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나 일본어에는 지시사/지소사가 인도유럽어에 비하여 풍부하다.

한국어로는 요것(최근접물), 이것(근접물), 저것(원격물), 그것(부재물)의 구별이 가능하나, 영어로는 this와 that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장소 또한 한국어로는 요기(최근접지), 여기(근접지), 저기(원격지), 거기(부재지)의 구별이 가능하나, 영어로는 here와 there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 라틴어도 영어와 마찬가지이다. 헬라어는 막장이어서; 요, 이, 저, 그가 전부 auto 한 단어이다.)

정은이는 한국인일 터이므로; 그에게 이곳이란 평양일 테고, 저곳이란 이니가 지키고 있는 판문점일 테고, 그곳이란 나머지 모든 곳이리라.

반면 트럼프는 미국인이므로; 그에게 이곳이란 와싱톤일 테고, 그곳이란 나머지 모든 곳이리라. 

그런즉, 트럼프로서는 싱가포르이든 판문점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고, 보다 더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어서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기만 하면 좋을 터였다.

그러나 트럼프 밑에 있는 부하들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1. 재인이 치하의 판문점은 현동맹국겸 잠재적 적성국 영토이며 영어 화자에게 생소하다.
2. 미 동부 표준시와는 큰 시차가 있으나, 평양과는 시차가 없다.
즉, 공간으로든 시간으로든 불리하다.

반면,
1. 싱가포르는 북경 표준시를 사용하니, 평양과는 1 시간 차이이다.
2. 싱가포르 도로 표지판은 영어로 표기되어 있으며, 플로리다 대도시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즉, 공간과 시간을 맞교환함이므로 공평하다.

트럼프가 굳이 시공간의 열세를 감수하면서까지 판문점에서의 미북 회담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회담 의제 및 합의할 내용에 대하여 이미 조율이 완료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어려운 길로 가고 있다는 한 증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