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황당한데 아니,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자기네가 원자폭탄 투하한 이유가 소련의 대일전 참여 이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이미 말했는데 무슨 역사학자들이 전쟁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 운운하지? 자기는 사료 한번이라도 봤나? 이정식과 이완범의 냉전의 기원 연구를 참고하면 이 부분이 명백해진다. 냉전사에서 소련의 참전 역할을 조명한 연구는 이완범과 이정식의 연구가 중요한 것이라 필히 참고해야 한다.

번스 미국 국무장관은 1960년에 전쟁 15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 급박한 이유가 있었는가?

답: 우리(대통령인 트루먼과 번스)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 전에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소련을 유럽에서 보다 잘 다루기 위해 원자폭탄의 보유를 과시했다.”

아주 솔직하게 목적을 말하고 있다. 아이젠하워 또한 회고담에서조차 “일본은 이미 패배해버렸기 때문에 핵무기 같은 야만적인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뒤에서 보다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원래 포츠담 회담 자체는 얄타회담이 끝나고 나서 3개월 뒤에 치러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7월까지 2달 넘게 미뤘다. 이 시기에 핵폭탄의 성능실험이 이뤄졌고 트루먼은 이 결과를 보고 받은 뒤에 핵폭탄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핵무기 투하 이후에나 미국의 핵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는 건 명백한 거짓이다. 이미 미국은 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소련을 어떻게든 대일전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켜야 하고 핵폭격을 그 수단으로 생각하며 소련에게도 경고의 의미로 핵무기 보유를 과시한다.

미국 대통령과 국무국장의 과시는 포츠담 회담장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미국이 손에 넣었다는 트루먼의 발언에 대한 서기장의 반응은? 번스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축하하오, 나는 그 무기가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오.”라고 했다. 그의 무관심한 태도에 번스는 다소 당황하다가 스탈린이 핵무기에 무지해 이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 영민한 스탈린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사안들이 예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새로운 세계전략으로 산출되어 나왔다. 미국 국무성과 국방부에 포진한 수많은 소련 스파이들로부터 공수된 최상급 1급 비밀정보들이 매일 아침 서기장의 책상 위에 올라왔고 서기장의 하루는 그 1급비밀정보를 정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 그가 미국 내부의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당장에 본국의 물리학자들을 소환해 자문을 받고 2년 전에 중단했던 소련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나중에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담당했던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정보를 넘겨주게 된다.

소련과 미국(+영국)은 이미 동유럽에서 첨예하게 영유권 분쟁을 겪었다. 솔직히 말해 미국과 영국은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장 전략에 기가 질렸다. 리비아에 군사기지를 설치해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스탈린의 야욕을 겨우겨우 저지한 시점에서 극동 지역에서는 또 얼마나 가져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이미 미국의 승리로 넘어간 시점에서 더 이상 희생을 늘리고 싶지 않았고 소련군이 개입하여 일본의 전력을 붕괴시킨다면 충분히 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핵무기의 개발과 함께 이 전략은 무효화된다. 더 이상 소련의 힘이 필요없어지게 된 것이다. 핵무기의 엄청난 위력에 트루먼은 지나치게 흥분했고 루즈벨트와 달리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참모들과의 의논 없이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련을 향후 국제질서에서 배제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제 극동에서 일본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건 온전히 미국의 몫이어야 했다. 소련에게 대일전의 참가를 허용해서는 안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일본제국에게 미국의 원자탄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것인지 그 위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소련에 대한 지대한 경고였다.

그런데 이미 일본은 소련에게 조기항복의 뜻을 4월 초에 전달한다. 일본은 최후의 시도로써 소련에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1945년 4월 5일 몰로토프 외상은 사토 나오다케 일본 대사에게 소련은 더 이상 소일중립조약을 연장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이미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영미와 유럽전쟁이 마무리된 시점에서 3개월 이내에 대일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일본과의 조약을 연장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극도로 당황한 사토 대사는 그렇다면 앞으로 향후 1년까지는 조약이 유효하게 존속하냐고 궁색하게 물었고 몰로토프는 그렇다고 답했다. 사토 대사의 통보를 받은 일본 제국 정부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크게 동요한다. 당연한 일이 이미 일본은 전선을 너무 넓게 잡아버려서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이 100만명도 안되는 규모였기 때문이다. 남방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시점에 소련의 대일전 참가가 명백해지자 일본 정부는 크게 당황하여 소련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주재해줄 것을 요청한다.

5월 15일부터 일본은 종전을 위한 대소교섭에 나선다. 일본은 소련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소련의 중재하에 미국과 교섭하려는 일본의 시도는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7월 10일, 11일 사토 소련주재일본대사는 몰로토프 외상과 로조프스키 차관에게 직접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일본 정부는 매우 다급했다. 사토는 황태자였던 고노에를 파견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서한을 7월 13일에 가져온다. 13일부터 25일까지 무려 12일에 걸쳐 사토 대사는 로조프스키 차관에게 전쟁의 희생을 줄여야 할 것 아니냐며 간청했지만 소련은 묵묵부답이었다. 몰로토프 외상은 “소련은 전쟁을 짧게 하고 희생을 줄이기를 원하고 있다.”고 답변한다. 사실 이미 소련은 이 당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미국이 원자탄을 완성했으며 그 위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대독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열병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대일전에 참여할 군대를 시베리아와 북만주, 몽골 지역에 산개시킨다. 일본은 이와 같은 소련의 태도에 깊이 절망한다. 황태자까지 보내려 했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으나 소련은 거부했다. 일본 지도부는 이 상황 속에서도 항복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일본 지도부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 사이에 60여만 명의 인민이 개죽음을 당했다.

한편 1945년 7월 말까지 소련군 164만명, 대포 3만 문, 탱크와 자동화포가 5,250문, 비행기 5,407기가 극동지역으로 이동해 원동군으로 재편된다. 이 원동군은 8월 9일 전쟁을 개시하여 만주, 몽골, 북중국, 한반도 북부에서 관동군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며 8월 20일 관동군이 사실상 항복하는 시점까지 11일동안 엄청난 규모의 전쟁을 벌인다. 관동군이 쉽게 무너졌다고들 알고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를 태평양 함대를 통해 들어왔지, 만주 일대를 통해서는 관동군의 저항에 막혀 들어가지 못한다. 100만명도 안되는 규모였지만 관동군은 치열하게 저항했고 일본의 항복이 공식적으로 이뤄진 뒤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요령성 안둥이 소련군에게 점령되는 건 일본정부가 항복한 뒤에서 한참 지난 8월 27일이다.

다른 한편 이런 소련군의 움직임과, 결정적으로 일본의 대소련 교섭을 일본 암호해독으로 접한 미국은 크게 당황하였다. 만일 일본이 소련에게 의탁하여 중요한 영토를 할양한다든지, 혹은 소련이 중립을 취하거나 일본에게 설득당해 미국과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든지 여러 가능성이 점쳐졌다. 특히나 최악의 경우에는 일본이 소련에게 조기항복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일본이 소련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그런 결정을 내려버리면 극동에서의 소련의 이해관계는 극대화되고 미국은 그 큰 희생을 치르고도 소련에게 고스란히 이권을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두려워할만한 일이었다. 미국이 택한 것은 포츠담 선언을 연기하고 서둘러서 핵무기를 완성시키면서 소련의 대일전 참여를 독촉하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신무기를 실험할 시간을 벌기 위해 5월에 열리기로 했던 포츠담 회의를 7월 17일까지 연기시킨다.

앞서 말했듯이 트루먼은 핵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흥분한다. 본래 500TNT 정도일거라 예상되었던 핵무기의 위력은 무려 17,500TNT로 측정되었고 미국 지도부는 이 막강한 무기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1945년 5월 25일부터 6월 7일까지 열렸던 스탈린과 해리먼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직접 일본을 점령할 의사를 전달한다. 트루먼은 일본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핵무기의 이런 막강한 위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포츠담 회담 하루 전인 7월 16일에 그 보고를 받았으니 과연 갓블레스아메리카라 생각했을 것이다. 육군 장군 마샬과 군부 장성들은 핵무기의 위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향후에 소련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소련을 배제할 것을 건의한다. 이제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이전에만 일본을 굴복시키면 된다. 그런데 스탈린이 7월에 이미 극동지역에 164만명 규모의 소련군을 이동시키며 일본과의 전쟁을 하려고 하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원자탄이 투하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원자탄 소식을 듣자마자 8월 7일에 오후 4시 30분에 8월 9일 대일전을 선포한다. 어떻게든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에라도 소련군이 일본군과 전쟁을 시작하면 향후의 이권쟁탈에 소련의 이해관계를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생각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극동에서의 이해관계를 무시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실패하게 된다. 소련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대일전에 소련을 배제하려고 하던 트루먼의 계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며 북조선, 만주 등의 이권지역을 소련에게 빼앗겼다. 이 중간에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의 항복 이전에 서둘러 참여해야 한다는 소련군대의 대규모 침공에 놀라 그 이전까지 미루고 지연하고 있던 소련과의 협정을 서둘러 체결하게 되니, 이것도 사실 미국의 전략적 실패라 할 수 있다. 일본영토를 얻지 못한 소련은 분을 삭히지 못했고 미국이 소련을 배제하기 위해 핵을 투하했다고 대대적으로 비난하였다. 미국의 원폭은 사실상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는 대량살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동맹국인 소련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냉전의 기원이라는 맥락 속에서 원폭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일본제국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 행해진 게 아니라 미소의 대립, 일본제국의 평화헌법체제로의 전환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다. 이 맥락을 고작 원폭을 맞고 제국이 무너졌다 수준으로 축소해서 이해하면 곤란하다.

"Somewhere unwritten poems wait, like lonely lakes not seen by any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