실 증거를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아이추판다님이 아니겠습니까? 즉, 헬름홀츠에 대한 라캉의 평가에 대해 님께서 반박하는 글을 써야되는 것 아닙니까? 기왕 쓰시는 김에, 프로이트가 헬름홀츠에 대해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프로이트를 잘 모르니, 헬름홀츠를 잘 아시는 님께서, 프로이트의 헬름홀츠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제게도 큰 공부가 될 듯합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헬름홀츠에 대한 저러한 평가들에 대해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신다면, 반박할 꺼리도 안된다고 여기신다면, 굳이 반박하는 글을 쓰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헬름홀츠에 대해 댓글로 쓰인 글에 님이 증거를 제시하라는 말씀에 위의 본글을 썼고 댓글들이 오고간 것이네요. 물론, 제가 이곳에서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라고 이야기를 안 했던 것이 아니고, 이런 수준에서 님의 "증거"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님과 같이 정신분석은 과학이 아니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심리학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분에게서, 그와 같이 "증거"를 제시하면 된다는 말을 듣는 다는 것은 여러모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칼도님의 글에 헬름홀츠에 대한 댓글을 썼을 당시에는, 님의 입장은 어떠한지는 생각도 안했고, 헬름홀츠와 프로이트, 라캉의 관계를 보이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은 없었다는 것도 밝힙니다. 물론, 라캉에 대해 쓰다보니, 라캉이 "과학주의"라고 말하는 것을 언급할 수 밖에 없었죠).
이런 맥락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나가봐야 되서, 나중에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의 헬름홀츠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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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U - TS
dA = dU - d(TS)
= dU - (TdS + SdT)
= (TdS - pdV) - (Tds + SdT) <= dU = dQ - dW (dQ=Tds & dW=pdV)
= -pdV - SdT
karma/
우선 님 댓글을 일부 인용부터 해둡니다.
<<< 프로이트도 라캉도 아닌 저의 입장에서라면, 어디까지 헬름홀츠를 검토해야할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을 걸고 정신분석학이 왜 과학인지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프로이트와 라캉이 당대의 "과학주의"와 어떻게 싸웠으며, 지금 나는 어떻게 싸울것 인지의 전략을 세워야한다면, 아마 저로선 헬름홀츠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이 기울이는 "과학"이라는 노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저에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저의 관심사의 작은 한 부분일 뿐이까요. 저는 정신분석학으로 밥 빌어 먹어야할 입장은 아니니, 정신분석학으로 밥 빌어 드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일이긴 합니다. 그래도 지금 오가는 정신분석학, 심리학에 대한 얘기들로도 저는 만족이니까요. >>>
1. 이 글을 요약하면 이런 얘깁니다.
=> 정신분석학이 왜 과학인지를 증명하고, 또 과학주의와 맞서 싸울 전략을 내가 세우는 작업에 착수한다면, 그 경우 헬름홀츠부터 검토, 연구를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내 여건, 처지에선 헬름홀츠부터 연구하면서 이 문제에 시간을 쓸 여유는 없다.
2. 그러자 아이추판다님이 이런 댓글을 남겼죠.
==> 정신분석학이 과학이라는걸 증명하려면 헬름홀츠부터 시작할 필요는 별로 없고, 정신분석학의 과학성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일이다.
3. 이 말을 두고 karma님은 아이추판다님이 karma님에게 증거제시를 요구하는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죠. 저 댓글을 두고 아이추판다님이 님한테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거라고 여긴다면 어처구니 없죠. 사실.... 지금 님은 말이 안되는, 억지 시비를 남한테 걸고 있는 거에요. 다음 가상의 대화를 봅시다.
karma : 만약 이번에 체중을 감량하고 피부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단식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너무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네요.
아이추판다 : 만약 체중을 감량하려고 하신다면 단식까지 할 필요는 별로 없습니다. 그냥 식사만 제때 규칙적으로 하시면 됩니다.
karma : 아니, 요즘 너무 바쁘다고 분명히 말을 했는데, 지금 저한테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라고' 요구하시는건가요?
아이추판다 : ......?????
댓글을 이어갈 기회를 님께서 저에게 주시네요.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그동안에 정신분석학과 관련해서 써왔던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앞 뒤 맥락 딱 짤라먹고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신 아이추판다님의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당장, 저는 아이추판다님이 "감각으로부터 지각에 이르는 과정 사이에서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어떤 정보처리과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죠."라고 말한 것에 대해, 정신분석학에서의 "perception-conception system에서, perception과 conception사이의 간극(gap)을 얘기하고, 기억(memory)의 문제를 논의하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을 얘기하겠죠."라고 쓰고, 심리학, 인지과학과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관련이 될 수 있는지의 아주 작은 단초 하나에 대해서 썼습니다.
근데, 아이추판다님은 앞 뒤 맥락 싹둑 잘라먹으면서, 저에게 프로이트와 라캉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셨죠. 제가 지금까지 썼던 것, 피아제에 대한 것이든, 헬름홀츠에 대한 것이든, perception-conception system에 대한 것이든, 그 모든 것들이 어떤 증거도 되지 못한다고 여기셨나 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전 그냥, 입을 닫으면 되는 것이죠.
사실, 저는 은근히 그런 것을 기대했습니다. 제가 perception-conception system에 대해서 쓰면서, 제가 "감각으로부터 지각에 이르는 과정 사이에서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어떤 정보처리과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죠."라고 말한 것을 읽고, 정신분석학에서의 "perception-conception system에서, perception-conception사이의 간극(gap)을 얘기하고, 기억(memory)의 문제를 논의하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을 얘기하겠죠."에 대해서 쓰면서 아이추판다님이 인지과학과 심리학(그것은 이미 헬름홀츠를 훌쩍 넘어선, 현대의 인지과학까지 포함해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전 그것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의 입장을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쓸 수도 있었겠죠.
마지막으로 님의 비유는 좀 그렇습니다. 저에겐 시간도 없을 뿐더러, 정신분석학이 과학이라고 입증할 능력도 안된다는 것이겠죠. 혹은, 아이추판다님의 강한 주장 덕분에 저의 주장들은 어떤 효력도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에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겠구요. 무엇보다, 본문의 짧은 글을 쓰는 것도, 별거 아닌 것같은 댓글을 다는 것도 너무 힘이 드네요.
여하튼, 저에게 변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캉이 피아제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karma님이 써놓은 것을 기준으로 하면 역시 아주 엉망입니다. 피아제의 이론에서 '자기중심적(egocentric)'이라는 술어가 표현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독백'이라는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독백'을 강조한 사람은 피아제가 아니라 동시대의 비고츠키죠. 이런 얘기는 학부 발달심리학 교과서만 봐도 다 나오는 얘기입니다.
피아제의 분류에 따르면 2~4세는 전조작기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아이들은 타인의 관점을 잘 인식하지 못해요. 피아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실험으로 입증합니다. 하나의 물체를 실험자와 아이가 함께 봅니다. 대신 실험자는 반대편에서 물체를 봐요. 그리고 아이에게 실험자의 위치에서 이 물체가 어떻게 보일지 설명하게 하면 아이는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모양을 이야기 합니다. 피아제가 말하는 '자기중심성'이란 이런 뜻입니다. 발음이 나쁘거나 생소한 문법, 어휘를 쓰기 때문이 아니에요. 물론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피아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피아제의 주장은 실험적으로 재현 가능한 것이죠.
라캉은 그냥 피아제를 엉터리로 읽고 자기 멋대로 떠들고 있는 거고, karma님은 그걸 무슨 대단한 이야기인양 인용하고 있어요. 근데 이게 아주 우스꽝스러운 소리란 말입니다. 라캉은 혼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귀기울여 듣는 사람을 위한 찬가"라고 떠드는데 라캉이 그래서 아이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뭘 직접 관찰하고 연구했나요? 정작 아이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아이들의 생각하는 방식을 알아내려고 한 사람은 피아제지 라캉이 아니죠.
쾰러의 거울 실험의 결과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을 쓴다면,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는 곧 흥미를 잃습니다. 원숭이보다 지능이 낮은 동물들은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흥미를 잃는 원숭이와는 다르게 인간의 아기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오히려 그 이미지 자체에 흥미를 갖는 다는 것이죠. 이것이 쾰러의 실험과 어떤 정도로 정반대로 인용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라캉은 자신의 이론을 전개시키겠죠. 그리고, "거울 단계"라는 용어 자체는 쾰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져 온다고 알고 있네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서 찾아봐야 됩니다.
피아제의 실험은 흥미롭네요. 저런 걸, 꼭 실험을 해야 하나 할 정도로, 지금의 과학의 입장에선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것을 실험까지 할까 싶을 정도의 실험이네요. 피아제의 실험 덕분에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겠지만요. 물론, 자기중심성이란 님이 말한 것이 맞는 것이겠죠. 그러나 피아제는 전조작기를 말하면서, 그 전조작기를 세 가지로 나누죠. 즉, 어른의 말을 그져 따라하는 것, 혼자 독백하는 것, 하나의 그룹을 이뤄 대화를 나누지만 결국은 피아제가 독백이라고 말하는 것.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서, 라캉은 그런 피아제와는 다르게 얘기한다는 것이고, 님은 비과학이라고 치부하실지 모르지만, 저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예요.
세 살짜리 조카와 두 살 짜리 조카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저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죠. 근데, 둘은 무언가 얘기를 나눈다는 겁니다. 라캉이 직접 아동 정신분석을, 혹은 심리학을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대상관계 이론이든, 등등을 라캉이 몰랐을리는 없겠죠. 그의 이론을 현대 심리학과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오류는 인정해야겠지만 말이죠.
님의 댓글에 너무 많은 내용이 있어서, 그것들 모두에 대답은 할 수 없고, 일단 이정도만 쓰겠습니다.
쾰러의 실험에서 침팬지는 거울에 비친 모습에 흥미를 잃지 않습니다. 라캉이 왜곡 인용한 것이죠. 라캉의 인용은 이런 식으로 악명이 높아요. 라캉이 무슨 실험을 한 것도 아닌데, 그나마 인용하는 것도 엉망이니 그 이론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남는 거라고는 그럴듯한 말 뿐인데, 말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죠.
karma님은 라캉의 주장(?)이 '타당성' 있다고 했는데 그거야 karma님이 보기에 그럴듯하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럴듯한 이론이 지천으로 깔려있단 말이죠. 예를 들어 작업기억(working memory)에 대해 심리학계에는 그럴듯한 이론이 10개나 있습니다. 이 이론들은 그냥 말로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게 아니라 수학적으로 정확히 기술되어 있고, 실험 결과도 아주 잘 예측한단 말이죠. 오늘도 심리학자들은 이 이론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 더욱 정교한 실험을 하고, 뇌의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한단 말이에요. 근데 정신분석학 책이나 몇 권 읽은 분들이 자기가 좀 보기에 말이 그럴듯하다고 '타당성있다' 이런 말하면 좀 곤란하죠.
그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Some of you may recall the behavioral characteristic I begin with that is explained by a fact of comparative psychology: the human child, at an age when he is for a short while, but for a while nevertheless, outdone by the chimpanzee in instrumental intelligence, can already recognize his own image as such in a mirror. The recognition is indicated by the illuminative mimicry of the Aha-Erlebnis, which Kohler considers to express situational apperception, an essential moment in the act of intelligence.
저기서 outdone이라는 부분을 오독했나 봅니다. 침팬지가 인간의 아기보다 더 뛰어나다는 얘기인 듯한데, 제가 오독했네요.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분명히 다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헬름홀츠로부터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정신분석학은 기억의 문제, 무의식의 문제, 감각과 지각 사이의 간극과 같은 것들을 분명히 얘기한다는 것이죠. 이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심리학이 기울이는 "과학"이라는 노선을 제가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그리고 라캉이 그러했듯이, 저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배울건 배우겠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이 말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예요. 그것을 비과학이라고 치부해서, 아무 말도 못하게 한다는 것은 좀 아니라는 것이구요.
나가야 되서, 이 정도로 쓸 수 밖에 없네요. 죄송합니다.
나중에 더 쓸 수 있을 듯합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쾰러와 라캉에 대해서 좀 더 쓰겠습니다. 물론, 라캉이 인용한 쾰러일 뿐입니다.
앞에서 인간의 아기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흥미를 잃는 원숭이와는 다르게 인간의 아기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오히려 그 이미지 자체에 흥미를 갖는 다는 것이죠."라고 썼는데 제가 라캉에서 읽어낸 부분이 틀린 것은 아니었네요.
단지, 아이추판다님이 쾰러의 실험은 "원숭이가 아니라 침팬지"라고 해서, 급하게 답변하다보니, 라캉이 쾰러를 "이용"하는 부분만을 읽고, 위의 댓글에 발췌 인용했었네요. 근데, 위에 인용한 문단 뒤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Indeed, this act, far from exhausting itself, as in the case of a monkey, in eventually acquired control over the usefulness of the image, immediately gives rise in a child to a series of gestures in which he playfully experienc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vements made in the image and the reflected environment.
두 발췌 문단, 즉 침팬지와 원숭이가 들어간 두 문단을 비교하면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두 문단을 비교해보죠.
일단, 라캉은 쾰러의 용어들을 쓰는 듯한데, "behavioral characteristic," "comparative psychology," "champanzee," "instrumental intelligence," "illuminative mimicry of the Aha-Erlebnis," "situational apperception"이 쾰러에게서 온 듯합니다. (저는 쾰러를 모르기는 하지만, 저 용어들은 라캉에서는 거의 안 쓰이는 용어입니다. "도구적 지성"과 같은 용어 말이죠. 혹은 Aha-Erlebnis라는 독일어도 쾰러에서 오지 않았나 싶구요.) 라캉이 쾰러를 어느 정도 까지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침팬지와 인간 아이를 비교하고선 그 다음 문단에서, 원숭이(a monkey)라고 쓰는 것이 바로 의문이라는 거죠. 즉, "어떤 원숭이 (a monkey)"는 쾰러가 실험한 "그 침팬지(the chimpanzee)," 즉 "사람상과"의 침팬지와는 다르다는 것이 저의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라캉이 예로 들고 있는 "어떤 원숭이"는 라캉이 쾰러의 실험에서 빌려온 것인지 아닌지 궁굼하다는 겁니다. 즉, 쾰러가 "비교 심리학"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의 아기를 비교할 뿐만 아니라, 침팬지와 인간상과에 포함되지 않는 영장목 동물인 원숭이를 비교했는지 궁굼하네요. 그렇지 않다면, "원숭이"에 대한 라캉의 이야기는 쾰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빌려온 것이겠죠. 그렇지만, "아하-경험(Aha-Erlebinis)이라는 illuminative한 모방"의 예, 그리고 "상황적 인지(situational apperception)"의 예, 즉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이런 저런 동작을 한다는 문장을 "원숭이"와 인간 아이를 비교하는 문단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쾰러가 인간 아이와 (침팬지가 아닌) 원숭이를 비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까지도 해봅니다.
참고로, 라캉의 <거울 단계> 논문은 36년에 최초로 쓰여졌습니다. 정신분석학회에서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발표를 못하고, 49년에 발표됩니다. <<에크리>>에 실린 것은 49년 판이죠.
해당 대목은 말씀하셨듯이 쾰러의 책에서 거의 그대로 옮겨온 부분인데 관심을 잃는다 운운한 부분은 쾰러의 책에서 침팬지도 원숭이도 아닌 다른 동물들에 대해 설명한 부분입니다. 쾰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빌려왔다면 이제는 왜곡 인용이 아니라 출처없는 인용이 되지요. 라캉의 인용은 아주 악명이 높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 편이 높습니다.
사실 기억, 감각과 지각의 간극 이런 것은 정신분석학보다 심리학과 생물학에서 연구가 더 많이 되고 있는 것이죠. 이것들은 행동 수준, 신경 수준, 분자 수준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하게 연구가 되어있습니다. 심리학에서도 50년전의 연구는 거의 다 기각되었는데 자기가 직접 실험한 것도 아니고, 남의 실험을 이상하게 끌어다가 그 위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인 라캉의 주장에 무슨 의의를 둘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위의 문제들은 제가 급하게 댓글을 달다보니 발생한 오류였습니다.
제가 <거울 단계> 논문의 집필 연도와 발행 연도를 써놓은 이유가 바로 님께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까지는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제가 명확해 지네요.
제가 원숭이가 흥미를 잃는 다고 썼는데, 이것도 저의 오류인가 봅니다. 라캉은 위의 댓글에서, 원숭이의 경우와 인간 아기의 경우를 동일하게 말합니다. 혼란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라캉이 여타 이론들을 어떻게 끌어다 쓰는가의 문제, 인용의 문제는 여기서는 다루기가 쉬운 문제가 아닐 듯합니다. 님이 거론하시는 악명 높은 라캉의 인용에 있어서의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라캉이 자신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에게 도둑질 당하는 것에 대해 극도록 예민했었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라캉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 정도의 지적 정직성은 당연한 것이겠죠. 이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엄밀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판받아 마땅할 터이구요. 그러나 진위 문제는 모두 논쟁을 통해 검증되어야 할터이구요.
정신분석학은 정신분석학이 가는 그 길 위에서 나름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죠. 그래서, 남미에서의 정신분석학 그룹이라든지, 여러 그룹들이 있을 수 있겠죠.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실천과 관련된 논의일 테구요.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관련해서라면, 그것이 나름의 이론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심리학, 생물학 등등의 여타 학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신분석과 자연 과학을 모두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도 했었습니다. 바로 님과 댓글을 나누고 잠자리에 들면서 그런 상상을 했었습니다. 즉, 그렇게 비판을 받고, 논쟁거리로 회자되는 프로이트와 라캉 만큼 여타 다른 학문들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하는 거죠. (물론, 이는 제가 찾아보지 않아서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모를 수도 있겠구요.) 이런 사람들을 통해, 프로이트와 라캉을 현대 자연 과학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도 있겠죠. 하나의 가능성일 뿐인데, 저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거죠.
논문 제목 : Lacan’s Misuse of Psychology
Url : ( http://tcs.sagepub.com/cgi/content/abstract/23/4/1 )
This article critically examines the relations between Lacan’s psychoanalytic theory and more conventional psychological ideas. It does so by concentrating on Lacan’s notion of the ‘mirror stage’. Lacan and some of his followers have suggested that psychoanalytic theory is ‘beyond psychology’. It is argued that Freud believed that psychoanalytic theory was beyond conventional psychology in a synthetic rather than rejectionist way. Lacan cited the work of orthodox psychologists such as Wolfgang Köhler, James Mark Baldwin and Charlotte Bühler as providing evidential basis for his ideas about the mirror stage. The rhetoric of these citations is examined in detail. It is suggested that Laca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facts’ of psychology and the interpretation of the facts. However, close rhetorical examination shows inaccuracies in his citations about the behaviour of children and chimpanzees in reaction to mirror images. Moreover, the evidential basis that he cites is neither supported by contemporary psychology, nor, more seriously, did it suggest what Lacan was claiming at the time of his writing.
전문을 꼼꼼히 읽고 글을 써야겠네요. 글을 쓰기 전에, 한 가지만 언급하면,
이전에 썼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 인정받길 원해서, 수학소(matheme)니, 브로미언 매듭이니 하는 것들에 집중하는데, 이에 대해 제가 정신병(psychosis)이라고 썼던 적이 있었죠. 이에 대해 minue622님이 이와 관련해 라캉의 비과학성에 관련된 영어 원문을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에는 제가 미쳐 응답을 하지는 못했었죠.
여하튼, 결론적으로 말해서, 라캉은 망상증(paranoia)으로 시작해서 정신병으로 그의 지적 여정을 마무리 합니다. 이 결론은 라캉의 전기를 읽으면서 받은 인상 입니다. 저 망상증으로 시작된 시기가 라캉의 1930년대 였죠. 그 망상증은 저와 같은 부적절한 인용과 오용을 낳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 어떤 명성도 얻지 못했던 30년대의 라캉 말이죠. 즉,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서의 문구와 인용문구 만으로 하나의 책을 쓸 수 있다는 벤야민 (이 부분은 13년 전에 읽은 것이라 확인을 해야 됩니다). 근데 막상 재미 있는 것은 라캉 자신이 "망상증적 지식"이라는 말을 36년에 발표하려던 <거울 단계> 논문에서 쓰고 있다는 것이죠. (망상증과 정신병은 30년대의 라캉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였죠.) 라캉은 슈레버 판사 혹은 빌헬름 라이히와 같았을지 모릅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프로이트와는 또 다른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탄생을 했지 싶습니다.
이러한 저의 주장들은 라캉을 "정신분석"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를 통해 어떤 재미있는 얘기를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꼼꼼하게 읽고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추판다님의 라캉에 있는 인용의 문제와 더불어서 말이죠.
전 이만 나가봐야 겠네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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