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 저의 글 어디에서 심리학계 전체가 몰상식하다(또는 바보다)고 생각하는 것같다고 여겨지는 대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심리학의 이런 저런 것들을 저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은 이래 저래 있겠죠. 가령, 라캉이 "자아 심리학"이라고 비판하는 것 등등등... 정신분석학이 가장 근접해 있는 분야가 있다면 심리학일 텐데, 아군이 될 수 있는 분야를 왜 애써 내치겠습니까? 조카가 "분리 불안"(엄마와 "분리"되는 불안감)으로 아동 심리 상당 치료를 받았었는데, 치료사가 내린 진단과 저의 진단이 거의 일치했었죠. 즉, 프로이트의 <<금지, 증후, 불안>>(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와 라캉의 세미나 10권인 <<불안>>에서 불안이 다루어지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혹은 프로이트의 "불안"이라는 개념을 라캉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겠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점들은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또한 조카에 대한 "놀이 치료"의 방식을 보면서, 멜라니 클레인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그녀와 아나 프로이드를 둘러싼 아동 정신분석에 대한 논쟁들까지 말이죠.
진화 심리학은 한 15년 전쯤에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언뜻 초파리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이런 말씀을 드릴 처지도 못 되겠지만,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 님은 그냥 님의 길을 가시면 됩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일지, 어떤 길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가 energy physics(국어 번역어를 몰라서...), 생물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철학에서 이런 저런 개념을 빌어와 "정신분석학"을 만들었듯이, 무엇보다 그가 "신경증"과 마주치면서 기존의 신경학(neurology), 심리학과는 다른 "정신분석학"을 만들었듯이, 님도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라캉이 당대의 학문들에서 이런 저런 개념을 빌어오고, 자아 심리학, 생물학주의,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프로이트로 회귀"하는 정신분석학을 만들었듯이 님도 프로이트든, 누구든, 어떤 학문이든 비판을 하시면서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논쟁이 될 수 있는 것은 "생물학주의"가 되겠네요.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을 논하는 부분은 다분히 생물학주의적이죠. 물론 그는 생물학주의를 떠나겠지만 말입니다. 님에게 가해지는 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가 생물학적 본질주의, 생물학적 환원론이라는 의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령, 본질적으로(by nature, essentially), 생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혹은 진화론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거나 등등등 ... (님의 입장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가능한 비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진화 심리학을 모르니, 더 쓰지는 못하겠고, 이정도로만 쓰겠습니다.
minue662
--------------------> 님의 너그러운 댓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의 위안이 됩니다. 혹은 님의 학문을 접하는 방법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즉 어떤 사상에 대한 역사적인, 혹은 계보학적인 방법론에 동의하면서, 하나의 동문서답이 될 저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스피노자주의자입니다. 무신론자, 자연주의자, 유물론자로서의 스피노자 말이죠. 어느날 노자의 도덕경을 읽으면서, 놀라운 발견을 했죠. 어쩜 이렇게 둘이 유사한가 하구요. 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을 넘어, 그 장구한 시간을 넘어 둘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한다는 것은 황홀경 그 자체였습니다. "자연은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는 자연주의를 마주하는 그들이 말이죠. 즉, 만물을 낳고 낳고 또 낳는 도(道)는 스피노자의 유일 실체라 불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정치학으로 읽혀야 되는 것처럼, 노자의 <<도덕경>>도 정치학으로 읽힐 수 있을테니까요.
<<국부론>>과 관련해서 잘 모르는 분야이긴 하지만 몇 마디만 쓰겠습니다. 푸코는 고전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노동"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합니다. 즉, "노동"을 노동 시간에 의해 측정가능한 것으로 만들면서, 그 이면에 숨은 잉여 노동 가치를 숨긴다는 생각입니다. 고전경제학 이전에는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임금이란 것이, 근대의 형태로 자리잡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들구요. 푸코의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두 권의 책이 있는데, 지금은 정리할 시간이 없네요. 그리하여, 노동의 잉여가치를 드러내는 이가 맑스죠. 즉, 재화의 가치를 생산하고, 재화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잉여 노동가치라고 말하죠. 한 마디만 덧붙이면, 푸코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국가(nations)를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시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노동, 재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재화, 수요, 공급을 다루는 "고전경제학"에서의 "경제학" 혹은 "자유주의"가 어떻게 수정자본주의로, 신자유주의로, 현재의 금융위기로까지 이어지는를 볼 수 있는데 있어서, 고전경제학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반칙왕
프로이트 무용론은 심리학 개론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인데,
문학을 제외하고선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댓글은 '몰상식'이라고 할 수 없죠.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구라라는 주장은, 심지어 물리학 개론 책에서도 본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 상식이 되어버린 몰상식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네요. 심리학 개론서를 읽어본 적이 없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서로 경쟁이 되는 학문들끼리, 서로를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죠. 프로이트도 그러했고, 라캉도 그렇게 비판했으니까요.
덧글1: 저의 이전 글에 대한 댓글을 읽고선, 막상 답변을 쓰려고 하니 막막하더군요. 포기할까도 싶었지만, 쓰고 싶은 말을 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덧글2: 저의 형편상 제가 쓰는 글에 달린 댓글에 즉각적인 댓글을 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합니다.
덧글3: 등록 버튼을 눌렀는데 "분류의 값"을 정하라고 팝업창이 뜨네요. 이전 글에서도 그랬지만, "과학"이라는 분류의 값을 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루고, 철학으로 넣습니다요... ^^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문학 외에서는 쓸모없다
는 주장은 몰상식합니다. 오직 한명의 심리학자나 과학적 합리성의 기준에 대한 교양을 갖춘 한 식자의 입장에서
나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두 경제학이 주로 충돌하는 부분은 이윤을 착취로 볼 것인가 정당한 대가로 볼 것인가 여부입니다. 이 문제는 과학의 교권의 문제라기 보다는 도덕 철학의 교권의 문제입니다.
물론 과학의 교권의 문제에서도 두 경제학이 충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프로이트 심리학과 주류 심리학의 충돌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리고 주류 심리학은 프로니트 심리학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는 반면 프로이트 심리학은 주류 심리학의 완전히 무시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주류 심리학(주로 인지 심리학)이 이룬 언어학이나 시각학의 성과가 쓸모 없다고 주장하는 프로이트주의자는 사실상 없습니다.
저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문학 외에서는 쓸모 없다"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과학의 교권에서는 쓸모 없다"의 차이를 잘 압니다. 적어도 도덕 철학의 교권의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저는 단지 후자의 명제를 지지할 뿐입니다.
서로를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구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양자는 상식적인 의미에서는, 즉 다수와 극소수로 나뉠 망정 대학에 들어와있고 저널을 갖고 있고 , 따라서 사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과학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공히 과학이고 서로가 이런 의미에서 과학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정하기 때문에만 극히 드믈게라도 서로를 비판합니다. 비판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이론의 입장에서보면 상대는 과학적이지 못한데, 과학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주류 경제학이 더 주류가 되고 마르크스 경제학이 더 극소수가 될 수록 주류 경제학에서는 굳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판할 필요가 줄어들 것이고 실제로도 그러해 왔습니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무엘슨같은 주류경제학의 대가가 논문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상대하기도 했는데 말이죠.
수요/공급의 법칙을 마르크스 경제학이 무시하지 않는다구요? 마르크스 경제학에 수요/공급의 '법칙'같은 것은 없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는 양 경제학에서 전혀 다른 이론적 역할을 합니다. 이론적으로 개념화되기 전에 그 관계에 대한 '현상기술' 자체에는 같은 면이 있다해도, 그것은 지동설에서 말하는 태양과 천동설에서 말하는 태양의 지시대상이 같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만 같습니다.
이윤을 착취로 볼 것인가 정당한 대가로 볼것인가는 바로 주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경제학으로서의 핵심적 차이입니다. 양자가 전제하고 있는 도덕철학의 차이가 아니라 말입니다. 양쪽 중 어느쪽도 이윤이 경제학적으로 설명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잉여가치의 위장된 형태로 다른쪽에서는 자본가의 기여/희생의 대가로 말입니다(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즉 마르크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주류 경제학에는 이윤론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설명되어야 할것을 자명한 것인양 놓아두는 면이 있죠). 덕하님은 두쪽 중 어느쪽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동일 학문의 서로 다른 학파가 대립한다고 할 때는 양자가 동일한 대상을 두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설명을 행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이가 양자의 상이한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류 심리학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서로를 과학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할때, 저는 당연히 양자가 같은 설명대상을 두고 양립할 수 없는 이론적 접근을 행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주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상호무시/충돌이 주류 심리학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상호무시/층돌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주류 심리학 쪽 논문들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쪽 논문들, 적어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입장의 논문들이 나란히 실리는 심리학 저널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은 반면 주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이 사이좋게 같은 저널에 논문들을 게재하는 경우를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는데, 양자는 70년대 초까지만해도 했던 상대하기를 이제는 아예 하지도 않습니다. 아울러 양자 사이의 충돌은 양자가 사회과학에, 그것도 사람들의 가장 첨예한 이해관심이 걸려있는 경제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충돌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바뀌어도 아마 어느 한 심리학쪽 사람들이 숙청되어야 할 객관적 필요는 그다지 없겠지만 어느 한 경제학쪽 사람들이 숙청되어야 할 객관적 필요는 그다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덕하님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과학으로서의 지위나 자격을 의심하는 것은 덕하님의 자유입니다. 더구나 덕하님은 당연하다는듯이 '쓸모 없다' 운운하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그 의심의 근거를 비록 독창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만 행사해야 합니다. '적어도 도덕철학의 교권의 문제가 걸려있다' 따위의 군더더기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남길 것으로는 다음이 좋습니다:
[나는 주류 심리학의 입장과 동일하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주요/고유 이론들이 과학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에, 저널에, 학회에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아직 사회에 의해 심리학 자격을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는 것, 어떤 나라 심리학계에서는 다른 나라 심리학계에서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입지가 더 넓다는 것을 인정한다. 실로 나같은 이들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비과학성을 논변하는 글을 대중잡지나 신문이 아니라 심리학 저널에 싣는것 자체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과학성에 대한 논쟁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된다는 사실 자체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비과학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 저는 이윤과 관련된 논쟁에 도덕 철학의 교권의 문제와 과학의 교권의 문제가 뒤섞여 있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경제학자들 스스로도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이 문제를 교통 정리할 수 있는 글을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있긴 하지만 경제학에 대해 저보다 훨씬 더 잘아야 쓸 수 있는 글인 것 같습니다.
창조론/진화론 논쟁도 여전히 있지만 매우 유치한 수준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이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은 학술지에는 거의 실리지 않지요.
정신분석/주류심리학 논쟁도 여전히 있고 상당 부분 학술지에 실리지만 저는 이것이 상당히 유치한 수준의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주류심리학 쪽이 거의 항상 옳다고 봅니다.
진화심리학/빈서판론 논쟁 역시 학술지에서 실리고 있지만 저는 이것 역시 유치한 수준의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저는 진화심리학 쪽이 거의 항상 옳다고 봅니다.
1. 덕하님이 옳다고 보는 것이 정말 옳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덕하님이 앞으로 쓰게 될것들이 기여하기 바랍니다. 최고의 논적들을 상대하려는 노력, 상대를 단순화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최고도로 경주해서 말이죠. 단, 이윤과 관련된 논쟁을 교통정리하고 싶은 욕심은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게 좋을 것입니다.
2. 덕하님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비판이 업데이트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덧붙입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과학성을 긍정하는 문헌들
80년대 중반 이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과학성을 둘러싼 논쟁(약칭'프로이트 전쟁')의 중심인물은 독일 출신이지만 미국에 자리잡은 저명한 과학철학자인 Adolf Grünbaum입니다. 그 전에도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양반이 아래 책으로 포문을 다시 연 이후로는 논쟁의 질적 수준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아마 그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비과학성을 최초로? 부르짖었던 포퍼의 비판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논쟁이 더 심화되는게 기여했을 듯 합니다. 곁가지를 덧붙이자면, 그가 자리잡은 피츠버그 대학은 과학철학 쪽으로는 미국의 최고 명문입니다.
The Foundations of Psychoanalysis: A Philosophical Critiqu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http://en.wikipedia.org/wiki/Adolf_Gr%C3%BCnbaum#cite_note-3
처음 네 문헌들은 Grünbaum 을 직접 다루고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네 문헌들은 갖고 있고 그 중 셋은 다시 화일로도 있으니 하루 이틀 내로 지금 이글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해서 링크를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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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Lear, Open Minded: Working Out the Logic of the Soul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Arthur Fine and Mickey Forbe, "Grunbaum on Freud: Three Grounds for Dissent", Behavioral and Brain Science 9 (1986)
Jim Hopkins, "Epistemology and Depth Psychology: Critical Notes on The Foundations of Psychoanalysis", in P. Clark and C. Wright (eds.), Mind, Psychoanalysis and Science (Oxford: Blackwell, 1988)
David Sachs, "In Fairness to Freud", reprinted in J. Neu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Freu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Richard Wollheim, "Desire, Belief, and Professor Grunbaum's Freud", in The Mind and Its Depth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Henry E. Adams, Lester W. Wright, Jr., and Bethany A. Lohr, "Is Homophobia Associated with Homosexual Arousal?"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105 (1996): 440-5
Drew Westen, "The Scientific Legacy of Sigmund Freud: Toward a Psychodynamically Informed Psychological Science", Psychological Bulletin 124 (1998), 333-71.
상식이 되어버린 몰상식 이라 하셨는데요,
청마 선생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프翁에 대한 비판이 몰상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형용모순의 문학적 표현으로 타개하려는 시도자체가,
님의 답변방식은 문학을 제외하고선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그 비판이 몰상식이라는 모순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문학에서는 모순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논증안에 모순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어떤 주장도 참임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답니다(업계에서는 ex falso quodlibet 이라 합니다).
한번 볼까요?
( 논리합 : OR,∨
논리곱 : AND, ∧
부정 : NOT, ~ )
먼저, 가정 : (p ∧ ~ p)는 참이다. <- 모순입니다.
[1] p는 참이다. <-
[2] ~p는 참이다. <- 진리표 p∧ q p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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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참 참
거짓 참 거짓
거짓 거짓 참
거짓 거짓 거짓
[3] (p 또는 X) 는 참이다. <- p가 참[1]이므로,
논리합인 (p∨ X) 도 참이죠. 진리표 p∨q p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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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참 참
참 참 거짓
참 거짓 참
거짓 거짓 거짓
[4] X 는 참이다. <- 요번에는 ~p가 참[2]임을 이용해서, p는 거짓이 되고,
논리합 진리표 세째줄을 참조합니다.
따라서, (p ∧ ~ p) 가 참이면, X는 참이 됩니다..
X에 원하는 주장을 아무거나 적어 Boa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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