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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와 한반도 통일
너무 오래 되어 년도조차 까먹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독일 통일이 25년 전(1990.10.3) 성사되었으니 브란트가 서울에 온 해가 대략 1987~8년 쯤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수상직에서 물러나 모처럼 한가한 동방여행길에 서울을 찾았는데 아직 독일 통일이 이뤄지기 전이고 그 전망도 외부인이 보기에 매우 불투명했었다.
진객을 맞아 방송국에서 국내 일급의 논객과 통일 전망 관련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브란트와 마주앉은 인사는 D 일보 주필과 시사저널 초대 주필을 맡았던 B 씨로 당시에 그는 시사나 정치 관련 명 칼럼을 쓰는 1급의 논객으로 자타가 인정하던 인사였다. 참고삼아 덧붙이자면 그는 분단문제 해결에 적극적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가깝게 지냈고 서로 말이 통한다던 사람이었다. 제도권 언론인 중에서는 이른바 진보적 시각도 가진 인사였다는 얘기다.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가 대뜸 의미심장한 질문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나는 우연히 텔레비를 켯다가 운 좋게? 그 장면을 봤기 때문에 지금도 그 장면이 아주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독일과 한국, 분단이라는 공통 문제를 안고 있는데요. 귀하께서는 어느 쪽이 먼저 통일 될 거라고 예측하십니까?>
텔레비의 속성상 그렇겠지만 아주 당돌한 무대뽀식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보는 사람은 두 사람 반응이 무척 궁금하고 흥미를 돋우었다.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한국의 1급 논객 B씨였다. 그는 그거야 생각해볼 여지도 없는 간단명료한 문제라는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당연히 한국이 먼저 통일되겠지요.> 라고 말하고 브란트를 빤히 쳐다봤다. 브란트는 쉽게 입을 열지 않고 그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만 흘리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 사회자가 답변을 재촉하자, 그제서야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독일이 먼저 통일 됩니다.>
브란트는 억양에 힘을 주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그런 조용한 말투가 웬지 섬뜩했다. 뭔가 일을 다 만들어놓고 온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 그 조용한 말투에서 감지되었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아마 그 방송을 보던 모든 사람들이 브란트가 지금 외국에 와서 프로정치가 다운 허풍을 치고 있고 B씨의 예측이 훨씬 타당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이 희귀한 장면을 지켜보는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역시상 최악의 전범국 독일이, 구미 4강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한국 보다 먼저 통일이 된단 말인가? 더구나 한반도는 남의 땅 침략이라곤 꿈도 못 꿔보는 천사표 나라 아닌가.
독일이 통일된지 금년으로 25년 째. 한반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어찌 보면 현 정권 아래 상황이긴 하나 더 악화된 감도 없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다. 통독 이년째던가 통일독일 문화사절로 동 베를린 오케스트라가 서울에 와서 모짜르트의 <주피터 교향곡>과 차이꼽스끼의 <비창>을 들려주던 것도 벌써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다.
이 시점에서 이 얘길 꺼내는 것은 한국의 정치권은 물론 지식인 사회의 통일 문제에 대한 대응과 예측이 너무나 허술하고 빈약하다는 걸 새삼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문제전문가라는 사람들 얘기는 언제나 구름 잡는 식이고 시정의 아마추어도 할 수 있는 빤한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통일을 바라지도 않는 것 같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왜냐하면 통일이 어찌어찌해서 된다면 자칭 타칭 북한 문제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직업을 잃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성으로는 이해불가한 극우파들의 극성 역시 같은 이치로 해석된다. 꿈에라도 통일이 되면 그들은 입지를 잃고 말 것이다.
한 나라의 지성이나 양식을 만약 GNP나 GDP처럼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면 독일과 한국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을 아주 축소해서 가령 일정 수준 직위 이상의 정치권 인사나 행정부 인사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인들만으로 샘플을 만들어서 그 지적수준과 양식의 정도를 수치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요즘 정치가 아닌 정치꾼들의 각축장이 되고있는 정치권과 그리고 우리 모두를 포함한 지식인 사회를 보면서 떠오르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자조적인 것이지만 남의 나라 침략은 커녕 처참한 피식민지를 경험했던 나라의 백성으로 요즘 정치권의 혼미를 보면서 역사가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생각마져 드는 것이다. 능력도 모자라고 정직하지도 않다. 이년 쯤 전 야권의 모 인사가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 점이 참여정부의 공로"라고 말한 걸 신문에서 봤을 때 대뜸 떠오른 느낌이었다. 그는 매우 부정확한, 사실상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독일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되나? 브란트의 사회당이 초석을 깔고 헬무트 콜의 기민당이
그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업을 완성시킨다. 서독 정객들이 고르바쵸프와 레이건을 설득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다독이느라고 분주히 오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매번 정권
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분단관리 정책을 개발해서 발표한다. 매우 창조적이긴 하나 그마져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미국은 북이 너무 말을 듣지 않아서 좋고 남은 또 너무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줘서 좋다.> 미국이 북과 남을 모두 사랑한다는 재미 어느 외과의사의 말이
재미있다. 한국은 비록 자기 일이지만 남을 설득하지 못하고 남에 의해 설득당하는 입장에
있다는 걸 잘 표현하고 있다. 이점이 독일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이제 광복. 분단 100주년
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일까?
*오래전 정사계에 게재했던 글을 약간 손질하여 다시 올려봅니다. 사실은 문학사상에 원고를 보내기 전 일종의 리허설 삼아
올립니다. 앞에 썼듯 광복 분단 70주년에 맞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 쓰기도 쉽지 않아 그냥 아크로에 있던 걸
비행소년 님 권유대로 골랐습니다.
재야 사학자 박현씨의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21가지 사건이라는 문서를 우연히 접하고 요약한 내용입니다. 너무 길어 마지막 한반도 분단 부분만 발췌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주변4강의 구도에서 본 관점이 아니라 좀 특이한 관점을 나타냅니다. 도움이 되실까해서 올려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한반도 강점 (뒤틀린 대동아공영권의 잔혹한 여파)
대원군 이하응의 실각 후 여러 번 정변 끝에 일본은 근조선 정부를 협박해서 급기야 1910 년에 타율적인 합방을 이루었다. 그런데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서 가장 주목할 일은 합방의 명분이었던 '대동아공영권'이다. 동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으려 했을 때,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간판구호였지만 한편으론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그 표현을 어떻게 바꾼다 해도 우리 역사에서 다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대동아공영권의 순수한 말뜻은 '동아시아는 더불어 발전해나가야 할 역사적인 단일주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는 원래 공영권의 역사였다. 중국 한족 중심의 공영권과 기마종족 중심의 공영권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해왔다. 우리 역사도 기마종족 공영권의 역사 가운데 일부이며, 몽고족이나 만주족의 역사 및 일본인의 역사도 그 가운데 일부이다. 그들은 모두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혈통, 언어나 문화에서도 공통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은 그런 의미에서 재검토할 만하다. 바로 거기에는 한족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가 아닌 또 다른 아시아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은 그것이 제국주의라는 근, 현대적 야수성과 결탁되어 매우 일그러진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폭력적이고 독점 자본주의적이며 종족 우월주의적 으로 나타난 그 개념은 동아시아 주민들 스스로에 의해 죄악의 개념으로 버려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 확보라는 제국주의적 속성과 맞물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는 한 번도 주도권을 잡아보지 못한 일본족의 한풀이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역사왜곡과 창씨개명, 일본어 교육이 나타난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은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이 자율과 평등의 원칙에 따라 평화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주제였다. 그리고 중국 한족과도 평등과 상호공존의 원칙에 따라 제2차 공영권을 설정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공영권을 이루며 독자적인 세계화를 추구해야 마땅할 여러 기마종족들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뒤틀린 대동아공영권으로 말미암아 2차 세계 대전 후에 오히려 한족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분단
자본주의의 공격적 성격과 확대재생산의 생리에 따라 일본족이 추진한 대동아공영권은 그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이미지마저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와 함께 사회주의의 국제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동아공영권이 끼친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뒤틀어 놓았다.
2차 세계 대전 후 일부 종족은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질서속으로, 또 일부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속으로 줏대 없이 끌려 들어갔고, 다른 일부 종족은 중국 중심의 사회주의 질서속으로 깊이 끌려 들어갔다. 우리나라가 독일 등과 다르게 양 진영이 점점 더 적대적으로 되어간 것도 이처럼 자기중심의 질서를 잃고 줏대 없이 다른 축으로 각각 깊이 휩쓸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마종족이 자기중심을 잃고 독자적인 국가마저 세우지 못한 채, 중화인민공화국의 충실한 주민이 되어버린 것도 바로 잘못된 대동아공영권의 부정적 영향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기마종족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내부붕괴를 상징하며, 밖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선진' 문화권에 의해 우리 문화권이 해체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요컨대 우리의 분단은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내적 응집력이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세계화를 주도하는 문화권에 의해 우리 문화권이 급속하게 해체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타율에 의한 문화 재편성과 외부세력에 의한 정치적 결정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신간회(1927. 2--1931. 5)와 1945 년 8월 15일 발족한 건국준비위원회는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한 자주적인 주권 확립을 위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실질적인 건국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좌절되고 3년이 지나자 남쪽과 북쪽에 주체성 없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마침내 우리 현대사는 이들 두 세력에 의해 주체성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1950 년의 '한국전쟁'은 그 성격상 주체성 파괴의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은 늘 주체성을 무기로 삼아 다른 세력을 '괴뢰'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어느 세력의 눈치도 보지 않는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 주체적인 정치세력은 아직 없다. 한반도의 분단 그 자체가 타율적인 주체성 파괴의 결정체이므로, 분단을 극복해야만 주체성이란 말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기마종족이 주도해온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체를 상징하며, 우리가 문화적 노예상태 또는 준 노예상태에 있음을 가리킨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한반도 분단은 과거 삼국시대의 분열보다 훨씬 심각한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문화적 주체성이 없으므로 두 정부에도 정통성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남과 북의 두 정부는 스스로를 정통이라 여기는 자세를 버리고 각자가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서 타율적이거나 비주체적인 요소를 차츰 줄여나가야 한다. 생존과 관련된 현실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업은 진행되어야 한다.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길(사실은 원래의 우리 길)이 남과 북 스스로에 의해 모색되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해나갈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작은 민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세력이 되어 세계무대에 주체적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겨레'는 '물결'이라는 말의 '결'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 나눌 수 없을 뿐 아니라 같은 흐름을 가지는 어떤 단위라는 말과 '누에'(누워 있는 생명체)나 '게'('기에'의 줄임말로 기어 다니는 생명체)의 '에'처럼 생명을 뜻하는 명사인 '에'(애)가 결합된 말이다. 즉 겨레는 '생명공동체'라는 말뜻을 가진다.
--- 식객문화는 인류역사를 통해 가장 문제가 되는 부의 집중화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을 해소시키는 우리 겨레의 특유의 부의 재분배 방법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공동체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지난날 기마종족이 가졌던 재화에 대한 개념, 즉 재화는 축적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고, 적절한 데 사용되어야만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는 개념을 가장 잘 대표한다. 식객문화의 본질은 모든 젊은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는 공동체 원리이며, 민족적 기상과 전통적 인간상을 다시 찾기 위해 '식객문화'로 대표되는 공동체 원리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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