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재미 있는 소설이군요
박시장 부친이 보국대의 일본인들을 우호적으로 평가했다는것은 박시장 본인 인터뷰니 팩트일것이고요
나중에라도 박시장 부친이 징용이 아니라, 보국대 관리자 였던게 증명 된다해도
1.2.3.4 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어려울겁니다
혹시나 하는 의심 정도는 해볼수 있겟네요
이런 가쉽성 정보는 나꼼수 수준의 마타도어 인듯합니다
종조부의 양손으로 호적 옮겨 형제가 함께 6방 받기. 부모님 돌아간 연도도 10여년씩 헷갈리는 사람, 종조부나 조부의 경력도 왔다갔다 횡설수설, 당숙(호적상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제사도 지내지 않은 사람, 딸은 학점 3.68로 서울대 사상 예체능계에서 전무후무하게 미대에서 법대로 전과에 성공한 신비한 능력, 아들은 본인도 가족도 디스크인줄 모르다가 불과 3~4개월만에 4급 판정을 받을 정도로 디스크 중증으로 바뀌는 신기한 신체의 신비를 가졌습니다.
저는 박원순의 가장 나쁜 점은 솔직하지 못하고 자기의 과오를 변명으로 덮으려 한다는 것으로 봅니다.
병역 관련해서 종조부가 징용 가서 행불되었다고 이야기하고, 당숙의 존재도 몰랐다고 하고, 어머니의 돌아가신 연도도 왔다갔다 일관성 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냥 아버지가 한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편법과 불법으로 호적 변경을 해 육방으로 빠지게 된 것은 잘못이고 현역으로 고생하신 분들에게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사과하면 될 일을 극구 잘못하지 않았고 당시의 관행이라고 우기는 뻔뻔함에 놀랐습니다.
박원순의 아버지가 보국대에서 일했다면 징용은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보국대가 1938년 창설, 1945년 해방 때에 없어져 7년간 존재했고, 박원순의 아버지는 7년간 보국대에 일했다면 창설 멤버거나 초기부터 일했다고 볼 수 밖에 없어 1941년부터 징용이라는 강제적 수단이 동원된 것을 감안하면 자발적이지 않으면 설명이 안됩니다.
박원순의 어머님이 42세(1915년생)에 박원순(1956년 출생)을 낳았다고 하고, 박원순이 7남매 중 6번째인 것을 감안하면 손 위의 남매 중에 1946년 이전 출생자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박원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연상이라고 한다면 1915년 이전 생이 되는데 1938년이면 23살, 1945년이면 30살이 되는데 이 사이에 박원순 손위 남매의 출생이 있었을 가능성은 99%는 될 것입니다. 이는 박원순의 아버지가 보국대에 끌려 일본이나 해외로 나갔다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국내로 이동이 가능할 정도면 징용으로 갔다고 보기 힘들지요.
일본인에게 배울게 많았다고 했다는 것을 보면 더욱 더 징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종조부도 자발적 이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아버지도 자발적 보국대 참여가 높은데도 굳이 일본에게 핍박 받은 민중으로 묘사(미화)하는 것은 박원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나쁜 짓입니다.
저는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때의 행적에, 특히 일제 시대의 행적에는 관대한 편입니다. 그들에게 친일로 단죄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고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당시에 자의든, 타의든 친일적이지 않은 국내 거주인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든 체계가 일제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데 그 속에서 산 사람들은 그 시스템에서 살 수 밖에 없지요. 고급 장교, 금융조합, 은행원, 기업인, 사범생(선생), 판사 등의 고위직을 했다고 그들을 친일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세상을 열심히 살지 마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지요.
따라서 저는 정동영의 아버지가 금융조합원이었고, 신기남의 아버지도 순사였고, 안철수의 할아버지도 농협에서 근무했다고 함부로 단죄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김희선 전의원 같이 첩자질을 한 (양)조부를 독립투사로 만들어 독립운동가 집안인 양 행세한 것은 용서하면 안되지요.
문제는 친일 단죄라는 검을 정치적 목적으로 휘두르는 것 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형평성과 일관성을 결여해 내 편은 관대하게, 남의 편은 과도하게 잣대를 갖다 대거나, 친일의 과거를 일제의 강제에 의한 핍박받은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행위입니다.
박원순은 1986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를 만들어 친일을 단죄했지만 자기의 가계의 친일은 일제의 강제에 의한 핍박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의 단죄는 일관성도 지속성도 없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것인지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있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박원순의 모습이 역겹습니다.
생계형으로 공무원이 되거나 취직을 목적으로 한것은 친일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모든 사람이 만주로가서 독립운동 하라고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다만 판검사나 고등문관출신등은 친일로 봐야 합니다
판검사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기소하거나 판결해야 하는것을 전제로 하고 적극적으로 일본치하에서 일신의 영달을 위해 힘쓴 사람들이라봐야하고 고등문관 역시 일제지배의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찰도 서장급 이상은 친일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그냥 호구지책으로 공무원을 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 시키는 역할을 했으니까요
일본은 봐라 우리는 한국 사람들도 판 검사도 시키고 군수도 서장도 시킨다
그리고 그들은 시험봐서 차별없이 임용되고 자발적이다
그리고 그런 한국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출세하도록 만들어 독립의지를 꺽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과도한 친일 단죄를 정치적 목적의 수단으로 쓰는 것도 잘못이고, 이런 친일의 행위를 피박받은 양 호도하는 행위도 역겹다는 것입니다.
박원순의 종조부는 자발적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박원순의 아버지도 보국대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박원순의 종조부나 아버지의 이런 행위를 지금에 와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박원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박원순의 종조부와 아버지의 행위가 아닙니다. 박원순이 자기의 종조부나 아버지의 행위를 왜곡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호적 변경을 변명하고자 종조부가 자발적으로 사할린 이주를 한 것을 마치 징용으로 끌려간듯이 이야기하거나, 민족문제연구소를 차려 남들의 사소한 친일적 행위도 도마에 올리면서 정작 자기의 아버지의 자발적인 보국대 참여에는 입을 닫는 것은 일관성과 형평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6번째 자식을 중학교 때부터 창녕에서 서울까지 유학을 시킬 정도의, 그것도 고교 재수까지 시킬 정도의 가정 환경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양 서민 코스프레하는 것은 역겹다는 것이죠.
박원순의 종조부가 자발적 이주라는 증거는 1)사할린으로 이주한 시기가 강제 징용되던 시기(1941년 이후)보다 훨씬 앞선 때이고, 2)종조부는 사할린에서 딸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박원순이 종조부가 강제 징용으로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강제 징용 되었다는 것은 박원순의 주장일 뿐 증거는 없습니다. 자발적 이주라는 증거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것을 내어 놓고 강제 징용의 가능성을 항변해 보세요.
보국대는 1938년 창설 1945년 해방 때까지 존속했는데 박원순 아버지는 7년간 보국대에서 일했다면 창설 멤버이거나 초기부터 보국대 일을 했다는 뜻이죠. 보국대 역시 1941년 이후에나 강제성을 띄는데 1938년 초기부터 참여했다면 자발적 참여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박원순의 누나 4명 중에 1938년에서 1945년 사이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2남5녀의 가족상황이나 박원순의 어머니 나이(1915년생)로 보아 매우 높아 보이는데 이것은 강제 징용형태로 보국대에 끌려가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 보는 것이죠. 국내에서 보국대 활동을 히면서 신변이나 거주가 자유로웠다고 보아야지요. 더구나 징용으로 끌려가 보국대 일을 했다는 사람 입에서 "일본인에게 장점이 많고 배울 점이 많다"는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죠.
저는 상당한 증거나 이유를 들고 추정하고 있지만, 나꼼수는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지요. 나꼼수 팬들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설마 한명숙 사건처럼 한명숙이 한명호로부터 직접 돈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으로 한명숙의 비서는 유죄, 한명숙은 무죄라는 재판부의 판결처럼 명확하고 직접적인 증거없이 박원순의 종조부나 아버지의 자발적 참여를 추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정봉주는 나꼼수에서 이야기할 때와 재판정에서 이야기할 때가 180도 다릅니다.
정봉주는 나꼼수에서는 당당하게 이명박의 주가조작과 횡령에 대해 주장하지만, 재판정에서는 허위사실이라도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위사실유포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목을 매달고 수세적으로 방어하기만 급급했습니다. 재판에서는 그것조차도 통하지 않고 유죄 선고를 받았지요.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정봉주가 의혹의 근거라고 제시한 것도 사실과 달랐으며, 본인도 자기 주장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회의하면서 주장을 계속하였지요.
반면 저는 추론을 펼칠 때 정황 증거이지만 그렇게 믿을만한 증거로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꼼수(정봉주)와는 엄연히 다르죠.
한가지 더 에를 들어 드릴까요? 시사인의 주진우(나꼼수 멤버)가 박정희가 독일 수상을 만나지도 않고 만났다고 뻥을 쳤다고 했다가 박정희와 독일 수상이 만나는 사진이 공개되어 망신 당했죠. 그것도 수년전에 그런 보도를 했다가 사과 기사까지 낸 건인데도 주진우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했지요. 주진우가 자기가 거짓말을 해 놓고도 시정하는 말이나 사과를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문제이지요.
이것으로도 부족하면 또 더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다스로 140억이 돌아갔다는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나요?
길벗님은 님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믿을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십니다만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은 1938년에 내려졌고, 역사학계의 강제징용은 모집 명목으로 행해진 인력 동원 역시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A7%95%EC%9A%A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1011151923§ion=04
저 자신은 길벗님의 추론에 공감이 가지만 주장하기에 따라서는 님의 주장 역시 박원순 일가의 실제적인 부역행위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저 의혹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진우의 박정희-독일수상 사진도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그 사진은 독일 수상이 방한했을 때 사진이라는 주장이 있군요.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디오 올리신분 영상 촬영날짜 확인해보셨습니까? 분명 간호사 집단 파독은 1966년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만약 이 영상이 64년 것이라면 광부분들과 함께 있는 수많은 젊은 여자분들은 누구라고 설명할 건가요? 대한 간호협회 웹진을 한번 보세요.- "1965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개별적인 진출과는 달리 1966년부터는 집단으로 진출하게 됐다. 아울러 1969년 이후부터는 정부의 인력수출정책과 맞물려 ‘한독간호협정’이 체결되어 민간차원에서 정부차원으로 전환, 간호사 파독은 1976년까지 이어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담 1964년 설마 대통령부부 방독을 위해 함께 수행했다고 거짓말 하시지는 않겠지요?! 이 영상은 결코 1966년 이전의 것일 수 없습니다. 밑에 주기자님 욕하시는 분들 진짜 촬영시기가 언제인지 확인 먼저 해보시지요!!!!!>
라고 하는군요
무엇보다, 문제의 기사가 바로 이건데요,
http://www.sisapres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6136
이 기사에서 하는 얘기는 독일 대통령을 아예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광부, 간호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배석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뻥이란겁니다.
공식만찬이 따로 한번 있었다고 하구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과 기사는 이 기사에 관한 것인가요?
링크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이명박이 BBK 와 관련 있다는 주장 때문에 정봉주가 유죄 판결을 받은 줄 아시는지요? 정봉주는 이명박의 주가조작과 횡령을 주장했기 때문에 유죄를 받은 것입니다. 다스에서 BBK에 140억(190억)을 투자한 것은 이명박이 BBK와 관련이 있다는 정황이 되지만(저도 이명박과 BBK가 관련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명박이 주가조작과 횡령을 했다는 증거는 될 수가 없습니다. 김경준이라는 풋내기에게도 사기를 당하는 멍청한 판단력으로 대통령하겠느냐는 것 정도만으로 충분했을텐데 정봉주는 여기에 범죄 혐의까지 덧씌우면서 기소까지 간 것입니다.
2. 박원순 종조부와 아버지의 자발성
먼저 일제시대의 역사적 평가에 대한 우리측의 냉정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징용과 위안부 문제도 객관적 자료로 실증적 접근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일본에게 무참하게 깨진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제시대와 실제와는 차이가 많음이 요즈음에 와서 냉철히 제기되고 있지요. 서울대 이영훈 교수, 한양대 임지현 교수 등 양심적 지식인들이 역사적 사실 규명에 나서고 있습니다.
징용과 관련해서도 과거의 우리측 입장의 해석으로 보지 말고 사실의 실체적 접근으로 보면 1938년대의 이주나 보국대 활동은 자발성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박원순의 증조부와 조부는 비교적 높은 관직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판이니 1938년도에 강제 징용이라는 희생자 코스프레는 먹히지 않을 듯합니다. 박원순 아버지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호적변경으로 두 아들을 육방으로 빼내는 능력(?)으로 보아 당시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 갔을 것 같지 않군요.
3. 박정희의 뤼브케 서독 대통령 만남
님께서는 주진우가 한 말을 정확히 하지 않고 링크 기사로 호도를 합니다.
주진우는 "64년도에 박정희가 서독에 간 것은 맞지만 서독 대통령은 만나지 못했다.", "아프리카에서 쿠데타로 정권 잡은 사람을 만나주지 않는다. 아무리 이명박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는다. 독일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했다. 탄광 간 것은 맞는데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다"고 했습니다.
박지만이 주진우를 고소한 것은 "박정희는 독일 대통령을 만난 것이 사실인데 주진우가 서독 대통령이 만나주지도 않했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부분입니다. 박정희는 서독 가서 뷔르케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습니까? 당시에 나온 신문의 사진은 모두 조작인가요? 독일 공항에서 영접 나온 뷔르케와 의장대는 독일 사람이 아닌가요? 그 당시에 저렇게 조작할 기술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님이 링크한 글에도 박정희가 뷔르케를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 증거도 없습니다. 단지 뷔르케가 탄광까지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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