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편

 

 

본 연구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려한다. 우선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공산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의 유년시절과 가정환경 및 공산주의 사상 수용과 공산주의 청년단체에서의 활동을 고찰한다. 그 다음 1930년대 초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할 때인 만주 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을 설립할 때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고찰하려한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의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경력인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의 활동상을 고찰해보겠다.

 

 

  본 연구 논문의 참고 자료는 먼저 1930-40년대 동만주의 항일운동 및 김일성을 다룬 당시 문서들이다. 그리고 주 참고 자료로는 김일성을 객관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보고 연구했던 학자들의 연구들이다. 연구 자료의 종류는 단행본과 연구 글들이 있으며 그 외에도 기타 연구 자료에 유용한 자료를 활용할 계획이다. 

 

 

 

Ⅱ. 공산주의 수용과 공산주의 청년단체 활동

 

 

  金日成(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즉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金成柱(김성주)이고 아버지는 빈농의 아들이자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인물인 金亨稷(김형직)이며 어머니는 김일성의 고향과 이웃한 고평면 하리에 있는 하리교회의 장로인 康敦煜(강돈욱)의 딸인 康盤石(강반석)이다. 여기서 아버지 김형직은 비밀결사 독립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결성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강반석은 전형적인 기독교집안의 여식이었다. 김일성은 어린 시절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김일성은 유년시절에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에 있는 창덕소학교를 다녔는데 창덕소학교는 1909년 기독교 집안이던 김일성의 외가에서 세운 하리 장로교회가 설립한 학교이다. 김일성은 창덕소학교에서 수학하면서 기독교 교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일성은 창덕소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길림성 화전현의 화성의숙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 길림성을 비롯한 만주지역은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는데 화성의숙은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계통의 학교이다. 김일성이 이곳에 재학하게 된 이유는 정의부 소속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김형직의 영향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형직은 그 해에 사망하였고 이로 인해 김일성은 화성의숙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김일성은 화성의숙처럼 길림성에 있는 육문중학에 들어갔다.(참고)《육문중학은 1917년 길림의 저명인사가 정부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중학을 만들고자 청진의 남개중학을 본떠서 창립한 사립중학교다 》

 

당시 김일성은 정의부에서 지원하는 학자금을 받고 다녔다.

 

 

김일성이 처음으로 공산주의를 접하게 된 것은 육문중학에서 수학하고 있을 당시였다. 김일성은 육문중학을 다닐 때 尙越(상월)이라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상월선생 등을 통해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구입해 읽었고 공산주의를 배웠다.(참고)《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현실 12권(1994), 한국사연구회, p. 149.》

 

그렇다면 스승 상월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수용하게 된 김일성이 소년 시절에 어떤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을 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아래에 제시되어있다.

  이 자료는 1929년 5월 14일 길림 주재 가와코에(川越(천월)) 총영사의 보고내용인데 일제의 관헌자료로 당시 만주의 한인들에 대한 첩보자료이다. 이는 김일성이 처음으로 등장한 일제자료이기도하다. 잠시 내용을 살펴보자.

 

VI.     5월 상순, 길림성성(吉林省城(길림성성)) 대동문 밖 모 선인(鮮人) 집에서 남만공산청년 회원 허소(許笑)ㆍ한석헌(韓錫憲),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연락원 이금천(李琴川), 그의 처 성숙자(成淑子), 남만한인청년동맹 김동화(金東華), 법정학교학생 신영근(申永根), 육문학교 학생 김성계(金聖桂) 남만학원 졸업생 차식(車軾) 외 수명이 모여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이 역원을 선거하였는데 그 면면 및 협의 사항을 종합컨대 앞의 사람들은 정의부 측에 후의를 갖은 자 같다.

 

 

VII.   책임비서 허소, 조직부 한석헌, 선전부 김동화.

VIII.

IX.                                         (중략)

X.

XI.   5월 10일 길림성성(吉林省城) 북산(北山) 부근 모처에서 제2회 회의를 열고 다음의 사항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XII.   1. 소년단 조직은 허소ㆍ차식ㆍ신영근ㆍ김성계에게 일임할 것

 

XIII.   2. 반동단체 내 책진회와 관계된 일은 김동화ㆍ차식 양동지에게 일임하고 … .

 

XIV.   3. 재중청년동맹의 조사는 허소, 김성계 양동지에게 일임하며, 조사할 사항은 간부, 강령, 규약, 회원 수 및 발간문서 등으로 한다.

XV.   4. 학생조사는 신영근, 김성계 양동지에 일임하여 조사할 사항은 학교별 성명, 연령, 본적, 현주소로 한다.

 

 

  위 자료에서 김성계(金聖桂) 로 지칭된 인물은 김성주(金成柱)의 잘못된 표기로 김성계는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를 의미한다. 이 자료의 내용은 길림성에서 조선인들이 ‘조선공산청년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는 것과 그들이 맡은 역할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고 언급된 인물들과 그들이 속한 단체를 볼 때 김일성은 단연 가장 나이가 어린 그룹에 속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29년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18살이다. 그는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조선공산청년회와 같은 공산주의 관련 단체 설립에 참여하였고, 육문중학 및 (재중 청년동맹) 내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김일성이 비교적 이른 나이서부터 활발한 공산주의단체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참여한 조선공산청년회는 그 멤버들의 구성을 보면 사실상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부 성향의 조직이다. 여기서 국민부란 기존의 정의부가 1929년 봄에 자신들과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인 신민부 및 참의부와 함께 새로 개편한 단체이다. 이것은 정의부가 나머지 민족주의 단체인 신민부와 참의부를 흡수한 것이다.(참고)《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항일만주투쟁(창작과비평사, 1992), p. 41.》

 

이러한 변동은 당시 만주의 조선인 사회에서 좌우합작 이라는 사명을 두고 사회주의 단체들과 민족주의 단체들이 서로 주도권을 갖기 위해 격렬히 대립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위의 자료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김일성이 조선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그가 국민부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김일성이 국민부 소속이었던 까닭은 정의부 소속이었던 돌아가신 아버지 김형직으로 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부에서 활동한 김일성은 왜 조선공산청년회라는 공산주의 단체 결성에 참여했을까. 그 이유는 당시 국민부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1920년대 말 국민부에서는 청년 멤버들의 우경화가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김일성이 참여한 조선공산청년회도 국민부 내 청년들의 좌경화 현상의 일환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은 1929년 가을에 중국 군벌당국에 체포되었고 길림감옥에서 투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육문중학에서 더 이상 수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감옥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는데 오늘날 김일성의 공식 전기에서는 그가 1930년 5월에 석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국민부 내 청년들의 좌경화 현상은 김일성이 길림감옥에서 있

 

 

   이상..       0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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