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님께서 인용하신 기사에서는 "폴 크루그먼의 지리경제학"를 인용 '영남만 발전한 이유'를 언급했는데 그동안 제가 주장했던 내용들과 일치하되 세가지가 빠졌습니다. 그동안 호남차별의 실상을 수차례 글을 썼던 입장에서 링크된 기사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그 기사에 부족한 것 또는 빠진 것들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며 물러갑니다.


1. 첫번째, 기사에서 언급한 '규모의 경제' ---> 부족한 이야기

이 부분은 최초의 차관이 들어왔을 때 박정희와 당시 한국일보 사장의 대화를 보면 '비대칭 경제 정책'을 구사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합니다. 돈이 없어서 한일협정을 하고 베트남에 파병을 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마치, 가난한 집에서 장남만 대학교 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박정희 : 임자, 이 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한국일보 사장 : (돈이 턱없이 부족하지만)한 곳에 몰아줘야지요.


2. '수송비 하락'---> 맞는 이야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임가공 수준의 경제에서 수출지역이 조금이라도 가까운 지역이 유리하겠죠. 더우기 경부고속도로가 1968년에 완성된 것을 고려한다면 교통수단은 일제 시대에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영남으로 건설되었으니 그걸 이용하는 편이 낫겠죠.


3.  노동자 유입 ---> 부족한 이야기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논의 면적이 경상도가 전라도보다 컸습니다. 차이점은 경상도는 소작농이 그리고 전라도는 대지주 위주였다는 것이죠. 언젠가 언급한 '친일 정치인은 적통 야당이라는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에 더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인합니다.


대하소설 '토지'에서 묘사된 것과는 다르게 대지주들은 토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일제와 협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의 가사에서 언급되는 '유달산'은 친일파의 소굴이었으니까요. 


반면에 경상도의 소작농들은 해방 후 미군정의 토지개혁에 힘입어 '작지만' 독립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고 돈 맛을 알게된 그들이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과 치열하게 싸운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런 소작농들은 경제활동에서 소비자 층이 되기도 하고 농번기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수 있습니다.


DJ가 빨갱이로 몰리게 되는 정책 중 하나인 1971년 예비군 폐지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이 부분은 예전에 안티노님과 논쟁 중에 박정희가 DJ 주장 전에 농번기에는 예비군 소집을 하지 않는다...라는 정책을 1970년에 이미 실시한 사실을 알게되어, 안티노님과 제가 '잘못된 거 가지고 논쟁했다'라면서 허무해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데 1970년 농번기에는 예비군 소집을 하지 않았지만 벼베기철 예비군 소집을 금지한 것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이어서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1970년 벼베기철에는 여전히 예비군 소집 훈련이 실시되었을 것이고 농민들의 불만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있었을 것입니다.


"농촌 예비군훈련 벼베기철엔 삼가"(관련 기사는 여기를 클릭)


이 부분을 다시 재론하지 않은 이유는 어쨌든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서 논점을 제기했기 때문이고 DJ가 실제 예비군 폐지 명분은 다른 것으로 내세웠으니까요.

"70년대에 김일성이 전면 남침할 가능성은 희박하며 월남판 게릴라전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며 "이는 국내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국민이 민주역량으로 뭉쳤을 때 퇴치될 수 있으며 따라서 예비군이나 학교 교련은 결코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강준만도 긴급조치에 대하여 비슷한 주장을 했었고 저는 강준만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긴급조치의 필요성은 국가안보에 도움은 되나 강준만의 주장대로 더 나은 정책을 고려하지 않은 라쉬움은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비군 역시 1.21 김신조 사태 이후에 신설된 것인데 전두환 정권 때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생각한다면 예비군은 무장공비를 잡기에는 무리지 싶다는 점에서 DJ의 주장도 맞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DJ가 비판받을 부분은 '향토예비군의 날 33주년 기념 메시지'에서 보듯 '말 바꾸기를 했다는 점입니다. 당시는 1970년대보다 통신 등의 시설이 개선되었고 한국군의 현대화도 1970년대에 비해 많이 진전되었은까요.(물론, 1970년대에 비하여 1980년대의 예비군은 이미 거대화되어서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폐지를 언급하기 힘든 점도 감안해야 하겠지요.)

"우리는 든든한 안보를 바탕으로 한 남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반세기 동안 지속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공영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민·관·군 일체의 총력안보태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어쨌든, 소작농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했고 소비층의 두터움을 제공했으며 큰아들은 농업에, 두째아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했을겁니다.


4. 일베의 주장과 배치되는 현실 ---> 하나는 버리시길

일베발 주장에서는 박정희가 호남에도 다수의 공장을 신설해서 호남차별이 거짓이며 선동이라고 하고 이런 주장을 의외로 많이 믿습니다. 그러니 호남의 경제적 격차를 주장해도 거짓말, 선동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양손의 떡 중 하나를 놓으세요.


어쩔 수 없는 비대칭개발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박정희가 호남도 개발시켰다....라고 주장하던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시라는 것입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경우, 경부고속도로 개발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것임을 부가합니다.



5. 대만 경제 모델 ---> 박정희 기계적 죽이기의 시동

이 것 때문에 DJ지지자들과 진보들과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저는 재벌위주의 경제정책이 맞다고 했는데 대만 경제 모델을 끊임없이 주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결과론이어서 1971년 당시 제가 선택을 했다면 대만경제모델을 지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더 나은 정책으로 판명된-물론 그 부작용은 고쳐져야 하겠습니다만-정책을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박정희 기계적 죽이기라는 이데올로기의 여파지요. 재미있는 것은 비호남 사람 중에 대만 경제모델을 주장하는 사람은 또 DJ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마치 현재에 문재인 지지자들이 박정희를 성토하고 DJ 역시 비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6. 호남경제격차의 본격화는 전두환 정권 시절

간단하게 비유로 들자면, 집안이 가난해서 '장남만 대학교에 보냈는데' 장남이 졸업해서 취직을 해서 집안의 형편이 좀 나아졌으면 나머지 자식들은 야간학교라도 보냈어야지요.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너희가 공부해서 뭐해?'라면서 여전히 큰아들만 밀어준 꼴이 전두환 정권시절이었습니다. 뭐, 고의적은 아니었을겁니다. 아웅산 테러로 그나마 엘리트들이 폭사한 상태에서 한국 경제를 조각할 능력이 전두환 정권은 없었으니까요. (호남경제 낙후는 전두환 정권 때 심화되기 시작했다...라는 통계들은 몇번 예시를 했으니까 검색해 찾아보시기를)



7. 호남이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이유는 박정희 영웅 만들기의 여파

박정희의 노력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면 호남인이 흘린 피로 민주화의 토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딜레마로 세계의 선진화 국가들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대한민국처럼 나뉘어서 이룩한 예가,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누구 잘잘못을 떠나 민주화의 결과는 온국민이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경제발전은 호남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민이 누리는 민주화 때문에 호남사람들은 더 짙은 차별을 받고 있고 경제발전의 혜택에서 소외된 호남사람들은 그 상황이 '선동에 의한 거짓말'이라고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호남은 서로 상대방의 경제발전과 민주화 공로른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뒷편, 이데올로기만이 지배하여 올바른 해법을 논의하는 분위기조차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노력을 시도해봐야 오히려 '빨갱이' 및 '수구꼴통'이라고 양 진영의 비난만 받을 뿐입니다.


고의적이건 미필적이건 호남사람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은 이유는 독재정권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영움만들기와 호남의 민주화 공로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전두환에 대하여 침묵하고 호남의 사회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남과 호남의 상호인정은 역사를 정명하게 수립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영웅만들기와 박정희 기계적인 죽이기 그리고 DJ 빨갱이 만들기가 여전한 현실은 영호남의 상호인정을 하지 않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8. 영호남 화합의 공헌한 전 기아타이거즈 감독 선동열


역사를 정명하게 밝히는 것이 영호남의 상호인정의 방편이라는 좋은 예는 바로 선동렬 전 기아 타이거즈 감독입니다. 선동렬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 우승을 두번이나 시켰음에도 삼성 라이온즈 팬들은 비판 일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삼성 라이온즈 팬들을 보고 기아 타이거즈 팬들은 '또 다른 호남차별'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포탈은 물론 각종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선동열을 두고 삼성 라이온즈 팬들과 기아 타이거즈 팬들 간의 상호비방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선동렬이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하면서 기아 타이거즈 팬들은 왜 삼성 라이온즈 팬들이 선동렬을 그렇게 성토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야구판에서는 삼성 라이온즈 팬들과 기아 타이거즈 팬들은 나름 친하게 지내며 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정치인도 못한 영호남 화합을 선동렬이 달성했다"



일개 야구판의 이야기지만 사실을 서로 공유했을 때 상호인정의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것으로 역사를 정명하게 세울 때만 영호남의 상호인정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누군가에 의하여 이 작업들은 더 정확하게 이루어지겠죠. 그런 날이 올겁니다.



진짜 BUY COUNTRY..........................입니다.


"차별 천국 대한민국이 개선되기를 바라며"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