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탄핵 인용 선고를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보셨나요? 제가 들은 사례들 중에는 아예 회사에서 틀어줬다는 사람도 있고, 일하던 도중에 스마트폰에 모여서 같이 봤다는 사람도 있었죠.

저는, 그때 안국역에 있었습니다. 이 글은 그 때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저께 글을 썼던대로 8:0 의견으로 탄핵이 인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 순간에 가장 가볼만한 곳이 어딜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당연히 안국역 헌법재판소 근처였지요. 오늘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헬스장 TV에서 양 진영이 시위를 하는 모습이 생중계로 나오는데, 저게 헌재 발표때는 어느 정도로 격해질지 궁금해졌습니다. 한 번 궁금해서, 땡땡이를 치고 안국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실수를 했습니다. 시위가 있는 날에 서울 중심부를 버스를 타고 가려고 한 거죠. 제가 탔던 버스는 종로나 안국역에서 아예 멀리 있는 쪽으로 이동을 하더라고요. 결국 중간에 내려서 지하철 타고 안국까지 갔습니다.

안국역에서 내려서 나갈 때의 모습. 태극기를 온 몸에 두른 나이 든 어르신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이런 복장은 저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처음 보긴 했습니다. 다만 저 사람이 "대~한민국!" 외치려고 저렇지는 않았다는 점이 차이점이겠지요.

안국역에 붙여져 있던 안내 표지. 다행이라고 해야 될까요, 두 시위는 안국역 반대편에서 벌어졌었습니다. 이게 시위 주체측이 이렇게 장소를 신고했을 것 같지는 않고, 경찰 측에서 이렇게 장소를 배정했을 것 같습니다. 저 둘을 붙여놓았다가는 11시 이전부터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이 뻔하니까요.


그리고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이때 의경들은 방호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긴장한 모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휘자의 말을 따라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들이 오늘 별 일 없었으면 하고 잠깐 빌었습니다. 

먼저 들른 곳은 탄기국 집회였습니다. 저는 헌재 선고 회견때에는 무조건 비상국민행동 쪽으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 곳을 먼저 들렀습니다. 제가 촛불시위를 좋아해서 그 쪽으로 간 것은 아니고, 탄기국 집회를 참석하려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너무 격앙되어 있어서 느낌이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극단적인 감정은 사람이 많아지면 증폭되는데, 이 시위는 그렇게 흘러갈 것 같은 분위기를 강하게 받았고, 이후 뉴스 기사를 보니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이곳은 그런 점에서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나올 때 기억나는 것은, 나이 많아보이는 경찰이 후배들에게 "절대 다치지 마라" 라고 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분들, 안 다쳤기를 바랍니다.

비상국민행동 시위 쪽으로 왔습니다. 저 노동당 로고 붙여져 있는 트럭은 예전에 촛불시위 가봤을 때도 봤던 트럭인데, 여기서 또 보네요. 제가 비상국민행동의 주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원외정당 사람들이 꽤 많이 개입됐겠죠.

위 사진에서는 사람들 대다수가 보는 방향이 오른쪽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트럭보다 더 큰 스크린과 스피커가 있었습니다.

별의별 단체들이 자기네 깃발 들고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탄기국 쪽에서도 깃발 들고 있던 것은 봤는데, 그 깃발에는 '경북 영천'이라고 쓰여있던 것이 기억나네요.

너희들은 좀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사실 이런 부류들과 섞이고 싶지 않아서 비상국민행동 쪽 시위도 그리 오래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11시, 선고가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스마트폰을 보거나, 주최측이 준비한 대형 스크린을 주목하거나, 모두 헌재의 선고에 주목했었습니다. 저는 스마트폰 데이터가 별로 없어서 대형 스크린을 보고 있었는데, 탄기국 측에서 틀어대던 노래 소리가 너무 커서 헌재 선고를 듣는 것을 방해할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좀 짜증이 났네요.


선고를 보는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는데, 박근혜에게 불리한 논지의 말을 할 때는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그러나'로 시작되는 이정미 재판관의 말이 나올때는 마치 도서관처럼 조용해졌습니다. 특히 세월호 관련 선고를 할 때는 탄식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최순실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는 지속적으로 환호성이 나왔었고,

결국 탄핵이 인용되던 순간에는 엄청난 환호성이 들리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몇몇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뭐라 해야되나,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팀의 서포터즈를 보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 진 팀도 있죠.

점심을 안국 쪽에서 먹기는 힘들 것 같아서 종로3가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1번 출구쪽으로 나와서 걸으니 이렇게 대로변에 버스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았죠.

네, 여기도 안국역만큼은 아니지만 탄핵 반대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탑골공원 근처라면 이런 시위가 분명히 있었겠죠.

이 집회의 단상은 인사동 입구 쪽에 있었는데, 진행자는 "대오를 맞춰서 헌재로 진격합시다!"라고 시위대를 지속적으로 선동했습니다.

음...... 경찰 병력을 뚫고 헌재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헌재로 간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려고 했을지 모르겠네요. 진행자의 말을 들은 시위대 노인들이 "이 나라는 법이 없으니 때려부숴야 돼!"같은 말을 하면서 안국역 방향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음식점 쳐들어가서 약탈은 안 하셨으니 다행이네요.


여기서는 손에 태극기 안 들면 혼날 것 같아서 태극기 하나 들고 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영양가 없는 방랑이었습니다. 사실 이 글의 끝으로 갈수록 글의 설명이 영양가나 성의가 없어보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맞습니다. 마지막에 봤던 모습은 사실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들이었거든요. 탑골공원에서 보이던 모습은 낮부터 술에 취해서 X발을 외쳐대는 태극기 들고 있던 할아버지나, 빨갱이에 넘어간 나라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며 술을 마시던 할아버지들이나.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의욕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어른을 존경해야 된다면, 그 사람이 저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세상을 살면서 쌓아온 경험과 연륜, 품격에 대해 존경을 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 봤던 모습은 '나는 나이 들면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였습니다. 그리고, 욕을 내뱉는 사람의 모습은 원래 모습보다 더 추해진다는 것을 새삼스럽지만 다시 깨달았네요.


종로3가역에서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태극기를 두르고 있는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위 도중에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였죠. 그 이야기를 듣고 한시간쯤 뒤에 심장마비로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죠. 그리고 또 한 명의 시위자는 스피커에 머리를 맞아서 죽었고, 그 외에도 몇 명이 오늘 시위로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는 제대로 된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늘의 원인은 박근혜 본인에게 있는데 말이죠. 적어도 제대로 된 지도자였다면 극단적인 시위에 대해서는 자제해달라는 말을 했어야 됐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위는 제 생각에 오래 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저 시위대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고, 시위를 유지할 동력이 별로 없어요. '500만 애국 시민의 분노'가 동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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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에 가서 먹은 점심은 잔치국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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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지만, 국회식당 점심식사 메뉴도 잔치국수였다네요.

안그래도 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옆자리에는 탄핵에 대해 분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런 날에 잔치국수 시켰다고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