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vs 심재철 제 2 라운드 - 추악한 여권(민주당 계열) 운동권의 민낯

 

2019.05.09.

 

심재철이 진술서를 공개하면서 유시민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진술서의 날짜가 유시민은 1980612, 심재철은 630일이라고 나왔으니 저 진술서가 가짜이거나 조작이 아닌 이상 유시민은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유시민은 아직까지 심재철이 공개한 진술서가 가짜이거나 조작되었다는 반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유시민은 절대 심재철이 공개한 진술서가 가짜이거나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시민은 자신의 진술서와 심재철의 진술서가 언제 작성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시민은 심재철이 자신(유시민)이 쓴 진술서가 언제 작성되었는지를 모를 것이라 생각해 알릴레오에서는 심재철에게 진술서를 공개하라고 강공을 취했을 뿐이죠. 어차피 자신의 진술서 날짜가 확인되지 않으면 이 진실공방은 유야무야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본 것입니다. 진술서 날짜가 확인되지 않으면 심재철에게 덧씌워진 배신자 이미지가 있으니 대중들이 자신의 주장에 더 신빙성을 둘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심재철은 5공 청문회 당시, 이해찬 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한 유시민으로부터 자신이 1980년에 썼던 진술서 사본을 건네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심재철)1995,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재심 청구를 했을 때, 유시민이 쓴 진술서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이 심재철의 말에 따르면, 유시민은 5공 청문회 당시 이해찬 비서관으로 일 할 때 이미 자신(유시민)과 심재철의 진술서를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재철의 진술서를 입수하고 심재철에게 이를 주었을 정도이면 자신의 진술서도 그 때 입수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유시민은 이미 자신의 진술서와 심재철의 진술서를 확보하고 있었으면서도 대화의 희열2’에 나와 그런 거짓을 섞은 글쓰기 재주를 자랑했던 것이죠. 유시민은 심재철이 1995, 자신(유시민)의 진술서를 입수했던 사실을 모르고 그런 자랑질을 늘어놓았다가 심재철에게 반격을 당한 것이죠. 심재철의 1차 반격이 있었을 때, 유시민은 사실대로 고백하고 사과를 했어야 하는데, 진술 일자를 거론하며 심재철을 재공격합니다. 심재철이 630일에 이미 불었고, 자신은 심재철의 진술에 따라 7월에 불게 된 것이라고 사기를 쳤죠. 이마저도 심재철이 날짜와 지장이 찍힌 진술서를 공개하자 거짓임이 드러나게 됩니다.이 정도로 자신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면 잠수를 타던가, 아니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는데, 심재철이 자신의 진술서를 공개한 것이 마치 불법이나 비도덕적 행위인 것처럼 헛소리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진술서를 공개하자고 제안해 놓았으면서 심재철이 진술서를 공개한 것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며 마치 자신이 선처하는 것처럼 나불댑니다.

더 웃긴 것은 심재철이 진술서를 공개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심재철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한 것입니다. 저건 자신이 쿨 한 것처럼 보이려는 수작이고, 자신의 진술서를 남(심재철)이 공개한 것은 불법(명예훼손이나 사적 정보 공개)인 것처럼 대중들이 인식하도록 하는 트릭일 뿐이죠. 유시민 자신이 먼저 진술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해 놓고 저 따위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진술서 진실 공방이 진행된 몇 일간의 유시민의 언행을 보면 정말 역겨워 토가 나올 지경입니다.

이렇게 심재철과 유시민 간의 진실공방이 유시민의 완패로 끝이 나자, 꼴통 좌파 진영에서 유시민을 구하려는 인간들이 나타납니다. 유기홍, 윤호중, 한인섭, 양민호 등 심재철의 서울대 선후배들과 동기들이 심재철을 배신자라며 비난하며 유시민 옹호에 나섰습니다.

<서울대 동료 "유시민 맞고 심재철 틀렸다" -윤호중, 유기홍, 한인섭, 양민호>

http://www.ekore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521

그런데 이 자들은 유시민과 심재철 간에 벌어진 논쟁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심재철을 공격합니다.

이 자들은 심재철이 유시민을 비판한 이유나 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해를 못하거나 모르는 것이 아니라 논점을 이동시키거나 본질을 희석시킬 속셈으로 메신저(심재철)를 공격하는 비열한 수법을 쓴다고 보여집니다.

심재철은 유시민이 그런 진술서를 썼다는 것을 탓하거나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런 엄혹한 시절에 합수부에 잡혀 갔다면 유시민처럼 고문에 못 이겨 그런 진술서를 썼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유시민처럼 무용담의 소재로, 그리고 자랑거리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합수부의 서슬퍼런 위세에 눌려 자기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직의 일부를 실토했다는 자괴감에, 그리고 그런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진술한 것 때문에 동지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또 처벌받는 증거로 사용된 것에 대해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껴 차마 사석에서라도 그것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시민은 그걸 공중파 예능 프로에서 자랑 삼아 떠들었죠. 그것도 거짓말을 섞어서 말입니다. 저나 심재철이 유시민을 비판하는 지점은 이 부분입니다. 유시민이 그런 진술서를 썼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절대 아니구요.

그런데 윤호중, 유기홍, 한인섭, 양민호 등의 인간들은 저나 심재철이 비판하는 유시민 발언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천착하지 않고 모른 체 하면서 심재철 개인의 도덕성을 들먹이며 유시민의 주장을 정당화 하는 해괴한 짓을 합니다. 이들의 심재철 비판이 궤변인 것도 어이없지만, 이 궤변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들은 심재철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서 합수부나 검찰에 협조해 거짓 진술을 하여 김대중의 사형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배신행위를 했다고 공격합니다. 배신자가 조직을 보호하려 애쓴 유시민을 비판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죠.

유시민이 비밀 조직을 보호하려 공개 조직(학생회)과 동료(학생회 간부)들의 활동만 진술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심재철로 인해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는 것도 생구라입니다.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친북 단체인 한민통의 의장으로 활동한 것과 학생들을 선동해 소요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죠.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후자보다는 전자의 이유가 더 강하게 작용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부가 사형 언도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심재철은 한민통과는 무관하니 한민통 관련한 문제는 별개로 하고, 여기서는 김대중이 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 선동한 죄로 사형 언도를 받게 된 것에 심재철이 얼마나 악역을 했는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호중 등은 심재철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공판에서 다른 사람(피고인)들은 혐의를 부인하는데, 심재철만 인정해서 합수부가 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고, 이것이 김대중 사형 선고에 결정적 근거가 되고 다른 피고인들도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과 동일한 주장을 이해찬()에서도 했지요. 이와 관련한 내용을 201810월에 보도한 한겨레와 jtbc의 기사를 아래에 링크합니다.

<이해찬이 심재철 사태 언급 꺼리는 이유>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64769.html

 

<허위 자백 논쟁? 심재철-이해찬, 38년전의 '순서'>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707782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피고인들이 모두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라고 진술을 했는데 심재철 의원만 그 사실이 맞다라고 인정해서 신군부가 해당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호중, 이해찬 등의 주장이나 한겨레, jtbc 보도는 사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심재철은 함수부에서의 진술서, 공판에서의 증언과 진술, 1994년 재심 청구 당시의 자술서, 그 어디에서도 저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해찬 등 다른 관련자들이 혐의를 인정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는 공소장에 증거로 첨부된 이해찬의 진술서 내용입니다.


<이해찬 진술서 1980.6.26. 000420~000424>

“46) 5.6. 14:00 아현동 소재 포그니 경양식집에서 이○○을 만나 본인은 서울대에서 5.14. 계엄해제 시한을 설정했으며 계엄이 해제 안 되면 가두로 진출할 것이라고 보고하니 이○○은 잘 되었다고 하여서 5.14까지 계엄이 해제 안 되면 가두시위 하도록 하고 총학생회를 움직여 서울시내 각 대학과 지방대학이 일제히 시위하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47) 5.8. 12:00 반포 경양식집 애천에서 이○○, ○○, ○○, ○○ 등을 만나 민청협 확대 간부회의를 열어 확대시위 관계 논의 끝에 그 행동으로서 조○○로부터

·조속한 시일안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하여 정부를 타도하고

·각 대학은 다음에 알려주는 일자에 광화문에 집결하며

·각대학 시위코스는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결정토록 하고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해 각목, 화염병, 돌멩이를 준비하고

·경찰은 요즘 사기가 저하되어 있으므로 투석만 하면 얼마든지 뚫릴 것이며

·충돌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기면 일반시민이 합세하여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면 중앙청을 비롯한 주요 시설물 점령하는데 이때 학생들의 희생이 있을 것이므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등을 지시받았고

○○5.9.에 국민연합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 선언이 나왔으니 대학에 배포하라고 지시를 하는데

 

<이해찬 진술서 1980.6.27. 000483~000487>

“4.19.에는 현금 5만원을 받았으며 5월 들어서는 학교를 교외시위로 유도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고 김대중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국민연합 등 사회단체와 공동으로 반정부활동 공동으로 한다는 것을 얘기 들었습니다. 본인은 이○○의 말에 부분적으로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동조했습니다. ○○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학생시위를 유도하여 정부 전복을 시도하라고 했으며(중략)5.8. 영동 인창상가 애천에서 만나 국민연합에서 성명을 냈으니 국민연합과 학교시위 공동투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교외로 시위를 유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심재철이 이해찬측의 주장, 그리고 한겨레 신문과 jtbc 보도를 반박하면서 제시한 자료입니다.

 

<심재철의 반박 자료>

1. 김대중씨는 114차 공판에서 이 512일 회합을 시인했습니다.

 

김대중씨가 사형을 언도받은 반국가단체 결성혐의는 유죄가 인정되면 무조건 사형입니다. 그 외 김대중씨의 내란음모정황의 관건은 512일 김대중씨의 국민연합 북악파크호텔 회합입니다.

검찰: 피고인은 검찰에서 1980.5.12. 그린파크(북악파크)호텔에서 장○○로부터 학생들의 폭력시위를 이용 정부를 전복하자는 요지의 말을 들은 바 있다고 진술하였는데 사실인가요.

김대중: ○○는 끝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당시 3~4 파트로 앉아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자세히는 듣지 못하였으나 내 동지들은 전부 그렇다고 하는데 나만 아니라고 하면 비겁할 것 같아서 그런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습니다.(1980.9.3. 114차 공판 002364~002365)


 2. 이해찬씨 역시 공판에서 주요 공소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검찰: 피고인은 이○○ 피고인을 아는가요.

이해찬: 저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 4년 선배로 민청협의 같은 회원이라 잘 압니다. 그리고 1980.1 하순경부터 자주 만나 학생데모등에 관하여 논의하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 서울대의 데모를 배후 조종하였습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417) 

검찰: 피고인은 조○○를 몇차례 만났는가요.

이해찬: 3,4월에 4,5차례 정도 만났습니다.

검찰: 피고인은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말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이해찬: . 김영삼집과 김대중집을 방문하여 함께 계엄령 해제에 노력하자고 하였습니다. 복학 후 느낀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하면 학생들이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군과 학생들이 충돌하는 등 마찰이 없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두 분 정치인을 만났습니다.

검찰: 피고인은 1980.3.2. 경 혜명다방에서 이○○ 피고인을 만난 사실이 있는가요.

이해찬: .

검찰: 그때 이○○ 피고인으로부터 앞으로 현 정부의 정권연장 기도를 막기 위하여는 학생운동의 강화가 필요하니 서울대는 복학생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있는가요.

이해찬 네. 있습니다.

검찰: 피고인은 1980. 3.17. 19:00경 서대문구 문화촌에 있는 서○○의 집에서 장○○, ○○, ○○, ○○ 등과 회합을 한 일이 있지요.

이해찬: .

검찰: 그때 장○○로부터 계엄령 해제를 위해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학생들과 교회측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여야한다는 의견을 들은 사실이 있지요.

이해찬: 내용이 좀 다릅니다.

검찰: 그때 장○○는 국민연합을, ○○과 황○○은 교회측을, 피고인과 이○○, ○○은 서울대를, ○○는 중대복학생 이○○, 한신대 복학생 김○○, 연대복학생 송○○, 이대 복학생 최○○을 각 담당하여 실천하기로 하였지요.

이해찬: . 맞습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418~1420) 

검찰: 피고인은 1980.3.18. 19:00경 아현동 소재 포그니 경양식 집에서 이○○을 만나 동인으로부터 학생회와 대학 신문을 복학생들이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지요.

이해찬: .(1980.8.21. 15차 공판, 001421) 

검찰: 이 때 이○○ 피고인이 써준 비상계엄 해제, 유신잔당 퇴진등을 주장하는 내용의 추도사를 채○○으로 하여금 낭독하게 한 사실이 있는가요.

이해찬: . 있습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428) 

검찰: 그 때 이○○ 피고인으로부터 참배 후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등을 구호로 하여 4.19 묘지로부터 가두시위를 전개하라. 수많은 사람이 투옥되어야 계엄해제를 관철할 수 있다는 지시를 받았지요.

이해찬: 4.19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묘지 참배만 하고 가두시위나 동아일보사 앞에서의 농성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지시는 받았습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433) 

검찰: 그때 조○○ 피고인이 서울대는 망 김상진 추도식에서 계엄령 해제 요구 시위가 있었으니 타 대학도 민주화 대행진의 이슈를 계엄령 해제 등 정치적 문제로 전환하라고 하여 전원이 이에 동의한 사실이 있는가요.

이해찬: . 있습니다.

검찰: 총학생회를 개최하여 12,000여명의 학생들로 하여금 15개의 플랭카드와 100여개의 피켓을 앞세우고 비상계엄령의 해제등 구호를 외치면서 교문앞, 기숙사앞, 교련장, 4.19탑을 돌아 위 광장으로 진행하게 하는 등 불법시위를 교사한 사실이 있지요.

이해찬: .(1980.8.21. 15차 공판, 001444) 


3. 다른 피의자들도 이해찬씨의 공소사실 시인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습니다. 

검찰: 그래서 각 대학 복학생 조직을 이해찬 중심으로 정비하여 각 대학별로 사정에 알맞게 동원 계획을 세워 조직적인 학생 시위를 야기하였나요.

○○: 각 대학 복학생 조직을 이해찬 중심으로 정비하자고 하였습니다.

검찰: 이해찬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이해찬은 서울대 복학생으로서 영향력이 크고 서울대에서부터 시위를 시작하여야 확산이 빠르기 때문입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381) 

검찰: 피고인은 그 날(1980.4. 10) 이해찬으로 하여금 서울대 데모를 주동하게 한 다음 타대학의 데모를 유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여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은 사실이 있는가요.

○○: .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385) 


4. 재판 공판조서에 따르면 검찰이나 경찰의 조사 중 고문이나 협박이 있었느냐는 검찰관의 질문을 받은 전원, 17명이 고문이나 협박사실이 없었다고 반복해 확인합니다. 이해찬도 역시 고문이나 협박받은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합니다. 

검찰: 피고인은 검찰관 앞에서 조사를 받을때 진술을 강요하거나, 폭행 협박을 당한 사실이 있는가요.

이해찬: 없습니다.(1980.8.21. 15차 공판, 001456~001457) 

심하게 고문받은 심재철을 포함한 7명에게는 고문이나 협박 사실이 있었느냐는 질문 자체가 없었습니다. 


5. 재판 공판조서를 보면 피의자 전원이 검찰피의자 조서에 임의로 사실 그대로 진술했다고 기입하고 무인지장을 찍었음을 증언했습니다. 이해찬도 공판에서 신문조서를 읽어본 후 서명하고 무인하였다고 진술합니다.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읽어본 후 서명하고 무인하였지요.

이해찬: .(1980.8.21. 15차 공판, 001456~001457) 


6. 이해찬은 114차 공판에서 1980510일 심재철을 만났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당일 학교에 오지 않고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했으나 이해찬의 운동권 친구인 박모씨가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이해찬의 위증을 밝혔으며 이해찬이 재판장에게 사과를 했으며 이 사실은 1980.9.3. 경향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이해찬: 동 증인의 진술에 대하여 별 이의없으며 제가 백○○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진술한 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므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1980.9.2. 114차 공판, 002391) 


7. 이해찬은 심재철이 체포된 630일 이전에 쓴 자술서에서 ‘5104시 등교해 사회학과 교실 등에 유인물을 배포하였다고 자술한 바 있습니다.

48) 5.10, 16:00 사회학과 여사무원에게 정○○이 갖다 놓은 이○○ 초안의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싸우자유인물 40부를 받아 사회학과 강의실에 살포했는데 그 내용은 신현확은 자유당 독재의 하수인으로, 유신체제의 하수인으로 활약한 자로서 현재까지도 유신연장의 망상을 꿈꾸고 있으니 전 대학이 궐기하여 유신잔당을 쳐부수자라는 것이었습니다.(이해찬 진술서 1980.6.26. 000424) 


8. 1980912118차 공판 최후진술에서 피의자 중 4,5명은 공소사실 전부를 인정했음을 언급했습니다.

○○: 공소사실 다 시인합니다.(000319)

○○: 모든 공소사실을 인정합니다. (중략) 지금까지 충분히 반성하였으므로 재판부의 각별한 배려가 있기를 바랍니다.(000308)

○○: 저의 자필 진술서와 검찰관 작성의 신문조서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000311)

○○: 우리도 반성하고 뉘우쳤으니 관대한 처벌을 바랍니다.(000314) 


9. 최후 진술에서 이해찬은 관대한 처벌을 바란다고 했지만 심재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심재철: 재판장님 그리고 여러 재판관님 할 말은 많지만 학생 시위의 일부분을 맡았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하고 데모를 하여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 이해찬 등은 관대한 처벌을 바란다고 말했다.(1980.9.12. 118차 공판 최후진술, 000315) 


10. 심재철만 사실과 다른 공소사실을 맞다고 인정해서 신군부가 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심재철은 공판에서 사실과 다른 공소사실을 부인했습니다. 4.19와 같은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고 승낙한 적이 있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민청협이 국민연합과 보조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는지 김대중을 내세워 정권을 인수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없었다고 사실 관계를 밝혔습니다.

심재철이 단과 학생장들에게 각목을 준비하는 가두시위를 지시하였냐는 검찰의 질문에 각목을 준비하라는 말을 안했음을 분명히 해 폭력시위를 부인했습니다.

그 외 심재철은 공판에서 다른 피의자들의 공소사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김대중씨와 다른 피의자들의 100쪽에 달하는 증거목록(002226~002327)을 보면 각 피의자별 경찰 검찰 공소사실별 증거상세 기록과 입증취지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일례로 김대중피고인의 검찰 증거목록(002235)을 보면 경찰, 검찰 공소사실 입증 증거로 (김대중의 공소유지에) 다른 피의자들의 진술서가 인용된 경우가 많습니다.그런데 100쪽에 달하는 김대중, 이해찬씨를 포함 전 피의자들의 증거목록에 심재철 이름조차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심재철의 증언이 김대중씨나 다른 피의자들의 공소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는 객관적 정황증거이며 심재철이 다른 피의자들의 공소사실에 영향을 주었다거나 JTBC 허위사실 보도처럼, 심재철의 공판진술에 따라 신군부가 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증빙합니다.

또한 다른 피의자들의 공소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도 아닌 심재철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의자들의 사형 및 중형 선고에 영향을 주었다는 범여권 일각의 허위사실 주장도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터무니없음을 증빙합니다.(김대중씨의 공소장에 심재철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음).


11. JTBC가 구속이나 체포 시점이 불분명하다는 기자멘트로 시점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해찬이 체포된 것은 1980624일이고 심재철이 체포된 것은 1980630일입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김대중이 김상진 열사의 분향소에서 준 20만원과 관련하여 공판에서 김대중과 심재철이 진술한 내용입니다. 합수부나 검찰이 이 20만원을 김대중이 학생 소요를 부추키는데 사용한 것으로 몰아가려고 했으나, 심재철이 이를 부인하고 조의금이라 말하며 유족에게 전달된 것을 확인시킴으로써 합수부나 검찰은 이를 김대중 내란음모의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검찰: 그때 서울대 학생회장인 심재철에게 20만원을 조의금으로 준 일 있나요.

김대중: 가족에 전하도록 비서에게 주었는데 비서가 누구에게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검찰: 그곳에서 피고인이 조사를 했나요.

김대중: 심재철이가 먼저 함석헌을 소개하고 저를 소개했는데 우리는 정치의 이용물이 아니라고 하며 저를 소개해서 서운한 마음이었는데 두 세 마디 했습니다.(1980.8.20. 13차 공판조서 00963~00964)

 

김대중: 제가 20만원, 함선생이 2만원 해서 22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비서를 시켜서 주었고 분향소에 가보니 학생이 모여있었는데 (심재철이) 함석헌 선생을 소개하고 저를 소개하는데 김대중씨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는데 조사를 한마디 하고 왔습니다.(1980.8.25. 17차 공판조서 001678)

 

검찰: 김대중 피고인이 그때 피고인(심재철)에게 20만원이 든 봉투를 준 사실이 있나요.

심재철: . 2만원은 함석헌이 내어 전부 22만원을 받았습니다.

검찰: 위 돈은 무슨 명목으로 주던가요.

심재철: 눈치로 봐서 장례금으로 인정합니다.(1980.8.22. 16차 공판조서 001602)

 

이상의 이해찬의 진술서와 공판에서의 진술, 심재철의 반박문을 읽어 보시니 이제 진실의 윤곽이 잡히시나요?

그리고 이해찬이 합수부에서 진술한 날짜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1980626일과 27일입니다. 유시민은 517일 체포, 611일과 12일 진술서 작성, 이해찬은 624일 체포, 626일과 27일 진술서 작성, 심재철은 630일 자수, 630일 진술서 작성.

611일 작성된 유시민의 진술서, 626일과 27일에 작성된 이해찬의 진술서, 630일에 작성된 심재철의 진술서를 보면 누가 먼저 불고, 누구의 진술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의 빌미로 작용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요?

 

90페이지에 달하는 유시민의 612일의 진술서를 보면, 이 진술서가 합수부에게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덮어씌울 수 있는 빌미를 많이 제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검찰의 기소장이나 공판에서 검찰이 무기로 사용되어졌을 법한 유시민의 진술 내용을 아래에 따로 모아 봤습니다. 유시민은 공개된 조직과 학생회 간부들, 그리고 그들의 활동만 진술서에 써 비밀 조직을 보호했다고 설레발을 치지만 진술서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시민 진술서 내용>

 

그 복학생이 바로 학기초부터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했으므로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나 이날 복학생총회에서의 시국성토와 교내시위가 다음날부터 정치문제를 들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고조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 그에 따라 학생회는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등이 있을 때 18:00시 조금 넘어 연성만(人文大), 심상환(사회학과), 오세중(철학과) 등 복학생 6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때 심재철은 방문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어서 오쇼하고 인사를 한걸로 보아 복학생과 심재철 사이에 미리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명목상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를 보았으나 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연성만(인문대)이었으며 심상환등 다른 복학생들은 다들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채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 우리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론이나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되므로 병영집체훈련거부는 깨끗이 철회하고 52일부터는 교내시위를 벌이면서 비상계엄문제를 이슈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처음에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 등이 반대의 뜻을 보였으나 결국 설득당해 복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이날 17:00경 학생 6000여명이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고 있을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그리고 저와 그 외 2명 정도의 학생회간부들이 앞에 모여있는데 이해찬 심상환 등 3~4명의 복학생들이 콜라 5~6잔을 사왔고 그중 이해찬이 저에게 콜라를 주었으므로 제가 411일 일도 있고 해서 화해하느라 먼저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했는데 그때서야 저는 바로 그가 이해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제가 일전에 다툰 일은 미안합니다고 사과하자 이해찬은 일을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수고가 많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5212:)0시부터 교내 일만이천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민주화대총회중 김부겸(복학생, 정치학과4)이 아주 탁월한 웅변력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해 응소키로 한 총학생회의 결정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일만이천 학생을 멋지게 설득하고 위기에 처한 총학생회를 구출해 주었기 때문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많은 복학생중에서도 김부겸에 대해서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총회가 끝난 후 김부겸형이 학생회를 살려줬다라고 심재철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습니다.“

 

같은 날 18:30경 총학생회장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부회장 김학진 문예부장 권혁철과 제가 같이 봉천동의 한식집(한식집이름 미상)에서 생선찌개와 곱창을 시켜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 2병 정도를 마셨는데 저는 이때 워낙 피곤하였으므로 술은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그동안 모두들 수고했다면서 격려해주고 식사대 약 10,000원도 자기가 지불하였는데 그 돈의 출처는 알지 못합니다.“

 

5815:00 ~ 5910:00시 사이에는 법대 경영대 미대의 공동 시국성토대회 및 자유언론 쟁취대회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송건호씨와 해직기자들이 참가하였다고 알고 있으며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복학생 김병곤(경제4)은 저에게 계엄군이 1300:00~ 03:00시에 수도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휴전선부근에 긴장이 있다. 이사실은 방송국에서 확인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학생회관 2층 라운지의 농성학생 뒤처리를 저에게 맡긴 후 총총히 복도를 빠져나갔습니다.”

 

이 때 연설을 잘하는 김부겸이 다시 등장하여 학생회가 잘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총학생회의 잘못이 아니라 복학생들이 소위 통박을 잘못 굴려서 그랬다고 말하여 총학생회를 다시한번 구제해 주었으며 그의 말로 미루어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김부겸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19:30경 이화여대의 평학생 두 명이 도서관에서 목격했다면서 학생회장실에 찾아와서 검거소식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비슷한 시간에 총학생회장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와 노량진에 있다는 전화가 왔읍니다. 저는 19:10경 이 홍동의 전화를 받고나서 사실임을 확신하고 학생회관 각 방을 다니면서 전달해서 집행부실에 있던 학생들을 귀가토록했고 학생활동위원회실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복학생 이해찬, 이범영, 김병곤, 연성만, 심상완3명정도 도합 8~9명이 있었는데 저는 소식을 전해주고 다시 총학생회장실로 돌아왔습니다.”

 

유시민의 진술서에는 8~9명의 복학생들이 등장하고,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합수부에 체포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살았습니다. 이들 복학생들은 학생회 일에 간여하고 학생회 활동 방향을 제시하고 주도하고 있음을 유시민은 진술합니다. 특히 이해찬과 김대중과의 관계도 설명하고, 마치 이해찬 등의 복학생들에 의해 학생회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합수부나 검찰이 김대중이 이해찬을 매개로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프레임을 짤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유시민은 심재철이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지급한 식사대가 마치 어떤 배후가 지원한 돈인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는 서술도 합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심재철의 소재(노량진)가 드러나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울대 학생회와 학생회 간부의 활동, 서울대의 상황, 타대학과 연계한 내용, 타대학 학생회의 활동을 미주알고주알 세밀하게 고자질한 것은 물론, 공개되지 않은 인물들(복학생)의 이름과 그들의 학생회 간여 내용 등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고, 결정적으로 김대중과 이해찬의 관계, 심재철의 사용 자금의 배후 의혹, 심재철의 소재 등도 까발렸습니다.

이것은 잡히면 공개조직은 불더라도 비밀조직은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는 유시민의 주장이 한깟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호중, 유기홍, 한인섭 등이 심재철 vs 유시민의 논전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해찬도 이제 이 전장에 자의든 타의든 들어올 수밖에 없으며, 심재철도 그 동안은 억울해도 혼자 안고 가야 했던 1980년대의 사연(사정)을 어쩔 수 없이 공개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심재철과 유시민의 전투가 이제는 심재철과 이해찬의 전쟁으로 확전이 되었으며, 이 싸움 과정에서 어느 누구 하나는 정치적인 사망이나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자료들이 공개되면 과연 어느 진영이 더 타격을 받을지도 관심거리입니다. 어느 사람에게, 어느 진영에게 헬 게이트가 열리게 될까요?

 

* 참고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관련자들의 형량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유시민은 합수부에서 풀려나 기소도 되지 않아 이 명단에 있지 않습니다. 이 명단에서 재학생은 심재철이 유일하며 최연소입니다.

 

김대중(55,정치인 사형) 문익환(62,목사 15) 이문영(53,교수 20) 예춘호(52,전국회의원 12) 고은태(47,시인 15) 김상현(45, 정치인 10) 이신범(30,학생 12) 이해찬(27,학생 10) 조성우(30,학생 15) 이석표(27,학생, 7) 송기원(32,학생 10) 설훈(27,학생 10) 김종환(47,정치인 4) 심재철(22,학생 5) 서남동(62,교수 2.5) 한승헌(45,변호사 3) 이해동(45,목사 4) 한완상(44,교수 2.5) 송건호(52,전동아일보편집국장 2) 유인호(54,교수 2) 이호철(36, 소설가 3.5) 김윤식(66.정치인 집행유예) 이택문(45,전국회의원 집유) 김녹영(56,전국회의원 집유

 

 

* 해당 사건과 관련되는 기사나 블로그들을 링크해 드리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심재철 블로그

https://cleanshim.blog.me/221374077280

 

2) 김대중 내란음모 군법회의 고등법원 판결문

http://dlcjfdnd6.egloos.com/4384722

 

3) 1981년 고등법원 및 대법원 판결문, 재심 무죄 판결문

https://ejung01.tistory.com/86

 

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1988년 청문회 증언

https://blog.naver.com/choky0417/8009080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