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주말 동안 많은 글을 올리셨네요.
그런데 님께서는 제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반박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주장한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것에 대해 인정이나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논지와 전혀 다른 것을 들고 와 논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이 아크로에서 쟁점이 된 것, 그리고 제가 주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언제 5.18에서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이 없었다고 했나요?
제가 언제 5.18에 북한군의 직접 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까?
제가 언제 계엄군의 발포가 없었다고 했나요?
제가 언제 5.18 유공자들이 공무원 시험을 싹쓸이 한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왜 님은 제가 주장하지도 않은 것을 마치 제가 한 것처럼, 그것도 실제로는 저를 상대로 쓴 것이면서 상대를 정식으로 거명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왕 주장하거나 반박하려면 당당하게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요?
저는 5.18은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시민들과 학생들의 시위 - 계엄군의 과격 진압 - 시민들과 학생들의 시위 과격화 - 계엄군의 대응 더욱 과격화 - 시민들의 경찰과 계엄군에게 위협적 행동 - 계엄군의 자위적 발포 - 시민들 무기 탈취, 무장 - 계엄군과 시민군의 전투로 이어지는 상호간의 행동이 에스컬레이팅 되면서 빚어진 불행하고 안타까운 참극이라고 봅니다.
계엄군(진압에 동원된 병사나 진압을 지휘한 지도부)이 처음부터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계획한 것도 아니고, 발포를 명령한 사실도 없으며, 발포는 자위적 차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의 ‘광수 찾기 놀이’를 비판했습니다. 당시 사진에 찍힌 시민군이 현재 북한에 있는 사람들과 일치한다는 지만원의 주장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황장엽도 당시 5.18 현장에 나타나 현장을 지도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저는 5.18에 북한이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지만원의 광수 찾기 놀이는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5.18 민주화유공자 예우에 관련한 법률“이나 ’5.18 민주화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5.18 사망자와 행불자의 배우자와 자녀만 취업 지원대상자(공무원 시험 가산 혜택)일 뿐이고, 5.18 유공자와 가족 전부가 대상이 아니라서 5.18 유공자들이 공무원 시험을 싹쓸이 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다만, 5.18 유공자 심사(보상 대상자 심사)를 광주지역 사람들만의 심사로 하는 것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함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님은 5.18 유공자 심사를 보훈처가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님은 이렇게 사실과 다른 주장하면서 저를 비난해 놓고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올려 놓은 5.18 일지를 보면, 최초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고 조대부고 김영찬군이 계엄군에 의해 총상을 입은 것만 밝히고 있습니다. 계엄군의 최초 발포는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장갑차 뚜껑을 열고 불에 붙은 짚단을 넣으려 하자, 공수부대 장교가 위협 사격하며 발생한 것입니다. 이 위협 사격으로 김영찬 군이 대퇴부 총상을 입은 것이구요.
님이 올린 사진(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처럼 계엄군이 2열 도열하여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일제 사격한 적이 아닙니다. 위에 김영찬군의 사례처럼 계엄군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자위적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시민군의 장갑차나 버스가 계엄군과 경찰을 덮쳐 계엄군과 경찰 다수가 사망하자 장갑차나 버스를 향해 자위적 차원에서 발사한 것이지 님이 올린 사진처럼 계엄군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하여 비무장 시민들에게 일제 사격을 한 것이 아닙니다. 몇 차례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발포 명령자를 찾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님이 올린 사진과 같은 장면이 5.18 당시에 있었다면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이 당연히 있었을 테지요.
님은 영화의 한 장면을 마치 당시에 실제 있었던 장면을 찍은 사진인 것처럼 아크로 회원들을 기만하고도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진을 유포해 계엄군이 마치 시민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한 것처럼 하는 것은 당시 계엄군을 악마로 만들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하는 것은 5.18을 옹호하는 입장이든, 비판하는 입장이든 모두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자신의 견해나 입장을 밝혀야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본인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뿐 아니라 5.18에 대한 순수한 정신도 훼손하는 것이라 봅니다. 또 국민들에게 불신을 사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고 생각하구요.
그런 측면에서 님이나 지만원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님이나 지만원이나 사유구조에서는 다를 바 없습니다.
님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이 확인되었는데도 이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다른 주제를 던지며 논점을 회피합니다. 또 디테일한 내용보다는 큰 줄기를 보라며 자신의 주장이 큰 틀에서는 문제가 없는 양 얼렁뚱땅 넘기려 합니다.
그리고 님은 상대가 주장하지도 않은 바를 예로 끌어오면서 마치 거짓이나 신빙성이 없는 사람의 주장을 마치 제가 한 것처럼 위장해 저를 공격하는 짓을 합니다.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 수법을 사용해 다른 네티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물론 님께서는 저를 명확히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만, 5.18 관련해 님과 상반되거나 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발제 글을 올린 사람은 아크로에서 저 뿐인 것을 감안하면 님의 글의 대상은 저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님을 상대로 직접 발제 글을 이렇게 써 올리는 것이구요.
원래 선동하기를 좋아하고 사탕발림을 잘 하는 사람들은 수치 등의 디테일을 말하지 않고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죠. 저는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잘못이 드러났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논점을 희석시키는 사람도 비열해 보여 상종하기 싫습니다.
논쟁을 계속하려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인정하거나 사과하고 난 뒤에 다음 주제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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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하는 것은 5.18을 옹호하는 입장이든, 비판하는 입장이든 모두 잘못이라 생각한다는 님의 기본 자세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최초 계엄군 발포 원인에 관해서는 명확히 규명된 바 없는데도 우발적인 사고였을 뿐이라고 단정지으시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군요. 그 추측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겠지요. 아직은 양쪽 모두를 향해 문을 열어 두는 편이 신중하지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북한군 개입설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용서와 화해를 얘기하는 것 역시 때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님이 방점을 찍으신 것은 치유라는 단어였을 테지만, 아직 상처가 화농해 있는데 치유를 바랄 수는 없는 겁니다.
저하고 토론을 하지 않는다구요? 그런 분이 왜 제 글들에 댓글을 다셨는지요?
님이 토론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님이 올린 사진이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실제 사진이 아니라는 것이 뽀록이 나서 도망간 것이 아니구요?
제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잔뜩 써 놓은 것에 왜 제가 답을 해야 하죠? 또 님이 짠뜩 올려 놓은 글이 왜 제게 불리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님이 잔뜩 글을 올려 놓은 이유는 님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게 된 엉터리 사진을 올린 것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거나 논점을 흐리려는 의도가 아닌가요?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될 일을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얍삽한 짓을 님의 양심이 허락하는지 모르겠네요.
길벗님 보면 참 한결 같으시네요. 어찌 일본놈들이 하는 논리를 5.18에도 그대로 적용 할까 ㅎㅎ 그래서 일본놈들이 무장하고 시민들을 억압하는데 무장독립운동은 하면 안되는건가요? 일본놈들은 그들에 대항하는 정당방위군인가요? 애초에 광주시민들이 왜 무기를 들었어야 하는가부터 애기를 해야 하는게 정상 아닙니까? 님 머리로는 이걸 생각할 용량이 없나요? 그래놓고 정당방위 타령을 하시는건가요?
에밀졸라 님의 글을 읽어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 대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폭동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 어디 있을 겁니다만, 저는 읽어 본 적이 없네요. 다만 상상을 해 보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상상이 됩니다. 그 상상을 조금 써 보겠습니다. 그러면 dd 님이 저와 길벗 님의 관점을 이해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람이든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이든 'thin slicing' 능력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모든 정보 말고, 단 몇 개의 정보만으로 어떤 결론을 추리해 내는 능력입니다. 사자가 달려드는 것만 보고, 즉시 도망치는 가젤들을 생각해 보시면, 가젤의 뇌에 들어 있는 thin slicing 회로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덩치가 있는 동물이 달려들면-->도망친다'라는 회로가 들어 있죠. 이 회로가 들어 있지 않은 뇌를 가진 가젤은 도망치지 않고 있다가 금방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유전형질은 다음 대의 가젤에게 전달이 되지 않고 사라지게 되지요.
폭동이 일어나는 원인이나 계기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만, 공통점도 있을 겁니다. 인간이 가진 thin slicing 능력이 발휘된다는 공통점이 그것입니다. 광주에서 데모를 하는 시민들 앞에 경찰이 아닌 군인이 나타났을 때, 시민들은 thin slicing 능력을 발휘해서 처음 보는 이 사태를 이해하려고 했을 겁니다. 시민들 각자의 해석(추리)이 다르고, 일부 시민들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발생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유언비어를 듣고 다음 단계의 언행들이 나타나게 되고,...... 제가 짐작하기로는 그것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그토록 심각한 살상이 일어난 원인-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시민들의 언행과 공수부대의 언행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에스컬레이트되어 심각한 살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닐까요......
전두환일당이 이런 메커니즘을 미리 알았다면, 공수부대를 보내어 진압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른 지역의 경찰을 닭장차에 실어서 보내겠다는 결정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전두환일당들은 아마도 군인을 보내면 시위대들이 겁을 먹고 굴복하여 흩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거겠죠. 설마 처음부터 학살해서 시위대를 겁주고 해산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길벗 님이 일제사격 조준사격을 두고 에밀졸라 님에게 증명을 요구하는데, 살상이 일어난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죠.
출처(ref.) : 정치/경제/사회 게시판 -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5393234&mid=free&act=dispBoardReplyComment&comment_srl=5393587
by 길벗
에밀졸라 님이 쓴 글을 먼저 링크합니다. '광주항쟁 시간대별 사건 일지'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http://theacro.com/zbxe/free/5393198
이 글을 읽어 보면, 공수부대의 진압과 시위대의 저항이 어떤 순서로 에스컬레이트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공수부대의 유혈 낭자한 진압이 시위대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 일으켜서 결국 서로 총을 쏘는 사태로 발전하지요. 공수부대가 처음부터 총을 쏴서 대량 살상으로 이어진 게 아님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개혁을 지지하니까 중립적이지도 않고, 기계적인 중립을 멋이나 교양의 척도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내 편이라고 편들고 네 편이라고 무작정 반대하지 않으며, 그저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할 뿐이고, 언급해야 할 다른 관점이 있을 때는 다른 관점을 언급할 뿐입니다.
출처(ref.) : 정치/경제/사회 게시판 - 에밀졸라님께 -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5393234&mid=free&comment_srl=5393725
by 길벗
사살명령이 내려진게 이미 밝혀진지가 언제인데 자의적 차원에서 발포를 했다는 겁니까? 애초에 실탄을 가지고 공수부대를 파견한거 자체가 여차파면 사살하겠다는거 아닌가요? 시위에 군인을 투입하는건 명백히 이런 배후행동이 있다는 겁니다. 시위에 군대를 투입해서 진압한 그 어떤 나라도 시위대가 총을 안맞은 온전한 나라가 없습니다. 의도된 결과를 무슨 정당방위처럼 써놓으니 황당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비무장인 시민들도 총을 맞았는데 이게 무슨 정당방위고 에스컬레이트고 그딴게 필요하나요? 이건 명백히 학살입니다. 단순 패싸움이 아니라고요. 일방적인 무력에 시민들이 죽어나간건데 대체 뭘 더 말해야 하죠?
제 짐작으로는 이렇습니다. 전두환일당들은 계엄군이 잔인하게 시위대를 진압하면 시위대들이 두려워서 시위를 그만둘 것으로 기대했겠죠. 처음부터 총을 쏘기를 기대하고 총알을 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부분인데요, 살상을 목적으로 총알을 나눠준 것인지 자위를 목적으로 총알을 나눠준 것인지 dd 님이 판단해 보십시오. 현장 지휘관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저는 비슷한 결론이 나옵니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면 맞아서 다쳐라'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시위대가 생명을 위협하면 당연히 자위적 행동을 하라'고 말할 겁니다. dd 님이 지휘관이라면 뭐라고 명령했을까요?
영화 [데몰리션맨]이 떠오르네요. 실베스타 스탤론과 웨슬리 스나입스가 주연이었죠. 미래에는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범죄자를 다루는 경찰이 나온다는 상상.... 참 재미있긴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인 영화 [저지 드레드]도 떠오릅니다. 이 영화에도 실베스타 스탤론이 나오죠. 이번에는 반대입니다. 현장에서 즉결심판을 해 버립니다.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12]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같은 날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13]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4]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5]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6]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17]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늙어도 공부는 하셔야죠.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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