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조선인들중 이른바 "국어 상용화 정책"의 결과 일본어 의사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엄청나게 큰 정신적 자산이었다, 근접한 선진국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음이므로. 지금도 만일 남한 인구의 절반이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아주 큰 잠재력이 될 거라고 말할 수 있다.

해방 당시 미군정에서 행한 조사에 의하면, 당시 문해율이 14% 정도였다.
이것을 이승만이 의무 교육 제도로써 1960년에 90%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이 인적 자원을 박정희가 산업 역군으로 활용하는데,
그들의 머리 구실을 한 사람들은 일본어 해득자로서,
일본으로부터 거의 대부분의 과학 기술 학문을 복제해 왔다.

을유년 해방을 기념하여 을유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개업하였고, 그 기념비적 사업이 "세계문학전집 100권" 발간이었다. 외솔 최현배가 만든 경쟁출판사인 정음사판의 "세계문학전집 100권"도 있었다. 이게 전부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重譯)이었음을 아는가? 문학만 그랬겠는가?

공장을 돌리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가장 손쉬운, 그리고 거의 최종적인 문제 해결 방법은 "일본 공장 견학"이었다. 모방(mimesis)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기러기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친분(이라고 쓰고 "종속"이라고 읽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1990년대초부터는 그래서 일본측이 공장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왜 "현지처"까지 대주면서 일본인 [은퇴] 기술자들을 모셔 왔을까?
이제는 폭파되어 흔적도 없지만, 남산 외인 아파트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그들과의 모국어 수준의 의사 소통이 중요치 않은 일이었을까?
(가령 트럼프와 재인의 회담과, 트럼프와 메이나 트뤼도와의 회담의 깊이가 동등할까? 재인와 정은의 회담과, 재인이와 근평이의 회담의 깊이가 동등할까?)

예전에는 남한을 국제 사회에서 "small Japan"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의 cooy라는 말이다.

물론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조선 속담이 있듯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 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 이글은 본시 판단력부족 회원의 질문에 대한 댓글을 보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