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 박진우님이 정리한 내용이 잘되어서 옮겨 봅니다.

깜도 안 되는 의혹 2)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선제 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서 발포하고, 금남로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사건일지>에 기술했듯,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는 후다.

깜도 안 되는 의혹 3) 5.18 당시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전문 간첩이 있었던 것 아닌가.

5.18에서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이다. KM900은 궤도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 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당시 버스기사와 트럭기사들이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시민의 KM900 장갑차 운전이 불가능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게다가 한국은 징병제 국가다.

깜도 안 되는 의혹 4) 어떻게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 38개를 모조리 털어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시민군 내부의 간첩들과 시민군이 조응한 것 아닌가.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상당수 보관하고 있었다. 접근이 매우 쉬웠다. 5.18 당시 전라남도의 경찰서, 파출소에 설치된 예비군 무기고는 269개 이상이었으며, 5.18 도중 시위대에 탈취된 38개 무기고는 전체 무기고 수에 비하면 일부분이다.

깜도 안 되는 의혹 5) 시위대가 쓰던 카빈 소총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 소총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틀린 주장이다. 5.18 진압 후 의사, 검찰, 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총기 확인이 불가능한 '총상'의 경우, 해당 사망자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면 계엄군의 총격을 당한 경우가 대부분.)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나온 이유는 80년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 위원회가 열리고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카빈에 의한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의 공식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군부에서는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해 폭도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도로 분류되면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으므로, 당시 검시자였던 의사 2명이 사망자들을 최대한 비폭도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M16 보다 카빈 사망자로 분류된 경우가 더욱 많아진 것으로 95년 국방부 재조사에서 밝혀졌다.

깜도 안 되는 의혹 6) 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 조종했다는 근거다.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월북했다.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윤기권이 5.18에서 대단한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니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 여명 전체를 매도할 수 없다.

깜도 안 되는 의혹 7)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 게 의심스럽다.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 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 (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www.rfa.org/kore…/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깜도 안 되는 의혹 8)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5.18 당시 광주에 침투했다는 북한군의 숫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고 증언한다. 2008년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는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을 바꾼다. (참고 :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1.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

2.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

3.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


깜도 안 되는 의혹들 9) 5월 21일 저녁부터 광주 외곽 지역이 봉쇄된다. 그런데 5월 22일 서울지역 대학생 500여 명이 광주에 도착하여 환영식을 거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500명은 북한군이다.

80년 항쟁일지에 ‘스피커를 통해 연․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발표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직접 가두방송을 한 전옥주는 그 당시 전달 받은 쪽지를 읽었을 뿐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전옥주는 당시 방송에서 과장된 내용이 상당히 많았음을 스스로 진술하고 있다.(후술 참조) 서울에서 대학생 500명이 진입했다는 것은 사료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며, 당시 상황 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21일 1시 금남로 발포 이후,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고속버스를 탈취한 300명 여명의 시민들이 이들일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북한군이나 간첩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21일 저녁부터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진행 중이어서 외부에서 북한군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이다. 상식적으로 600명이나 되는 북한군이 경기도 광주도 아닌 전라도 광주에 진입할 수 있었다면, 전두환과 주한미군은 대체 뭘 했다는 것인가.

또한 광주 시민들은 항쟁 과정에서 매우 반공적인 면모를 준다. 애국가와 태극기의 등장은 기초적인 사실일 뿐이다. 김정한의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도청에 간첩 여부를 조사하는 조사과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운동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를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강력한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자신들의 운동이 용공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전략적 대응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반공주의에 따른 실제 실천 행위들이 너무 적극적이었고 일상적이었다.”

“이에 관해 대표적인 사례는 가두방송을 담당했던 전춘심(전옥주, 당시 31)의 경험일 것이다. 5월 22일 그녀는 간첩으로 몰렸다가 풀려기도 한다. (...) 그리고 결국 5월 26일에는 시민을 가장한 수사관들이 전춘심을 향해 "저 여자는 교육을 받고 온 간첩이다"라고 소리치자 몰려든 시민들에게 붙잡혀 보안대로 끌려간다. 수사관들이 이런 방식으로 주요 활동가들을 체포하거나 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시민들의 반공주의가 진지하고 강력했음을 반증한다.”

“5월 21일에도 기자를 자칭하며 촬영하는 민간인에게 누군가 "저 자식 간첩이다"라고 소리치자 시위대열의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즉석에서 공수부대에 인계한 사례가 있었다. (...) 이와 관련해 최영태는 "간첩이라고 하면 모두가 경계를 하고, 심지어는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공수 사이에도 잠시 휴전을 하고 간첩 협의자를 인수인계할 만큼 시위대들의 반공의식은 강했다"고 평가한다.”

“22일 오후 3시쯤, 20일 밤의 주인공이었던 전옥주와 차명숙이 용달차를 타고 도청광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19일 밤 이후 꼬박 3일 밤새우며 방송을 하고 다니느라 목소리가 쉰 듯 했고 매우 지쳐 보였다. 두 사람이 용달차를 타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는 도청광장으로 오자마자 학생들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둘의 방송연설이 수준급이어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듯한 데다 내용도 “사실과 다른 과장된 내용이 많아” 오히려 시민들이 당황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20일 밤의 시위가 그토록 확산된 것으로 두 사람의 선동적 방송연설에 그 연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 항쟁주체 측은 그녀들이 혹시 북에서 보낸 공작요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도청광장에서 붙잡혀 일단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6시 쯤 지프차에 실려 군 수사기관에 넘겨졌다. 이 같은 전옥주 차명숙의 검거를 놓고 일부는 정보요원이 두 사람을 검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생이나 시민으로 위장해 들어왔다는 주장과 순수한 학생들이 군 수사기관에 의뢰해 진짜 간첩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상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어 넘겼다는 2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후자일 것으로 보고 있었다. 둘을 지프차에 태우고 화정동,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경계선에서 군 수사기관에 넘겨줬던 사람은 광주시 주택과 공무원 이무길이었다. (1999년 2월 2일, 이무길 인터뷰. 이무길은 5.18 당시 광주시청 주택과 무허가 건물 단속 반원이었으며 저자가 인터뷰 할 당시는 광주시민회관 관장이었다. 그는 그 후 타계했다.) (...) 물론 그녀는 북의 공작원이 아님이 수사당국에 의해 밝혀졌다.“

깜도 안 되는 의혹 10)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당시 상황을 TV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몇몇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주장하는데, 1980년 당시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 없이 광주에서 수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에 맞아 사망했다.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면서 한 시신의 사진을 제시하는데, 5.18 사망자 검시자료에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가지고 왜곡한 것이다.

깜도 안 되는 의혹 11)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이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는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해야 한다.

깜도 안 되는 의혹 12) 망월동 국립묘지에 있는 신원 미상자가 60-70명에 가까운데, 이들은 모두 북한군이다.

사실 자체도 틀렸고, 신원 미상자는 모두 북한군이라는 논리 역시 터무니없다. 망월동 국립묘지에 잠들고 있던 몸은 2001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는데, 2008년을 기준으로 신원 미상자는 5명이다. 게다가 신원 미상자가 있다는 게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논리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이다. 신원 미상자가 있다 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듯이, 신원미상의 시체가 북한군의 시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