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후배 OO에게


                                                                2018.05.16


* 이 글은 80년대 학생운동을 함께 한 후배가 카톡으로 보내온 글에 대한 저의 답글입니다.


후배가 저에게 보내온 카톡 내용


OO이 형, 이제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은 그만 쓰쇼~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군요.

선배에게 막말한다고 OO이를 뭐라 했었는데 이젠 OO이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군사독재시절 입 막고 살더니 지금은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는 군요.

참으로 비겁해 보이니 이제 좀 그만 떠들고 조용히 삽시다.


제가 보낸 답글


내 글이 너한테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고, 니 생각을 변화시키거나 심화시키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이 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글은 보내지 않으마.


지난 주 내게 보내온 메시지에 약간의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내가 접한 386(지금은 586) 운동권 세대들의 반응이 대부분 그러하기도 했고, OO이나 OO 형, OO 형, OO 형 등 OOO 선후배들로부터도 이미 너와 유사한, 아니 너보다 더한 반발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OOO 선후배들로부터 느끼고, 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80년대 몇 년간에 접한 편협한 지식으로 쌓은 세계관에 사로잡혀 화석화 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만이 정의이고 선이라는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또 있다. 내 글을, 내 말을, 내 생각을 반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하고 수용하겠지만, 제발 그 비판과 반박은 근거를 갖고 구체적으로,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OO 형, OO 형, OO 형, OOdm로부터 이때까지 제대로 된 비판이나 반박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이게 제일 아쉽다. 설혹 내 주장이 깨져나갈지라도 제대로 된 반박이나 비판을 받으면 기쁘고 즐거울 것 같다.

나의 이 말에 니가 어떻게 답변할 지는 대충 예상은 한다.

“쓰레기 같은 글과 주장에 무슨 비판이나 반박이 필요하냐?”

내가 인터넷에서 논쟁을 하면서 항상 듣는 이야기다. 소위 깨어 있다는 사람들, 자신들이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정의와 인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내게 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내 글의 주제나 내용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원래 선동하기를 좋아하고 사탕발림을 잘 하는 사람들은 수치 등의 디테일을 말하지 않고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논쟁에서 불리해지면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며 논지를 흐리거나 논점을 회피하려 한다. 구체적인 내용도 없으면서 추상적인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에 숲이 있다고 우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논점을 희석시키는 사람도 비열해 보여 상종하기 싫다. 나는 인터넷에서 논쟁하면서 자칭 진보라는 자들이 이런 태도를 심하게 보이는 것에 실망했고, 솔직히 OOO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좀 생각이 과격한 OOO 사람들(물론 내 생각을 이해하는 선후배들도 있더라)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지. 하지만 나는 내 양심을 저버리며 너희들의 독선과 비논리를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고 대화나 토론으로 서로를 이해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대화는 단 서너 번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고 너희들의 일방적인 욕이나 위력 과시로 더 이상 진행되기 힘들었다.

아마 내가 자칭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도 이런 인터넷상의 경험들과 너희들과 대화들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진보연 하는 인간들의 패악질에 나도 모르게 반발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너나 OO이가 내 글을 쓰레기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내 글을 받아보는 사람들 대부분의 반응은 너희들과 다르더라. 글을 보내지 않으면 왜 보내지 않느냐고 재촉하거나 걱정해 주는 사람들도 많다. 새로운 시각에 눈 뜨게 해 주고 몰랐던 정보를 제공해 줘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받는 편이다. 이 중에는 예전 열렬한 노사모였던 사람도 있고, 너나 나와 같은 80년대 운동권 출신들도 있다.

내 글을 싣고 싶다는 인터넷 언론이 있어 필진으로 참여해 너에게 보낸 글들을 그 곳에 계속 게재하고 있다. 함께 참여하는 필진에는 주대환, 주동식, 김대호, 이병태(KAIST 교수), 박정자 등 쟁쟁한 사람들도 많다.(주대환과 김대호는 너도 잘 알리라 생각한다. 주동식은 호남분으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지역평등연대를 만들어 열심히 활동하는 분이지.)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더군. 너에게 보낸 주동식님의 글도 이 곳(‘제3의길’)에 실렸던 것이다. 너나 OO이는 내 글이 쓰레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너희들과 다른 시각으로 내 글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도 참조해 주면 좋겠다.


아마 내가 자칭 진보진영에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있은 2002년부터로 기억된다. 나는 당시 진중권의 주장과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고 미군 장갑차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주사파 그룹(진보진영)의 형태를 비판했고, 지하철 안에서 장갑차에 짓이겨진 두 여중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다니며 선동하는 인간들에 학을 뗐다. 인권과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저런 짓도 마다하지 않는 것에 놀랐다. 의정부 미군 장갑차 사건(일명 미선이 효순이 사건)의 전말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아마 너도 그럴 거라 본다)은 미군이 두 여중생을 일부러 뭉개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SOFA 내용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미국에만 유리한 협정인 줄 알고 사고를 낸 미군 병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미국 법정을 비난했다.

그런데 누구의 요구도 없었는데도 주한미군이 사고 직후 바로 촛불을 들고 제일 먼저 추모집회를 하고, 현장에 추모비를 세우고, 주한미군들이 두 여중생 유족들에게 성금을 기탁한 것, 사고를 낸 미군 장병들이 사고 책임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어떤 나라도 해외 파병 군인들에 대해서는 자국이 수사권과 사법권을 갖는다는 사실(우리나라도 이라크, 동티모르 등 해외 파병시에 똑같은 조건으로 해당국과 협정을 맺었다. 이라크에서 장난치다 오발사고로 이라크 민간인을 사망케 한 우리 군인도 우리나라에서 재판을 받았고,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 국민들은 잘 모른다. 너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의정부 장갑차 사건은 훈련중 발생한 교통사고에 의한 과실치사일 뿐이다. 그 어디에도 미군 병사가 고의로 사고를 낸 증거나 정황이 없다. 고의로 사고를 낼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 이후 주한미군이 대처한 것은 나름대로 훌륭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솔직히 우리 한국군이 이런 유사한 사고를 냈을 때 주한미군처럼만 하면 비판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촛불의 원조도 사실은 주한미군인데 촛불이 지금 같이 진보의 전유물이 된 것을 보면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고가 발생한 시점(2002년 6월)에는 월드컵에 빠져 우리 국민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주한 미군만이 촛불 추모하고 성금 기탁하고 추모비를 세웠는데, 11월, 12월 대선 국면에 들어서자 이 사건을 자칭 진보진영이 핫이슈로 부각시켰다. 2002년 대선에 정치적으로 활용할 목적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나는 솔직히 이런 진보진영의 행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데다 자극적인 사진과 문구로 선동하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당시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사람은 진중권이 거의 유일할 정도로 진보진영에서 이런 형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비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사건을 겪고 난 뒤에 자칭 진보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갖기 시작했고, 광우병 사태, 천안함 사건을 거치면서 진보진영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했다.

나도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고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당시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고 이유도 달랐다. 내가 시위에 참여하여 본 당시 진보진영의 주장은 반과학적이어서 그 뒤로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때도 진보진영의 주장에 실망했다.

아마 내가 진보진영에 가장 실망했고 또 진보진영을 격렬하게 비판하게 된 것은 천안함 사건일 것이다. 나는 천안함 사고에 대해 많은 의혹을 제기하면서 당시 정부를 비판했다. 그와 관련해 쓴 글만도 책 한 권 분량 이상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반부에는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해 진실 규명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음모론을 제기하는 자들과 싸우게 되었고, 수단과 방법의 합목적성을 무시하는 진보진영과 결별하기로 그 때 결심했던 것 같다. 신상철(당시 야당 추천으로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자, 정지영이 만든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출연)의 이스라엘 잠수함 추돌설, 멍게유생설 등 반과학적, 음모론적 주장에 맞서 싸우느라 ‘서프라이즈’에서 날밤을 샌 기억이 난다.

내가 더욱 실망했던 것은 내가 쓴 글이나 댓글에는 단 한마디 욕설도 인신공격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서프라이즈 관리자와 신상철이 내 글을 삭제하거나 내가 글을 쓸 수 없도록 아이피를 차단한 것이었다. 민주와 소통을 입에 달고 사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증거들을 제시하면 글을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무지막지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이 이후 내 글쓰기의 주제는 자칭 진보진영의 이중성과 위선에 집중된 것 같다.


김어준, 주진우, 정봉주, 김용민의 나꼼수, 이동형, 이상호 등 자칭 진보라는 인간들의 거짓말과 음모론은 여전히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8대 대선에서 부정개표가 있었다며 영화 ‘더 플랜’을 만들어 국민들을 오도한 김어준은 문재인이 당선된 19대 대선에서도 18대와 똑같은 결과가 나와 자신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나도 단 한 마디 정정이나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영화 ‘그날, 바다’를 만들어 세월호 사고가 외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놓고 세월호를 직립시켜 본 결과 아무런 외력이 작용한 흔적이 없어도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다. 정봉주의 입장과 알리바이를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공중파 방송에서 옹호하고도 피해자에게 사과하거나 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나꼼수와 같은 인간들이 우리 사회에 가장 암적 존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자들이 소위 깨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일반 국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것을 그냥 넘기는 것이 정의일까? 이들의 무한폭주를 막는 사람이 없다면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나섰다. 이게 너한테 비난 받을 일인가?


내가 이렇게 자칭 진보진영을 비판하게 된 히스토리를 설명하는 것이 내 글에 대한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나는 진보진영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는 것을 절감한다.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고 오해를 풀 수 있게 내 생각은 좀 더 구체적으로 따로 더 쓸까 하다가 예전에 친구에게 쓴 글이 있어 그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아래에 그 글을 복사해 올리마.


조만간 상호 오해를 풀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좋겠고, 나는 그런 시간을 언제든지 환영한다. 그런 기회가 없다면 시간이 흘러 이런 일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 쯤 만날 수 있겠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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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일까?

                                                         2013.01.11


* 이 글은 제가 예전에 썼던 <제가 박근혜를 지지한 이유, 그리고 진보에게>라는 글을 본 친구로부터 반론 성격의 답변이 문자 메시지로 와, 오해하는 부분을 해명하고 또 이에 대해 재반론하고자 쓴 글입니다.


어제 저녁 문자를 받고 개인적인 일로 바로 답신하지 못해 미안했다. 문자를 확인하고 문자 메시지로 답을 하기에는 부적절할 것 같아 이렇게 메일로 답을 보내게 된다.

먼저 오해는 풀어야 할 것 같아 사실관계를 바로 잡고자 한다. 네가 나를 <강남좌파> 정도로 네이밍하는데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네 시각으로 내가 그렇게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조국, 박원순 같이 강남좌파라 불리는 인간들을 경멸하는 편이거든. 내가 경멸하는 그룹에 내가 속해 있다면 어쨌든 자기모순이 되니까 니가 내게 붙여준 “강남좌파”에 내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

또 <강남좌파>는 현재의 진보진영과 스탠스를 같이 하고 야권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현재의 진보진영을 비판하고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았으니 나를 <강남좌파>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아야겠지?

<강남좌파>라는 게 개념 정의하기가 애매한 구석이 좀 있긴 하지만, 10여년 전에 <보브스>라고 한 것과 유사한 개념으로 나는 이해한다. <보헤미안 부르조아>의 줄임말로 기억하는데, 60년대의 히피와는 달리 고소득의 안정적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사회비판적 의식을 갖고 좌파적 성향을 띠는 부류의 사람들을 일컬었었지. 좋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고, <강남좌파>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때는 경제적으로 현 체제에서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의식과 사고의 영역에서도 진보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한마디로 존재와 의식이 따로 놀고, 자기 만족과 세상의 존경을 받기 위한 것이면서도 마치 이타적 존재로 비치고 싶어 하는 허위의식으로 찌든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개념 짓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개념에서 너도 나를 <강남좌파>라 부르는 것 같고. 그런데 나는 이런 <강남좌파>를 경멸하고 있고, 개념적으로도 이 범주에 들지도 않을 뿐아니라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나는 <강남좌파>일 수가 없지. 내가 사는 동네는 강남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변방이라는 강북의 상계동이거든.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원론적인 말에 나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현재의 내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계층(계급)에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소득면에서는 나이 먹은 값을 인정해주는 급여체계와 별 실권도 없는 월급쟁이 임원이라는 이유로 상위 10%에 속하고, 자산면으로도 상위 50%는 속하니 서민이라고 불리기는 힘들겠지. 거기다 니가 말한 대로 애들도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장래에 안정적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 같으니 기득권층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 경제적 위치가 내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지 않겠느냐는 너의 분석에 정면으로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인간의 의식은 존재에 영향을 받는다는 일반론에서 나도 예외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의식의 변화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테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그 변화가 긍정적인지, 바람직한지, 방향이 옳은지, 진정성이 있는지, 초심을 잃지 않았는지,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면서 진화했는지가 아닐까 한다.

너와 같이 주변에서 나의 변화에 부정적 시선으로 비판을 해 올 때, 나는 나의 변화에 대해 위에 열거한 기준으로 내 변화를 살펴보곤 했다. 어쨌든 이건 내 주장일 뿐, 너나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한 가지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은 내가 소득 상위 10%, 자산 상위 50%가 되기 훨씬 전인 10년 전에도 근본적인 내 의식수준은 지금과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도, 아니 내가 학생운동을 했던 20대에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으니 일관성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변절했다는 비난은 적절치 않다고 나는 항변하고 싶은 거지.


니가 내가 변했다고 하는 의심 속에는 내가 현재의 진보민주진영을 줄기차게 비판한다는 것에 있을지 모른다.

나는 20대 학생운동(80년대 초중반)을 할 때도 주사파들의 논리를 수용할 수 없었고, 전대협 내부의 비민주성과 지도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런 모습들은 여느 혁명사에서 종종 나타났듯이, 혁명의 급박성을 이유로 묵살된 내부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비판이 결국 집권 후에 파쇼화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는 인식이 당시의 내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면서 스탈린의 폭압 정치체제가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벌써 그 맹아를 잉태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이런 모습들이 당시의 (학생)운동권에도 나타났기 때문에 우려를 많이 했다. 북한의 김일성 유일체제도 이 범주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고, 우리의 유신시대도 구조적으로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박정희를 그나마 평가해 주는 것은 그의 진정성이고, 개발독재의 방향을 우리 현실에 맞게 잡아가면서 가난에서 탈피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김일성은 결과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모두 실패한 지도자이지. 이것이 내가 박정희를 김일성보다 10배 이상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민주진보진영은 내가 우려했던 대로 비민주성과 독선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87년 체제 이후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그것을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사고에 젖은 이들이 진보진영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에게서도 고스란히 그 폐단이 드러나고 있고. 그래서 나는 진보진영이 외연을 넓히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이런 문화를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왕따를 각오하고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네가 가장 의심한다고 여겨지는 계급적 이해에 있어 나의 변화를 이야기해 보자.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민중(대중)들의 삶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20대와 같이 여전하냐이고, 그 방법론을 선택하는데 있어 이들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는지가 될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열정과 강도에 있어 나이가 들면서 약해졌다고 인정한다. 물론 여러 변명과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하고 싶지는 않구나.

문제는 후자의 것으로, 내 의식 속에 대중들의 이익을 여전히 우선하고 있는지, 정책과 정당(후보)를 선택하는데 있어 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이게 니가 진짜로 나를 변절했다고 보는 부분이고. 이에 대해 나는 여전히 그러하다고 답하고 싶다. 다만 관점과 시각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나는 누차 <대중의 삶의 질을 단 1보라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진보다. 진보는 비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현해 낼 능력과 의지로 평가되어야 한다.>라는 進步觀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내 진보관이 문제라면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내가 선택하고 실행했던 행위들이 이 기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자칭 진보민주진영의 형태를 볼까?

이들이 궁극적으로 대중들의 삶에 관심이 있다고 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단지 대중들의 삶이 그들의 집권의 수단이고, 대중은 그들이 자기 존재 이유로 삼으려는 객체일 뿐이라는 생각이지. 지금 민주진보진영의 대다수는 <대중들의 삶의 실질적 향상이 궁극적 목적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들이 이에 맞는 비젼과 정책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 집권하는 것이 수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 독선에 빠져 궁극적 목적과 대의는 자기가 독점하고 자기들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기 편을 선택하는 것이 정의이고 선이라고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형국이지. 그러니 자기와 맞은 편의 상대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며 적이라고 생각하고 상대가 당선되면 집단 멘붕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고 “국개론”으로 상대를 비하하면서 우월의식으로 위안을 삼고 있지.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칭 진보민주진영의 인사나 단체들은 자기들의 존재 이유를 위해 대중들은 정권으로부터 더 핍박받아야 하고 삶의 질은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 공지영이 나찌 운운하면서 박근혜 집권을 유신의 부활이라 하고, 야권 지지자들이 박근혜에게 저주를 퍼붓고 惡政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궁극적이고 실질적으로 내 이웃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존재 이유가 없어질까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20대 밖에 안되는 유아인이 진정한 진보라고 칭찬했지. 물론 유아인은 공지영 등의 자칭 진보세력들로부터 다구리를 당했지만.


나는 지금 상태의 진보진영이 이대로 집권한다면 87년 이전, 아니 70년대의 유신의 재판이 될 것이라 보았다. 아니 박정희 정권보다 실질적으로 더 후퇴를 할 것이라 본다. 해괴망측한 예상이고 악담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이렇게 본 이유는 지금의 진보진영의 모럴과 마인드 때문이다. 자기 진영의 부패와 불합리에는 관대하고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져 상대와 다름에 대한 인정이 없으며, 실질적 대중의 삶의 향상에 대한 의지과 실현할 능력도 없으면서 그것을 포퓰리즘적 정책을 들이밀어 대중을 현혹하여 기만하고 있다고 보지.

박정희는 정치적으론 문제점이 있었지만 경제적 성과(대중들의 경제여건의 향상)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 진보진영의 집권은 정치, 경제적으로 모두 퇴행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 이들은 70년대에 국내 산업의 보호 육성이 필요해 조금은 불량해도 국산품을 애용하자고 하던 시절처럼 불량한 정치 상품과 정치인을 내세우고 대중들에게 자기를 선택하는 것이 애국이고 다른 상품들을 선택하는 것은 악이며 매국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87년 이전의 <민주와 반민주>의 프레임을 여전히 들이밀고, 주체적 역량과 현실적 대안 제시로 선택받기보다 상대방을 巨惡으로 딱지 붙이고 그 반사이익 얻기에 매몰되어 국산품 애용이 애국이며 외산 구매는 매국으로 치부되던 70년대 산업화시대의 프레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시대, 글로벌화된 경제, 다극화된 국제환경에서 70년대의 패러다임에서 헤매는 사람(세력)이 누구일까? 과연 누가 과거로 퇴행하고 있으며 구태를 보이고 있는가?


나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논쟁 이전에 양 진영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체계와 사고가 지배하는 건전한 (토론)문화 건설, 그리고 이런 세력들이 양 진영의 주류가 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 양 진영이 생산적인 쟁투로 대중의 선택을 받게 해야 한다고 본다. 양 진영이 감성과 진영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한, 소통과 타협은 있을 수 없고 생산적 결과물을 도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최근까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양 진영의 모습은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한 건전한 세력이 지배했다기 보다 소위 “꼴통”이랄 수 있는 독선, 상대 불인정, 비이성, 비합리, 진영주의에 쩔어 있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내가 박근혜를 지지한 이유는 “오늘의 (상대적) 진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전 보수 쪽에 완전치는 않지만 한 발짝 다가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더 큰 이유이다. 나는 지금의 자칭 진보민주진영도 좌파적 정책을 무조건 내세워 선명성을 경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민주성을 강화하고, 독선을 버리고 합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내부 논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 한 발짝 건전한 진보세력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시스템과 정책은 대중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없는 공염불이고, 결코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가 관통하지 않는 감성은 자칫 선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고,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의 삶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내 글쓰기에서도 원칙으로 삼고 있다. 2008년에 모 사이트에 내가 올렸던 <글쓰기 원칙에 관한 제언 - 좌우를 떠나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라는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우를 떠나 생산적 토론을 위해

                                                2008.09.09

이 제목으로 글을 쓰는 게 주제 넘는 일이라 생각되지만, 이 사이트의 합리적, 생산적 토론을 위해서 좌/우와 진보/보수를 떠나 모든 논객들에게 본글과 댓글을 올리는 것에 관련하여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1. 글쓴이의 본문이나 댓글을 최소한 일독한 후, 비판이나 옹호의 댓글을 답시다.

2. Fact에 충실합시다.

3. 균형감각과 일관성을 가집시다.

4. 진영논리에 빠지지 맙시다.

5. 비판에 있어 논거는 정확히 제시합시다.

6. 학력이나 권위 등을 내세워 우월적 지위에서 논쟁하려 하지 맙시다.

7. 상대방의 사상적 포지션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매도하려 하지 맙시다.

8. 상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합시다.

9. 비난이 아닌 비판을, 비판 후에는 가능한 대안을, 합리적 비판에는 겸허한 수용을 할 수 있도록 합시다.

10. 본인의 글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가를 되돌아 봅시다.

이상은 제가 인터넷에 글쓰기를 하면서 제 나름으로 정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이 원칙을 벗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쓰기 전이든, 글 쓴 후이든 이 원칙을 한번쯤 생각해 봅니다. 제 글들을 찬찬히 돌아보면 8, 9번항이 생각만큼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의식을 하면서도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입장이 skeptical left가 되었든, skeptical right가 되었든 간에 상기의 원칙에 충실한다면 생산적 토론과 합리적 대안이 도출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 진보진영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형태는 이성과 합리와 여전히 멀다. 대선이 끝난 지 20여일이 지난 지금에도 부정개표 의혹 제기와 재검표 청원으로 난리를 피우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이성과 합리, fact는 찾을 길이 없다. 너도 이들의 주장과 행동에 동의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저런 모습에서 절망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 글과 주장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공통점이 발견된다. 내 글의 내용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아니라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공격한다는 것이다. 인신을 공격하는 것 뿐아니라 교묘하게 비틀어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박근혜 지지자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가령 내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와 우리 회사의 다른 임원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는 거의 180도 다른 관점과 이유일 정도로 지지 이유의 스펙트럼은 넓다. 그런데 내가 밝힌 박근혜 지지 이유에 대해서는 반론하지는 못하면서 나를 박근혜 지지자 그룹으로 편재시키고, 심지어는 가장 꼴통스러운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과 등치 혹은 치환시켜 공격하는 경우이다. 내 글이나 내가 말한 박근혜 지지 이유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여야 하는데 같은 박근혜 지지 입장이라고 꼴통스러운 사람들의 꼴통스러운 지지 이유와 그가 갖고 있는 사유체계를 들어 나를 비판하고 자기들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은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이다. 내 글이 아니라 허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마치 내가 주장한 것처럼 비틀어 대중들을 현혹하는 것은 온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좀 이런 부분에 예민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니가 나를 <강남좌파>라는 틀로 규정하는 것도 혹시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해 본 것이다. 너무 민감하게는 받아들이지는 말아라.

나는 내 글에 정면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을 언제든 환영한다. 그게 나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나를 발전시키는 동인이 되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너로부터 메일을 받아 추가로 그 메일에 대한 답을 하마.

니 글을 요약하면, 정치는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으며, 이번 대선 결과도 현 국민들의 수준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언론환경은 민주진보진영에 절대적으로 불리함으로 조중동의 보수언론이 온존하는 한, 진보개혁 정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1. 소위 “국개론”은 정당한가

이번 대선은 우매한 대중과 자기이익만 밝히는 기득권층이 박근혜를 찍어 나온 결과라고 보는 것은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인 조국이 말하는 소위 “국개론”(국민들의 수준이 낮아 진보진영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선거에서 진보진영이 패할 때마다 나오는 논리, 국민개새끼론의 약자)과 같은 버전인 듯하다.

그런데 박근혜를 찍은 51.6%가 국개론으로 매도되어도 될까? 조국이 말한 대로 박근혜를 찍은 계층은 고졸이하의 학력에 저소득층이 많다고 하여 그들의 수준이 낮은 것이라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먼저 조국의 분석이 얼마나 개소리인지 한번 살펴보자. 조국은 “국개론”을 시전하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국이 이야기한대로 문재인을 지지한 사람들은 대학 재학 혹은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이 많고, 상대적으로 박근혜 지지자들은 고졸 이하의 저학력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건 문재인 지지자들이 20~30대이고 박근혜 지지자들이 50대 이상이라는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현재의 20~30대의 대학진학률이 80%가 되고, 현재의 50대 이상 세대의 대학진학률이 10~20%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을 두고 조국은 고학력의 깨어있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문재인이 수준 낮은 사람들이 지지한 박근혜에게 패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20~30대 = 고학력 = 수준이 높고 깨어있는 시민 = 문재인 지지자, 50대 이상 = 저학력 = 수준이 낮고 지각이 없는 사람들 = 박근혜 지지자라는 제논보다 더한 이상한 삼(사)단논법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우월의식과 허위의식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이야 조국의 개인의 일로 치부하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조국이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이며 민주진보진영 소장층의 아이콘으로 야권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과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멘붕 상태의 문재인 지지자들이 패인에 대한 냉철한 성찰 대신에 이런 조국의 멘트를 상대(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한 폄훼와 선거 패인의 합리화 근거로 삼고, 또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 안주한다면 민주진보진영에는 미래가 있겠는가? 

지금의 20~30대가 학력이 높다고 50대 이상보다 현명하고 사고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을까? 문재인을 찍은 20대는 대학생층이라 수준이 높다고? 이들이 박근혜와 문재인의 공약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문재인을 찍었을까? 140자 트위터 세계에서 나꼼수나 조국, 공지영, 이외수 등의 선동적 글 외에 얼마나 다른 심도있는 글을 읽어 보았을까? 내가 깜짝 놀란 것은 나를 비판하고 문재인을 지지한다는 사람 중에 문재인의 공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이들 중에 나보다도 문재인 공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을 아직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요즈음의 젊은 애들 생각은 어떨까? 20, 30대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혼비용(집 구입 등)의 부모 부담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80% 정도가 그것이 당연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문재인 지지층의 주류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매칭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문재인 지지자는 똑똑하고 합리적이고 수준이 높아서 찍은 사람이고 박근혜 지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에 내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

박근혜 지지자들이 수준이 낮은지를 따지기보다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과연 어떤지를 보면 저 “국개론”이 한갓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도 내가 부정개표 의혹 제기와 재검표 청원에 대한 글을 올렸지만, 문재인 지지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저렇다. 저들의 주장에 fact가 보이는가? 이성과 합리를 찾을 수 있나? 그렇게 반미를 주장하는 자들이 재검표 청원을 왜 백악관에다가 하는가? 개인의 망신이야 자기가 책임지면 되지만 국제적으로 나라 망신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국내 재검표 청원자가 21만명을 넘었고, 백악관 청원도 2.5만명이면 관철된다고 지금 1.7만명이니 청원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고 한다. 저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지지자들보다 수준이 높다고? 그냥 웃고 말자.

* 1/14 추가 : 부정개표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 시사인의 기사를 소개한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405


2. 언론환경이 진보개혁의 걸림돌이다?

진보개혁진영 정권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조중동이 버티는 강고한 언론환경 탓이라고? 이것도 위의 “국개론”과 같이 자칭 진보진영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87년의 언론환경과 사반세기(25년)가 지난 지금의 언론환경을 비교해 보자. 페이퍼신문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중동의 위상과 영향력이 25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볼까? 구독률은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발행부수도 최소 1/3은 감소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들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하락했음을 보여준다. 페이퍼신문의 퇴조 이유가 되었고 이를 대체한 것이 무엇이었지? 인터넷, 그리고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SNS다. 지금 이들 매체를 지배하는 진영이 어느 쪽이지? 그리고 사실상 언론으로 그 영향력이 막대한 포털 상황을 볼까? 대표적인 포털인 다음과 네이버는 기사를 신문사에서 제공받지만 그들이 선택해서 기사를 올려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히려 페이퍼신문보다 더 크다. 설마 이 두 포털이 박근혜(보수진영)한테 우호적이었다고 보지는 않겠지? 다음 아고라만 하더라도 특정 진영(진보)에 유리한 글을 주로 메인으로 올리는 편파적 운영을 한다는 것을 너도 부정 못할거야.

방송쪽으로 눈을 돌려볼까? 5공 시절의 땡전 뉴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이고, MBC, KBS의 노조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너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사장이나 간부들에 대한 인사권이야 정권에 있지만, 과거와 비교해 정권 옹호를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에 너도 동의할 것이라 본다.

언론환경(미디어 환경)이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바로 여론조사, 출구조사가 개표결과와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과거에는 야권에 숨은 표가 많아 여론조사와 출구조사보다 항상 야권(진보진영) 후보의 개표결과 득표율이 2~3% 높게 나왔지만, 최근 총선과 대선에서는 오히려 여권(보수진영) 후보의 숨은 표가 많아 개표결과에서 2~3% 높게 나오는 현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평소의 on, off 여론시장에서 보수진영의 지지자들이 쉽게 자기 의사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들이 왜 움추려들어 자기 의사를 숨기려 들었을까? 언론(미디어)이 모두 보수를 옹호하는데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이것이 지금의 언론환경이 과거와는 확연히 바뀌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페이퍼신문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서, 최근의 조중동(보수)과 한경오(진보)의 기사를 비교해 어느 쪽이 fact 왜곡이 심하고 편파적인지 살펴보자. 대선기간 동안만 볼까?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의 메인 페이지의 기사들은 박근혜 비판으로 도배되다시피 했어. 물론 나는 신문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나쁘다고 보지 않아.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신문이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그 경향성(편파성)이 한경오가 조중동보다 훨씬 더 심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야. 니가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대선기간 동안의 한경오와 조중동의 정치면을 모니터링 해 봐. 나는 직무상 중앙일간지와 경제지 모두를 매일 볼 수밖에 없어 거의 다 보고 내린 결론이야. 아래에 링크하는 글은 한경오가 진영논리에 찌들어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는 사례야. 쌍용자동차 문제와 관련하여 쌍차의 노조가 보도문으로 낸 최근에 자살한 류모씨의 유서 내용과 쌍차 노조의 입장이다. 니가 알고 있는 쌍차 사태와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거야. 왜 이런 괴리가 생기는 것일까? 한경오가 쌍차 사태와 관련하여 올린 기사, 아니 이번 류모씨의 자살과 관련한 기사들만 보더라도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을거야. 진보언론? 이건 예전 이야기이지. 한겨레가 찌라시가 된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이를 조롱한 글도 함께 링크한다. 김지하를 비난한 한겨레 사설을 패러디해서 한겨레를 조롱한 글이다.

-. 쌍차 노조의 보도문 : http://www.ilbe.com/626862211

-. 한겨레 비판 패러디(말의 죽음, 언론의 죽음) : http://skynet.tistory.com/notice/1898

위에서 살펴본 대로 언론환경이 민주진보진영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실패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기 보다는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마무리하며

이 글을 보내기 전에 너에게 두 가지 글을 보냈었다. 하나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쓴 감상문인 <아! 레미제라블>이고, 또 하나는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제가 박근혜를 지지한 이유, 그리고 진보에게>라는 글이었지. 후자의 글에 대해 너는 심적 반발이 상당했었던 것 같지만, 그 전에 보낸 전자의 글 <아! 레미제라블>에도 이미 내 생각을 완곡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 글은 <레미제라블>에 대한 감상평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비판(비난)에 대한 해명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내 심경을 드러낸 그 글의 말미 부분을 다시 옮겨본다.


<나이가 들면 아집만 늘고 보수적인 꼰대가 된다고 합니다만, 켜켜이 쌓인 경험으로 인생을 관조하고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는 것도 20~30대가 보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레미제라블에서 민중의 혁명을 읽어내고 좌절한 혁명에 분노와 재기의 다짐을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용서와 화해로 이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가지의 시선이 서로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순수함이 퇴색하고 초심을 잃고 변절한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순수함도 그대로고 초심도 그대로이다. 그 위에 인생이 더해져 얹어졌을 뿐인데 남들이 순수와 초심이 인생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을 변절이라고 부를 뿐이라고.”>

http://theacro.com/zbxe/?mid=free&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A%B8%B8%EB%B2%97&document_srl=713151


내가 저 글의 말미에 썼듯, 나는 <레미제라블>에서 프랑스대혁명이라는 격변기에서조차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관, 계급과 세대에 속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Who am I>라고 끊임없이 되묻는 장발쟝의 자기 성찰과 고백,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어진 용서, 사랑, 그리고 박애라고 보았다. 물론 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공화파의 좌절한 혁명에 분노하고 바리케이드 넘어 울려퍼지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에 가슴 아려하면서, 창문을 닫으며 앙졸라의 공화파를 아무도 돕지 않는 민중들에게 원망과 분노를 나타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러분의 좌절한 혁명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재기의 다짐을 나도 존중해 주고 싶다. 하지만 다른 관점과 다른 방식의 수용태도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적대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문을 닫아 걸 수밖에 없었던 파리의 민중들을 원망하기 이전에 그 민중들이 겪은 장기간 혁명으로 인한 지친 피로감에 대해 혁명의 당위만을 강요하며 무시하지 말고, 그것을 어루만져줄 비젼과 대안을 그들에게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성찰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 가치관이 크게 흔들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가치관이 연륜으로 풍부해지고 다른 방식의 삶도 포용할 수게 있게 된 것이 변절이라면 내가 “변절자”로 불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세상의 변화에 눈 감고 화석화 된 이념의 고수가 초심을 지키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에 함께 할 수 없으며, 또 그것으로 상대(나)를 공격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주변에서는 나를 배신자,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배신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20대부터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바에 배신을 한 적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지 되묻고 싶다. 나는, 여러분들은, 우리는 무엇을 배신한 것일까? 이건 나의 변명도 아니고 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과연 누가, 누구를, 무엇을 배신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