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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고양이가 약 열세마리 개가 두마리가 있습니다
처음에 새집지어 이사할때 길냥이가 한마리 들어온것이 이제 자손이 늘어나서 거의 족보를 만들정도가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족보를 적자면 야옹이가 까망이를 낳고 까망이는 네로와 띠옹이와 브릿지를 낳고 브릿지는 투 부릿지를 낳고 띠옹이는 애기와 몽순이를 낳고 뭐 이런식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브릿지가 ( 브릿지는 하얀고양이인데 머리위에 살짝 검은 털이 있어서 브릿지입니다) 새끼를 냇가근처 하우스에 낳았는데 어느날
새끼 두마리를 마당에 데려와서 놓고는 젖을 안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들을 키우기위해 고양이 분유를 샀는데 자그마치 거금 삼만원인데 이글쓰느라 보니 인터넷에서는 25천원 23천원이군요
좌우간 분유를 주는데 다음날부터 설사를 시작하더니만 피똥을 싸는 겁니다
전에 강아지 키우다 혈변누고 죽는 파보를 경험했기에 놀랐는데 그 어린것들이 그냥 죽는것을 볼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먹였더니 그래도 낫지를 않습니다
영장류중 인간은 의료보험이 되지만 고양이과 고양이는 의료보험이 안되어 주사맞는데 3만원 그리고 약타는데 6천원 애기고양이 사료 2키로에 2만원 주차비 천원 이래저래 거금 십만원이 들어갔는데 이 금액이면 우리집 고양이 개들 두달분 사료비에 해당합니다
다행히 수의사가 영험한 분이어서 아이들이 나아지고 치료가 되어 잘먹고 잘 놉니다
얼마나 귀엽고 먹성이 좋은지
이번 소동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새끼 고양이의 가격은 한마리에 5천원정도입니다
그것도 힘들어서 애완동물 샾에 사정해서 새끼들을 그냥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고양이들이 새끼를 너무 많이 낳고 주변 밭에 가서 말짓하고 사료도 감당이 안되어 말이지요
가격으로는 5천원이지만 생명이라는 가치의 관점에서보니 십만원이 들어도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이나 사물이 가격이냐 가치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구나 하는점을 느낀 헤프닝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치를 보지않고 가격을 보고 살지 않앗나
나 자신을 가치로 보지 않고 가격을 매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난지 한달도 안된 고양이로 부터 배운 소중한 교훈이었습니다
열 세마리면 거의 제 로망이 실현된 수준인데요. 단독주택, 그것도 마당 좀 딸려있고
집들이 빼꼭히 들어차 있지 않은 동네에서나 실현이 가능할텐데, 전 까마득하네요.
아마 무사히 60 정도 넘겨야 가능해질 듯..
서양의 아주 유명한 시인이 고양이를 가장 완전한 생물이던가 신의 최고의 업적이던
가로 꼽았다는데, 꼬리 바짝 치켜들고 나대고 칭얼대고 뛰어놀고 부비대고 퍼져 자고
눈 동그랗게 치뜨고 궁금해하거나 억울해하는 표정을 짓고 어느새 책상위 양옆에
비스듬히 누워 저를 빤히 쳐다보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 얼굴을 기대는 걸 보면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서 고양이, 개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건, 아파트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저의 로망이기도 합니다. 뜰에서 뛰어놀게 해주고 싶은데 아파트에서는 그게 안 되니...
흐강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인가 봅니다.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군말 없이 먹여살리시는 걸 보면...
그렇죠. 시장가격과 가치란 특히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는 결코 동일할 수가 없는 거죠. 모든 것을 놀라운 속도로 상품화하며 가격을 매겨대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자꾸 잊어가는 점이 아닐까 싶네요.
그나저나 참 희한한게 곤충빼고(개인적으로) 동물은 파충류, 포유류 할것없이
새끼들은 다 귀엽고 이쁘단 말이죠?
사람이고 동물이고 새끼는 다 어쩌면 그렇게 이쁜지 몰라요 볼때마다 참 희한해요
그냥 이게 단순히 '작은건 귀엽고 이쁘게' 인식하게 진화한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악어도 새끼는 귀엽더라구요 ㅋㅋ
공급 측면에서 비용은 객관적이죠. 물론 이 비용도 출렁거리는 하지만 적어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짢아요. 객관적 가치이고 이걸 기반으로 가격체계가 작동해야 한다고 믿은게 노동가치설의 주장이었죠. 심지어 애덤 스미스조차. 즉 인간 외부에서 결정되는 가치체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에 비해 수요 측면에서 효용은 주관적이죠. 하지만 어느 정도 보편성은 있습니다. 그것은 희소한 것에 사람은 더 효용을 느끼다는 것이죠,. 물이 아무리 생명에 중요한 것이더라 하더라도 공급량이 무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의 한계효용은 매우 낮게 평가받거든요. 결국 인간의 주관적인 보편성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칸트적으로 말하면 인간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 만족체계를 기반으로 한 보편적 경험평가죠.
그에 비해 흐강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라는 건 심미적인 것이고 예술적인 영역에 해달될 겁니다. 숭고미같은 것일 수도 있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거죠. 하지만 자본주의는 또 저런 심미적인 가치도 상품화하고 광고에 이용해 먹는게 현실입니다.
맑스 왈 "교환가치(가격?)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효용?)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난다"고 했죠. 맑스에 대한 흔한 오해중의 하나가 '맑스는 한계효용같은거 다 무시했다' 인데, 맑스 이론의 출발점이자 기본 전제가 바로 교환가치에 대한 이 정의이고, 교환가치란 이렇게 사용가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놈인데, 맑스가 한계효용같은 것을 무시했을리가 있나요. 단지 효용이라는 단어나 개념을 몰랐을 뿐이죠.
맑스가 어떤 상품의 교환가치는 (시장의 경쟁에 의하여) 장기적으로 '상품생산에 투입됀 노동의 량'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논증했지만, 그걸 기반으로 가격체계가 작동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걸 기반으로 가격체계가 작동하게 됀다'와 '그걸 기반으로 가격체계가 작동해야 한다'는 매우 다른 말입니다. 후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엄청난 삽질을 했죠.
요즘 어떤 물의 리터당 가격은 주유소의 휘발유 가격보다 비싸다죠? 그 물의 생산에 투입돼는 노동의 량이 휘발유 생산에 투입돼는 노동의 량보다 많기 때문이죠. 그 '특별한 물'의 사용가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휘발유의 사용가치보다 높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맘일몸/
어떤 값을 찾아내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겠죠.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산출하는 방법과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이 있겠죠. 예를 들어 어떤 회사 주식의 가격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계산해서 내놓는 적정주가와 시장에서 거래되는 실제가격이 그것이죠. 장기적으로는 (제대로 계산했다면) 적정주가와 시장가격은 근사치로써 비슷해질겁니다. 즉 "시장가격은 적정주가를 기반으로 형성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해서 느닷없이 정부가 "모든 주식은 적정주가로 거래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한겁니다.
(또한 반대로 적정주가따위는 필요없고 온리 등락 그래프만 보면서 시장에 대한 기술적분석으로만 주식거래를 한다면, 그 투자자 역시 망하는건 마찬가지이겠죠. 즉 어느 하나로만 시장을 운영할 수는 없고 서로 보완의 대상이라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
이렇게 상품의 가격은 상당수 원가계산에 의해 (가령 견적서가 그런거죠) 도출됄 수 있는 것이지만, 시장을 제껴놓고 그것만으로 경제를 운영할 수는 없죠. 비록 그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실제로도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걸 실제로도 가능하다 생각해서 삽질을 하다 망한게 바로 사회주의 국가들일테구요. 맑스의 경우에도 어떤 상품의 교환가치(상품가격)를 계산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죠. 당장에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이라는게 계산으로 뽑아낼 수 있는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평균적 숙련도니 평균적 노동강도니 하는건 그저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죠.
맑스가 주류경제학처럼 사용가치(효용)를 이용해서 경제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애초 그의 연구의 목적이 상품가치의 본질을 탐구해서 '착취가 존재함'을 밝히기 위함이었고, 그러다보니까 자본주의는 곧 망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애써 그런게 왜 필요하냐는 생각에서였을거에요. 이후의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또한 죄다 그랬구요.
저만의 생각이겠지만, 저는 주류경제학의 가격결정이론을 맑스 경제학의 한 파트로 포함시켜도 무방하고, 그것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건지 잘 이해를 못하는 편입니다.

all / 이름없는 전사님이 말씀이 일반적인 설명이긴 한데요 약간보완하면 교환가치는 교환을 정당하게 하는 게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또는 무엇을 기준으로 교환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죠. 사용가치는 실제 사용했을때 느끼는 총만족과 관계된 것이구요. 이걸 기반으로 볼때 마르크스나 애덤스미스는 공급측면에서의 교환가치만을 중요시한거죠. 수요측면의 교환가치는 이른바 한계효용이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반면 사용가치는 이것과 무관하게 총효용과 관계된다고 보구요.
즉 사용가치=총효용
공급측면의 교환가치=노동가치설에 기반한 한계비용설=객관적 가치설에 의해 공급가격을 결정
수요측면의 교환가치=한계효용설=주관적 가치설에 의해 수요가격을 결정
이렇게 됩니다.
이걸 마샬이라는 신고전파 학자가 종합해서 나온게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이에요. 우리가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란 바로 마샬에 의해 정립된 거죠.
그리고 마르크스에게서 교환가치란 평가라는 측면이 강한 편입니다. 애담스미스조차 가치는 노동뿐이라고 봤거든요. 그리고 가치란 분배를 정당하게 하는 어떤것이라고 본 거죠. 즉 교환을 정당하게 하는 가치가 머냐를 탐구한 거죠. 가치 자체가 평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지대나 이자 이건 노동과 무관한 불로소득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교환을 정당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품에 들어간 노동양만큼 교환되는게 타당하다고 본 거죠. 이건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어느정도는 수긍할 수 있는 거죠.
즉 이것은 지극히 가치평가 즉 정당성 차원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비용이라는 현실적 측면까지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샬은 여기서 그냥 비용이라는 측면만을 가져온 것이구요. 물론 긍극적으로 한계비용으로 갑니다.
그렇다면 수용측면에서 교환을 정당하게 하는 건 멀까요? 사람이 한단위를 더 소비했을때 느끼는 만족의 크기 즉 한계효용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라는 거죠. 쉽게 말해 저걸 무지 가지고 싶은면 많은 돈을 지불해야겠죠. 근데 보통 생전 처음 소비할떄는 무지 가지고 싶지만 여러번 소비하다보면 그보다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처음은 비싸게 거래되는게 당연하고 뒤에는 싸게 거래되는게 타당하다는게 한계효용론이죠. 즉 부존량(나아가 소비량)이 증가할수록 가치가 떨어지게 되니 그에 따라 교환하자는 거죠. 그리고 그러한 교환은 정당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죠.
결국 마샬은 공급측면의 교환가치와 수요측면의 교환가치가 서로 만나는 그것이 가격이라고 했고 그 가격은 교환을 정당화시켜준다고 본 거죠. 공급가격과 수요가격이 만나서 생기는게 바로 가격이 되는 것이죠. 교환을 정당하게 하는 수준을 공급과 수요면을 종합해서 찾게 된 거죠. 상식적으로도 이러한 가격이야말로 사실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가격은 완전경쟁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일 것을 전제로 할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동시에 사기 기망 이런 것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의 의사결정이어야 하고 나아가 불노소득까지도 없어야 하는 거죠((이건 견해 대립)
이름없는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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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잉여가치가 왜 이윤을 발생시키는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상품의 가격은 순전히 노동시간이 투영된 만큼의 가치입니다. 그게 그 상품의 적정가가 되는 거죠. 근데 상품의 가격이 그 적정가를 초과해서 더 높아지는 이유가 뭐냐? 바로 상품에 노동자의 피와 땀, 곧 노동자 개개인이 더 높은 생산력을 발휘한 그 잉여가치가 포함되는 만큼 상품의 가격이 올라간다고 본 거죠. 헌데 상품의 가격은 그렇게 노동의 잉여가치 까지 다 흡수해서 쭉쭉 올라가는 반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 노동의 잉여가치를 하나도 반영하지 못한 채, 오직 노동한 시간만큼만 계산해서 지불이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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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수준에서 말씀드리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잉여가치>의 기본적인 원천은 상품생산에 투입된 총노동시간 중에서 지불된 노동시간분을 제외하고 지불되지 않는 부분(부불노동시간)을 말하고 있으므로 노동자의 임금은 "오직 노동한 시간만큼만 계산해서 지불이 된다"는 표현은 <노동한 시간만큼 지불되지 안는다>라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사님이 언급한 노동자의 피와 땀(노동강도의 강화)이나 더 높은 생산성은 절대적 잉여가치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기본적으로 부불노동으로 형성되는 잉여가치를 더욱 더 확대하는 방편들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은 <가치>와 <가격>의 개념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 전사님이 언급한 문장 속에서는 <가치>와 <가격>의 개념이 거의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상품의 가격은 순전히 노동시간이 투영된 만큼의 가치"라고 표현하셨는데 "노동시간이 투영된 만큼의 가치"에서 <가격>을 직접적으로 유추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가격>은 경제전체의 착취율(지불노동 대비 부불노동 비율)의 평준화와 투하자본 대비 획득하는 잉여가치(부불노동)의 평준화(개별자본간의 경쟁에 따른 이윤율의 평준화)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생산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은 개별자본(자본집약적 생산자본)은 해당 개별자본의 부불노동분보다 더 많은 부불노동을 획득하게되는, 즉 <생산가치>보다 높은 수준에서 <생산가격>이 결정되고 반대로 유기적 구성이 낮은 개별자본은 <생산가치>보다 낮은 수준에서 <생산가격>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에 아직까지도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가치를 가격으로 전형시키는 문제(전형문제)는 이론적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전형문제가 이론적으로 깔끔하게 해결되고 여기에다가 사용가치(효용)를 추가로 고려할 수 있는 이론틀이 만들어지면, 더 없이 훌륭한 경제학이 탄생하겠지만 기대가 난망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류경제학은 <가치>차원의 문제를 완전히 포기하고도 (혹은,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무엇인가를 외면하고도) 나름대로 훌륭한 설명력을 가지는 이론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1. 착취율의 평준화
노동강도나 숙련도등 다른 조건은 동일하다고 가정하고 10시간의 노동으로 300만큼의 가치 생산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면,
A기업 상품의 생산가치 = 산노동 10시간 = 가변자본 100 + 잉여가치 200 ---- > 10시간의 노동의 대가로 100만큼을 임금으로 지급 ------ > 착취율 200%(=잉여가치 200/임금100)
B기업 상품의 생산가치 = 산노동 10시간 = 가변자본 200 + 잉여가치 100 ---- > 10시간의 노동의 대가로 200만큼을 임금으로 지급 ------ > 착취율 50%(=잉여가치 100/임금200)
위의 경우에서 정상적인 노동자라면 모두 B기업에서 일을 하려고 하고 아무도 A기업에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결국 전체적으로 착취율은 100% 수준으로 균등화, 평준화된다.
2. 이윤율의 평준화
착취율이 100%로 평준화되어 있고 다고 가정,
A기업(자본집약적 개별자본)의 생산가치 = 불변자본 500 + 가변자본 100 + 잉여가치 100 = 700 ---- > 가치대로 교환이 이루어진다면 투하자본(불변자본 + 가변자본) 대비 이윤율은 16.7%
B기업(노동집약적 개별자본)의 생산가치 = 불변자본 100 + 가변자본 200 + 잉여가치 200 = 500 -----> 가치대로 교환이 이루어진다면 이윤율은 66.7%
위의 경우 자본가들은 A기업 투자하지 않으며, B기업에 투자하려고 할 것임. 따라서 균형상태에서는 개별자본들의 경쟁에 따라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잉여가치 300을 투하자본에 동일하게 비례하여 배분되는 결과를 낳는다. 평균이윤율은 33.3%로 A기업이 획득하는 이윤(가치텀인 잉여가치가 비로서 가격텀인 이윤으로 전형된)은 200을 획득하고 B기업은 100만큼을 획듬한.
따라서 A기업의 생산가격= 500 + 100 + 200 = 800
B기업의 생산가격 = 100 + 200 + 100 = 400

맘일몸/
논의의 주제와는 큰 상관은 없는거 같은데, 그냥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1의 경우에서 만약 A기업에서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하다면 착취율의 평준화를 이루는 것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B기업의 자본가도 큰 역할을 할 것 같은데요. 맘씨좋은 아저씨가 아니라면 200의 가변자본을 100으로 줄이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거라면 용역깡패들을 부를테구요. 결국 최종적으로 착취율은 두 기업 모두 200%가 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이때 두 기업의 이윤율이 보편적인 이윤율보다 매우 높다면 다음의 경우들이 가능하겠죠.
신규진입문턱이 낮은 업종이라면 곧 경쟁업체들이 창업되어 공급이 늘어나 시장가격은 하락하고, 고용증가압력으로 인해 임금 또한 상승하여 최종적으로 잉여가치가 100으로 수렴. (혹은 보편적인 이윤률로 수렴)
신규진입문턱이 매우 높은 업종이라면 두 기업이 경쟁보다는 담합을 해서 높은 착취율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거나, 보다 더 많이 생산하여 파는 것이 이득이라면 (이윤량이 늘어나 종전보다 이득이 돼는 지점까지) 투자를 유치하고 공급을 늘려 결국 시장가격 하락, 이윤율 역시 하락하여 최종적으로 잉여가치가 100으로 수렴.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주류경제학의 용어로도 번역(?)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노동자들더러 "회사일을 내 일처럼' 이라는 표어를 곳곳에 붙이고서 착해질 것을 강요하는걸테죠^^ 아니면 '못 배운걸 어떻하리, 비정규직은 나의 운명' 이라고 온갖 곳에서 떠들거나.. 가끔 품위있고 교양있는 분들이 "무소유를 아시나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렸더니 오히려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햄볶아요" 라고 꼬시기도 하구요.... 그런거죠.
언젠가 어느 유명 여작가님이 트윗에다 "지리산에 갔더니 자발적인 가난이 이토록 아름다운 삶인지 미처 몰랐어요" 하고 동네방네 떠들길래 '이건희가 할 소리를 왜 당신이 하느냐"고 쫑코를 줬더니 영 이해를 못하고 블럭을 먹이던데요? ㅋㅋㅋㅋ. 그 분 요즘 쌍용차 노동자들 위해서 매우 보람있는 일을 했다가 표절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죠? ㅎㅎㅎ
저는 조금 삐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가난한 분들이 가난한 삶을 긍정하고 예찬하거나 돈 욕심 부리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을 때 굉장히 화가 나요. 이건희대제가 보시기에 "쫀쫀하게 돈의 노예가 돼지 않고, (그래서 월급이 많든 작든 신경쓰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직원들"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보이겠어요? 차라리 이건희가 그런다면 오히려 이해가 되는거죠.
그래서 아크로초창기때 노회찬의 재활용 침대 발언 (저는 그게 가난을 예찬하는 발언으로 들리더라구요) 때문에 '진보진영의 리더로써 기본이 안돼 있다'고 열라 깠더니 영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랑 대판 붙어서 난장판이 돼기도 했고;; 저는 "우리 모두 악착같이 돈의 노예가 돼어서, 열라 투쟁해서 임금 올려서 우리 노동자들도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고 다들 부자됍시다!" 이렇게 주장해야 맞는거 아닌가 그런거죠.
제가 너무 괴팍한 걸까요?;;

피노키오/
1. 제가 예시로 든 것은 A기업과 B기업(또는 A상품과 B상품)만이 존재하는 경제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2.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정성적인 면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및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고 또 그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좌파이론이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에 빚지고 있을만큼 훌륭한 설명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더 나아가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정량적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하려면, 앞에서 제가 설명한 가치텀인 잉여가치의 가격텀인 이윤의 전형에서 더 나아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부분도 가격텀으로 전형시켜야되고 이것이 가능하다면, 마르크스 경제학도 나름대로 완성된 가격결정모형(비록 수요측면이 고려되지 않는 상태라하더라도)을 가지게 되지만, 이게 제대로 아직까지 완성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피노키오님 말씀대로 정성적인 면에서는 마르크스 경제학, 정량적인 면에서는 주류경제학적의 가격결정모형에 따른 설명은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다만, 주류경제학의 논리는 잉여가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므로(잉여가치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되는 가격결정이론을 가지고 있으므로), 잉여가치의 존재를 주류경제학의 설명에 끼워 넣는 것이 일관성을 갖추는 것, 혹은 더 나은 설명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사/
음...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살짝 달라서 잠시 적어볼게요.
우선 제가 편의를 위해 사용가치를 '효용?' 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래서 ?를 붙였죠). 엄밀하게 따지면 사용가치의 개념과 효용은 다릅니다. 맑스는 '사용가치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결과'를 유용효과라고 했고, 그게 주류경제학의 효용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죠. 맑스 이론에서 사용가치란 상품이 갖고 있는 고유한 유용성이고, 상품의 가치 그 자체입니다. 상품은 교환돼지 않고 단독으로 존재할 때는 오직 사용가치밖에 없는 것이고, 유용성이 사라진 상품이란 더 이상 상품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 곧 쓰레기일 뿐이니까요.
또한 사용가치는 측정돼지 않고, 동일한 상품이면 사용가치의 크기 역시 동일합니다. 오직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에 따라 유용효과의 크기가 달라질 뿐이죠. 쉽게 말해 한그릇의 밥은 한끼의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는 유용성(사용가치)를 갖고 있고, 밥을 먹음으로써 배고픔의 해소라는 유용효과를 얻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돈을 주고 구매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밥이라는 물건 그 자체이지, 배부름이라는 감각이 아닙니다. 배부름이라는 추상적인 감각을 사고 팔 수는 없는거니까요. 만약 어떤 식당에서 밥이 팔리지 않고 남았을 때, '밥이 남았다'고 하지 '배부름이 남았다'고는 하지 않죠? 그저 우리는 각자가 밥을 소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용효과의 크기와, 지불해야하는 화폐의 크기를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합리적으로 비교하여 교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뿐이죠.
그리고 맑스에 따르면 교환가치는 서로 다른 상품(사용가치)이 교환돼는 비율로써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됄 수 있지만, 그렇다해서 교환가치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교환가치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는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사람마다 유용효과의 크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죠.) 이렇게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게 바로"'상품생산에 투입돼는 노동량"이죠. 완전히 다른 두 상품이 어떤 비율에 의해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은, 두 상품에는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공통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이고, 오직 노동량만이 모든 상품에 골고루 들어있는 유일한 공통 속성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모든 상품이 공통적으로 갖고 잇는 유일한 경제적 객관성이구요.
그리고 맑스가 말하는 이윤이란 <노동자들이 같은 시간동안 더 열심히 일해서 새롭게 창출됀 부가가치를 자본가가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맑스는 객관화를 위해 모든 노동을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평균적 노동강도와 숙련도' 라는 개념으로 표준화 정량화시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전체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하죠. (임금은 필요노동시간에 대한 댓가입니다) 그리고 잉여노동시간만큼의 공짜노동이 바로 잉여가치와 이윤의 원천이라 주장하는거고, 그 공짜노동을 '착취'라고 명명합니다. 즉 님의 설명처럼 <열심히 일한 댓가를 생까고 노동한 시간만큼만 계산해서 지불하니까> 착취인게 아니고, 노동한 시간만큼 다 주지 않은 채 따로 띠어먹고는 마치 다 준 것처럼 눈속임을 하니까 착취라는게 바로 맑스의 착취 개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맑스의 이론이 지금의 현실 경제에 잘 안들어맞는게 아니고, 설명하는 측면이 완전히 다를 뿐입니다. 맑스의 방식으로도 현실 경제 다 설명되죠. 단기적인 가격결정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주류경제학이 훨씬 뛰어나지만, 장기적인 예측력은 맑스의 방식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오히려 공장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맑스의 자본론을 읽는게 훨씬 더 쓸모있을겁니다. 어찌하면 이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는건지 아주 자세하고 과학적인 설명이 담겨있거든요^^) 그리고 사실 저는 주류경제학과 맑스 이론이 과연 모순적으로 충돌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주류경제학은 이윤의 원천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이고, 맑스는 수요공급이나 효용체감등에 의한 가격결정 매카니즘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주류경제학이나 맑스나 각자 경제학이라는 과학 이론에 본인들의 이데올로기를 개입시켜서 그리되었을 뿐인거죠.

맞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전사님의 의도를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설명하셔도 딱히 틀린 말씀은 아니겠죠.
맑스의 방식으로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이런거죠. 어떤 회사의 노동자들이 평균적인 노동강도의 1.5배로 8시간동안 일을 한다면, 그 회사의 노동자들은 12시간을 노동한 것으로 계산이 돼는거죠. 만약 그 회사 노동자들의 임금이 평균이고 해당 업종의 필요노동시간(지불노동)이 4시간이라면, 8시간동안 공짜노동을 한 셈이 되는거구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경우는 잘 없죠. 어떤 회사가 1.5배의 노동강도로 일을 시켜서 이윤이 늘어나면 가격을 내릴 수 있고, 따라서 경쟁업체들은 줄도산을 하던지, 아니면 곧 그 회사의 수법을 염탐해서 똑같이 따라하게 될테니까요. 이게 아마 맘일몸님이 말씀하신 평준화일겁니다.)
암튼 이리매치나 저리매치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맞는데, 맑스가 굳이 노동을 시간을 기준으로 정량화를 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잉여가치 창출 수법들을 좀 더 수치적으로 폭로(?)하기 위해서이고, 나중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비니 장기적 이윤율 하락이니 뭐니 하는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니까 그런거라고 봐야죠.
all / 맘일몸님의 설명이나 피노키오님 설명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설명으로 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전사님 설명이 마르크스가말하고자 하는 근본취지에서 틀린 것은 아닌것 같구요.
다만 피노키오님의 경우 마르크스 경제학이 수요측면 즉 효용 측면을 포섭할 수 있다고 보시는것 같은데 이건 좀 아닌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맘일몸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공급측면에서만 미약하게 가격이 결정되는 과정을 설명할 뿐이라고 봐요.
그리고 물론 주류경제학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과 가정이 있음에도 이런 것들을 많이 순화시켰다고 보여지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수요의 문제를 너무 간과했던 것이 아닌가 해요. 유물론의 영향인지 아니면 도덕주의의 영향인지 인간의 심리문제 특히 경제적 심리문제에 대해 이론적인 접근이 미약했다는 거죠.
이건 인간의 마음을 어느정도 독자적인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와도 연관이 된다고 봅니다. 마음 자체의 법칙성의 문제이기도 하구요.
아무리 인간이 노동이 투입되어 가치있는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좋은 상품이 나오면 인간은 그걸 처다보지도 않거든요. 피처폰과 스마트폰의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걸 잘했죠. 슘페터가 말했던 창조적 파괴요. 이게 가능했던 것도 결국 소비자의 수요의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이론적 접근을 할 수 있는 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니다. 바로 한계효용학파가 그것이죠. 이러한 한계효용학파의 견해를 수요측면의 이론적 틀로 삼고 전통적인 고전주의 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적당히 완화해서 공급면에서도 나름의 이론적 틀을 삼아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이론적 틀을 완성한 것이죠.
결국 공산주의의 마르크스 이론이 인간의 마음을 외면하는 이론체계였기 때문에 인간이 그 공산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레드문/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마음)으로부터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를 지켜내야한다" 고요. 우파 이데올로기는 딱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는거고, 인간의 마음을 외면하는건 자본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긍정적인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대부분 '뭔가 잘못되어 있지만, 그게 가장 최적이고 효율적이라니 어쩔 수 없다' 정도의 수준으로 긍정하고 있는게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런면에서 우파들이 영 틀린 소리를 하는건 아니지요.
인간의 마음은 평등을 지향하기도 하고, 불평등을 지향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얼핏 '양시론의 모순'인데 알고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인간이 평등심리를 적용하는 대상과 불평등심리를 적용하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는 말씀이죠. 평등심리를 모든 것에 적용하는 것도 오류이고, 불평등심리를 모든 것에 적용하는 것도 오류이죠. 공산주의는 그래서 망했고, 자본주의 역시 '불평등심리를 모든 것에 적용하면' 레드문님 말씀대로 망할겁니다.
결국 우파들의 주장도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고, 좌파들 역시 그럴겁니다. 두개의 진실이 하나로 통합돼는 방법이나 이론이 분명 가능할텐데, 제가 그런걸 만들어낼 능력은 없으니 그저 툭툭 던져볼 뿐이지요.
관련한 주제로 포스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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