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주해야 할 불편한 역사의 진실들

 

2019.08.09.

 

 

진실을 외면하고 반일 종족주의에 찌든 애국자로 행세하며 대중의 칭찬을 받느니 차라리 후세가 제대로 된 역사적 진실을 알 수 있게 된다면 기꺼이 반일 종족주의자들의 죽창에 망신창이가 되는 것을 감수하겠습니다.

반일과 친일의 이분법으로 내편 니편을 가르며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매국노라고 욕하는 전체주의자들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이 하수상하니 이런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고는 글을 올리기도 힘드네요.

오늘은 그 동안 제가 역사 문제를 다루었던 글들을 정리하여, 불편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들을 간추려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짜증나고 불편하더라도 정면으로 마주해 볼 용기를 한번 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안중근은 동학농민군을 서절배(쥐새끼 같은 좀도둑)라고 표현하며 아버지와 함께 동학군 토벌에 나섰지만, 동양평화론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이 주축이 된 일진회와 유사한 스탠스를 취한다. 일진회는 독립협회, 대한자강회와 함께 문명개화론을 설파하며 교육사업에 힘썼다.

 

2.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동학농민군의 폐해를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동학농민군의 선량한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3. 안중근 부자는 동학군을 토벌했지만, 동학에 참여해 황해도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김구를 집안에 기거시키며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다. 김구는 상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을 살해했다는 의심도 받고, 해방 후에는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친일 행적에 통분하며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4.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은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와 박문사(장충단 내, 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서 만나 사죄하고 둘이 화해함으로써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혔다.

5.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라며 적시한 15가지는 대부분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안중근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어두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 대표적으로 열다섯번째 이유인 일본 천황의 태황제를 죽인 죄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태황제는 메이지 천황의 전대 천황으로 고메이를 지칭하는데, 이 고메이는 개방을 반대하고 근대화에 부정적인 인물이라 개방과 근대화를 추진하던 세력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안중근은 이 고메이를 물러나게 하고 죽인 것에 이등박문이 관여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를 볼 때 안중근이 일본 황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조선 황실(왕실)에 대한 인식도 어떤지 알 수 있다. 대한 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의 내용 중에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이다.”,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주권을 누린다.”고 되어 있습다. 대한 제국의 국체는 전제군주국이고, 모든 권한은 황제에게 있는 전근대국가라는 말이다. 이런 대한제국과 조선 황실의 유지가 안중근의 목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을 일본과 같이 근대화시켜 신분제를 타파하고 삼권분립의 근대 민주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이등박문을 안중근이 살해한 것은 역사의 후퇴이고 반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6.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총리를 지낸 근대 개혁가이고,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대립하여 조선의 합병을 반대한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일하며 전국에 5천개의 소학교를 짓고 조선의 교육에 공을 들였다. 이토가 학교를 세우는데 지역 유지들의 협조를 받고자 했지만, 양반들은 자신의 자식이 상놈과 같이 앉아 공부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7.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운 우금치 전투의 실상은 이렇다. 동학 부적을 그려서 가슴팍에 붙이고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고 주문을 외우면 총알도 피해간다는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말을 믿고 농기구를 들고 참전했던 농민군들이 일본군 (개틀링) 기관총에 36,000명이 학살당한 것이 우금치 전투이다. 그 때 죽은 일본군은 단 1명이었다. 이게 당시 동학농민군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 수준이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은 봉기를 만류했는데 전봉준과 김개남 세력이 무리하게 봉기했다는 설도 있다. 그 결과는 수 만명의 민중들의 죽음,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이다.

 

8.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하고 성주에서 동학운동에 뛰어 들었으나 동학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냈다.

 

9. 김구는 치하포 사건에서 민간 일본인을 살해하고 돈을 강탈한 살인강도 행위를 했지만, 이를 민비를 시해한 복수행위로 백범일지에서는 포장하고 있다. 영화 대장 김창수치하포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내용은 치하포 사건을 왜곡하고 있다.

 

10. 독립협회 회원이며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과 일진회는 대립했다. 한일합방의 원흉인 이완용과 일진회가 이런 관계였다. 일진회의 수장인 이용구는 한일합방 이후 이를 후회하고 괴로워 했다.

 

11. 일본에 항거해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우리 교과서는 칭송이 자자하지만, 대부분 조선 왕조의 부활이나 성리학적 세계의 복원을 원하는 복벽주의자 유생들(대표적으로 유인석)중심이라 당시에 민중들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진회는 의병투쟁이 문명개화를 달성하는데 장애가 되고 동양평화를 해친다고 인식하고 의병의 무력토벌에 가담하였다.

 

12.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들은 나중에 일진회의 주축 세력이 되고, 일진회는 일본을 이용해 근대화를 도모하려 했던 긍정적 활동도 했다. 물론 친일행위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받아야 하겠지만.

 

13. 민비의 시해에는 조선인들의 조력자가 많았으며, 대원군도 이에 가담하였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는 민비 시해 당시 일본인들을 안내한 경복궁 수비대장이었다.

 

14. 민비는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의 군인들에게 쫓겨서 친정이 있는 여주로 가는 길에 어느 마을에 들러 물과 음식을 마을 아낙네로부터 제공 받았는데, 다시 정권을 잡은 후에 그 아낙이 있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이유는 그 아낙이 물과 음식을 민비에게 주면서 민비인 줄 모르고 니가 민비와 그 일가의 폭정으로 고생이 많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 아무도 그 아낙이 누구인 줄 모른다고 하자 민비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민비는 미신과 무속에 빠져 아들을 위해 금강산 12천봉마다 시주하여 국고를 탕진하였고, 민씨 일가의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민비는 조선의 국모가 아니라 백성을 억압하고 나라를 피폐케 하여 망국에 이르게 한 희대의 악녀일 뿐이다.

 

15. 3.1 만세운동에서 사망한 사람은 우리 정부의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 의하면 645명으로 박은식이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서 밝힌 7,503명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는 총독부가 당시에 집계한 553명과 유사한 숫자이다.

http://theme.archives.go.kr/next/collection/formJapaneseSearch2.do

 

16. 1931,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물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여 쌍방간 충돌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중국인에 의해 조선인이 살해되었다는 오보를 내자, 조선 내에 중국인 테러가 발생해 평양 등에서 127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400여명의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중국인의 집과 가게가 방화 피해를 입자 중국인들이 대거 조선을 떠났다. 소위 만보산 사건이라 부르는 이 사건에 대해 우리 교과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 때 죽은 중국인 숫자와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피살되었던 조선인의 숫자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17.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조작되고 일본 사회의 내부 불만이 조선인에게 향하면서 도쿄, 지바(千葉), 가나가와(神奈川) 등 관동 일대에서 재일동포가 일본군과 경찰, 자경단 등에 의해 살해된 조선인이 다수 살해되었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피살된 조선인 숫자를 6천명 이상이라고 기술하고 있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정부의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에 의하면 289명으로 나타난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보상 요구하고자 조사했던 관동대지진 피살자도 200여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일본 내무성이 조사한 사망 231, 부상 43명의 숫자와 유사하다.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6천명 혹은 수천명이라는 이 숫자는 관동대지진으로 사망한 조선인 숫자로 이를 자경단 등에 의해 피살된 숫자로 둔갑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당시 피살된 조선인들을 위한 위령비를 건립하고 당시 사건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만보산 사건에 대해 중국인들에게 사과나 위령비 건립은커녕 사건 자체를 은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 -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

http://theme.archives.go.kr/next/collection/formJapaneseSearch3.do

 

 

18. YTN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고 소개했던 그림은 관동대지진 때의 일본인이 재일 조선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만보산 사건 이후 조선인이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YTN이 보도한 그림의 상단을 살펴보면 倭奴 嗾使 鮮人 慘殺 我同 胞之 血恨라고 적혀있다. ‘왜노(倭奴, 일본인)가 선인(鮮人, 조선인)을 속여 우리 동포(중국인)를 참살하게 하고 핏자국을 남겼다라고 쓰여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조선인)이 합동으로 중국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맥락상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 아니라 1931년 한반도에서 있었던 화교배척폭동’, 그리고 평양화교학살’, 즉 만주에서 일어났던 만보산 사건으로 조선 내에서 벌어졌던 조선인에 의한 화교 학살 사건을 그린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19. 2017, 4MBC '이브닝 뉴스가 보도한 일제시대 징용노동자 관련 내용은 사실을 철저히 왜곡했다.

[이브닝 이슈] "모두 거짓" 산케이, 영화 '군함도' 비난

http://imnews.imbc.com/replay/2017/nw1800/article/4215654_21388.html

MBC가 하시마섬이라고 공개했던 사진은 실은 하시마(端島) 탄광(나가사키(長崎) )의 지하가 아니라, 카이지마(貝島) 탄광(후쿠오카(福岡) )에서 지상 노천채굴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임이 밝혀졌다.

MBC가 공개한, 한 남성이 옆으로 누워서 채굴하는 사진도 하시마 탄광이 아닌 치쿠호우(筑豊) 탄광이다. 이 사진은 사이토 고이치가 찍은 것으로 1950~60년대에 한 가난한 일본인이 폐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장면으로 확인됐다.

MBC가 하시마 탄광을 지옥과 같은 현장이라면서 검게 그을린 사람들을 공개한 사진은, 실은 19269월에 홋카이도(北海道)에 소재한 아사히카와(旭川) 신문이 도로건설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학살치사 사건을 보도했던 사진이다. 역시나 시대와 장소, 경위, 소재가 한참 다르다.

한편, MBC는 해당 방송에서 하시마 탄광의 내부 벽에서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어머니 보고 싶어라는 한글 낙서가 발견됐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산케이에 따르면 “(문제의) 해당 낙서1965년에 조총련 산하 단체가 제작한 영화 속에서 치쿠호우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영화의 연출성을 높이기 위해 제작진이 새겨 놓은 글씨에 불과하다.(영화 제목은 을사년의 매국노’)

낙서경위와 관련 정확한 사실관계는 200013일자로 니시닛폰(西日本)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당시 영화 제작에 관여한 관계자는 강제연행과 관련된 영상자료는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감독이 ‘(연행된 사람들의) 느낌을 넣는 게 좋을 것 같다’ (고 말했어요)”라고 증언한 바 있다.

 

20. 제주, 경남 등 전국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 헐벗은 강제징용 노동자상의 모델은 하시마(군함도)에서 노역하던 조선인 징용자가 아니다. 이 노동자상의 모델이 된 사진상의 인물 10명 모두 일본인이며 1926년 홋카이도 토목공사 현장에서 학대받은 사람들이다.

이 사진은 우리에게 일제에 끌려가 학대당한 조선인 노동자들로 알려진 대표적 사진으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기념비에 새겨지고,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수록된 바 있다.

 

21. 서경덕(성신여대 교수,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 알리는데 김장훈과 함께 열심인 사람)군함도의 진실을 알리겠다며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광고한 광고영상에 나오는 군함도의 인물 사진 속 주인공들은 군함도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려 굶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조선인들이 아니다.

서경덕이 올린 사진 속 주인공들은 192699일 홋가이도 아사히카와 신문이 게재한 홋가이도 탄광에서 노역하는 일본인 광부 사진이다.

1926년이면 조선인이 징용되기 한참 전이었음으로 저 사진 속의 사람들이 조선인일 리도 없고, 군함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홋가이도라는 것이 명백함으로 서경덕이 저런 사진을 내걸고 펀딩을 하고 영화 군함도를 홍보한 것은 사기이며,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저 사진을 동영상에 넣어 광고한 것은 전 세계를 상대로도 사기를 친 것이다.

 

22. 영화 동주(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감독 이준익)에서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福岡県) 교도소에서 의문의 주사를 맞은 뒤 얼마 후 피를 토하며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영화 말미에 나오는 후쿠오카 감옥에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1800여 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의 자막이 나온다. 이는 마치 당시 악랄한 일제가 수감자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이라도 감행해 수많은 조선인들을 살해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일본) 사법성에서 매년 간행하는 행형통계연보는 내지(內地, 일본 열도)의 형무관계의 각종 통계를 집성한 것인데, ‘행형통계연보’ 1939판을 보면 1939년말 현재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1397명이 수감되어 있으며, 각 지소를 전부 포함해도 2000명이 조금 넘었다. 여기서 2000명이 조금 넘는 숫자라는 것은 물론 조선인 수감자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수십배 많을 수밖에 없는 일본인 수감자를 포함한 숫자다. 윤동주가 후쿠오카에 수감되어 있던 1944년의 수감자 숫자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1940년대 들어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재감자가 몇 배, 몇 십배 늘지 않은 이상, 후쿠오카 형무소의 수용인원을 기준으로 볼 때 생체실험으로 1800명 사망이란 건 성립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1939년 내지(일본 열도)의 형무소 전체 수감자 26,651명 중, 조선인은 남녀 합쳐서 1,391명이 있었다. 당시 일본 형무소 전체에서 일본인 총 수감자가 조선인 총 수감자의 19배에 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평양전쟁시기에 조선인 도항자수의 증가와 그에 수반한 범죄의 증가, 치안유지법 등 사상사건의 증가 등으로 숫자가 크게 늘었을 수 있겠지만, 이 시기의 1,391명을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1944년 일본 전국(내지 전체)의 조선인 수감자를 달달 긁어모아야 1800명이라는 숫자는 넘지 않을 것이다.

1800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일본이 전국 형무소에 있는 조선인 총 수감자를 모조리 살해했다고 주장해야 혹시 가능한 숫자다. 결국, 후쿠오카 형무소에 한정하건, 일본 형무소 전체로 확장하건 1800명이라는 숫자는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숫자임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들어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재감자가 몇 배, 몇 십배 늘지 않은 이상, 후쿠오카 형무소의 수용인원을 기준으로 볼 때 생체실험으로 1800명 사망이란 건 성립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23.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보천보 전투에 대한 남북한 교과서의 내용은 과장이 너무 심하며, 1922자유시 참변으로 무장 독립군끼리 서로 싸워 사실상 독립군은 와해되고, 독립군의 활동은 그 이후 힘을 잃었고 특별한 전과가 없었다.

우리 중고등교과서에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 전사, 300명 부상, 독립군 4명 전사, 2명 부상으로 나오지만, 일본측 기록에는 일본군 1명 전사, 2명 부상으로 나온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양측 사상자는 우리 교과서에는 일본군 1,200명 전사, 독립군 60명 전사, 90명 부상으로 나오지만, 일본측 기록은 일본군 11명 전사, 24명 부상이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본영사관 비밀보고서'를 언급하면서 청산리 전투에서 카노 연대장이 죽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영사관 비밀보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카노 연대장이 사망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본 육군성 공문서를 조회해봤더니 일본군 전사자는 일반병 11명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카노 연대장의 죽음은 중국측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국내학자(박창의 논문. 동북 지역 한민족독립운동사 관련 사료 정황)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경찰보고서를 인용, 카노가 버젓이 생존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24.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는 고작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해 주재소에 근무했던 순사부장의 2살 짜리 딸과 구경 나온 음식점 요리사를 죽인 것이 고작인데, 북한에서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축지법으로 일본군 사단 병력을 격퇴했다고 선전한다. 중국의 자료에 따르면 이 보천보 전투를 직접 지휘한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고 중국인이었고, 이 중국인을 김일성이 살해했다고 한다.

193767일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동북항일연군 소속 최현, 김일성 부대와 박달, 박금철의 조국광복회 등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현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일시적으로 습격하고 퇴각, 6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성인,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 6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의 25명이 사망, 30명이 부상,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원이라고 한다.

진보성향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은 민간인 2(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25.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으로 와해되어 1921년 이후 사실상 무장투쟁운동은 힘을 잃었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19216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러시아 적색군(赤色軍, 적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고,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다.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하여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 모았고,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 권력투쟁이 발생했다.

러시아 적군이 독립군 내부 권력투쟁에 개입하여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인 공산주의자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하면서 3,500명의 독립군이 적군(赤軍)에 의해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탈출한 사람은 드물었고, 이후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됐다.

 

26.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미주의 독립운동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한인들이 모아준 독립운동자금으로만 운영되었다.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장개석)의 전적인 지원으로 운영되었으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국 공산당(모택동)과 소련 볼세비키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장개석 영향 하에 있어 독립군의 무장에도 제한을 받았으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도 중국과 러시아 군 편제에 편입되어 사실상 독립적인 독립 무장 투쟁은 불가능했다.

 

27. ‘코민테른 40만 루블 사건으로 김구는 이 자금의 운반책이었던 김립을 살해했다.

소련의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을 지원해주기로 이동휘(사회주의 계열)와 약조를 하고 이중 60만 루블을 먼저 주었다. 김립은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고, 40만 루블을 한인사회당으로 지급한다. 돈의 본래 수령자와 사용처에 대해 김구와 이동휘, 크게는 임정과 사회당의 반목이 생기고, 김구는 원래 임정으로 와야 할 돈이 사회당으로 흘러간 것은 김립의 개인 유용이라고 판단하고 김립을 암살했다. 원래 이 돈은 볼세비키가 한인사회당에 지급하기로 결정했고, 결산보고도 한인사회당이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볼세비키가 임정내 사회주의 계열에 지원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임정내 좌파와 우파가 결렬했다.

 

28.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신고주의를 채택하여 신고하지 않은 민유지를 약탈하여 일본인에게 주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토지조사과정에서 신고하지 않은 민유지는 거의 없었으며, 일반 민유지 중 약탈당한 민유지는 거의 없었다. 다만, 궁방과 민간 사이에 소유권이 분할되어 있었던 경우나 민유지를 궁방전에 강압적으로 편입시킨 경우에 이 토지를 조선총독부가 국유지화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민간으로부터의 이의 제기가 있었고, 이런 토지 중 일부는 끝내 국유지로 되었지만 이것 역시 해방될 때까지 토지소유권 분쟁이 계속되었다.

 

29. 일제시대의 조선(한반도)의 예산(조선 총독부 예산)4~18% 정도는 일본 본토 정부로부터 보조 받았다. 일제시대 예산의 대부분은 철도건설과 식산흥업에 쓰였고, 3.1운동 이후는 식민지(병합) 경영을 위한 치안 등 행정비용이 크게 늘었다.

 

30. 일제시대 조선으로부터의 쌀 수입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일본 내지의 농민들이 조선으로부터 쌀 수입을 금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조선총독부에 시행토록 지시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쌀 수출을 금지하면 조선의 농민들이 힘들어진다며 이를 거부했다. 당시 일본의 쌀값이 조선의 쌀값보다 월등히 비쌌기 때문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쌀 수출이 많았다. 우리 교과서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지역간 가격 차이에 따른 무역거래를 수탈이라고 표현했다.

 

31. 일본이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의 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일본이 토지와 임야조사를 위해 측정기준을 삼기 위한 기준 표식을 위해 박았던 구조물을 이런 식으로 매도한 것일 뿐이다. 심지어 군부대의 훈련을 위해 설치된 철구조물을 일본이 박은 쇠말뚝이라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일본은 풍수지리를 믿지 않는데 풍수지리가 만연한 조선 사람들이 근대화의 산물을 비과학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것을 오늘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믿는 것은 어이가 없다.

 

32. 일제가 조선의 전통주들을 말살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근대화되고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품질이 균일하고 위생적인 제품들이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됨으로써 근대화된 공장에서 생산된 주류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자 한국의 전통주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퇴출된 결과일 뿐이다.

 

33. 한국산 호랑이가 멸종된 것은 일제시대 일본이 국내 호랑이를 모두 죽여 없앴기 때문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호랑이는 맹수로 당시 조선인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생업에 큰 지장을 주었음으로 조선인 스스로가 일제에게 호랑이를 없애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도시나 농가에 멧돼지가 출현하면 포획하거나 사살해 달라고 시민들이 민원을 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34. 일제가 조선의 산림을 황폐화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미 구한말의 우리나라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더 이상 황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한 상태였다.

조선총독부는 산하에 산림과를 두어 산림을 관리했고 무단 벌채를 엄금했으며, 일본에서 연탄을 들여와 난방을 하게 했다. 3.1운동 당시 해방이 된 줄 착각한 사람들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무분별한 벌채를 막고 국가적으로 식목행사를 펼쳤다.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식수하는 관례는 일본이 전파한 것이며, 식목일의 유래도 조선 총독부의 43일 식수일로부터 나온 것이다.

 

35. 일제가 우리의 문화유산을 훼손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오히려 일제는 문화유산 보존에 노력했으며, 발굴에도 관심이 많았다. 경주의 불국사나 석굴암을 오늘 우리가 현재와 같이 볼 수 있는 것도 일제 덕분이다. 석굴암을 잘못 보수하여 처음의 형태처럼 보전되지 못하고 불국사가 왜색풍이라며 비판하지만, 당시의 문화재 보존기술을 감안하고 보수가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만약 일제가 아니라 조선이나 대한제국이었더라면 현재 우리가 보는 문화재의 많은 것들은 벌써 허물어져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36. 일제가 한글을 말살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일제는 소학교 교과에 조선어(한글) 과목을 정식으로 편성하고 교육했다. 오히려 근대화된 교육기관에서 남녀, 신분 차별 없이 조선어(한글)를 공부할 수 있어 조선의 대중들의 문맹률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한글은 세종 때 창제되었지만, 제대로 보급(교육)되지 않아 그 한글을 읽고 쓰는 대중들은 구한말까지 별로 없었다. 아래의 블로그를 보면 1935년 발행한 보통학교 6학년 조선어독본의 표지와 내용을 볼 수 있다. 당시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똑같은 수업시간을 배정했다.

https://blog.naver.com/greensonata/220585903015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에는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정했다. 1938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제가 조선어 사용을 제한하는 제3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조선어를 필수과목에서 빼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 19391230일자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이 기사는 그 동안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해왔던 사실을 밝히고 제3차 교육령에서는 조선어를 수의과목으로 하여 학교장의 재량으로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37.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38(?) 징병령과 징용령을 내리고 일본 내지인에 대해 먼저 실시하고 조선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인적 자원이 부족해지자 1944년이 되어서야 실시한다. 조선인에 대해 징병과 징용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까지에는 조선인에 대해 참정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조선인에 대한 징병과 징용을 검토할 때 일본 정부는 조선()에게도 참정권을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는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 친구에게 너는 군대에 징병되지 않아서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징병령을 내리고 19(18?)까지 징집을 하게 되자, 선거권이 없던 19(18?) 청년을 징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곧바로 선거 연령을 19(18?)로 내렸다. 권리와 의무는 함께 하는 것이다.

 

38. 1900년 이전의 우리나라 고서나 지도 등의 문헌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우리 외교부나 독도 관련 단체들이 제시하는 우리의 역사적 근거는 모두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와 관련된 것일 뿐 실제 독도에 대한 것은 없다. 독도의 옛 지명이 우산도라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고문헌에 나오는 우산도는 모두 울릉도 혹은 죽도를 의미할 뿐 독도와는 무관하다. 우리가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내세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내용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39. 우리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랫말을 읊으며 세종실록지리지삼국사기(삼국유사)’에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우기지만 사실이 아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 구절을 찾을 수 없고, 세종실록지리지 오십 페이지 셋째 줄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지증왕 십삼년 섬나라 우산국이라는 가사는 <삼국사기> 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조, 44 열전 이사부전과 <삼국유사> 1 기이제 지철로왕조에 나오는 것으로 지증왕 13(512) 6월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 현재의 강릉)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정벌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에 우산국은 명주(溟州 正東)의 해도(海島)로 울릉도(鬱陵島)라 불리기도 했다고 나오고 삼국유사에는 于陵島(今作羽陵)’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이사부가 울릉도(우산국)를 정벌했지 독도를 정벌했거나 독도를 신라의 관리하에 두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이사부는 독도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보여지고, 그리고 당시에는 독도를 관심에 둘 이유도 없었다. 이런 판국인데 삼국사기의 이 내용을 두고 우산이 독도를 지칭하는 것이라며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섬의 크기도 훨씬 크고 사람이 많이 사는 큰 섬인 울릉도를 두고 조그만 한 돌 섬에 사람도 살지 않는 섬 이름을 삼아 나라의 이름인 우산국이라 지었겠는가?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산국()은 울릉도를 이르는 말이지 독도를 지칭할 수가 없다.

 

40. “세종실록 지리지 오십페이지 셋째줄에 나와 있는 아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함이 합당하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

<해석 : 우산과 무릉이 현의 정 동쪽 동해에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으며, 날씨가 맑으면 (울진에서) 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오십페이지 셋째줄 역시 독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우산이 독도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데, 우산과 울릉은 거리가 멀지 않다고 기술하고 있어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가 200(87km)나 되는 먼 거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산을 독도라고 하는 것은 억지이다.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은 울릉도를 동해안(울진)에서 맑은 날 보면 보인다는 뜻이지,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고 한 말이 아니다. 울릉도에 살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내륙(울진)에서 울릉도를 바라보고 쓴 글이다. 내륙에서 울릉도를 바라보면 절대 울릉도와 독도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아무리 날씨가 청명하고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도 울진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울진에서 울릉도를 바라보고 기술한 것이라는 근거는 "우산과 무릉이 현의 정 동쪽 동해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도는 울진현에서 보면 정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이고 울릉도와 동시에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산과 무릉 중 한 곳이 독도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울진에서 울릉도를 바라보면 울릉도가 두 섬으로 보여 저렇게 기술한 것뿐이다.  

그런데 왜 울진에서 울릉도를 바라보면 두 섬으로 보일까?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울진에서 울릉도는 300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울진의 제일 높은 곳에서 청명한 날 울릉도를 바라보면 울릉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울릉도의 하부는 보이지 않고(지구가 둥글고 울릉도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간이나 상층부 부분만 보이게 된다. 중간이나 상층부만 보이면 울릉도는 2~3개의 섬으로 보일 수 있다.

부산 앞 바다에 있는 오륙도를 생각하면 쉽다. 오륙도는 실제 5개 섬이지만 동쪽에서 보면 6, 서쪽에서 보면 5개로 보인다 하여 오륙도라 부른다.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으로 불러 6개로 보이지만, 방패섬과 솔섬은 실제 하나의 섬인데 동쪽에서 보면 두 개로 보이기 때문에 6개의 섬 이름이 있는 것이다. 육지에서 불과 수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이렇게 보이는데 삼 백리나 멀리 떨어진 울릉도가 두 개의 섬으로 보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41. 1711, 박석창이 울릉도 수토를 다녀온 뒤에 비변사에 보고한 지도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울릉도 도형을 보면 울릉도 동쪽에 우산도가 그려져 있는데 아래와 같이 표기되어 있다.

해장죽전 (海長竹田) 소위 우산도 (所謂 于山島)”

우산도에는 해장죽전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현재 죽도에는 해장죽이 많은 것과 일치하며, 독도에는 대나무는커녕 나무 한 그루도 자라지 못하는 바위 섬이고 동도와 서도로 구성된 두 개의 섬인 점을 감안할 때 박석창의 울릉도 도형의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현재의 죽도임이 명확하다.

 

42.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울릉도 옆에 우산도가 나오는데, 현재의 죽도의 모습과 동일하다.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현재의 죽도라는 것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산도=독도설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로 부인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문헌과 고지도에 나오는 우산도가 현재의 독도라는 우리측의 주장은 거짓이다.

 

43. 우리는 우산도 -> 석도 -> 독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하지만, 이 명칭들간에 상호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1900, 대한제국 칙령에 울릉도를 관할하는 지역으로 울릉도, 죽도, 석도라고 표기된 것에서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다. ‘石島가 경상도 말로 으로 발음하고 한자 을 차음하여 석도를 獨島라고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건 웃긴 이야기다. 20세기초가 무슨 신라시대 이두를 쓸 때도 아니고 한자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절에 무슨 한자를 차음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한제국 칙령에 나오는 석도가 단순히 울릉도 인근에 있는 돌섬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지도가 있다. 1912년에 발간된 이승만의 저서에 조선지도가 있는데 거기에 울릉도 옆에 죽도(우산도)와 함께 돌도라고 표기되어 있다. 돌도가 대한제국 칙령에 나오는 석도이다. 울릉도 주변에는 죽도와 관음도라는 유인도가 있고, 섬이라고 할 수 없는 바위들이 몇 개가 있다. 이 바위섬들을 칙령에서는 석도라 한 것이지 울릉도 남동쪽 87km에 떨어진 독도를 석도라고 한 것이 아니다.

 

44. 조선은 울릉도 공도화 정책을 실시하고 입도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고 안용복이 울릉도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다 어업활동을 하던 일본인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어 조선과 일본간 일어난 외교분쟁이 안용복 사건이다. 따라서 안용복 사건은 울릉도 문제이지 독도와는 무관하다. 안용복은 일본 막부로부터 우산도(원문에는 子山島라 적혀 있음, 지금의 죽도)가 조선의 땅이라 인정하는 문서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이런 사실이 일본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고 안용복의 일정상 도저히 에도(막부의 쇼군이 있었던 현재의 도쿄)에 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안용복이 문서를 받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사건으로 안용복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처음에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일본은 울릉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해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을 정도로 당시에 조선은 독도를 인지조차 못하던 때라 안용복 사건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다.

 

45. 1900년 이전까지 우리가 독도를 인지했다는 기록은 1694년 안용복 사건 이후 울릉도에 수토관으로 갔던 장한상의 아래의 보고 외에는 단 하나도 없다.

西望 大關嶺遠迤之狀 東望海中有一島 杳在辰方 而其大末滿蔚島三分之一不過三百餘里

"울릉도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대관령의 구불구불한 모습이 보이며,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아득히 동남방에 위치하며, 섬의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에 못 미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는다."

장한상은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다가 조그만 섬을 보았다고 보고할 뿐, 그 섬의 이름을 우산도라고 하거나 독도라고 하지도 않았고, 어떤 섬으로 불려졌는지도 모르고 그냥 보았다는 보고만 할 뿐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1900년 이전의 고문헌, 고지도에서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할 근거가 되는 역사적 기록을 단 하나라도 찾아내 제시하면 1천만원을 포상하겠다.)

 

46.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에게 공이 있다.

이승만이 일본이 미군정하에 있어 외교권 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일방적으로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한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설정하여 발표하고, 이 평화선을 월선하는 일본 선박을 나포하고 심지어 일본인들을 사망까지 하게 했다.

한일회담에서 일본이 강력하게 독도 반환을 주장함으로써 독도문제로 인해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박정희는 독도문제를 한일회담에서 거론하면 더 이상 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일본은 한국이 독도를 점유하는 것은 인정하고 한국은 독도에 군대를 상주하거나 시설물 설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당시 독도문제를 이렇게 매듭지었던 일본측 실무자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사실 독도를 우리가 영유하게 된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47.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고 우리나라는 주장하지만, 해저 지형으로 보면 독도는 울릉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부속 섬으로 보기 힘들다. 오히려 일본 열도의 해저 지형과 독도는 맞닿아 있어 우리나라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불리하다.

구글의 지도를 통해 직접 독도 인근의 해저 지형을 확인해 보라.

 

48.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연한 김병기, 각종 매체에서 역사 강의하는 설민석이 떠든 광개토대왕비의 일본 조작설은 거짓이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를 조작한 적이 없으며, 그리고 일본측의 비문 해석이 한국측의 해석보다 합리적이다.

광개토대왕비는 1883년 당시 일본군 중위인 사코우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중국 지안 지역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발견하고 그 탁본을 떠 일본에 가져감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 탁본을 분석한 <회여록>을 내놓으면서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기 시작했다.

문제가 되는 비문은 아래의 신묘년조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광개토왕비에 적힌 1775자 가운데 20, ‘신묘년조로 일컫는 위 문구를 근거로 일본 학자들은 왜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해 신하 된 백성(신민)으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두고 북방의 강자이던 고구려와 대립할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파악했다. 광개토대왕비가 4세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1930년대에 정인보, 신채호 등 민족주의 학자들이 반박에 나섰는데, 정인보는 신묘년조의 주어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아래와 같이 일본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통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하지만 정인보의 해석은 광개토대왕 비문의 해당 구절에 없는 고구려를 주어로 넣어 해석해 한문의 문법이나 해석방식에 있어 억지스러운 것이고 일본측의 해석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1970, 재일동포 학자 이진희는 탁본마다 같은 글자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며, 그 원인이 비면에 발라진 석회 때문이란 사실에 주목하고 이를 근거로 일본의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릉비를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진희의 주장에 따르면, 탁본을 최초로 일본에 반입한 사코우 가게노부는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이었으며, 그는 광개토왕비의 이용 가치가 큰 것을 알고 탁본을 직접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 쪽에 유리하도록신묘년조 기사 등 25글자를 변조했다는 것이다. 이후 참모본부가 사코우 탁본의 글자 변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라 다시 글자를 조작했으며, 현재 일본에 남은 탁본들은 모두 변조된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진희의 주장은 1981년 중국 학자 왕젠췬(王健群)에 의해 간단히 부정되어 버린다. 왕젠췬은 지안에 머물며 장기간 현지 조사를 진행한 결과, 능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 전문 탁본업자였음을 밝혀냈다. 탁본을 팔아 장사를 하던 중국인 초씨 부자가 탁본 작업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울퉁불퉁한 비면 일부에 석회를 발랐을 뿐, 글자 조작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1980년대에는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제작한 탁본들이 차례로 확인돼 일본이 입수한 탁본들과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됐고, 그 결과 일본 쪽이 신묘년조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그렇다고 4세기 후반 당시 왜가 백제·가야·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광개토왕비의 기록, 신묘년조의 상황이 역사적 사실로 학계의 정설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신묘년조에 대한 일본측 해석은 맞지만, ‘신묘년조는 고구려의 자국 중심적, 주관적인 국제질서 인식을 반영한 정치적 선전성격이 강해 전쟁 서술 과정이 반드시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광개토왕비를 쓴 광개토대왕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를 과대 칭송하고, 고구려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뻥을 섞어 비문을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한국 뿐아니라 일본 학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49.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은 일본 위안부로 종사한 대부분의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 군인(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연행 당해서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본군의 성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댓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실제와 다르다.

물론 일본군(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된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조선인이나 일본인 포주(업자)들에 의해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꾀임으로) 유괴, 유인되어 위안부가 된 사람들과 부모들에 의해 팔려가다시피 하여 위안부가 된 경우도 많다.

객관적 자료나 당사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일본군이나 총독부의 강제 연행의 케이스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반면, 후자의 두 경우가 더 많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마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최초로 위안부 할머니임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나 현재 위안부 할머니를 대표하듯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용수 할머니도 (이 분들의 최초 증언을 의하면)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니라 가족(부모)이나 지인(친구 혹은 친구 어머니)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와 정대협이 2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결과에도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에 의한 것으로 볼만한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50. ‘조선인 여성 일본군 위안부들 대부분이 아무 댓가 없이, 인신 구속을 당하며 성노예처럼 살았다는 우리의 종래 인식도 객관적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조선인 여성 위안부 생활을 쓴 유일한 책, ’버마전선의 위안부, 문옥주나 위안소 관리인으로 일하며 기록했던 위안부 관리인의 일기를 보면, 위안부 생활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군이 작성한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에도 일본군 위안부들의 생활상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도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과 많이 다른 내용들이 나온다.

수입도 당시 경성(서울)의 택시 기사의 월급의 거의 10배 수준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아 본국(조선)에 송금도 하고 외출해 쇼핑도 한 것을 알 수 있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문옥주 할머니의 위안부 경험을 전체 위안부들의 생활이라고 일반화 할 수 없고, 미군의 심문 보고서 내용도 모든 전선에서 있었던 위안부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댓가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을 한 위안부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운,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 생활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51. 위안부의 숫자에 대해서도 우리의 주장에 무리가 있다. 정대협 등에서는 20만명, 혹은 그 이상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만할 객관적인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인 여성 일본군 위안부를 약 4~6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20만명설이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 비참한 국면을 맞아야 하고 곤혹스러워진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 운영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 사이 조선의 인구는 약 2,300만 명, 그 중 위안부 대상이 되는 연령의 조선인 여성이 대략 126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조선인 위안부가 20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 나이의 조선인 여성 6명 중에 1명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나 여동생, 연인들이 이렇게 많이 끌려갔는데 당시 조선인 남자들이 저항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또 우리는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로부터 자신들이 저항했다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독립운동사에도 이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당시 신문에도 조선인 남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딸과 연인을 구하기 위해 저항했다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없다. 당시나 1990년전까지의 소설 등의 문학에서도 이런 사실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조선인 남자들은 자신의 딸이, 여동생이, 연인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는데 어떤 저항도 없이 가만히 당하고 보고만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러분들은 이걸 인정하겠는가?

 

52.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먼저 제기한 것은 일본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까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문제의식도 없었으며, 일본측에 사과나 배상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고, 1952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시에도 위안부문제는 우리측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얼마나 인식이 없었는지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대표적 사회단체인 정대협의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와 정신대와는 엄연히 다른데, 우리는 초기에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대에 간 여중고생을 위안부라고 혼동했다.

 

53.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으로 경제적, 정신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특정 세력에게 장악되어 그들의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었다. 정대협을 장악한 세력들이 반일감정을 증폭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또 이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강제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 정대협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아래에 링크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 할 뿐아니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대협의 실체를 보기 바란다.

<정대협, 설립에서 20년까지 행적>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09

<정대협을 움직이는 사람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08

 

54. 위안부 문제를 결정적으로 잘못 인식하게 한 사람은 요시다 세이지이다.

일본인 요시다 게이지는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사실을 날조하여 자신이 제주도에서 조선인 여성 200여명을 잡아다 위안부로 보냈다는 반성을 담은 자기 고백록을 책으로 발간하여 떼돈을 벌었던 파렴치한이다. 요시다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나의 전쟁범죄-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책을 1977, 1983년 각각 발간하여 일본 내에서 일본인 위안부문제를 본격 거론하게 했을 뿐아니라 한국에도 이 책이 소개되어 우리 국민들을 격분하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이 요시다가 쓴 책의 내용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대로 머리에 각인되었으며, 심지어 국제사회에서도 이 책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을 정도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대표적인 책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도 요시다의 책을 근거로 16회에 걸쳐 특집 기획기사를 내보냈다가 나중에 날조라는 것이 밝혀지자 신문사 사장이 사퇴했을 정도로 그 후폭풍이 엄청났다.

1989년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는 조선인을 이렇게 잡아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날조가 밝혀진 때문인지 현재는 이 책은 볼 수가 없다.

아래는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잘 정리한 글이다.

<요시다 세이지 사건을 시간순으로 잘 정리한 글>

https://blog.naver.com/zemo0001/220950674198

 

55. 대표적 위안부 할머니, 이용수의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용수 할머니는 민주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도 출마하고, 정대협과 함께 각종 정치적 사안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포함한 일대기가 영화(‘아이 캔 스피크’)로도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명인이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용수 할머니의 최초 증언과 그 이후의 증언이 일관성이 없고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최초에는 친구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친구와 함께 따라나섰다가 위안부가 되고, 위안부 생활 중 가미가제 특공대원과 사랑에 빠지고 해방 후에는 그 가미가제 특공대원과 영혼 결혼식도 올렸다고 증언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갑자기 일본군에 강제 연행되어 혹독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증언을 바꿨다.

아래에 이용수 할머니의 시기별 증언을 소개할테니 여러분들도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지 판단해 보기 바란다.

<이용수 할머니 증언의 변화>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3196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3198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3199

<위안부를 자처하는 이용수 할머니 간단 분석>

http://www.godemn.com/xe/free_board/539490

 

56. 위안부 문제와 관련 우리 학계와 언론은 왜곡을 많이 했다.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하는 영상기록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있었다영상기록 최초 발굴>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9925880

영상을 발굴했다는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고, 정진성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 이후 세계 이곳저곳에서 깊이 묻힌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이 자료들이 할머니들의 증언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발표가 있자마자 바로 국내 학계에서 반론이 제기되었고, 일본에서도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했다.

아래는 국내 학계와 일본 신문(야에야마닛포, 유칸후지)들이 반론한 글과 기사이다.

<중국서 위안부 학살설 신빙성 없어, 강성형 교수 발표는 허위>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3129

<야에야마닛포, “‘위안부 학살근거 없다...중국 사료 직접 확인”>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3105

https://www.yaeyama-nippo.com/2018/03/14/慰安婦虐殺-根拠なし-奥氏-中国史料確認/

<, 유칸후지, 한국 반일좌파가 공개한 위안부 학살 영상반박 칼럼 게재>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3085

https://www.zakzak.co.jp/soc/news/180303/soc1803030003-n1.html

강성현과 정진성은 일본에서 오래 전에 발굴한 자료를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처럼 주장하고, 그 자료를 다른 자료들과 짜깁기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짜 맞추는 반지성적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위안부 문제를 이용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57. ‘뉴시스도 미군의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를 왜곡해 보도했다.

<뉴시스 - ‘미군 위안부 20명 직접 심문’ 1944전범문서>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5735530

위 뉴시스의 보도는 미군의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내용 중에 일부만을 취사 선택하여 왜곡했다.

뉴시스는 위안소는 군대가 주도한 유례없는 인신매매 현장이었고, ‘위안부 소녀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빚을 진 부모를 위해 몇백엔의 선급금을 받고 해외의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군기지에 마련된 위안소에서 최소 하루 12시간 이상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공식적으로 쉬는 날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아래는 뉴시스의 보도를 반박한 미디어워치 기사이다. 미군의 심문 보고서 49호를 우리 말로 번역한 전문도 첨부하니 뉴시스 보도와 비교해 보라.

<미군 위안부 포로심문 보고서 왜곡한 뉴시스>

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0567

[전문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0568

 

58.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영화 귀향의 서두에는 일본군이 민가에 난입해 주인공 소녀를 납치한 후에 또 일본군의 감시 하에 다수의 소녀들을 열차와 트럭에 태워 일본군 군부대까지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이른바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처녀 강제연행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이후 지난 수십 여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학자들과 정부 기구가 관련 수많은 연구와 조사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조직적인 지휘체계를 통해서 민가에 난입해 직접적으로 조선인 처녀를 위안소로 강제연행(납치)했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단 한개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일본군에 의해 직접적으로 강제연행 됐다고 증언하는 생존 위안부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강제연행과 관련하여 일본 군부가 조직적·계획적·제도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는 관련 조사가 이뤄진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기에, 이런 일부 피해자의 경우는 결국에 개별 군인이나 일본군 군복을 입은 개별 군무원의 일탈에 의한 경우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정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있었다는 주장은 학계에서는 사실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에 한국과 일본의 좌파 학자 일각에서는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서 위안부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민간에서의 사기·약취, 인신매매 등을 조장하고 그래서 어떻든 조선인 여성을 위안소로 흘러가도록 만든 것까지도 역시 넓은 의미의 강제연행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른바 광의(廣義)의 강제연행설이다.

하지만 광의의 강제연행설은 강제연행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너무 넓히는 것으로, 이에 일제시대에 일본정부, 일본군의 시책을 어떤 식으로든 따랐었던 당시 한 세대 전원을 모조리 강제연행 경험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59.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는 14세 전후 어린 소녀들이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지금 한국 뿐아니라 해외에 어린 소녀들이 일본군에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되었다며 소녀상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을 왜곡한 선동이다.

조선의 10대 초반 소녀를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주장은 근로정신대경우와의 혼선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근로정신대노동에 어린 소녀까지 동원됐다는 내용이, ‘일본군 위안부성노동에 어린 소녀가 강제 연행됐다는 내용으로 와전됐다.

역사전문가들은 ‘14세 소녀 위안부설도 현실 감각으로 신빙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14세라면 ‘2차 성징이 막 시작될 시점으로, 통상 성적 대상으로 보기가 어렵다. 군 위문공연 등에서 선호되는 성적 대상성적 외양을 떠올려본대도 일반적인 14세 여성의 외양을 성적 외양으로서 추구하는 남성은 극소수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군(조선인도 많았다)이 문화적으로 일반적인 14세 여성의 외양을 선호했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

물론 일부 일본군 위안부들 중에서는 10대 초반부터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증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외양이 조숙했던 경우로서, 매개한 업자들이 일본군 위안소 측에 나이를 속이는 방식을 통해 위안부가 됐을 공산이 크다. 이는 실제 벌어진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일부 해당 일본군 위안부의 개인적 체험이지,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역사전문가들의 평가다. 일반화하기가 어려운 경우이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48월에,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004, 296쪽에서 재인용)였다. 어느 조선인 출신 일본군도 위안부들이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던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누님으로 부르며 지냈다고 증언하면서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정신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2011).

1944년에 작성된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평균 나이가 대략 25세 내외(about twenty-five years old)”라고 밝히고 있으며, “위안부 중 몇몇은 모집 이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다(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일본군 위안부가 되기 이전부터 풍속업에 종사해왔다는 의미)는 내용까지 나온다.

 

60. 종군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에만 있었던 특수한 제도가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자 일본은 미군에 의한 일본인 여성의 강간행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미군측에 위안부를 모집해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또 건국 이후 한국 땅에도 얼마 전까지 한국군/미군/유엔군을 위한 종군위안부가 있었고, 명칭까지도 명확히 위안부(慰安婦)’라는 용어를 썼다. 종군위안부는 사실 기지촌 여성이라는 말과 정확히 똑같은 말이다.

시대순으로는 물론 일본군 위안부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보다 먼저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 문제와 비교했을 때 1980년대까지도 언론의 관심 사항이 거의 되지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정대협 등의 주도로 반일감정이 대두되던 1990년대가 되어서야 언론에 대대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까지 위안부라는 표현만 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가 대대적으로 써왔던 정도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그러했듯이, 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가 공적 대상으로 삼고서 강제 성병검사, 애국심 교육 등까지 하면서 개입했던 것도 역시 똑같다.

2014년도에 새로 기밀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1945년도 당시 문서를 살펴보면 일본군 군의관이 일본군 위안부를 매주 정기검진을 하고 성병감염 여부를 철저히 관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2014316일자 연합뉴스는 이 소식을 전하면서 일본 군의관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이며 이에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국가범죄가 입증되었다는 식 보도를 했다.

하지만 관련 역사전문가들은 만일 일본군 군의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성병 검진을 했던 것이 일본 정부에 의한 국가범죄의 증거가 된다면, 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가 같은 식으로 국가범죄를 저지른 게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의 경우도 정기적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강제 성병 검진을 받았으며 응하지 않으면 풍속업을 계속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지 못했다.

역사전문가들은 종군위안부로서 한국군/미군/유엔군 위안부일본군 위안부의 차이는 사실상 없다고 보고 있다. 물론 학계에서도 한때는 군인에 의한 직접적 강제연행여부 문제에서 둘이 큰 차이가 있다는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연구를 통해 그런 식의 강제연행이 어떻든 조직적인 형태로는 일본군에서 전혀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사실상 났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논쟁을 거의 하지 않는다.

 

61. 조선총독부와 경찰은 인신매매와 유괴하는 업자들을 단속하고 처벌했다.

정대협 등 한국의 위안부 관련 단체들은 조선총독부와 경찰, 일본군이 조선의 처녀들을 강제 연행하여 끌고 갔다고 주장하지만, 당시의 동아일보 등의 기사를 보면 조선총독부와 경찰은 여성들을 취업사기나 유괴, 인신매매하는 업자들을 단속하고 처벌했다는 기사가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여성 유괴, 인신매매업자를 단속한다는 동아일보 기사>

http://yeoksa.blog.fc2.com/category66-1.html

인신매매, 유괴, 취업사기 등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단속, 처벌한 것을 보면, 조선의 처녀들을 일본군이 총칼로 위협하여 연행해 위안부로 끌고갔다는 주장은 허구임을 유추할 수 있다.

 

62. 구한말 한양거리는 똥 천지였고 위생 상태는 엉망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가 많으면 장수한다고 믿고 목욕을 자주 하지 말라고 했으며, 이가 적으면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했다.

1890~1910년 사이의 광화문, 숭례문 거리의 사진들을 보면 분뇨가 곳곳에 널려 있다.

1910년 경성부 경상지출의 81%는 분뇨 치우기에 쓰였으며, 1910년대 내내 경상지출액의 50% 이상을 분뇨 처리에 사용했다.

1910년 합방 이후 조선의 위생상태의 심각성을 느낀 조선총독부가 제일 먼저 시행한 사업이자 최대 사업은 전국의 분뇨 치우기였다.

당시 한양이 얼마나 분뇨로 인해 불결하고 위생 상태가 엉망이었는지는 외국인들과 조선의 선각자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인 조지 길모어 : 영국인은 조선서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자신이 여지껏 본 사람 중에 가장 더러운 사람이다고 말했다.

미국인 선교사 알렌 : 한국인은 목욕을 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침례교가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박제가 : 도성의 우물물이 짠 것은 함부로 내다버린 똥 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서 장마가 아니면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영국인 여행가 세비지 랜도 : 서울에 도착하니 여름에는 오물이 비에 씻겨져 내려가 견딜만 하고, 겨울에는 얼어붙어서 괜찮았지만, 봄에는 얼어붙었던 것이 녹으면서 냄새가 지독해 차라리 내 코가 없어졌으면 했다.

고종의 주치의 독일 의사 리하르트 분쉬 : 서울의 길거리 청소는 견공들에게 맡겨둔 상태다. 길의 청결여부는 견공들의 식욕에 달려 있다.

윤치호 : 천하만고에 조선만큼 더러운 곳이 없다.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똥 구더기에 사는 격이다.

김옥균 :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조선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길에 가득한 사람과 짐승의 똥과 오줌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 : 광화문 광장, 경복궁 담장, 종묘 광장 등 조선시대의 지층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 알을 발견했다. (중략) 당시 한양에는 인분이 널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63. 1945년 해방 당시의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조선 공산당(남로당)마저도 자신의 대표로 이승만을 내세울 정도로 당시는 이승만을 내세우지 않으면 어느 정당이나 세력들도 대중들을 끌어 모으기 힘들었다.

 

64. 19489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였을 때, 일반 대중들은 친일파에 대해 지금처럼 적극적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반일 정서(감정)은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8.15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가공으로 만들어낸 집단기억일 뿐,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차이가 많다.

 

65. 북한은 친일 청산을 제대로 했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북한의 초대 내각을 보면 오히려 더 친일적 인사들로 이루어졌다. 아래는 남북한의 초대 내각 명단이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

*대총통-이승만(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총통-이시영(임정내무총장)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광복군 참모장)

*국회의장-신익희(임정내무총장)

*대법원장-김병로(항일변호사)

*무임소장관-이윤영(국내항일)

*무임소 장관-이청천(광복군 총사령관)

*외무장관-장택상(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윤치영(홍업구락부사건/일제말기 시국강연회와 좌담회 참석,친일기고문을 발표)

*법무장관-이 인(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재무장관-김도연(2.8독립사건)

*상공장관-임영신(독립운동가-교육가)

*문교장관-안호상(항일교육)

*사회장관-전진한(국내항일)

*체신장관-윤석구(국내항일,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총살)

*교통장관-민희식(재미항일)

*총무처장-김병연(국내항일)

*기획처장-이순탁(국내항일)

*공보처장-김동성(국내항일)

 

북한 김일성 내각의 친일파

*김영주-북한 부주석, 당시 서열 2, 김일성 동생 (일제 헌병 보조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일제 도의원)

*정국은-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김정제-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 양주군수)

*조일명-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북한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김달삼-조선로동당 제주4.3사건 주동자 (일제 일본군 소위)

*박팔양-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일제 만선일보 편집부장)

*한낙규-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 검찰총장)

*정준택-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이승엽-남로당 서열2, 월북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 식량수탈기관 식량영단 이사)

*기타-북한 공군간부 20명은 대부분 일본군 출신이며, 만주군 출신으로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등 수없이 많음.

 

66. 조선은 명백한 노예제 사회였다. 노비는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조선 양반의 상속 문서 제일 상단은 노비의 이름이 차지했다. 토지보다 먼저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노비의 값은 저화(종이돈) 4천 장이었는데, 노비의 하루 평균 임금이 저화 6장이었으므로 666일어치의 임금이고, 20마지기의 소출에 해당했다. 조선의 노비는 원칙적으로 해방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조선 노비제의 핵심은 신분 세습에 있었다. 양인(상민)과의 결혼이 가능한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락하는 대신 부모 한쪽이 노비면 출생한 아이도 무조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가혹한 원칙이 노비제를 유지했다.

노비제는 조선 유교·봉건 사회를 떠받친 기둥이었다.

조선의 신분제는 양반-중인-상민-노비라는 4단계 신분사회였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조선 인구의 30~40%를 노비가 차지했다. 조선 전기 학자 이심원은 백성 가운데 노비가 팔, 구할이나 된다라 했고, 같은 시기 <용재총화>를 남긴 문인 성현은 인구 가운데 노비가 거의 절반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15세기 총인구 900만 명 중 절반 이상은 노비였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중엽 조선의 인구 1200만 명 중 30~40%로 계산하면 360~480만 명이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의 비중은 지역별로 달랐다.

특히 왕실과 잘나가는 경화사족(京華士族·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온 명문가)이나 문벌 고관대작이 모여 사는 서울은 사실상 노비의 도시였다. 1663년도 한성부 서부 성 밖 십리지역 호적에 따르면 2374명 중 1729, 73%가 노비로 등록돼 있었다. 사대문 안 인구 중 노비 비중은 80%를 웃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에 사는 미관말직 양반 관료도 평균 100명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은 758명의 노비를 재산으로 물려줬다. 퇴계 이황도 367명의 노비 문서를 남겼다. 세종의 왕자 중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은 각각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

출처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28&aid=0002436766

 

67. 설민석 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설민석은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로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 내용을 들고 있으나, 엉터리 해석으로 자신의 무지만 드러냈을 뿐이다.

청의 목극등과 조선의 박권이 양국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백두산 아래 4km 지점에 세운 정계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

이 내용 중에 양국의 경계를 말하는 西爲鴨綠 東爲土門의 문구에서 토문을 두고 설민석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하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쪽의 경계가 압록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양측이 이의가 없는데 동쪽의 경계에 대해 청은 두만강, 조선은 쑹하강의 지류인 토문강이라고 본 것이라는 거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51, 52권을 보면, 당시 조선 조정은 토문을 당연히 두만강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다만 목극등이 두만강의 시원이 되는 지류를 잘못 지정하는 바람에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목극등과 박권이 양국의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하는 것에는 합의하고 백두산 정계비에도 그렇게 표기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두만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바로 시작 되어 흐르는 것이 아니고 땅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가 일정 거리를 두고 원류가 시작하기 때문에 천지에서 두만강 원류까지의 양국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목극등은 천지에서 두만강 시작되는 곳까지를 목책과 돌로 쌓아 경계를 표시하라고 조선에 이르고 두만강이 시작되는 원류가 되는 곳을 조선에 일러 주었다. 그런데 목극등이 제대로 살피지 않고 두만강 원류가 되는 곳을 쑹하강 지류로 조선측에 잘못 알려주게 된다. 조선의 관리들은 목극등이 알려준 대로 쑹하강의 지류로 따라가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만강이 나오지 않고 엉뚱한 데가 나오니 조선 쪽에서 더 당황하게 된다. 목극등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목극등이 곤란해질 것이고, 목극등이 잘못 말한 대로 조선과 청의 경계를 했다가는 원래 청과 조선이 경계로 하기로 한 두만강과 다른 국경선으로 목책이나 돌을 쌓게 되니 이것 또한 문제가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목극등이 지정한 두만강 시원이 아닌 실제 두만강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목책과 돌을 쌓았다. <숙종실록 52, 숙종 38127일 병진 3번째기사 1712년 청 강희(康熙) 51, ‘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에 대한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이에 대한 논의와 거산 찰방 허양의 공술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다.

쑹하강과 그 지류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청과 조선의 동쪽 경계를 토문으로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북쪽인 쑹하강과 그 지류인 토문강으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쑹하강과 그 지류인 토문강은 중국의 내륙으로 흐르지 동해로 흐르지 않아 양국의 경계를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목극등과 박권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자로 흐르는 두 강이라고 이르고 있는데, 압록강과 자로 흐르는 강은 두만강이고, 쑹하강이나 그 지류인 토문강은 ()자로 흐르고 있다.

백두산 정계비에도 두 강의 분수령상에 비를 세워 기록한다(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고 하고 있다. 백두상의 정계비의 위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에 위치에 있다. 토문이 쑹하강의 토문강을 말한다면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모든 정황과 사실들을 종합할 때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은 두만강이 확실하다.

 

 

이 이외에도 우리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은 너무 많습니다. 반일 종족주의에 빠져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오늘과 같은 한일간 갈등이 생겨 급기야 나라의 경제가 아작이 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