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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디쉬어에 관한 추억>을 적다 보니 박노자의 저서를 소개하게 됐네요. 그렇다면 여기 곁 가지를 좀더 쳐서 그 이후 적은 글 하나도 올려보겠습니다. 거의 그대로 가져오지만 시간이 지났으니 살짝 수정만 가해서 그대로 올리고자 합니다.
theacro.com을 제 블로그에 소개하면서 뤼야님의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글의 제목은 <박노자,20대, 병맛현상>이었죠. 그 글에서 뤼야님은 박노자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중, 20대에 거는 박노자의 희망의 글을 가져 옵니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사람들이 그 체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가면서 더 이상 발전의 동력을 체제를 내재화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주어진 필연성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리고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현재에 절망하고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젊은 좌파지식인이었죠. 이 젊은 학생 좌파 지식인이 룸펜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한다면 급진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작은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책들이 신좌파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인기 지식인으로 등극한 그는 <해방에 관한 에세이>에서 신좌파학생들을 혁명의 담지자로 '임명' 합니다. 그리고 그 동반자로 슬럼가의 흑인과 베트콩을 나란히 같은 열에 자리잡아 줍니다(지젝이 어딘가에 발표한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크메르루즈에 관한 비슷한 글을 적었던가요? 그들의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던 글이 있었죠).
결국 마르쿠제나 박노자가 주목한 것은 '절망감' 입니다. 그 절망감이 에너지를 축적하고 마침내는 혁명의 에너지로 터진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마르쿠제보다도 더 통찰력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마르쿠제가 똑똑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 체제내에 충분히 포섭된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바꾼다는 것은 조직화되지 않은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좌파지식인이 일시적으로나마 동맹하여 폭발하는 것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 않나요?
언젠가 박노자에 대한 글을 하나 올리고 싶었는데 그냥 이 글은 그 서문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박노자는 어딘지 책상물림 지식인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지식과 이론으로 세상을 여과시키려고 시도하는 것 같아요.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런 모양새대로 가만히 있는 고형물이 아니죠. 세계는 오히려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많은 변수가 동시에 부딪쳐 산란하는 폭포수의 흐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지식으로 세상을 필터링하면서 그것을 진정한 세계라고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죠.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파이프가 아닌 것처럼.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e Magritte>
그러나 르네 마그리트는 그것이 파이프가 아닌 줄 알지만 박노자나 마르쿠제는 자신의 언어를 세계, 혹은 세계의 진실된 반영이라고 믿는 겁니다.
상징계는 결코 실재계가 아닙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보르매우스의 매듭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제가 라캉이나 지젝을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상징계는 언어이고 언어는 결코 실재를 담을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동의한다는 것 뿐입니다.
어쨌거나 마르쿠제나 박노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신이 가진 이론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절망을 느낍니다(이론적으로 세상은 진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처럼 절망한 세대, 계층의 상실감이 다시 에너지로 뭉쳐질 것이라고 내다 봅니다. 절망의 에너지가 다시 희망으로 분출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비합리적인 믿음이 다시 그의 이론을 완성시켜 줍니다. 절망의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세상의 진보를 가져 오니까요.
순환논리 아니냐구요? 당연히 그렇죠. 그러나 위의 인용문과 마르쿠제의 주장에서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요? 그냥 자신의 믿음을 늘어놓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닐까요?
전 물론, 박노자를 좋아하고 그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의 글을 읽으면 조금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 같은 글이 툭툭 튀어나오곤 하니까요.
어디더라? 아마도 <하얀가면의 제국>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그는 티벳을 침공한 중국을 비난하면서 티벳의 종교적 제사의 미신성을 비판한 중국학자의 논리를 비난합니다. 티벳의 종교는 합리적이며 그리 미신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전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티벳의 민중들은 아마도 미신적이었을 겁니다. 근대 티벳을 방문한 많은 인류학자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신앙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미신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 것과 그들이 미신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 속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전자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후자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후자를 주장하다가 그것이 팩트와 거리가 먼 것으로 확인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또 다른 문제 역시 놓여 있습니다. 박노자나 마르쿠제는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성과 문명에 이미 길들여진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의 이성과 문명에 맞지않는 비문명을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주장해야 할까요? 예컨대 여성의 성기를 할례하는 야만적 풍속을 문화적 상대주의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어린이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풍습도 문화적 상대주의에 속하는 것일까요?
지젝이라면 그걸 받아들이자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박노자라면 눈을 감고 그 모든 장면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왜곡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스피박이라면, 이 둘은 결국 상위주체의 눈으로 하위주체를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이들의 언어로 하위주체의 입은 막혀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군요.
영화 <디스트릭트9>은 아프리카의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이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나이지리안들이 외계인의 신체를 잡아먹으면서 그 안의 주술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장면입니다.
아프리칸들은 실제로 대단히 미신적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사람이 동물로 변신할 수 있고 무당은 저주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팩트입니다. 이 팩트가 우리의 문명과 우리의 이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저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저들의 저러한 행위는 그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을 감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실재을 가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실재를 앞서는 것은 일종의 '증상'입니다. 망상은 실재계와 상징계가 어긋날 때 이를 복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라캉은 주장했죠. 우리 모두가 어느정도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실재를 가리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겁니다.
아, 다시 말하지만 저는 라캉의 이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하니까 이렇게 멋대로 원용할 뿐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라캉과 지젝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곧 잠이 오니까요.
가볍게 가볍게 적었지만 이 문제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습니다. <슬픈 열대>와 <문화 상대주의>을 대충 읽은 한 영화평론가는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인간제물을 문화 상대주의로 이해해애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수천명을 죽여 태양의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 상대주의로서 받아들여 그것이 옳다고 주장 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들은 미개하니 우리의 이성으로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까요?
진보진영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현실의 부정입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 나의 노동계급은 그렇지 않아! 나의 위수동은 그렇지 않아!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나요? 가장 최근 모습은 나의 노짱은 그렇지 않아! 인가요. 하긴 친노를 진보라 할 수는 없네요. 그냥 대중일 뿐이죠.
현실과 이념이 충돌할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이념을 돌아보고 수정하고 다시 맞추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론이 현실을 못보게 만든다면 그 이론은 버려야 합니다. 이론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현실을 외면케 하는 눈가리내는 아니니까요. 현실을 가리는 이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교의일 뿐입니다.
P.S. <학문에서의 진영논리>에서 적었지만 학계에서도 이런 일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론이 정립되고 주류가 되면 그 이론에 반하는 것은 쉽게 무시됩니다. 그리고 그 주류 이론은 또 당대의 인식이나 주류 사회사상도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이집트학에서 지배종족설은 상당히 오래동안 무시됩니다. 외래 엘리트 종족이 도래하여 이집트 문명을 건설했다? 우선 우생학 느낌이 나는 엘리트 종족이 보기 싫고, 이집트 민중의 자생설을 부정하는 내용도 듣기 싫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고고학적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는 데도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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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cro.com을 제 블로그에 소개하면서 뤼야님의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글의 제목은 <박노자,20대, 병맛현상>이었죠. 그 글에서 뤼야님은 박노자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중, 20대에 거는 박노자의 희망의 글을 가져 옵니다.
…20대들이 더 이상 절망감 이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본질적으로 다 갈아보자!"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이 높다.(65p); …젊은이들에게 이제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결함투성이의 사회경제적 체제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그리스 식 '젊은이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젊은이들과 같이할 수 있다면 이 반란은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306p)
그런데 이런 박노자의 인식을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나 <해방에 관한 에세이>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사람들이 그 체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가면서 더 이상 발전의 동력을 체제를 내재화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주어진 필연성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리고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현재에 절망하고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젊은 좌파지식인이었죠. 이 젊은 학생 좌파 지식인이 룸펜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한다면 급진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작은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책들이 신좌파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인기 지식인으로 등극한 그는 <해방에 관한 에세이>에서 신좌파학생들을 혁명의 담지자로 '임명' 합니다. 그리고 그 동반자로 슬럼가의 흑인과 베트콩을 나란히 같은 열에 자리잡아 줍니다(지젝이 어딘가에 발표한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크메르루즈에 관한 비슷한 글을 적었던가요? 그들의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던 글이 있었죠).
결국 마르쿠제나 박노자가 주목한 것은 '절망감' 입니다. 그 절망감이 에너지를 축적하고 마침내는 혁명의 에너지로 터진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마르쿠제보다도 더 통찰력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마르쿠제가 똑똑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 체제내에 충분히 포섭된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바꾼다는 것은 조직화되지 않은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좌파지식인이 일시적으로나마 동맹하여 폭발하는 것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 않나요?
언젠가 박노자에 대한 글을 하나 올리고 싶었는데 그냥 이 글은 그 서문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박노자는 어딘지 책상물림 지식인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지식과 이론으로 세상을 여과시키려고 시도하는 것 같아요.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런 모양새대로 가만히 있는 고형물이 아니죠. 세계는 오히려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많은 변수가 동시에 부딪쳐 산란하는 폭포수의 흐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지식으로 세상을 필터링하면서 그것을 진정한 세계라고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죠.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파이프가 아닌 것처럼.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e Magritte>
그러나 르네 마그리트는 그것이 파이프가 아닌 줄 알지만 박노자나 마르쿠제는 자신의 언어를 세계, 혹은 세계의 진실된 반영이라고 믿는 겁니다.
상징계는 결코 실재계가 아닙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보르매우스의 매듭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제가 라캉이나 지젝을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상징계는 언어이고 언어는 결코 실재를 담을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동의한다는 것 뿐입니다.
어쨌거나 마르쿠제나 박노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신이 가진 이론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절망을 느낍니다(이론적으로 세상은 진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처럼 절망한 세대, 계층의 상실감이 다시 에너지로 뭉쳐질 것이라고 내다 봅니다. 절망의 에너지가 다시 희망으로 분출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비합리적인 믿음이 다시 그의 이론을 완성시켜 줍니다. 절망의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세상의 진보를 가져 오니까요.
순환논리 아니냐구요? 당연히 그렇죠. 그러나 위의 인용문과 마르쿠제의 주장에서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요? 그냥 자신의 믿음을 늘어놓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닐까요?
전 물론, 박노자를 좋아하고 그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의 글을 읽으면 조금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 같은 글이 툭툭 튀어나오곤 하니까요.
어디더라? 아마도 <하얀가면의 제국>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그는 티벳을 침공한 중국을 비난하면서 티벳의 종교적 제사의 미신성을 비판한 중국학자의 논리를 비난합니다. 티벳의 종교는 합리적이며 그리 미신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전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티벳의 민중들은 아마도 미신적이었을 겁니다. 근대 티벳을 방문한 많은 인류학자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신앙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미신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 것과 그들이 미신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 속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전자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후자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후자를 주장하다가 그것이 팩트와 거리가 먼 것으로 확인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또 다른 문제 역시 놓여 있습니다. 박노자나 마르쿠제는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성과 문명에 이미 길들여진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의 이성과 문명에 맞지않는 비문명을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주장해야 할까요? 예컨대 여성의 성기를 할례하는 야만적 풍속을 문화적 상대주의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어린이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풍습도 문화적 상대주의에 속하는 것일까요?
지젝이라면 그걸 받아들이자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박노자라면 눈을 감고 그 모든 장면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왜곡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스피박이라면, 이 둘은 결국 상위주체의 눈으로 하위주체를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이들의 언어로 하위주체의 입은 막혀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군요.
영화 <디스트릭트9>은 아프리카의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이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나이지리안들이 외계인의 신체를 잡아먹으면서 그 안의 주술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장면입니다.
아프리칸들은 실제로 대단히 미신적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사람이 동물로 변신할 수 있고 무당은 저주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팩트입니다. 이 팩트가 우리의 문명과 우리의 이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저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저들의 저러한 행위는 그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을 감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실재을 가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실재를 앞서는 것은 일종의 '증상'입니다. 망상은 실재계와 상징계가 어긋날 때 이를 복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라캉은 주장했죠. 우리 모두가 어느정도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실재를 가리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겁니다.
아, 다시 말하지만 저는 라캉의 이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하니까 이렇게 멋대로 원용할 뿐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라캉과 지젝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곧 잠이 오니까요.
가볍게 가볍게 적었지만 이 문제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습니다. <슬픈 열대>와 <문화 상대주의>을 대충 읽은 한 영화평론가는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인간제물을 문화 상대주의로 이해해애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수천명을 죽여 태양의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 상대주의로서 받아들여 그것이 옳다고 주장 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들은 미개하니 우리의 이성으로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까요?
진보진영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현실의 부정입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 나의 노동계급은 그렇지 않아! 나의 위수동은 그렇지 않아!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나요? 가장 최근 모습은 나의 노짱은 그렇지 않아! 인가요. 하긴 친노를 진보라 할 수는 없네요. 그냥 대중일 뿐이죠.
현실과 이념이 충돌할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이념을 돌아보고 수정하고 다시 맞추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론이 현실을 못보게 만든다면 그 이론은 버려야 합니다. 이론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현실을 외면케 하는 눈가리내는 아니니까요. 현실을 가리는 이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교의일 뿐입니다.
P.S. <학문에서의 진영논리>에서 적었지만 학계에서도 이런 일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론이 정립되고 주류가 되면 그 이론에 반하는 것은 쉽게 무시됩니다. 그리고 그 주류 이론은 또 당대의 인식이나 주류 사회사상도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이집트학에서 지배종족설은 상당히 오래동안 무시됩니다. 외래 엘리트 종족이 도래하여 이집트 문명을 건설했다? 우선 우생학 느낌이 나는 엘리트 종족이 보기 싫고, 이집트 민중의 자생설을 부정하는 내용도 듣기 싫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고고학적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는 데도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2012.01.15 01:57:20
코지토님의 글은 역시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제가 요즈음 인물 까기 글만 올리는 것이 부끄러워지는군요.
이론(이념)과 현실의 충돌이라는 말에 20대의 기억이 나 몇 자 적어 봅니다.
80년대 주사파가 학생운동권에 준동하면서(장악하면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운동권에서 치열했었지요.
그 때 주사파들이 한국(남한)사회를 식민지 반봉건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고 엄청 싸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들은 80년대 한국사회가 어찌했든 자본주의화 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주체사상 이론에서 그렇게 규정하고, 또 남한 해방론을 관철하기 위해 우리(남한) 사회는 "반봉건 식민지"여야 하기 때문에 현실과 괴리된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주장하더군요. 현실을 이론에 거꾸로 궤맞추는 주장한 것이죠. 이러니 당시 운동권의 방향이 제대로 잡힐리 없고 그 역량이 강화될 리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정권의 탄압 이전에 운동권 스스로의 모순이 운동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봅니다.
그 때의 경험과 기억이 생생해서 그런지 몰라도 현실을 왜곡하는 주장이나, 실제와 다르게 부풀리거나, 조작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정책이나 인물, 사건 등을 보는 관점들이 이념, 기존 논리, 진영이 우선이고 실제(진실)는 밀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가 곽노현, 한명숙, 정봉주(나꼼수), 박원순, 안철수를 까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2012.01.16 05:15:51
저도 당시의 기억이 많이 납니다. 꼭 NL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PD도 마찬가지 였죠. 당시 PD계열은 사구체논쟁시 한국을 신식국독자(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구성체)라고 정의 내렸죠. 신식국독자나 식민지반봉건이나... 50보 100보 차이지만... 그래도 식민지봉건사회보다는 낫네요. NL이 웃기는 것이 북한은 완전 전근대적 왕조국가를 건설하였는데 남을 봉건사회로 규정했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자는 길벗님의 주장에 찬성합니다.
다만, 그 있는 그대로를 볼 때, 상대적 감각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안철수를 비판할 것은 당연히 비판해야 합니다. 다만, 그를 비판은 하지만 다른 정치가들보다 나은 점이 더 많다면 그 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벗님이 제기한 문제점들은 제가 보기에는 큰 허물은 아니며 지지를 철회하기에는 다소 미미한 사안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철수가 직접 한 이야기라고 한 것들도 대부분 언론에서 노출 된 것들이고, 저 역시 언론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데, 이 경우 그들의 편집이나 생략을 일일이 대응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호의적인 입장에서 접근한 매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 일일이 잡아내고 바로잡고해야 하는 건데 못한 건지, 혹은 그런 인식이 아예 없는 건지, 혹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경력을 부풀리기로 작정한 건지, 혹은 미필적 고의인지... 경우의 수가 여럿 있는데, 제 생각에는 적극적 뻥튀기만 아니라면 용납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나라에는 이보다 나은 인물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나은 인물이 정치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려운 것이 또 한국정치의 현실 아닐까요?
길벗님의 비판 맥락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상대적 비교라는 점에서 전 약간 생각이 다르다고 밝힙니다. 아, 전 안철수에 대한 지지자가 아니라는 것도 미리 밝혀 드립니다. 다만 상대적으로는 아직 더 나은 점이 많다는 것에만 동의할 뿐입니다.
2012.01.16 06:38:55
코지토님/
제가 안철수를 지금 이렇게 신랄하게 까대는 것은 아마 제가 안철수를 지지했을 때 알았던 것과 지금 밝혀지고 있는 것과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럴 것입니다. 코지토님과 제가 개인적인 차가 있어 그 실망감과 배신감이 다를지 모르지만, 저는 안철수의 자가 포장방식이 더 구역질 났기 때문이고, 제 주변의 안철수 지지자들이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믿으려 들지 않아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무릎팍도사에 나온 안철수가 자기 주식을 직원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단지 조금 포장된 정도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그 과정이 불순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안철수가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으로 보이고 결코 작가나 방송의 편집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안철수에 관심이 많아 그 방송을 본방과 재방을 모두 보아 생생히 기억하고 엄청 감동을 먹었더랬습니다.
강호동이 주식을 직원들에게 다 무상으로 주식을 준 것을 언급하자 안철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같이 키워온 회사니까 무상으로 준 것인데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기자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취재를 요청하는데 취재를 피해 다니느라 중앙의 엘리베이터를 ㅁ자형으로 뺑뺑이를 도는데 기자는 반대로 올 생각을 하지 않더라. 결국 얼굴은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취재에 응했는데 손가락 꼼지락 거리는 것만 나왔더라"
위의 방송을 본 저를 포함한 시청자는 안철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안철수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같이 고생한 직원들에게 자기 주식 전부를 무상으로 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네. 거기에다 저 겸손까지 봐라. 요즈음 보기 힘든 인물이네"라며 뿅 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실상은 어떠 했나요? 1년전에 자기 소유 주식수 만큼을 BW를 발행하여 전부 자기가 인수하고 BW 행사 가능 시점인 딱 1년이 지나 바로 행사하여 146만주를 인수해 이 중에 8만주를 직원에게 준 것이죠. 시세차익은 본인은 311억을 얻고 18억 상당의 주식 8만주를 준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죠. 직원에게 준 8만주의 근원이 BW를 행사한 것인데 이 BW를 인수한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안랩의 지분은 안철수 뿐 아니라 , 산업은행, 삼성SDS, LG창투 등 기관투자자들이 있었죠. BW가 발행되면 당연히 지분율에 따라 인수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안랩 투자자들은 배임을 한 것이 됩니다. 에버랜드의 CB 인수를 포기해 결과적으로 이재용이 인수케한 삼성SDS가 배임으로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요. 묘하게 에버랜드 CB건과 안철수의 BW에 관계한 회사에 삼성SDS가 끼워져 잇고 시기도 비슷합니다. 아마 이 건과 관계되는지 모르지만 안랩의 산업은행 담당자(임원?)가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추징금 11억에 실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안철수도 검찰의 수사를 받았으나 신병 치료를 이유로 수사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안철수가 직원에게 주식을 준 실상과 안철수가 무릎팍에 나와 한 이야기는 천양지차가 아닌가요? 실상이 저렇다면 저는 저런 질문을 강호동이 하지 말았으면 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저것은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치부이지요. 그런데 안철수는 어떠 했습니까? 강호동의 질문을 교묘하게 스스로 포장합니다. 대놓고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강호동의 말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지요. 시청자로 하여금 "그래 내가 그랬어"라는 말보다 100배 높은 강한 긍정을 보임과 동시에 무한 감동을 선사해 자기의 치부(?)를 위대한 행위(?)로 격상시켜 버리죠.
저는 안철수의 BW 발행과정과 주식 무상 배분 과정을 알고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안철수를 저렇게 과대 평가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시중 말로 안빠에서 안까로 돌아섰습니다.
또 아직까지 실상을 모르고 무릎팍 방송으로 안철수를 평가하는 분들이 있다면 안되겠다 싶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식 배분 건을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것 말고도 과도하게 포장된 것은 많습니다. 거기에는 대부분 안철수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라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고 대담하는 것이 수차례 있었는데 과연 이런 것들이 주관사 탓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안철수가 다른 정치인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위일 수 있고 장점이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상대 비교해서 나으니까 안철수를 까서는 안된다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대 비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안철수를 두고 한 것이라 상대 비교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상대 비교의 전제는 가능한 대상의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을 두고 비교해야 함으로 먼저 실상을 보여주고 검증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후에 상대 비교를 통해 각자의 가치관과 후보에 요구하는 도덕 수준에 따라 지지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고 봅니다.
제가 안철수를 지금 이렇게 신랄하게 까대는 것은 아마 제가 안철수를 지지했을 때 알았던 것과 지금 밝혀지고 있는 것과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럴 것입니다. 코지토님과 제가 개인적인 차가 있어 그 실망감과 배신감이 다를지 모르지만, 저는 안철수의 자가 포장방식이 더 구역질 났기 때문이고, 제 주변의 안철수 지지자들이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믿으려 들지 않아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무릎팍도사에 나온 안철수가 자기 주식을 직원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단지 조금 포장된 정도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그 과정이 불순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안철수가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으로 보이고 결코 작가나 방송의 편집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안철수에 관심이 많아 그 방송을 본방과 재방을 모두 보아 생생히 기억하고 엄청 감동을 먹었더랬습니다.
강호동이 주식을 직원들에게 다 무상으로 주식을 준 것을 언급하자 안철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같이 키워온 회사니까 무상으로 준 것인데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기자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취재를 요청하는데 취재를 피해 다니느라 중앙의 엘리베이터를 ㅁ자형으로 뺑뺑이를 도는데 기자는 반대로 올 생각을 하지 않더라. 결국 얼굴은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취재에 응했는데 손가락 꼼지락 거리는 것만 나왔더라"
위의 방송을 본 저를 포함한 시청자는 안철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안철수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같이 고생한 직원들에게 자기 주식 전부를 무상으로 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네. 거기에다 저 겸손까지 봐라. 요즈음 보기 힘든 인물이네"라며 뿅 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실상은 어떠 했나요? 1년전에 자기 소유 주식수 만큼을 BW를 발행하여 전부 자기가 인수하고 BW 행사 가능 시점인 딱 1년이 지나 바로 행사하여 146만주를 인수해 이 중에 8만주를 직원에게 준 것이죠. 시세차익은 본인은 311억을 얻고 18억 상당의 주식 8만주를 준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죠. 직원에게 준 8만주의 근원이 BW를 행사한 것인데 이 BW를 인수한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안랩의 지분은 안철수 뿐 아니라 , 산업은행, 삼성SDS, LG창투 등 기관투자자들이 있었죠. BW가 발행되면 당연히 지분율에 따라 인수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안랩 투자자들은 배임을 한 것이 됩니다. 에버랜드의 CB 인수를 포기해 결과적으로 이재용이 인수케한 삼성SDS가 배임으로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요. 묘하게 에버랜드 CB건과 안철수의 BW에 관계한 회사에 삼성SDS가 끼워져 잇고 시기도 비슷합니다. 아마 이 건과 관계되는지 모르지만 안랩의 산업은행 담당자(임원?)가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추징금 11억에 실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안철수도 검찰의 수사를 받았으나 신병 치료를 이유로 수사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안철수가 직원에게 주식을 준 실상과 안철수가 무릎팍에 나와 한 이야기는 천양지차가 아닌가요? 실상이 저렇다면 저는 저런 질문을 강호동이 하지 말았으면 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저것은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치부이지요. 그런데 안철수는 어떠 했습니까? 강호동의 질문을 교묘하게 스스로 포장합니다. 대놓고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강호동의 말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지요. 시청자로 하여금 "그래 내가 그랬어"라는 말보다 100배 높은 강한 긍정을 보임과 동시에 무한 감동을 선사해 자기의 치부(?)를 위대한 행위(?)로 격상시켜 버리죠.
저는 안철수의 BW 발행과정과 주식 무상 배분 과정을 알고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안철수를 저렇게 과대 평가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시중 말로 안빠에서 안까로 돌아섰습니다.
또 아직까지 실상을 모르고 무릎팍 방송으로 안철수를 평가하는 분들이 있다면 안되겠다 싶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식 배분 건을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것 말고도 과도하게 포장된 것은 많습니다. 거기에는 대부분 안철수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라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고 대담하는 것이 수차례 있었는데 과연 이런 것들이 주관사 탓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안철수가 다른 정치인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위일 수 있고 장점이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상대 비교해서 나으니까 안철수를 까서는 안된다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대 비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안철수를 두고 한 것이라 상대 비교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상대 비교의 전제는 가능한 대상의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을 두고 비교해야 함으로 먼저 실상을 보여주고 검증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후에 상대 비교를 통해 각자의 가치관과 후보에 요구하는 도덕 수준에 따라 지지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고 봅니다.
2012.01.16 07:53:51
길벗님은 관심이 많으시다 보니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셨고 그 정보를 토대로 배신감을 느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안철수가 나오는 방송을 본 적이 없고 직접 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BW부분은 한번 실상을 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1. 그가 안철수연구소를 맥아피(라고 기억됩니다)에게 팔지 않았다는 것...
2. 자신이 가진 주식 절반을 기부했다는 것...
3.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 중심으로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여러번 비판 했다..
4. 자본주의의 부의 불균형적인 배분 현상과 이의 세대를 통한 고착화를 비판했다...
이정도네요. 위 두가지 사안이 일반인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잇는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대부분의 정치인이 법인을 만들어서 기부하는 것에 비해 안철수는 그냥 기부했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플랜카드 내 거는 것은 정말 낯간지럽긴 하지만 그게 그닥 깔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관사 탓만 할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반대로 안철수 탓만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답도 부정적인 거 아니겠어요? 빌게이츠가 공개방송에서 하버드 티셔츠를 입고 나왔죠. 졸업생도 아니면서 그거 왜 입냐? 하고 버핏이 웃으면서 말하니까 그냥 입었다.. 그러면서 나중에 덥다면서 벗어요. 그걸 보고 버핏이 진작에 벗었어야지! 하면서 조크를 하는데... 그 정도로 깔 수 있는 사안 아닌가요? 안철수보고 누군가가 그 강연장에서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하면 좀 웃기지 않나요? 그 현수막 내립시다... 그러면 안철수가 아니요, 난 석학입니다.. 이러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그냥 그거 내려버리세요.... 그러고 말 거 같은데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업인은 보수적입니다. 그리고 소유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가 진보적인 정책입안자가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도 다소 미흡합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입장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행동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직까지는 상대 우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말은, 상대적으로 우위가 있으니까 안철수를 비판하지 말라! 이런 말이 아닙니다. 저 개인적 입장에서는 이런 비판과 입장을 가진 정치인이 등장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유리하므로 상대적으로는 낫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012.01.16 08:13:25
네, 코지토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제가 갖고 있던 안철수에 대한 인식이 사실과 워낙 달라 오는 자괴감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순전히 개인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니 코지토님과 제가 다른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죠.
이건 괜히 꼬투리 잡는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지만,
1. 안철수가 맥아피에 안랩을 팔지 않았다는 풍문이 과장되었거나 자가 발전이라는 설이 IT업계에 있더군요.
2. 자신이 가진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최근에 발표했지, 아직 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기부가 대부분의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하던 방식인 재단을 만들어 한다고 합니다. 지금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간 것도 재단 설립에 대한 조언을 들으려 간다고 발표했으니까 코지토님이 알고 있는 그냥 기부는 절대 아닙니다. 저도 안철수가 그냥 기부하면 그 진정성을 인정해 주려 했습니다. 류근철 박사가 600억 상당의 자산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던 것처럼 말이죠. 재단을 만든다고 할 때 저는 그 진정성을 의심했습니다. 그것도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그 저의가 의심되지요. 그리고 안철수의 이번 주식 기부 발표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고위 공직자는 주식을 백지신탁하고 6개월 이내에 정부가 장내에서 매각해 버립니다. 안철수가 대선에 나와 대통령이 되거나 고위 공직을 맡으면 어차피 주식은 백지신탁해야 함으로 이 참에 주식 기부해서 생색 내고 재단 만들어 절세도 하고 재단에 유력인사를 참여하게 하여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요. 안철수가 주식 절반을 그냔 기부하고 정치권 기웃거리지 않고 서울대 보직에 충실하면 그 진정성을 인정해 그 동안 제가 깠던 것을 철회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철수는 이번 주식 기부 발표 전에 기부를 했다는 사실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3, 4의 내용은 안철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닌가요? 저 말을 했다고 높이 평가할 일은 아니지요. 3,4에 대한 것이라면 장하준이나 김종인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나요? 추상적인 언급보다는 구체적 정책으로 말하는 쪽을 더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또 IT업계에서 안랩이나 안철수가 한 행동을 보면 안철수가 3,4와 같이 말할 입장이 아닌 것 같구요.
안철수의 BW 인수 건 등을 정리한 예전의 제 글을 링크합니다. 참조하세요.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476602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477591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478256
저는 코지토님께 안철수가 서울대 홈피 자기 소개란 논문실적이라고 올려놓은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라는 글을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안철수가 지금까지 쓴 논문 총 3편 중에 1편(안철수는 논문이라고 합니다)입니다. 의사협회보에 기고한 글인데 아직 거기에서 검색하면 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울대 정교수 24호봉 대학원장이 자기 논문이라고 소개해 놓은 것입니다.
제가 갖고 있던 안철수에 대한 인식이 사실과 워낙 달라 오는 자괴감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순전히 개인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니 코지토님과 제가 다른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죠.
이건 괜히 꼬투리 잡는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지만,
1. 안철수가 맥아피에 안랩을 팔지 않았다는 풍문이 과장되었거나 자가 발전이라는 설이 IT업계에 있더군요.
2. 자신이 가진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최근에 발표했지, 아직 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기부가 대부분의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하던 방식인 재단을 만들어 한다고 합니다. 지금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간 것도 재단 설립에 대한 조언을 들으려 간다고 발표했으니까 코지토님이 알고 있는 그냥 기부는 절대 아닙니다. 저도 안철수가 그냥 기부하면 그 진정성을 인정해 주려 했습니다. 류근철 박사가 600억 상당의 자산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던 것처럼 말이죠. 재단을 만든다고 할 때 저는 그 진정성을 의심했습니다. 그것도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그 저의가 의심되지요. 그리고 안철수의 이번 주식 기부 발표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고위 공직자는 주식을 백지신탁하고 6개월 이내에 정부가 장내에서 매각해 버립니다. 안철수가 대선에 나와 대통령이 되거나 고위 공직을 맡으면 어차피 주식은 백지신탁해야 함으로 이 참에 주식 기부해서 생색 내고 재단 만들어 절세도 하고 재단에 유력인사를 참여하게 하여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요. 안철수가 주식 절반을 그냔 기부하고 정치권 기웃거리지 않고 서울대 보직에 충실하면 그 진정성을 인정해 그 동안 제가 깠던 것을 철회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철수는 이번 주식 기부 발표 전에 기부를 했다는 사실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3, 4의 내용은 안철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닌가요? 저 말을 했다고 높이 평가할 일은 아니지요. 3,4에 대한 것이라면 장하준이나 김종인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나요? 추상적인 언급보다는 구체적 정책으로 말하는 쪽을 더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또 IT업계에서 안랩이나 안철수가 한 행동을 보면 안철수가 3,4와 같이 말할 입장이 아닌 것 같구요.
안철수의 BW 인수 건 등을 정리한 예전의 제 글을 링크합니다. 참조하세요.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476602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477591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478256
저는 코지토님께 안철수가 서울대 홈피 자기 소개란 논문실적이라고 올려놓은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라는 글을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안철수가 지금까지 쓴 논문 총 3편 중에 1편(안철수는 논문이라고 합니다)입니다. 의사협회보에 기고한 글인데 아직 거기에서 검색하면 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울대 정교수 24호봉 대학원장이 자기 논문이라고 소개해 놓은 것입니다.
2012.01.15 02:06:18
문화적 상대주의를 개인적으로 어느 선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도 고민을 많이 한 적이 있습니다.
에스키모(이누이트)나 중국의 오지 부족들이 외지인이 방문하면 부인과 하루 밤을 재우는 풍습(문화) 정도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성 성기의 할례, 인간을 태양신에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용인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유전인자의 흡수로 부족의 강화를 위한 외지인과 부인의 동침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 있고 인간 생명과 무관한 것이라 금방 수용이 될 것 같은데, 후자는 그렇지 못하네요.
문제는 전자와 후자 사이에 있는 다양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세계 각지의 풍습들을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12.01.15 02:57:10
길벗님 / "" 외지인이 방문하면 부인과 하루 밤을 재우는 풍습(문화) 정도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
==> 저도 이 정도는 괜찮다고 봐요
==> 저도 이 정도는 괜찮다고 봐요
2012.01.15 16:21:14
저는 항상 정확한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에스키모들이 낯선 사람에게 마누라와 동침을 허락한다는 것. 이거 에스키모 사회에 갔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잘못 알고 퍼뜨린 겁니다.
이덕하님이 두달전 링크걸어 놓은 글. Do Eskimo men lend their wives to strangers? 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못 알았던 것에 대해 자세히 재미있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에스키모 풍습에 두 가정이 경제적, 우의(friendship) 밀착을 목적으로 공-결혼(co-marriage)생활을 하는 커플들이 있답니다.
생활은 따로 하는데 가끔 남자들이 1주일 정도 서로 상대방의 집에 가서 가장 노릇을 한다는군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한답니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남자들이기 때문에 부인 교환이 아니라 남편 교환이랍니다. 이걸 보고 선교사들이
에스키모들은 낯선 사람에게 자기 부인을 제공한다고 잘못 해석한 거랍니다.
저는 질투를 포함해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문화의 차이를 떠나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낯선 사람에게 자기 마누라를
섹스 파트너로 제공한다? 에스키모인들은 성적 질투도 못 느끼는 별종인간인가요?
김어준이 전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외국 여행을 처음할 땐 우리와 다른 것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나중엔 다른것 보다는
보편적인 것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오더랍니다.
미누에님 번역실력이 탁월하신데 이덕하님이 링크걸어 놓은 글 번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2.01.16 05:33:48
아래에 여러 의견이 있는데요.
우선 이러한 관습이 실제한다는 가정하에, 배우자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도, 관습이 배우자에게 억압으로 느껴질 경우 그때에는 이 관습은 상대주의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고 봐야겠죠.
비슷한 케이스 히잡풍습입니다.
유럽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히잡, 차도르, 부르카에 대한 반대의견이 많습니다. 심지어 법적으로 제한한 나라도 있죠.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명백한 여성억압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슬람 여성들은 이러한 비판을 서구적 시각으로 이슬람여성을 재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피박(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C. Spivak)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거 같아요.
이들은 서발턴(하위주체)들은 이중으로 억압받는다. 제 3세계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서구적 보편성과 자본주의적 수탈에 의해 억압받고, 자국에서는 자국의 남성과 지배계급에 의해 억압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계몽하기를 원하는 자국의 지식인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오로지 서구의 관점으로만 이들의 억압을 해설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 서발턴들은 마치 크리스테바의 주장을 내재화 한 것처럼 자신에 둘러진 억압을 싫어하고 폐기하기를 원할거라고 주장한다. 아니 그래야만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은 억압을 내재화하여 더 이상 저항하기를 포기하여 순종하는 자들이며 같은 계급, 계층, 집단의 배신들일 뿐이다. 이들은 이렇게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던지, 아니면 자기 가 속한 집단의 배신자, 혹은 전근대적 문화의 노예가 되던지 양자 택일을 강요 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족 선택의 자유가 있다. 자신들의 관습을 고수할 권리가 있다. 그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념과 언어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말할 수 없다! 서구의 계몽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이여 그대들이 하위주체을 위하여 말한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념을 위해 말할 뿐이며 서발턴들은 그대들의 이념확장을 위해 활용되는 논문의 주석 같은 존재다!
저역시 이들 억압을 받는 대상들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문명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초소한의 보편성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하위주체들이 기꺼이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불에 타 죽기를 원한다고 해서 그런 풍습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2012.01.15 09:23:24
문화상대주의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 외과의사의 수술도같은게 되어야 겠지요. 서구 문화를 마땅한 보편자로 자부하고 타 지역 문화를 그에 못미치는 야만이나 무지몽매 상태로 간주하는 유럽 중심주의의 사례가 아닌가 의심되는 간섭이나 비난이나 충고를 최종적으로 그 사례로 확인하기 전에 그 야만이나 무지몽매 상태가 사실은 그 서구적 보편자와 별다르지 않은 것이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 것일 뿐인 것은 아닌지, 문제의 바로 그 지역들 자체에 그 간섭이나 비난이나 충고를 수용하고 환영할 수 있는 전통이나 입장은 없는지 - 우리, 서구적 모더니티에 물든 이들이 억압이고 차별이라고 느껴 분개하는 그 지역의 관습들이 따져보면 그 지역의 전통적 규범에도 어긋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관습의 '희생자'들 일부도 그 관습을 억압으로 느끼고 있는건 아닌지 - 충분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서구적 모더니티 전통에서 형성된 인간 존엄성의 이념 자체는 보편타당성을 지닌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입니다. 다만, 그 전통에서 형성된 모든 관행이 보편타당성을 지닌다거나 인간 존엄성의 이념이 구현되는 구체적 방식이나 경우 자체도 그 이념 자체 만큼이나 거의 선험적으로, 초맥락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닌것 같다는..
2012.01.15 12:11:54
문화상대주의가 용인될 수 있는 한계는 외부인의 판단이나 시선이 아니라 내부인들이 실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느냐 아니냐로 봐야 할 것입니다
여성할례 같은 것을 전통으로 생각하고 수용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이 죽음이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에 그런것은 과감하게 비판하고 없애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무당의 저주를 믿던 사람이 동물로 된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주는 것이 아니라면 뭐 용인해야 할 것이고
그러나 깊이 따져들어가면 아마도 명확하지 않은 사안들이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서두에 말하였듯이 그로인해 그 당사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느냐 아니냐라는 부분이 중요한 기준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몽테뉴의 수상록에도 보면 손님에게 아내를 빌려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대에 그런 사실들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하군요
그외 여러나라 풍속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원하는 것을 상상하는 호사가들이 많았던듯 합니다
근데 지금도 정말 빌려주는데가 있나요
여성할례 같은 것을 전통으로 생각하고 수용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이 죽음이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에 그런것은 과감하게 비판하고 없애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무당의 저주를 믿던 사람이 동물로 된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주는 것이 아니라면 뭐 용인해야 할 것이고
그러나 깊이 따져들어가면 아마도 명확하지 않은 사안들이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서두에 말하였듯이 그로인해 그 당사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느냐 아니냐라는 부분이 중요한 기준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몽테뉴의 수상록에도 보면 손님에게 아내를 빌려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대에 그런 사실들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하군요
그외 여러나라 풍속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원하는 것을 상상하는 호사가들이 많았던듯 합니다
근데 지금도 정말 빌려주는데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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