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노예근성은 한국인만의 특질은 아니다. 노예근성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생존의 수단 중 하나로 터득한 생존에의 지혜이다. 방증으로 사마천의 '화식열전'에는 노예근성에 대한 일침이 쓰여져 있다.

"무릇 보통 사람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욕을 하고, 백 배가 되면 무서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 사람 노예가 된다." (언터넷 인용)



그리고 심리학 연구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인간이 노예화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물론,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사람이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노예근성이 얼마나 쉽게 표출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기계에는 300V 이상은 위험하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고, 학생 역할의 배우는 전기 충격을 받으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으며, 150볼트가 넘어가면 가슴이 아프다며 그만둘 것을 간청하고 전압이 너무 높아지면 죽은 듯이 전기 충격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연기까지 했다. 이들은 자신이 죽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단지 지시에 따라 계속 전기 충격을 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해하거나 실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기는 했으나 밀그램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거나 말로 다그치자 시키는 대로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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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지와는 관계가 없는 한 공학도로서 저 실험에 의문을 표시한다면 피실험자들은 전기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비록 학생 역할을 한 배우가 '죽을 표정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실험 방법의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220V를 직접 만지는 것은 위험하다"

이 경구에 실제 위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최소한 220V에서 튀는 전기스파크를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220V의 전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노예근성이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지혜라는 것의 다른 방증은, 이 추론은 한그루 고유의 추론이지만, 민족 별로 서로 다른 동성애 비율을 고려할 때 민족에 가해진 외부에의 위해가 심할수록 동성애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동성애가 후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은 아니다.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 동성애라는 것이 생존에 강력한 무기가 되어 동성애자는 살아남기 유리한 한경이고 그 결과 동성에자의 비율이 높았다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노예 근성의 대표적인 것을 성서라고 한다. 성서의 기술들은 인간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이단논박의 결과 예정설에서 희미하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규정했을 뿐 성서의 기술은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기술일 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인간의 노예화를 기술한 성서에 반발하여 유럽에서는 근대화가 시작되었지만 한반도에서는 근대화의 시작이 이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의 전래라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유럽에서는 인간의 노예화, 그러니까 노예근성에 반발하여 탈노예화를 부르짖었다면 한반도에서는 근대화라는 것이 인간의 노예화의 방법만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다른 노예화의 방법인 일제시대이며 그 일제시대가 끝나자 시작된 것은 인간의 노예화의 연속인 독재정권.



그 여파일까? 노예 근성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바로 우상화. 한국은 우상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성서의 기록이 우상화의 기록이라면 박정희 우상화는 노예 근성의 대표적인 예. 그리고 박정희 우상화에 비하여는 덜 심각하지만 김대중 우상화 경향 역시 노예 근성의 발휘. 노예 근성이라는 키워드로 보면 영호남의 대결은 '누구 노예화가 더 심한가?'의 대결. 



이제 민주화 시대가 되었지만 사마천이 일침을 가한 것처럼,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달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민들은 자본가의 노예가 되었다. 재벌총수들의 범법 사실에 '한국 경제의 안녕을 위하여' 그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아도 비난의 목소리가 낮은 것은 그 방증.



유럽의 근대화의 시작과 한국 근대화의 시작이 전혀 다른 것에서 보듯, 한국은 여전히 노예 근성을 발휘하고 체득하고 실행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유럽 제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열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뭐, 유럽의 근대화도 게우 2백년 남짓이니 유럽인들의노예 근성이 완전히 없어졌다라고 하기에는, 유럽 역시 노예근성이 강요되던 역사의 기간보다 훨씬 더 짧으니 도낀게낀.

그렇다고 저 빌어먹을 국개론 따위를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국개론은 오히려 노예근성 시전을 최대화한 것이니 사장되어야 마땅하다. 

단지, 노예 근성의 발휘가 대한민국에서는 현재진행형이고 그 노예근성을 한국의 정치인들은 알뜰히 우려먹고 있으며 그 노예근성에 대하여 일침하는 지식인들이 없다는 것이다. 즉, 유럽의 경우에는 그들의 유전자 지도에 새겨져 있는 노예 유전자 DNA를 점치 희미하게 만드는 반면 한국의 경우에는 노예 유전자 DNA가 여전히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카인의 낙인처럼



노예근성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해석하다 보면,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역사의 시실들이 꽤 그럴듯하게 조각된다. 바꿔 말하자면 한그루의 주장이었던 '한국의 근현대사는 우익들에 의하여 한번, 그리고 좌익들에 의하여 또 한번 뒤틀려져 해석이 되었다'라는 그 마닥에 바로 노예근성이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은 우익과 좌익의 싸움이 아니라 노예끼리 편먹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반복'이라고 했다. 이 토인비의 발언을 노예근성에 대입하면 인류의 투쟁 역사들은 '노예화와 반노예화의 대립'이다. 그리고 그 노예화의 주체는 그 때마다 바뀌었지만 '지배층'이라는 같은 명사로 표현이 된다. 그리고 그런 지배층의 의도가 가장 확실하게 투영되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이 노예화를 북한에 빗대 표현하면 그나마 남한은 개방이라는 것 때문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으며 탈노에화 운동이 본격화 되어 민주주의를 구현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노에화의 가속만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멸망설을 내가 처음부터 부인했던 이유이다.


어쨌든, 언제쯤이면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유전자 DNA 지도에 새겨져 있는 노예 DNA 유전자를 희미하게 만들까? 사포로 박박 문질러 그 흔적을 희미하게나 만들 수 있다면 해보겠다만.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