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과 서정주



                                                                      2017.09.19


지난 주말 벌초하러 고향에 갔었는데 통영 국제 음악당과 통영 국제 음악제가 집안 사람들 사이에 화제로 올랐다. 통영시가 음악당을 멋있게 지어 연중 수준 높은 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통영시가 이런 음악당을 짓고 음악제를 개최하게 된 것은 윤이상의 고향이 통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당 이름은 통상 작가나 음악가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과 달리 이 음악당은 윤이상 음악당이 아니라 통영 국제 음악당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그 내막을 들어보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배어 있고 치유와 화해의 노력이 필요함이 느껴진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으로 형을 살고 나왔고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찬양했던 전력이 있다.

통영시나 통영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윤이상은 통영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이긴 하나 북한체제와 김일성을 찬양한 인물이기도 해 윤이상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다. 더구나 윤이상은 통영 출신의 신숙자와 그 남편 오길남, 그리고 두 딸에 저지른 과오(오길남의 주장)도 있어 통영시민들의 심사는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윤이상은 오길남 가족(신숙자와 두 딸 포함)을 북한에 들어가게 했다. 오길남은 우여곡절 끝에 북한을 탈출하긴 했으나, 신숙자와 두 딸은 북한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오길남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북한에 들어가게 한 윤이상에 대한 원망이 컸고 이에 대한 책임을 윤이상에게 묻고 가족들의 북한 탈출을 도와주길 호소했지만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는 오히려 북한에도 2천만이 살고 있다며 오길남에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오길남의 주장이고 윤이상과 이수자, 그리고 윤이상의 딸은 윤이상은 오길남에게 북한 입북을 권유한 적도 없으며, 신숙자와 두 딸의 탈출을 도와 주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양측이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윤이상이 자주 방북을 했고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찬양한 것은 명백한 사실임을 볼 때 상호간 해석의 차이는 있겠으나 오길남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아래는 윤이상과 이숙자가 한 발언들이다. 이런 발언들을 고려한다면 어느 쪽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을지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북쪽이야말로 자주권과 민족의 영도자가 있다.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겨서야 민족의 따뜻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 (1992.11월 평양, 윤이상 연설 중)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 같이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영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일 파리, 윤이상·이수자 부부)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연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 (1995.7.8일 이수자)


문재인은 17일 '윤이상 탄생 100돌'을 맞아 추모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오늘은 윤이상 탄생 100돌이 되는 날입니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 남쪽의 작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경남 통영)에서 출발한 윤이상의 음악은 독일 베를린에 이르러 현대음악의 가장 중요한 성취가 됐다”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 속에 악보 위의 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지만 한반도를 가른 분단의 선만큼은 끝내 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윤이상이 사랑했던 이 땅, 이 바다, 이 하늘의 소리를 그의 음악에서 발견하고 즐길 날을 기대해 본다"고도 했다.

김정숙은 문재인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통영의 동백나무를 수송해 가서 윤이상의 묘지에 심었다. (윤이상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말 하는 것이다. 동백림은 동베를린을 우리 말로 일컬어 붙인 이름으로 동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일국의 대통령과 부인이 북한 체제를 옹호하고 김일성을 떠받든 인물에게 공식적으로 찬양 일색의 추모의 글을 올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통영의 동백나무를 독일까지 공수해 그의 묘지에 심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윤이상의 음악과 정치적 이력을 구분해서 윤이상의 북한체제 옹호는 비판하면서 그의 음악성을 평가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칭송하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자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윤이상이 단순히 유신체제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으로 고초를 당했다면 모를까 북한 체제와 김일성을 찬양하고 오길남의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줬는데 말이다.


윤이상과 대비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시인 서정주다.

서정주는 친일의 이력 때문에 그의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문학 분야에서 서정주는 독보적 인물이며, 특히 서정시 부문에서는 그의 시는 세계적 수준이라 생각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한국에서 나온다면 제1의 후보는 단연 서정주라 본다. 물론 이는 서정주의 문학적 업적만을 평가한 것이고, 그이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별개로 한다면 말이다.

필자는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읽고 그가 왜 친일적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기도 한다.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은 종의 자식임을 밝히고 있다.(실제는 아버지가 마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고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신분의 억압을 벗어나고 싶다는 서정주의 강렬한 욕구도 읽힌다. 이 자화상을 쓴 시기가 20대 초반이었으니 그가 당시에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환경에 대해 어떤 심정이었는지 필자의 20대를 생각하면 짐작이 간다. 半노예제 사회였던 조선(전제군주국이었던 대한제국도 마찬가지)보다 신분제를 타파한 근대 국가를 선호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들이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일진회의 중추가 되었듯이 말이다.

물론 서정주가 1940년대 ‘송정 송가‘, ’헌시‘ 등을 쓰며 학도병 참여를 독려하고 가미가제 특공대를 칭송한 것이나 1980년대 전두환을 칭송하는 시를 쓴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필자는 서정주의 친일에 대한 비판은 그것대로 하되, 그의 문학적 업적은 별도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전북 고창에는 미당 서정주 문학관이 있다. 이 문학관에는 서정주의 육필 원고도 전시되어 있지만, 서정주의 친일 행각도 함께 알리고 있다고 한다. 서정주의 문학적 업적만을 강조해 그의 친일 행위를 희석하거나 면죄부를 주어서도 안 되겠지만, 친일 행위만이 한 인간의 인생이나 업적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처럼 재단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통영의 국제 음악당도 언제가 윤이상 음악당으로 개칭되기를 필자는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에 의해 인생을 망친 이해당사자(오길남과 그 가족들)가 현존해 있고, 윤이상이나 이수자가 자신의 친북(종북)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의 이름을 붙인 음악당이 고향에 서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풋살구가 꼭 하나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동백림 사건>

1950년대 후반 유럽 거주 한국인들은 대부분 1950년대에 한국을 떠난 지식인들로서 한국을 떠나올 당시 고국의 부정부패 및 정쟁경화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던 중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외환송금 제한 조치[2]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렸었다. 또한 당시 · 서베를린은 상당 수준 자유왕래가 이루어졌고 서독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식료품 및 서적 구입 등의 이유로 공산권 지역인 동베를린을 출입하였다. 이에 반해 북한은 1957년부터 동 · 서통행이 용이한 동베를린을 물색, 거점화 하였는데 초기에는 북한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화보, 평화통일 방안 선언문, 최고회의 연설문 들의 선전물을 운송 곧이어 동독대사관에 대남 활동 실무자를 파견하여 한국인들을 직접 접촉, 평화통일 방안을 선전하고 북한방문을 권유 및 주선하였다.[3]

이 같은 상황에서 동베를린 북한공작원과 한국인의 직접 접촉이 여러 경로를 통해 급속 확산되었고 다수의 한국 유학생 및 장기 체류자들이 한국음식 접대 등 북측의 관심 및 환대에 대한 기대, 재북가족 소식 탐문, 북측 평화통일 방안에 대한 관심등으로 인해 동베를린을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방북 · 노동당 입당 · 특수교육 이수 내지 북측 요청사항을 이행하였다. 1966년 서독파견간호원 제1진으로 건너갔던 정완순의 유고 국적 남자와 결혼문제[4]가 사회문제화 된 것을 계기로 한국인의 공산권 출입현황에 대한 점검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67년 4월 14일 서독 주재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이 체코 프라하 개최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취재차 체코 입국 이후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중정은 1967년 4월 24일 한국여자농구선수단 이재학 감독을 통하여 최초로 이기양 기자 실종사실을 확인하고 행방을 추적하는 한편, 이 기자가 외국환관리법 위반 협의로 프라하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한편 서독 유학 후 국내 대학교수로 활동 중이던 임석진은 이 기자의 실종사건이 국내신문에 보도되자 북한이 이 기자를 납치한 것으로 확신, 자신에게도 납치 등 위해가 가해 질 것을 염려하고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 노출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어 자수하기로 결심하였으며 독일 유학시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홍세표에게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한 뒤 정부 주요인사화의 접촉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홍세표는 박정희에게 관련사실을 제보한 뒤 임석진과 면담을 약속받았으며, 5월 17일 임석진에세 "누구를 만나기로 했다"고만 언급하고 임교수를 청와대로 안내하였다. 임석진은 1967년 5월 17일 오후 3시부터 2시간동안 홍세표의 배석하에 대통령을 면담하고 유럽 유학생들의 대북 접촉상황을 직접 진술하였다. 대통령은 임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신변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 중정 수사에 협조해라"고 언급하고 진술내용을 서면 제출토록 요구 하여 임석진은 5월 22일 원고지 200매 분량의 글을 작성하여 홍세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박대통령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임교수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중정은 임석진을 조사하여 일명 「V-318」 수사를 시작하고, 중정은 임석진에 대한 조사를 통해 대공 혐의자 40여명의 명단 및 대북 접촉 내용을 파악,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중정은 임석진 및 임의 제보인물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해외거점에서 역공작하는 방안과 수사관들을 해외에 파견, 일망타진하는 방안을 병행 검토하다가 6월 초에 이르러 국내외 관련자 40여명을 대상으로 한 수사 계획( 「V-318」 공작)을 수립하고, 6월 7일 해외 혐의자 23명을 체포, 국내 연행하기 위한 「GK-6717공작계획」 일명 「GK-공작」을 수립하였다. 이후 6월 5일 부터 국내 거주 사건 관계자를 연행하기 시작한데 이어 6월 20일 이후 독일 등지의 해외 혐의자에 대한 소환을 시작하였다. 6월 19일부터 중정뿐만 아니라 검찰 · 경찰 · 군 방첩대까지 참여하는 합동수사본부가 발족,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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