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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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고야스 노부쿠니, 김석근 역 , 역사비평사, 2007)
메이시 유신기의 대표적인 일본 계몽사상사,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표작 '문명론의 개략'을 읽고 해설한 책입니다. 우선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사항부터 말합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가 쓴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를 독자가 이미 읽어 봤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그 내용을 전개시킵니다. 본문 도처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명론 독해를 인용, 거론하며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목만 봐도 이를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문명론의 개략을 마루야마처럼 그냥 안이하게 읽는게 아니라 '정밀하게' 읽겠다는 점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을 읽고나서 이 책을 집어들기를 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본문 중간중간 헤메거나 대충 읽고 넘어 갈 수 밖에 없는 유감스러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뿐만 아니라 '문명론의 개략' 책 자체를 읽은 후에 노부쿠니의 설명을 듣는다면 더 좋겠지요.
이 책을 집어들 정도의 독자라면 대개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떤 인물인지 약간의 사전정보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국내에서는 일본 근대기의 계몽 사상가이자 악명(?) 높은 '탈아론'을 주장한 인물, 일본 우익의 원류 정도로 알려져 있죠. 김옥균 등 조선 말기 국내 급진 개화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었다는 사실이나 일본 화폐권에 나오고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위인의 하나라는 점도 많이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노부쿠니가 그리는 후쿠자와의 모습은 근대 일본의 초국가주의의 원류와는 약간 거리가 있습니다. 우선 후쿠자와가 일본 국민 만들기와 서구식 제도와 기술의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추구 노선을 주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천황제를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쿠니에 따르면) 후쿠자와를 천황제 국가의 신봉자라고 볼 순 없습니다. 노부쿠니의 통해 보여지는 후쿠자와는 서구 열강의 위협에 절치부심하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독립과 생존, 발전의 방안을 모색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천황제를 인정하는 후쿠자와의 입장 역시 딱히 천황이 국가이 정치/종교적 수장으로서 절대권력을 누려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기왕에' 메이시 유신이 왕정복고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시작된 운동이고 이제 와서 이를 되돌리긴 불가능하니 만큼, 일본의 근대화, 문명화에 걸리적거리지만 않는다면 천황제 자체를 굳이 반대하며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는, 바꿔 말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식의 상황에 따른 현실주의, 실용주의적 사고에 가깝습니다. 요컨데 후쿠자와는 정체의 선택 문제를 서구적 문명화(근대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수단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노부쿠니에 따르면, 문명론의 개략은 출간된 1875년 당시 일본이 차후 채택해야할 정체를 둘러싸고 각 세력들이 대립각을 세우고 투쟁하는 상황에서 천황제 절대주의 국가를 추구한 이른바 '국체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후쿠자와가 행한 사상투쟁의 일환으로 태어난 저서입니다. 후쿠자와 입장에선 유감스럽게도, 이후의 일본 역사는 이들 '국체론자'들이 대세를 점하고 후쿠자와의 우려대로 훗날 태평양 전쟁 패전이라는 비참한 종국을 맞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쿠자와가 이들 천황제 국가주의자들보다 더 평화(?)스럽고 온건한 신조를 가졌냐면 그건 아닙니다. 19세기 당시의 제국주의 질서를 주어진 대세로서, 국익을 위한 전쟁을 당연시합니다. 천황제 국가주의를 주장한 국체론자에 대한 후쿠자와의 반대는 단지 그와 같은 길을 걸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당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 같은 반열로 올라가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위용을 떨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나름의 정세 판단, 즉 일본이 갈 길은 복고주의가 아닌 철저한 영미식, 또는 서유럽식 문명화(이는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도 포함됩니다. 후쿠자와가 보기엔 식민지 침략 역시 '문명' 행위입니다)라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뿐입니다.
문명론의 개략을 통한 후쿠자와의 사고관을 일단 이해하면 왜 10년 후 '탈아론'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 쉽게 납득이 갑니다. 피부에 딱 와닿을 정도라고 할까요. 탈아론은 문명론의 개략에서 명시된 후쿠자와의 '국가,국민 만들기-근대화' 방안의 논리적 귀결에 가깝습니다.
뱀꼬리 : 노부쿠니의 각주를 보면 '자유', '권리', '연설'이란 번역어를 고안한게 바로 후쿠자와라고 합니다. 철학이란 용어는 문명론의 개략이 출간된 1875년의 1년 전인 1874년 니시 아마네가 처음 쓰기 시작합니다. 1881년 경이 되면 '윤리학' '형이상학' 등과 함께 번역어로 정착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만, '경쟁'이란 번역어휘를 고안한 장본인도 역시 후쿠자와입니다. 이를 국내에 도입시킨 자는 유길준. 박노자가 쓴 책 중 어딘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만 지금 그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2. 1Q84 1권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역, 문학동네, 2009)
우선 1권까지 읽었습니다. 속도감 있게 잘 읽힙니다. 문학성, 문학적 성취는 제가 뭐라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제쳐두고, 소설적 재미만 얘기하면 '태엽감는 새'나 '해변의 카프카'보다 낫습니다. 이건 어느정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루키 작품 가운데 제가 제일로 쳐온 소설이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고 이후 하루키가 이와 맞먹거나 뛰어넘는 작품을 쓰지 못하리라 여겼왔습니다만, 이번에 나온 1Q84와 비교하면 어느 작품이 더 나은지 우열을 가리기가 조금은 고민될 정돕니다. 일단 완결판까지 다 읽고 평가할 문제겠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하루키 소설도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1Q84도 마찬가진데, 제 경우엔 이 소설을 '일본 전후 시대에 관한 사회풍자'와 '주인공의 모험 이야기'가 직조된 소설로 즐기고 있습니다. 좀 무리한 얘기일수도 있지만, 유사종교집단 선구의 이야기는 천황제 하의 일본인, 일본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여지도 다소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인공 덴고와는 기질상 대척점에서 서 있고 또 갈등을 겪었던 덴고의 부친이 'NHK' 라디오 요금 수금원이었다는 점도 재밌습니다. 하루키가 전후 일본사회, 일본시민들에 체질적인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나름대로 작품에 반영하려고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것이 문학적 성취라는 기준에 볼 때 성공적인가 여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넘깁니다.
이번 소설을 좌파성향이 강한 소설로 읽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읽기입니다. 인간의 산물에 불과한 시스템에 도리어 상처받고 억압당하는 개인들, 이건 맑스주의의 '인간소외론'과 맞닻아 있는 문제의식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인간소외는 맑스 자신이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말하는 그 소외의 개념과는 다르고, 오히려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며 젊은 맑스(young Marx)를 강조했던 유럽 신좌파의 인간소외론, 문화론적 소외이론과 친연성이 훨씬 더 강합니다. 따라서 이번 소설은 (적어도 1권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관점에 따라선 좀 좌빨스러운, 혹은 진보신당스러운 세계관에 일정 부분 통하는 면이 있는 작품으로 풀이할 여지도 있습니다.
메이시 유신기의 대표적인 일본 계몽사상사,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표작 '문명론의 개략'을 읽고 해설한 책입니다. 우선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사항부터 말합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가 쓴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를 독자가 이미 읽어 봤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그 내용을 전개시킵니다. 본문 도처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명론 독해를 인용, 거론하며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목만 봐도 이를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문명론의 개략을 마루야마처럼 그냥 안이하게 읽는게 아니라 '정밀하게' 읽겠다는 점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을 읽고나서 이 책을 집어들기를 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본문 중간중간 헤메거나 대충 읽고 넘어 갈 수 밖에 없는 유감스러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뿐만 아니라 '문명론의 개략' 책 자체를 읽은 후에 노부쿠니의 설명을 듣는다면 더 좋겠지요.
이 책을 집어들 정도의 독자라면 대개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떤 인물인지 약간의 사전정보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국내에서는 일본 근대기의 계몽 사상가이자 악명(?) 높은 '탈아론'을 주장한 인물, 일본 우익의 원류 정도로 알려져 있죠. 김옥균 등 조선 말기 국내 급진 개화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었다는 사실이나 일본 화폐권에 나오고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위인의 하나라는 점도 많이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노부쿠니가 그리는 후쿠자와의 모습은 근대 일본의 초국가주의의 원류와는 약간 거리가 있습니다. 우선 후쿠자와가 일본 국민 만들기와 서구식 제도와 기술의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추구 노선을 주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천황제를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쿠니에 따르면) 후쿠자와를 천황제 국가의 신봉자라고 볼 순 없습니다. 노부쿠니의 통해 보여지는 후쿠자와는 서구 열강의 위협에 절치부심하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독립과 생존, 발전의 방안을 모색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천황제를 인정하는 후쿠자와의 입장 역시 딱히 천황이 국가이 정치/종교적 수장으로서 절대권력을 누려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기왕에' 메이시 유신이 왕정복고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시작된 운동이고 이제 와서 이를 되돌리긴 불가능하니 만큼, 일본의 근대화, 문명화에 걸리적거리지만 않는다면 천황제 자체를 굳이 반대하며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는, 바꿔 말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식의 상황에 따른 현실주의, 실용주의적 사고에 가깝습니다. 요컨데 후쿠자와는 정체의 선택 문제를 서구적 문명화(근대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수단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노부쿠니에 따르면, 문명론의 개략은 출간된 1875년 당시 일본이 차후 채택해야할 정체를 둘러싸고 각 세력들이 대립각을 세우고 투쟁하는 상황에서 천황제 절대주의 국가를 추구한 이른바 '국체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후쿠자와가 행한 사상투쟁의 일환으로 태어난 저서입니다. 후쿠자와 입장에선 유감스럽게도, 이후의 일본 역사는 이들 '국체론자'들이 대세를 점하고 후쿠자와의 우려대로 훗날 태평양 전쟁 패전이라는 비참한 종국을 맞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쿠자와가 이들 천황제 국가주의자들보다 더 평화(?)스럽고 온건한 신조를 가졌냐면 그건 아닙니다. 19세기 당시의 제국주의 질서를 주어진 대세로서, 국익을 위한 전쟁을 당연시합니다. 천황제 국가주의를 주장한 국체론자에 대한 후쿠자와의 반대는 단지 그와 같은 길을 걸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당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 같은 반열로 올라가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위용을 떨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나름의 정세 판단, 즉 일본이 갈 길은 복고주의가 아닌 철저한 영미식, 또는 서유럽식 문명화(이는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도 포함됩니다. 후쿠자와가 보기엔 식민지 침략 역시 '문명' 행위입니다)라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뿐입니다.
문명론의 개략을 통한 후쿠자와의 사고관을 일단 이해하면 왜 10년 후 '탈아론'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 쉽게 납득이 갑니다. 피부에 딱 와닿을 정도라고 할까요. 탈아론은 문명론의 개략에서 명시된 후쿠자와의 '국가,국민 만들기-근대화' 방안의 논리적 귀결에 가깝습니다.
뱀꼬리 : 노부쿠니의 각주를 보면 '자유', '권리', '연설'이란 번역어를 고안한게 바로 후쿠자와라고 합니다. 철학이란 용어는 문명론의 개략이 출간된 1875년의 1년 전인 1874년 니시 아마네가 처음 쓰기 시작합니다. 1881년 경이 되면 '윤리학' '형이상학' 등과 함께 번역어로 정착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만, '경쟁'이란 번역어휘를 고안한 장본인도 역시 후쿠자와입니다. 이를 국내에 도입시킨 자는 유길준. 박노자가 쓴 책 중 어딘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만 지금 그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2. 1Q84 1권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역, 문학동네, 2009)
우선 1권까지 읽었습니다. 속도감 있게 잘 읽힙니다. 문학성, 문학적 성취는 제가 뭐라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제쳐두고, 소설적 재미만 얘기하면 '태엽감는 새'나 '해변의 카프카'보다 낫습니다. 이건 어느정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루키 작품 가운데 제가 제일로 쳐온 소설이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고 이후 하루키가 이와 맞먹거나 뛰어넘는 작품을 쓰지 못하리라 여겼왔습니다만, 이번에 나온 1Q84와 비교하면 어느 작품이 더 나은지 우열을 가리기가 조금은 고민될 정돕니다. 일단 완결판까지 다 읽고 평가할 문제겠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하루키 소설도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1Q84도 마찬가진데, 제 경우엔 이 소설을 '일본 전후 시대에 관한 사회풍자'와 '주인공의 모험 이야기'가 직조된 소설로 즐기고 있습니다. 좀 무리한 얘기일수도 있지만, 유사종교집단 선구의 이야기는 천황제 하의 일본인, 일본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여지도 다소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인공 덴고와는 기질상 대척점에서 서 있고 또 갈등을 겪었던 덴고의 부친이 'NHK' 라디오 요금 수금원이었다는 점도 재밌습니다. 하루키가 전후 일본사회, 일본시민들에 체질적인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나름대로 작품에 반영하려고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것이 문학적 성취라는 기준에 볼 때 성공적인가 여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넘깁니다.
이번 소설을 좌파성향이 강한 소설로 읽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읽기입니다. 인간의 산물에 불과한 시스템에 도리어 상처받고 억압당하는 개인들, 이건 맑스주의의 '인간소외론'과 맞닻아 있는 문제의식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인간소외는 맑스 자신이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말하는 그 소외의 개념과는 다르고, 오히려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며 젊은 맑스(young Marx)를 강조했던 유럽 신좌파의 인간소외론, 문화론적 소외이론과 친연성이 훨씬 더 강합니다. 따라서 이번 소설은 (적어도 1권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관점에 따라선 좀 좌빨스러운, 혹은 진보신당스러운 세계관에 일정 부분 통하는 면이 있는 작품으로 풀이할 여지도 있습니다.
2009.10.19 10:18:22
1. 정리하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에 대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해석을 비판하는 [고야스 노부쿠니]의 해석이군요.
그저 미누에님 덕분에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게 감사할 따름....
2. 코지토님의 서평과 미누에님의 서평, 그리고 예루살렘 연설문까지, 제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하루키에 대한 이미지와 많이 다르네요. 이번에 다시 하루키를 읽게되면 완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그저 미누에님 덕분에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게 감사할 따름....
2. 코지토님의 서평과 미누에님의 서평, 그리고 예루살렘 연설문까지, 제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하루키에 대한 이미지와 많이 다르네요. 이번에 다시 하루키를 읽게되면 완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2009.10.19 16:30:31
링크미/ 그런 셈입니다. 따라서 [고야스 노부쿠니]의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먼저 한국에 번역된 문명론의 개략 및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을 먼저 읽는게 안전해 보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론의 개략을 출간한 때는 1875년입니다. 갑신정변은 그로부터 9년 뒤엔 1884년에 일어납니다. 양자 간에 9년의 시간이 격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후쿠자와의 저 책이 한국 급진개화파들에게 일정 부분 영향을 줬을 개연성도 있겠죠.
2. 이번의 제 감상은 약간 무리한 면이 없지 않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하루키의 1Q84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 어딘지 모르게 예전보단 더 구체적이라고 할까, 더 명시적이다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2. 이번의 제 감상은 약간 무리한 면이 없지 않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하루키의 1Q84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 어딘지 모르게 예전보단 더 구체적이라고 할까, 더 명시적이다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2009.10.19 16:38:50
1. 일본은 어떻게 보면 정말 특이한 "근대국가"라고 보입니다. 어떻게 저런 체제에서 저런 문명과 경제를 이루어 왔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천황제, 신도, 세습정치인 등등... 전근대적인 사회시스템이 곳곳에 묻어 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합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라면집을 하면 아들이 이를 물려받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는 거죠. 물론 서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하긴 하지만 그게 무슨 사회적 의무감이라기 보다는 경제적 목적이나 아버지 개인의 요구에 대한 아들의 순응이라는 형태인데 일본은 그런 것이 일종의 사회적 관습처럼 내려온다는 느낌입니다. 기술적 발전과 사회체제적 발전이 상당히 따로 갈 수 있는 가능성(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의 여지가 큰?)을 보여주는 나라 같아요. 그 이면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이를 체제내화 하는 방식의 변수가 있을 거 같습니다. 이 저작이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2.1Q84는 지금까지 하루키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저작 중에서<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이 최고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작품을 읽으면서 생각을 재고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괜찮네요. 결국 <하드보일드>는 한 개인의 세계을 말하는 작품인데요, 다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상징이 사회에서 세계의 끝(즉 그 개인의 의식의 세계)으로 유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접점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체제의 모순과 접점을 가지지는 않죠. 주인공은 그저 으깨어지는 계란일 뿐입니다. 그는 상당히 쿨하게 계란으로서의 입장을 받아 들입니다. 맥주를 마시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혼자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녹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1Q84는 다르죠. 어떻게보면 전공투와 광신의 알레고리도 있지만 그 광신의 이면에 있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도 놓지 않습니다.
다만 하루키의 소설에 제가 가지는 몇 가지 의구심은 그가 좋아하는 초현실적 구성이 사실은 현실의 모순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연설문에서 우리가 시스템을 만들지만 그 시스템은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다고 말하죠.
그러나 그 시스템이 그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생명을 가지는 과정을 회의주의적으로 보자면, 그건 철저하게 개인과 사회의 역학관계에 대한 단계적 환원주의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게 리얼리즘적 태도겠죠. 그런데 그는 그러질 않습니다. "양"이라든가, "리틀 피플"이라든가, 혹은 환상적 힘을 가진 어떤 존재(태엽감는 새의 노보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런 운명을 타고 났고, 그런 어둠의 힘을 저절로 가지게 되었고, 혹은 어떤 기이한 현상을 통해 어둠의 힘을 가진 존재가 강림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저는 의문입니다.
물론 그 어둠의 존재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느냐, 그에 맞서 싸우느냐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며 그는 마땅히 그 힘에 부응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 부분이 대단히 설득력있게 전개되고, 그것에 그의 매력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 어둠의 힘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는 너무 초자연적 힘으로 설명해 버립니다.
시스템은 결코 저 혼자 생명을 가지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만든 것도 우리며, 시스템에 생명을 부여한 것도 우리이며, 나아가 시스템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명을 뺏도록 부추기는 것도 우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하루키의 문체로...^^).
여기까지가 제가 생각하는 하루키의 성취와 한계입니다.
2.1Q84는 지금까지 하루키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저작 중에서<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이 최고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작품을 읽으면서 생각을 재고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괜찮네요. 결국 <하드보일드>는 한 개인의 세계을 말하는 작품인데요, 다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상징이 사회에서 세계의 끝(즉 그 개인의 의식의 세계)으로 유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접점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체제의 모순과 접점을 가지지는 않죠. 주인공은 그저 으깨어지는 계란일 뿐입니다. 그는 상당히 쿨하게 계란으로서의 입장을 받아 들입니다. 맥주를 마시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혼자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녹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1Q84는 다르죠. 어떻게보면 전공투와 광신의 알레고리도 있지만 그 광신의 이면에 있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도 놓지 않습니다.
다만 하루키의 소설에 제가 가지는 몇 가지 의구심은 그가 좋아하는 초현실적 구성이 사실은 현실의 모순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연설문에서 우리가 시스템을 만들지만 그 시스템은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다고 말하죠.
그러나 그 시스템이 그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생명을 가지는 과정을 회의주의적으로 보자면, 그건 철저하게 개인과 사회의 역학관계에 대한 단계적 환원주의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게 리얼리즘적 태도겠죠. 그런데 그는 그러질 않습니다. "양"이라든가, "리틀 피플"이라든가, 혹은 환상적 힘을 가진 어떤 존재(태엽감는 새의 노보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런 운명을 타고 났고, 그런 어둠의 힘을 저절로 가지게 되었고, 혹은 어떤 기이한 현상을 통해 어둠의 힘을 가진 존재가 강림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저는 의문입니다.
물론 그 어둠의 존재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느냐, 그에 맞서 싸우느냐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며 그는 마땅히 그 힘에 부응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 부분이 대단히 설득력있게 전개되고, 그것에 그의 매력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 어둠의 힘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는 너무 초자연적 힘으로 설명해 버립니다.
시스템은 결코 저 혼자 생명을 가지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만든 것도 우리며, 시스템에 생명을 부여한 것도 우리이며, 나아가 시스템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명을 뺏도록 부추기는 것도 우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하루키의 문체로...^^).
여기까지가 제가 생각하는 하루키의 성취와 한계입니다.
2009.10.20 23:09:22
코지토/ 예컨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말하는 하루키의 비판을 들어 보면, 일단 그 주장 자체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정론이지만 거기에는 그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거세되어 있지요.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어요. 그러다보니 하루키 소설에서 제기되는 진단과 해결책엔 구체성, 또는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좀 그런 면이 있죠. 예전에 제가 아크로에 올렸던 하루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본인도 옴진리교 사건이라든지, 일본 학생운동의 과격화나 몰락의 배후에 놓인 일본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에 관해 나름의 판단을 갖고 있는 듯 한데 그게 실제 작품에서는 썩 만족스럽게 전달되진 않는 듯 합니다. 문학 기법의 차원해서 환상적인, 또는 초현실주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법 전략이야 작가의 개성이니 문제가 될 게 없겠지만, 정치적인 문제나 소재를 건드릴 때조차 이를 탈정치화시켜 버린다면 이건 좀 이상한거 아니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사실주의 기법을 굳이 채용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사회적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해 그려낼 수 있다는 애깁니다. 하루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진실을 픽션의 영역으로 끌어가서 이를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 예를 들어 '난쏘공'의 경우가 그 좋은 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가로서의 하루키는 평가할 입장이 못되지만), 이야기꾼으로서 하루키는 그 재능이 두드러지는 바가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그런 하루키의 장점이 몇 년만에 빛을 발한 경우 같아요.












minue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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