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짝사랑한 여성의 얼굴에 황산을 부어 얼굴을 없애고 실명되게한 가해자 남성에게 눈동자에 황산 20방울을 떨어뜨려 실명되게 하는 처벌을 이란 법원이 명했네요. (http://www.durl.kr/85bfk)
말그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방식의 형벌인데, 이러한 동해보복식 형벌은 극단적인 이슬람 국가 외에는 일반적으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금지되고 있습니다. 범죄예방에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아니라 무엇보다도 동해보복의 형벌은 잔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형폐지국들이 사형을 폐지한 이유는 아무리 인도적인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더라도 잔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엠네스티가 드는 사형폐지의 주된 근거도 논리적 근거가 아닙니다. 엠네스티는 사형은 잔인하다는(cruel) 감정적 근거를 가지고 운동하며 상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네티즌들을 보면 '눈에는 눈'의 동해보복과 사형제도는 '그 제도를 부정해야할 만큼' 잔인하다고는 느끼지 않는 네티즌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범죄가 줄어든다고 오해하는 이들도 많고... 사회환경이 각박해져서 그런건지 아니면 원래 국민성이 그런 건지... 어쨋든 분명한 것은 글로벌스탠다드 기준과 문화발전의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우리 나라는 인권의식의 수준이 많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표현의 자유 외에도 각종 기본적 인권은 불안정한 상태인데, 이와 관련해서 미국의 보수단체인 '프리덤하우스'가 조사한 각국의 언론자유 현황에서 우리 나라가 자유국에서 부분자유국으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477209.html)
이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http://www.durl.kr/85cn3)은 자괴감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일색입니다. -황산테러 보복판결을 지지하는 네티즌들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네티즌들은 서로 별개의 집단일 가능성도 있지만 논문도 아닌 인상비평식의 지금의 글에서는 한 포털에서의 반응이 너무나 한결같아서 이들을 한 묶음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듯-
원래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진보적 가치(글로벌 기준에서 이것들은 더 이상 진보적 가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다)들은 '체계적'이며 '구조적'이고 '총체적'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진보적 가치를 훼손하면서 다른 부분에서 진보적 가치를 옹호한다면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前在하고 있어야할 진보적 가치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황산테러에 동해보복을 명한 이란 법원에 대한 태도나 사형제도 유지에 대한 태도 언론 자유 내지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함께 볼 때 우리 나라 네티즌 일반인들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동해보복과 사형제도는 부끄러움 없이 찬성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반대하고 부끄러워 합니다. 이러한 네티즌들이 이명박 정부나 어떤 정치사회적 사안들을 비판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봐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보적 제 가치에서 어느 한 부분에서는 긍정적(approval)이고 다른 어떤 부분에서는 부정적 (disapproval)인 태도를 보이는 등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前在하고 있어야할 진보적 제가치관들을 그가 필요에 따라 왜곡해서 부분적으로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다른 패러다임을 이면에 가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면에 숨겨진 것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진영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이곳에서 주로 비판받는 엠팍에서도 이 기사관련해서 논쟁이 있었더군요. 엠팍이 한편으로 진보라면 진보일진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저 기사에 "속 시원하다. 한국은 너무 형벌이 약하다." 이런 반응이 꽤 있더군요. 결국 감정이 이성보다 우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인이 감옥이 적다는 것이라는 걸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그냥 판사가 미쳤다라고만 생각을 하죠...
출처(ref.) : 자유게시판 - 황산보복 판결을 지지하는 진보적(?) 네티즌들을 보며 - http://theacro.com/zbxe/free/391326
by 백수광부""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이 총체적, 체계적, 구조적이라는 것에 대한 추가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자유권적 기본권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쓰신 것인지 궁금해서요. 자유권적 기본권이라면 더 포괄적으로 재산권도 거기에 포함되는데, 여기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진보적 사고일 수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형벌의 강화를 주장하면서 표현의 자유의 확대를 말하는 것이 왜 이상한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헌법적 차원에서 두가지가 서로 충돌한다고 보기도 어려운데요. 어떤 관점에서 그렇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총체적이라는 말은 한 묶음으로 묶을 수 있다는 뜻으로, 체계적이라는 말은 개념화를 전제로 해서 아이디어들이 서로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뜻으로, 구조적이라는 말은 위에 드러나는 것 밑에서 그를 떠받치는 것들이 있는데 밑의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위에 드러나는 것도 해결될 수 없는 관계로 돼 있다는 뜻으로 쓴 말입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범죄자는 대체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층에서 나오고 사회의 복지수준이 높아져서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좀 더 관심과 배려를 주었다면 그만큼 그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떨어집니다. 사형 같은 위하적 형벌제도를 운용하는 국가는 범죄자를 교화할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다하지 않은 채 이러한 위하의 시스템에 기대죠. 그런 점에서 형벌의 강화, 즉 사형제도와 위하목적의 형벌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제도이고 약자일수록 소수자일수록 불리한 제도입니다.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은 기득권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소수자와 부와 권력이 없는 약자를 위한 자유죠. 좀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 들어간다면 이러한 기본적 인권들은'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대원칙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원칙에서 사형수 역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되는데 이러한 점들에 주목할 때 표현의 자유, 신체적 자유 등 여러가지 기본적 인권 이슈에서와 마찬가지의 체계, 구조적 관계를 찾을 수 있습니다.
ps: 사형수는 인간이 아니기에 존엄하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사형판결은 증명되지는 않았지만,피해자의 카타르시스회복이라는 점에서 시사점을 줍니다. 피해자를 위로한다는 것이지요. 피해자학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그들의 아픔에 대해 사회는 보상을 해야합니다.
그들의 아픔에 대해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형판결로 피해자가 위로될까 궁금합니다. 제가 어렸을적에 빈민가에서 살았는데 제 작은 어머니께서 동네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김밥을 파시다가 새벽에 동네 깡패에게 강도 강간으로 구타당해 숨지셨습니다. 범인이 잡히지 않아서 미제사건으로 끝났습니다. 그 때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범죄자가 잡혀서, 사형으로 그 깡패를 죽여도 위로되지는 않을 것 같더군요.
진보는 각자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나아가는 역사의 진보를 말합니다. 집단 즉 계급의 이익과 무관한 진보는 없습니다. 그렇게 계급적 이익과 무관한 진보, 관념적인 진보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강남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강남좌파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진보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 같습니다. 멋으로 진보하는 사람들이란 표현도 강남좌파에 훨씬 더 잘 어울리구요.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대표되는, 힘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양형의 불균형도 그렇지만,
흉악범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에게 "네 가족이 똑같이 당했다면 네가 그렇게 관대하게 판결하겠느냐?"고 항의하는 것도 사실은 일관성 결여를 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서로 다른 유형의 사건에 대해 일관성을 적용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가령 표현의 자유와 생명권... 이 두 가지는 사람에 따라서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즉, 단순한 일관성이라는 잣대로 재기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는 겁니다.
가령 이번 황산테러범에 대해서 황산을 이용한 처벌이 아닌, 단순한 총살형이나 교수형 또는 무기징역 또는 10년형 정도가 선고됐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거기에 대해서도 반대하실 건가요? 그 근거는? 황산을 이용한 처벌이나 총살형/교수형과의 차이가 뭘까요?
지금 황산테러범에 대해서 분노해서 황산 처벌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본질적으로는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탈리오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등가의 법칙에 대한 요구입니다. 바로 일관성에 대한 요구라고도 할 수 있죠.
사형제와 황산 처벌 가운데 어느 게 더 인간의 기본권을 훼손하는 것일까요?
생명권과 신체권 vs 표현의 자유... 어느 게 더 중요한가요?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지켜지지 않아도 되는 가치인가요?
생명권과 신체권에는 등가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다? 그것이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가치라는 것이 진보주의자들 모두의 합의사항입니까? 그러면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사형 아니 구금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신체권에는 구금으로부터의 자유가 포함이 되나요, 안 되나요?
제 말씀은, 네티즌들이 감정에 호소한다고 해서 그것이 일관성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양형의 일관성을 요구하면서도 그 방법으로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우리나라 법정의 양형기준을 갖고 따지는 것이 어떻게 그냥 감정에 대한 호소에 그치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감정에 대한 호소라면 대개 "피의자 사정이 딱하니 법의 관용을 베풀어달라..." 이런 식으로 요구하는 것이 감정에 대한 호소 아닌가요? "니 가족이 피해자라도 그렇게 관대하게 처벌하겠느냐?"가 어떻게 감정에 대한 호소가 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법률 적용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님이 황산 처벌과 사형제 가운데 사형제가 보다 더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신다면 즉, 보다 나쁜 행동이라고 보신다면 지금 이란의 황산 처형에 대해 "그 정도는 용인할 수 있다"는 네티즌들과 견해 차이가 크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만일 이란(맞나요?)의 법정이 이번 황산 테러범에 대해 사형을 언도했다고 치죠. 그때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그놈 당연한 처벌을 받았다"고 이란 법정의 판결을 지지한다면 님은 그 네티즌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놈들이 사형제를 지지하다니, 스스로 진보란 말도 꺼내지 마라"고 하실 건가요?
저는 황산 처벌은 반대하지만, 사형제에는 찬성합니다. 님의 기준으로 따지면 저 역시 진보적인 발언을 뻥긋도 안하는 게 맞겠지만, 이런 사안에서 일관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좀 무리한 접근 같습니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방향이 아닌, 인류 전체의 진보를 말해야 가치가 있다? 가령, 노동삼권은 노동자 계층의 이익을 증대하는 방향의 접근 아닌가요? 자본가 계급은 아마 노동삼권이 없는 것을 더 좋아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노동삼권은 인류 전체의 진보와 어떻게 매치될 수 있습니까? 자본가 계급은 인류의 범주에서 빼버릴까요?
하하하님 그리고 미투라고라님, 행간의 의미를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에 반하면 진보를 버릴 사람들"이라는 표현의 행간에 '소수자와 약자의 희생을 대가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보라는 것이 원래 소수자와 약자도 똑같이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여러가지 기본적 인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소수자와 약자를 희생시키고 그 댓가로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면 이것은 진보가 아니죠. 이것은 관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계급의 이익이라는 것은 현상적인 것입니다. 계급이라는 것이 뭔지, 그 말이 왜 생겨났는지 따져들어가보세요. 계급이라는 말도 결국엔 소수자 약자를 위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소수자와 약자를 희생시키고 그 댓가로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건 기득권자들에게 어울리는 일이고 진보가 될 수 없습니다.
PS: 제가 이 글에서 말한 '멋으로 진보하는 사람들'과 '강남좌파'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강남좌파는 이 글의 주제와 무관합니다. 진보를 하려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면서,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인식이 필요한데 '멋으로 진보하는 사람들'은 그런 인식 없이 특정사안에서 우연히 진보적 주장과 표면적으로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진보라고 주장하죠. 강남좌파는 이런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진보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문제까지 포괄하는 개념입니다만. 진보(progress)는 역사의 결말을 추정하는 개념이고, 그것은 역사가 일정한 합리적 진행법칙에 의해 진전한다는 것을 상정합니다. 그 말은 진보가 과학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역사의 발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그 과학이 뭘까요? 저는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모순과 대립구조를 극복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로 계급의 문제죠. 그 계급관계에서 소수니 약자니 하는 것은 매우 비본질적인 개념입니다. 솔까말, 진보는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필연적으로 반드시 다수가 되어야 하고, 다수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가치관입니다.
소수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보의 결과물로서 얻어지는 성과입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진보일 수도 없고, 그러한 가치관이 진보적 노력의 중심에 놓여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미투라고라님의 인식이 맞고 제가 틀렸고. 아니면 제가 틀렸고 미투라고라님의 인식이 맞고의 문제에는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다만 계급적 이익 어쩌고 진보 어쩌고 하면서 소수자 약자를 희생시키는 사건 그 자체에만, 구체적인 현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호남 차별도 그렇죠. 호남의 왕따와 차별을 댓가로 영남이 패권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리 그 영남이 진보라고 주장하고 참여고 개혁이라고 주장해도 정당성이 없습니다.
또, 저렇게 영남 독식구조가 불러오는 광범위한 저항, 그에 따른 체제유지 비용은 생산력 발전에 투입해야 할 자원을 낭비하는 결과로 이어지죠. 이 모든 것은 과거 군부독재 시절부터 숱하게 지적됐던 문제점들입니다.
오히려 소수자 약자 보호 등 보편적인 윤리 개념이야말로 영남인의 반박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 몇명 되지도 않는 호남인들을 위해 전국민을 위한 국가발전 전략을 포기해야 해? 그거야말로 소수의 횡포잖아?" 이렇게 반박할 때 뭐라고 답변하실 건가요?
영남인에 대한 반박은 간단합니다.
"영남인만 잘먹고 잘사는 구조로는 결코 생산력이 진보할 수 없습니다. 노동력 동원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제약을 안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발전 전략을 포기할 셈인가요?" 라고 영남인에게 반박하면 됩니다.
동의하시죠? 미투라고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영남인에게 영남인만 잘먹고 잘사는 구조에서 생산력의 진보는 영남인에게 알 바 아니죠. 영남인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우월입니다. 나라 전체가 못살아도 영남인만 잘 산다면 무방하다는 게 영남패권주의의 한 속성입니다.
윤리를 배제한 진보는 결국 사회를 힘의 대결의 장으로 만들 뿐이고 그러면 약자와 소수자는 계속 불리한 게임이 됩니다. 이걸 용인할 수는 없죠.
님이 인용하신 제 발언은 윤리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윤리적인 효과를 냅니다만.
제 발언은 원래 님이 옹호하셨던 이타적인 차원의 윤리가 아닌, 님이 배척했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속성에 호소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결과가 비슷하다고 해서 접근 방법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되죠. 님과 내가 말하는 것의 차이가 소수와 약자도 배려받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의 실현이라는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달성하는 방법론이나 가치관이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는 것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님이 정말 결정적으로 오해하시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영남패권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남패권주의자들의 속성을 폭로하고, 다른 지역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죠. 영패주의자들이야 어차피 우리나라의 생산력 발전보다 자신들의 패권 유지에 더 신경을 쓰겠죠. 하지만 호남을 비롯한 다른 지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패주의자들의 집단 이익과 호남 등 기타지역의 집단 이익이 충돌하도록 만들고, 거기서 역사적 진보에 부응하는 집단 이익이 승리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진보의 역할 아닌가요?
여기에서 소수 약자에 대한 보호는 사실상 본질을 흐리는 접근방식입니다. 엄격히 말해 진보는 역사적으로 다수가 될 필연성을 지닌 집단에 대한 과학적 옹호입니다. 영남이 다수 같습니까? 아닙니다. 실은 소수죠.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를 넘기 힘든 집단이 나머지 70%를 배제하고 지들이 이권과 특혜와 자원과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저는 호남의 집단이익을 옹호하지만, 호남의 집단이익이 영원히 소수 약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속성이라면 과감히 호남의 집단이익을 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추호의 거리낌이나 부끄러움 없이 단언할 수 있습니다. 호남의 본성이 소수 약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의 변방으로서 그냥 인권적 차원의 보호와 배려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을 진보의 주역으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제가 호남의 집단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나라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는 핵심 요소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하니 저도 강요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밑도끝도 없이 그냥 토론 상대를 '위험하다'고 규정해버리고 얘기 끝내는 것도 일종의 폭력입니다.
저는 소수에 대한 인권 탄압이나 정상적 생활에서의 배제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인권적 차원에서 보호해야 하지만 냉정한 과학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한 진보 운동의 주도권을 소수 약자 위주로 가져가는 것이 정말 위험하다는 지적을 했을 뿐입니다.
공희준이 '소녀 진보'라는 표현을 쓰던데, 저도 그 지적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편입니다. 진보 진영이 대중의 외면을 받고 갈수록 소수 딜레탕트들의 동호회 정도로 전락하는 것이 바로 님과 같은 진보 개념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광범위한 기층 대중의 실제 집단이익의 요구를 외면하고 그저 소수 약자 차원의 윤리적 담론을 하고 있으니 대중들에게는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위험한 것은 님과 같은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운동을 소수 약자에 대한 보호 차원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결국 강자에 대한 '구걸' 운동으로 전락합니다. 진보의 주역인 노동대중은 시혜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당당한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거죠. 이 차이를 명백히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쑥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이 쓰레드와 댓글들을 유익하게 잘 보는 중인데, 두 분의 위 댓글들을 제가 한참 열심히 있다가 갑자기 아래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ㅎㅎ
아크로 깔때기 법칙은 어디에서나 적용되는군요. (물론, 제가 만든 말입니다.) 결국은 영패척결 방법론으로...;;
사실 아크로에서 저로선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인데, 지나치게 지역주의 구도로 모든 것을 해석, 적용, 해결하려는 인상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개념논의를 벗어나서, 영패척결에서의 현실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인데, 제가 또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진보" 라는 개념이 어떤 것이든, 보다 정합적인 사고가 좋은 것 아닌가요.
저는 백수광부님이 언급하신 일관성을 정합성이라고 받아들였는데요. 즉. 언제나, 어떤 사안에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이 삼고 있는 진보" 의 대전제-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아래에서는 눈에는 눈식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말씀으로 이해했거든요.
따라서 충분히 수긍이 가더군요.
헌데, 의견 대립을 보이시는 부분이 결국 목적이냐 결과냐로 본다면 비약일까요?
백수광부님은 목적을 더 중시하시는 것 같고, 미투라아고라님과 하하하님 등은 결과를 더 중시하시는 것 같은 인상이 들더군요.
정해진 답은 어차피 없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적 보복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단순히 표출했을 뿐인데, 진보 노릇하지 말라는 것이냐는 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단순히 상대를 비꼬는 개인적 감정의 표출일 뿐이죠.
저 상황을 현 한국사회에 대입시켜서 바라봐서 풍자해서 바라보고 있다고 '좋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사형수에게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거나, 사적 보복을 일정부분 허한다고 하면 저 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단순 감정 표출일지라도 저렇게 좋은 반응은 안 나올겁니다. 대부분 반대하지 싶습니다.
자, 여기서 자기가 속한 내內집단의 문제일때는 반대하거나 부정하고, 외外집단의 문제일 때에는 찬성 혹은 최소한 동조하는 반응이 "진보" 라는 이름 하에 합리화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납득하기 어렵군요.
같은 사안에 대한 내-외집단에 따른 편향이라고 해석되는 것은 저뿐입니까?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눈에는 눈'식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내용으로 제 글을 해석하신 것은 옳은 해석입니다. 그리고 추가해서 제가 드렸던 말은... 진보의 가치관은 구조적이고 체계적이기 때문에 진보를 한다는 어떤 이가 어느 한 곳에서 정합성이 떨어지는 사고를 가지면 그의 진보관 전체를 의심해봐야한다는 이야기죠.
한편, 미투라고라님과 하하하님께 논쟁하는 과정에서는 저는 목적만을 강조하지 않았고 목적과 결과 모두를 강조했죠. 저는 진보의 가치관은 구조적이고 체계적인데 그 구조와 체계의 정점에는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보편적 윤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문화와 역사의 발전과정은 그러한 보편적 윤리를 확인하는 끝없는 과정이라는 것이고요.
제가 미투라고라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소수자 약자 보호 등 모든 인간의 존엄이라는 보편적인 가치 대신에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과학적(?)가치를 앞세워 진보에서 윤리성을 부차적로 놓는다면 결국은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공동체 내지 진영간의 생산력과 힘의 대결의 구도가 되는 것이고 이는 강자의 논리. 횡포가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진보는 자기와 무관한 분야에서만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시는 하하하님에 대해서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 가치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서 찬성, 최소한 동조내지 방관하는 반응을 진보라는 이름하에 합리화하는 것은 동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진보'라고 말하면 안되고 '진영주의'라고 해야할 겁니다.
추가로... 극형이 범죄로 멍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은 없습니다. 극형이 범죄로 멍든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피해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방어적인 자기 기만일 뿐일 겁니다. 치유는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가능합니다고 봅니다.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상황도 있겠고 없는 상황도 있겠죠. 이때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피해자 줄이는 것입니다.
1. "진보라는 것이 원래 소수자와 약자도 똑같이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여러가지 기본적 인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동의합니다. 진보의 주요 특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계급적 약자'만 중시할 뿐, 계급적 약자와 연관이 있는 '지역적 약자'에는 무관심하거나 이 문제를 외면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이나 진보정당들은 짝퉁 진보라고 봅니다. 손호철, 유시민, 진중권, 노회찬, 심상정, 이정희 등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인사들이 지역차별 문제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참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노당, 진보신당이 어떻게 대해 왔습니까. 50년 동안 진행된 영남패권에는 왜 다들 침묵하는 걸까요.
2. "황산테러에 동해보복을 명한 이란 법원에 대한 태도나, 사형제도 유지에 대한 태도, 언론 자유 내지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함께 볼 때 우리 나라 네티즌 일반인들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동해보복과 사형제도는 부끄러움 없이 찬성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반대하고 부끄러워 합니다."
솔까말 저는 제 알량한 기득권조차 쉽게 포기 못하는 짝퉁진보일 뿐이고, 인권에 대해서도 무지한 편입니다. 그걸 전제하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동해보복, 사형제도 유지"가 똑같은 범주에 속하는지 의문입니다.
전자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위한 배려이고,
후자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어느 수준까지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문을 하지 않는 것,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는 것, 변호사를 선임하여 변호받을 권리를 주는 것,
부당한 사적 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 등등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해 주면서도, 범죄에 대한 책임은 물을 수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의 책임 묻기가 사적인 보복이 아니라 공적인 처벌이라면, 저는 그 방식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똑같은 피해를, 고통을 당해봐야 왜 가해를 하면 안 되는지 깨달을 수 있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가해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런 처벌을 당하고도 더 복수심을 키우는 인간이라면, 그건 그 인간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 그런 거겠죠.
황산 테러의 경우, 솔직히 저는 가해자가 자신이 가한 테러의 1/10, 1/5만이라도 경험해보길 원합니다.
얼굴에 황산 몇 방울이라도 떨어뜨렸을 때 어떤 고통이 느껴지는지 한번 경험해보라는 겁니다.
물론, 처벌을 위한 처벌, 보복을 위한 보복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리하길 원합니다.
제가 황산테러를 당한 여인의 오라비라면 그 인간에게 수십배의 보복을 하고 싶겠지만 말입니다.
그게 인지상정이죠. 분노는 수십배의 보복을 원하기 마련입니다. 이성으로 그걸 억누를 뿐이죠.
심정적으로는, 지난 50년 동안 영남출신 정치인들과 경제인들, 관료들, 영남 지역민들이
영남지역의 이익과 영남패권을 위해 자행한 일들을 앞으로 50년 동안 똑같이 당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알 수가 없어요. 정말 무관심합니다.
자신은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겁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모르니 반성할 수도 없죠.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런 분노를 억누를 뿐입니다.
제가 사형이나 심한 형벌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잔인한 범죄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까봐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영남인을 싸잡아 비난하는 걸 반대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무고한 사람들, 양심적인 사람들까지 도매금으로 비난받는 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정희부터 이명박까지 주구장창 영패주의 세력을 찍어온 사람들, 그 때문에 크든 작든 이익을 누린 사람들,
그러는 동안 한쪽에서 벌어지던 약자에 대한 잔인한 학살과 학대, 고문, 차별, 타지역민들에 대한 차별과 홀대,
온갖 불의한 일들에 눈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세한 그 영남인들...
그들에게까지 면죄부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제가 온정적인 성향이 적지 않은 편이라 평소에는 "그냥 좀 봐주고 살자. 인간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라고 생각하지만,
요즘처럼 분노가 치밀고 홧병이 도질 때는 솔까말 영남은 따로 떼어 독립시켜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기만 합니다.
하하하님, 비유를 잘못 드셨습니다. 허수아비 세워놓고 뭐하십니까? 비유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죠.
『 밥굶기를 밥먹듯이 하면서 빈민가에서 자라온 청년A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온 끝에 범죄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청년A가 곤궁한 생활을 한 끝에 과도를 들고 강도를 하게 됐는데 피해자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허벅지를 칼로 두 차례 찌르게됐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10명과 싸운 끝에 청년A는 검거됐습니다.
지금 논의 주체는 청년A의 편을 드는 것이 옳으냐가 아닙니다.
지금 논의 주제는 첫째, 청년A의 행위에 대해서 청년A가 피해자의 허벅지를 칼로 두차례 찔렀다고 해서 피해자가 청년A의 허벅지 똑같은 곳에 똑같은 칼로 두차례 찌르도록 하는 것이 허용되느냐입니다.
둘째, 진보를 자처하면서 이명박정부와 영남패권주의를 비판하고 표현의 자유 등 인권적 가치를 부르짖는 논객들이 피해자가 청년A의 허벅지를 찌르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경찰에 저항하는 등 청년A의 반사회적행위가 심각하므로 그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2차례 찌르는 것도 부족하고 4차례를 찌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진보로서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입니다. 』
미투라고라님과 리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논점들이 추가돼 있지만 시간관계상 메인 주제 둘만 설명드렸습니다.
쓸데없이 긴 글 주고 받는 것보단 이렇게 짤막짤막하게 쓰는게 훨씬 낫군요. ^^
1. 어렵게 자라고 교육도 받지 못해서 범죄자의 길로 들어섰는지 처음부터 유전자에 사악한 성향이 있어서 그랬는지 알게 뭡니까? 법에서는 언제부터 그런 거 구분해서 판결했나요?
2. 지금 여기서 진보를 자처하면서 "황산보복이 문제되지 않으며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허수아비는 그쪽에서 세우고 있는 것 같군요. 저의 경우 저 범죄자 얼굴에 황산이 부어지면 통쾌한 느낌이 들긴 할 것 같지만 이 형벌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아주 다른 문제죠.
3. “진보라는 것이 원래 소수자와 약자도 똑같이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여러가지 기본적 인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 –
님의 개인적 가치관으로서는 존중해 드리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 같지는 않군요. 진보와 소수자 보호라는 두 가지 개념이 모순관계는 당연히 아니지만 절대로 등치는 아니란 말입니다. 진보로 인정되는 다른 가치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진보의 다른 가치에 더 신경을 쓸 수도 있죠.
2. 이명박정부를 비판하고 영패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런 동해보복에 통쾌한 만족을 느끼고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네티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지요. 제가 본문에서 링크 건 사이트에 들어가서 댓글들을 확인해보시지요. 그리고 아크로에도 그게 잔혹하지 않다고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럿있다는 거 보지 않으셨습니까?
3. 제가 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라고 할 때의 여기서의 개념을 번역하면 concept로 번역합니다. (일반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라고 할 때의 개념을 번역하면 conception입니다. 한글로는 똑 같이 개념이지만 영어로는 다릅니다. 컨셉트적 개념에서 볼 때 제 표현에 오류가 없습니다. 물론 헌법학 교수님들이 잘못을 해서 제가 오류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하하님은 이 concept와 conception을 혼동하십니다.
빈정대지 마십시오 하하하님. 가만히 보면 하하하님은 늘 그런식으로 빈정대는 글을 쓰시는데 저는 하하하님의 그런 글을 기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가상의) 상대에 대한 모욕이거든요.
특정 상대 없이 방백하며 빈정대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상관하지 않습니다만 상대와 대화하는 중에 상대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런식으로 상대방에게 빈정대시는 건 예의가 아니죠.
님의 사과를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하하하님께서 제게 무례를 사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하하님은 논점도 제대로 잡지 못하시고 제가 설명이나 반박을 하면 중구난방으로 왔다갔다하시시고, 제가 하나 하나 설명을 다 해드려야 하니 사람 참 피곤해집니다. 주장을 하시려면 다른 분들처럼 정의와 논거를 명확히 하시면서 주장을 하셔야지요. 그렇지 않고 항상 쿨하게 촌평 날리듯 반박하시면 상대는 항상 하하하님의 논거를 추측해가며 토론해야하고 설명을 해가며 토론을 해야합니다. 그건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시간과 에너지를 빼내시는 겁니다. 그것도 예의가 아닙니다.
메인 논점 하나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원칙을 부차적인 것으로 즉 다른 것에 양보가능한 가치로 다루는 것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여러가지 근거를 들어서 그것은 진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하하님은 이에 대해서 "동의한다" 아니면 "동의 못한다", "왜 그러한가"를 말씀해주십시오. 빈정대시려면 하하하님의 댓글이나 촌평은 사양합니다.
덧붙여서 "님은 일반인과 구분되는 특별하신 분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을 볼 때... 참 한 숨이 나옵니다. 아직 '개념'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정확하게 못하신듯한데... 이걸 어디까지 응해줘야하나. 설명을 또 어디까지 해야하나.
제가 말한 게 "많은 사람들이 합의에 도달한 개념을 컨셉트"라는 건 님의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의에 도달한 개념은 컨셉션일 수도 있습니다. 컨셉트도 마찬가지 컨셉트는 대중들이 사람이 동의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의에 도달한 것은 중론일 뿐입니다. 중론이냐 아니냐는 컨셉트나 컨셉션의 도출 과정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사회과학은 현상에서 이론까지 이르는 체계적 과정에서 현상과 이론을 연결시켜주는 것을 아이디어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이디어와 아이디어의 결합을 컨셉트라고 하고 이런 과정(현상과 이론의 연계체계, 아이디어의 결합)이 결여된 아이디어를 컨셉션이라고 합니다. 컨셉션은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중론일 수도 있고, 자의적인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학적 사고를 하거나 논문을 쓸 때면 컨셉션을 배제하고 컨셉트를 가지고 써야합니다.
"제가 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의 개념은 컨셉트를 말한 것입니다"라는 저의 문장 이해되십니까? 이해못하시더라도 저는 더 이상 설명 안하겠습니다. 님께서 찾아서 공부를 하시든가 마시든가 저는 여기까지!
형벌의 의미는
위하적 효과로서 범죄 억제,
피해자나 그 가족의 피해보상
죄에 대한 응보
교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 황산테러자의 눈에 황산을 붓는 판결은 단지 형벌의 선택의 문제이지 비 문명적이거나 야만적이지 않습니다
만일 저 범인에게 징벌을 내린다면 징역 20년 내지 무기징역
재산형이라면 평생 일해서 번돈을 여인이 몰수하는 형벌
뭐 이런정도 내릴수 있을텐데 이번 판결과 비교해서 전자가 더 문명적이고 인간적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감형없는 무기징역으로 하자는 것도 차라리 죽이는게 낫지 어떻게 사람을 평생 가둬줄수 있느냐 이렇게 말할 사람도 많거든요
얼굴에 똑 같이 붓지 않는걸 보니 그래도 이란 법원이 문명적인 법원이라고 봅니다
여인의 얼굴을 저리 만들어 놓고 ( 저건 살인보다 더한 고통이지요)
가만보면 진보도 가끔가다 삽질할때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솔직이 진보는 많은 경우에 배우고 살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지요
그래서 실제적인 악이나 피해자 범죄자와 범죄 결과에 둔감하다는 말이지요
낭만진보 낭만좌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도입니다
1. 흐르는강물님께서 말씀하시는 응보형에 대한 개념은 순수한 응보형주의 즉 19세기 초의 칸트적 응보형사상입니다. 시대착오적이죠. 현대에도 응보 개념이 여전히 존재합니다만. 형벌 그 자체가 목적인 칸트적 응보형주의는 퇴색됐습니다. 현대에서의 응보형주의는 형벌의 목적을 연구하는 이론이 더 이상 아닙니다. 형벌 본질에 관한 이론에서 논의되는 정도입니다.
현대에서 응보형주의의 의미는 첫째, 응보형주의는 죄를 지은만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죄를 지은것 이상의 벌을 주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응보형의 의미가 있습니다. 동해보복이나 복수의 의미는 아크로 논객 개인적 차원에서 존재할 수는 있지만 국가 제도적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요즘 시대에서 응보라고 할 때의 응보는 상응한다는 뜻이지 보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해보복은 전근대적 발상입니다.
둘째, 현대 형사정책에서는 결합주의라고 해서 응보형주의와 목적형주의의 일반예방주의 특별예방주의가 결합해서 운용됩니다. 형의 상한은 응보형주의가 담당하고 형의 하한은 일반예방주의가 담당합니다. 보안처분은 특별예방주의가 담당하고요. -일반예방주의도 위하를 목적으로하는 소극적 일반예방주의와 준법의식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 일반예방주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예방주의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범죄자를 수단으로 쓴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반한다는 비판을 받고 책임을 넘어서는 예방의 의무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책임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는데 일반예방주의의 이러한 한계, 즉 책임주의의 한계를 응보형주의가 보완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응보형주의가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현대에도 응보형주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내용은 고전적 응보형주의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2. 흐르는강물님은 황산테러자의 눈에 황산을 붓는 판결이 참혹하거나 야만적이지 않다고 하셨는데, 흐르는강물님의 생각과 느낌 인정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흐르는 강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개인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충분히 인정합니다. 정도의 차이이고 감수성의 차이입니다.
다만, 이 점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이란정부에 대해서 황산보복 판결이 참혹하고 야만적이므로 집행을 중단해야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고 그 여론이 얼마나 거센지 그 꼴통같은 이란 정부도 당황하여 형집행을 보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 황산테러자에게 황산보복을 하는것은 참혹하고 야만적이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황산보복은 참혹하고 잔인하다고 느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문화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는데 집단 감수성의 측면에서도 정의될 수 있다고 봅니다, 황산보복판결이나 사형제도에 대한 그 사회의 입장은 어떻게 보면 문화적 현상입니다. 그 사회의 집단적 감수성이, 즉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잔인하다고 느끼면 잔인한 것이 되고 폐지해야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납니다. 반대로 황산보복판결이나 사형제도가 잔인하지 않다고 (혹자는 통쾌하기까지 하다고)느끼면 잔인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것이 존재해도 무방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납니다.
동해보복이나 사형제도가 문화적 현상이라는 말을 다시 설명하자면 예전에는 머리를 자르는 참수형도 있었고 사지를 찢어죽이는 거열형도 있었고 돌로 때려죽이는 투석형도 있었습니다. 그런 형벌들이 없어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참수형이나 거열형, 투석형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었기 때문에 참수형이나 거열형이 없어진 겁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나라의 경우 참수형 거열형 투석형은 없어졌지만 교수형은 존재합니다. 이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그의 머리를 베어서 건다거나 사지를 찢어죽이는 것은 잔인하지만 목졸라 죽이는 것은 잔인하지 않다는 수준에서 우리 나라의 집단 감수성, 문화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진보와 진화의 개념으로 보면 흐르는강물님이나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감수성의 수준이 둔감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불쾌해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지난 세기 말에 전세계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한 국가가 10여개국이었는데 이제는 전 세계의 2/3의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페지했죠. 교수형조차도 잔인하다는 게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황산보복판결 과같은 동해보복도 마찬가지.
진보이야기를 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는 진보주의자 아니고 보수 우파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온건한 리버태리언입니다. 리버태리언을 개인적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보면 진보주의자와 비슷하죠. 정치경제적 영역에서보면 보수주의자와 비슷하고요. 그런데 개인적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도 진보주의자와 구별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기본적인권을 연대권적 가치에 기반해서 주장합니다만 저는 기본적 인권을 간섭의 배제, 모든 개인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주장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보주의자와 겉보기로는 같을지 몰라도 사상적으로 완전히 틀립니다.
어쨋든 진보주의자가 아니고 우파 보수주의자인 제가 보기에 진보에 대해서 사람들이 욕하는 것은 진보가 주장하는 인권의 가치가 잘못됐다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먹고사니즘을 외면했기 때문에 욕하는 것으로 봅니다만... 뭐 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저 개인적인 직감을 상당히 신뢰를 하는 편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선거결과 예측하는 거 거의 99%정도 쯤? 적중해왔습니다. 이번에도 엄기영 낙선만 예측못했을 뿐이고 엄기영도 사실 불법선거운동 안하고 잠바입고 시장바닥만 돌아다녔어도 당선됐는데 인간이 너무 멍청하다보니 떨어진 거지요.
문화적 현상이라는 말이 정확한 판단기준이라고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전세계의 여론이 거셌다고 하는데요
다른나라 사람들 중 얼마가 그것을 잔인하다고 중지하라고 생각할까요
서구의 경우 우리보다 확실히 인권이나 감수성면에서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비율이 높다고 볼수도 있지만 서구에서도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그 판결에 대하여 묵인하거나 찬성하는 사람 수도 만만치는 않을것 같은데요
다만 찬성하는 목소리는 굳이 소리를 높일필요가 없는데 비해 반대하고 야만적이라고 하는 목소리는 클수밖에 없기때문에 말입니다
또한 서구가 아닌 다른 국가들의 사람은 어떨까요?
결국 이란이나 우리나라의 문화적 판단으로는 저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황산으로 실명케 하는 것은 야만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고 이것을 전 인류로 확대해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백수광부님은 이란정부에 항의하는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의 진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 시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확대해석 하신 것입니다
문화적 현상으로 재단한다해도 엄밀하게 따지면 잔인하지 않다가 답이 될듯 십습니다
두번째로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요
형벌에 있어서 응보형 주의가 고전적 의미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교화중심으로 간다고 했을때 또는 인권을 내세워 범죄자에게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그러한 노력들이 실상 범죄의 억제나 재범에 그다지 효율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범죄라는 것이 개인 인성의 문제와 함께 사회 구조의 문제가 같이 가기 때문이지요
인권 선진국이라는 미국이 낮에도 함부로 다니지 못하는 거리가 있고 교도소마다 수용자가 넘쳐나서 감당하기 힘들고 재범율또한 후진국에 비할바가 아니지요
우리나라도 재범율이 상당히 높고 한번 교도소에 갔다온 범죄자들은 교도소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지요
즉 교도소가 단순한 격리기능이 상의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소년 교도소 다큐를 보았는데 그쪽도 마찬가지더군요
즉 교화의 노력에 비해 얻어지는 것은 극히 적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이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엄격한 율법이 지배하고 술을 금지하고 있으며 처벌또한
강한 사회인데 청소년 범죄의 증가나 흉포화 범죄율이나 재범율이 아주 낮습니다
대부분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의 선함을 믿는데서부터 출발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선악이 공존하는 존재이며 불완전하기에 어느정도의 억제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인권 절대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형사정책이나 사회진보 방향아래서는 범죄는 증가하기 마련이고 사회는 탐욕과 방종으로 흐르며 청소년 범죄는 점점 많아지고 흉포화되며 죄의식 조차도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결과적 선량한 피해자의 고통에는 둔감하며 대책이 없는 반면 가해자는 안락한 교도소에서 몇년만 살다 나오면 되는
부조리한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지요
하하하님의 사과를 요구하는 글을 쓰다가 또 새벽이 깊었고 그 때문에 정작 써야할 글들, 미투라고라님의 글 에 대한 답변과 흐르는강물님의 글에 대한 답변을 못썼습니다.
규범의 문제는 '옳고 그름', '당위'를 다루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나중에 시간나는대로 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인권선진국이라는 건 흐르는강물님의 큰 오해이십니다. 미국은 군사경제대국일 뿐이지 인권에 있어서는 선진국이 절대 아닙니다.
종교적신념으로 인권을 제한하는 이슬람원리주의 아랍국가들은 논외로 하고 순수하게 사회시스템 차원에서만 인권문제를 판단할 때 미국은 중국 북한 등과 함께 세계 최악의 인권후진국 자리를 다툽니다.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국가에 한정해서 보면 미국은 세계 최악의 인권후진국입니다.
나중에 뉴스 보실 때 국제뉴스에서 국제회의 소식 전하는 뉴스 나오면 찬찬히 잘 보십시오. 국제회의장 옆에서 인권단체들이 시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거기서 인권단체들의 비판대상이 대부분 미국입니다.
미국이 우리보다는 인권 선진국 맞는데요
물론 미국이 타국이나 여타 사회적 약자 인종에 대한 인권 차별이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인권 보장에 대한 법이나 절차 집행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되는걸로 압니다
과거 개인적으로 미국의 형사정책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요
유럽에 비하면 미흡하지만 미국을 비판할만한 인권 선진국은 흔하지 않을텐데요
인권단체의 시위는 주로 미국이 다른나라에서 저지르는 인권침해 때문인 경우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또한 오늘 올려주신 국제 형사정책기구 자료를 보면 인권 선진국인 사민주의 국가도 범죄율은 엄청 높더군요
좌우간 백수광부님께서 말씀하신 동해보복적 형벌에 대하여 다른 진보적인 사람들의 동조가 일관성 있는가에 대하여 말한다면
아주 극좌나 급진적인 진보주의자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인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면 사안별로 어느정도 견해가 엇갈리는 것은 피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산보복을 하는 판결을 지지한다고 해서 진보가 아니다라거나 일관성 없다고 보는 것은 백수광부님의 견해일뿐이지요
백수광부님이 말씀하시듯 문화적 현상이요 그 시대의 가치관이나 사람들의 의식의 척도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우리나라
에서는 명확하게 저런 형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며 여기에는 논리적으로 반진보적이다라고 말할수가 없는 사안입니다
결국 백수광부님은 사회구조가 원인이고 개인의 책임이 아닌 범죄도 많은 상황에서 가해자라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형벌을 하는 것은 반문명적이다라고 진보에 반한다고 보는 것이고
저는 피해자의 입장을 우선해서 볼때 저런 정도의 형벌은 충분히 용인될수 있고 반문명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반 진보라고 말 할 수 있는 범주의 것도 아니고요
만일 백수광부님은 저 범인에게 무기징역을 내렸으면 반문명적이니 반진보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마는
이란 같은 나라의 행형 상황에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무기징역이 더 잔인할 수도 있다니까요
또한 서구일부의 항의는 이슬람이나 이란에 대한 편견에서 나온 것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밥 / 1. 영남도 똑 같이 지역차별을 당해보면 알기는 하겠죠. 하지만 영남이 그렇게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단시간에 해소될 문제라면 굳이 '지역차별'이라는 말을 꺼낼 이유도 없겠죠. 지역차별이 해소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나아가서 영남이 차별을 당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때가 온다는 것을 느낄 때쯤 되면 영남은 뻔뻔하지만 지역차별 철폐를 주장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선대의 책임은 후대에서 제한되는 것처럼 전 세대의 책임은 후 세대에서는 어느 선에서 제한될 수 밖에 없고 책임 부담이 허용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동해보복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성이 없습니다.
1-2.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지역차별에 침묵하는 이유는 자기의 정치적 기반이 주류 기득권에 근거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지역차별이 장기간에 걸쳐서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정 시점에서 지역차별을 철폐를 주장하면 지지자들에게 생뚱맞은 느낌을 줍니다. 직업정치인은 포기하고 재야운동가로 전환해야 할 겁니다.
그런 기득권이 없는 정치인들이나 지역차별 철폐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을 뽑아줘야하는데 국민들이 그런 사람을 뽑아줍니까? 능력없다고 하면서 안뽑아줍니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정치인 지식인 말단을 바꾼다고 해서 구조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기득권을 기반으로 하고 지역차별에 묵인하는 자기의 복제인간들이 자기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요.
하하하님처럼 자기가 속한 공동체 밖의 문제에 대해서 진보적 가치에 반하는 것들에 방관하는 게 당연하다고들하면, 미투라고라님처럼 똑같이 힘의 논리로 대응하면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계속 차별받고 억압받을 수 밖에 없는, 불리한 게임이 계속됩니다.
2.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위한 배려이고, "동해보복, 사형제도 유지"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어느 수준까지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관한 얘기라고 하셨는데 비교선상에 동일한 속성, 동일 뎁쓰의 카테고리 항목을 올려놓지 않으셨습니다. 바오밥님의 비교방식을 그대로 차용해서 제가 역으로 표현해볼까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게 어느 수준까지 기득권을 해제시킬 지를 물을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고 "동해보복, 사형제도 유지문제는 (힘과 위하(威嚇)의 논리가 지배하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불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형사제도측면에서)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배려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해도 말은 됩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문제와 "동해보복, 사형제도 유지"문제는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 맞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헌법학은 기본권론의 장에서 이들을 모두 다룹니다. 모두 인간의 존엄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고 소수자와 약자의 기본권 향유의 형태에 주목하여 동화적 통합의 일환으로 다루어집니다.
ps: 바오밥님에 대한 답변은 이정도로 하고 미투라고라님에 대한 답변은 이미 새벅이 깊어지는 관계로 내일 출근을 위해서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미투라고라님의 주장 역시 바오밥님의 주장처럼 비현실적입니다.
백수광부/
1. 저는 위에서 "심정적으로는"과 "이성적으로는"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영남에 실제로 50년 동안 차별을 가하자는 말이 아니었고, 똑같이 당해봐야 피해자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분노하고 화병이 도질 때는 그런 생각까지 든다는 말이었지요. 님이 염려하실 만큼 제가 나이브하거나 과격한 사람은 아닙니다.
2. "범죄예방에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아니라"고 하셨는데, 저 역시 범죄자의 처벌보다는 범죄 예방과 범죄자의 교화가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은 범죄자의 처벌이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가 일어나는 조건들을 해소하며, 범죄자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돌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저는 텔레비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나 범죄가 보도될 때도 그 끔찍함에 몸서리치는 한편, "저 사람은 어렸을 적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것일까. 저 사람의 가정은, 부모는 얼마나 문제가 많았던 것일까. 저 아이는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 것일까"를 떠올리곤 합니다. 끔찍한 범죄자들도 아기 때는 천사들이었죠. 그런 천사들을 괴물로, 악마로 만들어버린 사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동해보복의 형벌은 잔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군요. 물론 제 안에는 잔인한 성질도 있습니다만, 제가 스스로 평가하기에 보통 사람보다 폭력성에 더 민감한 편입니다. 육식을 안 하고 몇 년 동안 채식만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잔인함을 몰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사적인 보복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처벌"을 전제하고 말했죠. 모든 나라의 형법이 동일한 것은 아니고, 이란을 포함한 무슬림 국가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해당하는 형법 체계가 있는 모양인데, 공적인 처벌이라면 그것도 나름의 일리는 있다는 걸 얘기한 겁니다. 물론, 동해보복이 사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보복이라는 악순환을 낳기 때문에 거기에는 명백히 반대합니다.
그리고 제가 동해보복도 고려할 수 있다고 보는 건, 님이 위에서 칼로 찌른 사람의 예를 든 것처럼 모든 경우에 적용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특히 연쇄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고려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본다고 해서 실제로 도입되거나 적용될 가능성은 없겠지요. 그냥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범죄자의 인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고통입니다.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미제 사건을 시리즈로 다루고 있는데,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속칭 개구리 소년 사건을 보았습니다. 정말 끔찍하더군요. 특히 개구리 소년의 경우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잔인한 살해 사건이었습니다. 어린 소년들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극한까지 몰아붙이면서 그것을 즐긴 살인범이었지요. 그런 살인법에 대해 제 솔직한 심정을 얘기한 겁니다. 악마의 마음을 가진 그 살인자에게 그 고통을 한번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겁니다. 1/5, 1/10만큼이라도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끔찍하고 의도적인 범죄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그런 방법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런 범죄자들은 사이코패스일 거고, 어떤 환경적인 조건들이 많이 작용했을 겁니다. 그래서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면 해주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괜찮을 방법일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동해보복을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고통을 줄 수도 없습니다. 개구리 소년의 경우 5명의 소년을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살인했는데, 똑같은 고통을 주기는 불가능하죠. 설령 동해보복이 가능하다 해도 제가 염려하는 사람들은 형 집행인들입니다. 그런 끔찍한 처벌을 담당하다 보면 심리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입을 수밖에 없겠죠.
"진보라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보면 제 말이 우스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과격하고 잔인하고 무지하고 야만적으로 보이겠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진 이런 글을 쓸 줄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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