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하하하님이 쓰신 <정의란 무엇인가> 독후감에서 흥미있는 주제가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저 책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라서, 본격적으로 저 주제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운데요...
하하하님의 글에서 정치문화랄까, 동서양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하신 부분에 관심이 가는군요. 이미 미뉴에 님도 언급을 하신 것 같은데... 댓글로 썼다가, 용기를 내서 본글로 올려봅니다.
이 주제로 많은 분들이 글을 올려주셔서 제가 좀 배웠으면 합니다. 사실 꽤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사안인데, 공부도 짧고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내가 자료를 찾아 읽을 여유도 없어서... 그냥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이번 기회에 공짜로 배웠으면 한다는 욕심이 생기네요...^^
명확하게 근거를 대기는 어렵지만, 저도 하하하님이 말씀하신, 서양과 동양의 정치문화(뿐만 아니고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 전반)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이게 과연 증거가 될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경우 기본적으로 주변 민족과 공존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원래 황하 중류의 작은 세력이었던 화족이 중국 대륙 전체를 동화시켜가는 과정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악의에 기인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다는 것이죠.
저는 그 원인을 두 가지 정도로 판단합니다. 실제로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만,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일단 두 개로 나눈 것입니다.
첫째, 마르크스가 말한 동양적 생산방식의 특수성에서 이 문제가 기인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황하 치수의 요구 때문에 동양(중국)은 고대부터 대규모 인력동원과 관리를 위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등장이 요구됐습니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 요구가 사실은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사상적 체계화로 이어졌고, 이러한 정치문화의 유산이 그 뒤로도 중국 나아가 한중일 등 동양 3국의 정치문화 또는 사회문화 전반을 규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양의 경우 동양처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가 일방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왕권 등 중앙권력의 크기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차이가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관계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동양의 경우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완전히 수탈해서 끝장을 내는 문화가 일반적이죠. 하지만 서양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땅덩어리로만 보면 중국보다 훨씬 작은 유럽에서 수많은 민족국가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닐까요?
둘째, 저는 계약의 문화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양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법전을 마련해도 그 법전보다 우위에 선 것이 절대권력자의 의지입니다. 이런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고 봅니다. 반면 서양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더군요. 지배-피지배 관계가 일종의 계약의 정신 위에서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이러한 계약의 정신이 살아있으면 강자와 약자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이 계약의 문화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구약성경은 사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대한 스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중동 지방에서 계약의 사회적 문화적 기반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증거 아닌가 생각해보는데, 명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즉,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계약 정신이 점차 중동 및 서양문명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제가 보기로는 중동 지방에 애초부터 계약의 문화가 확실한 사회적 인프라로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만...
고대 지중해 국가들이 활발하게 해상 무역에 의존했던 것도 계약문화의 발달에 기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동양에서도 교역이 서양에 비해 적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육상로를 통한 무역과 해상무역은 기본 질서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즉, 육상 무역은 아무리 정밀하게 계약을 맺는다 해도 계약 당사자들의 힘의 우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파기될 수 있습니다. 어제 계약을 맺었다 해도, 오늘 자신에게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이 생긴다면 당장 군사들 이끌고 가서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해상무역의 경우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출병에 따른 부담이 너무 크고, 결국 경제적으로 손실이 나는 행동이 되기 쉽죠.
또, 동양은 기본적으로 중앙집중형 전제권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만그만한 세력들의 평판을 별로 의식할 필요가 없지만, 지중해 문명의 경우 절대적인 권력이 존재하지 않고 바닷길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소왕국 또는 도시국가들 사이의 평판이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대립한 포에니 전쟁의 궁극적인 승부를 가른 것은 위대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역량이 아니라 바로 두 나라를 지지하는 지중해 도시국가들의 향배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유럽과 비교해 전제적 중앙집권체제가 형성의 정도나 지속기간 면에서 두드러진다고 할 만큼 발달되었다. 그러나 은,주 이후 시기의 중국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니 (중세 5호 16국 등 이민족이 강남 이북지역을 할거했던 기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유럽이 여러 열강 및 소국으로 조각조각 났던 것과 흡사했던 시기, 바로 춘추전국시대가 있었다. 역으로 유럽의 경우도 언제나 복수의 국가들로 나눠져 있었던 것은 아닌데, 바로 로마제국의 성립이 그것이다. 단순 비교는 불가하지만 근세유럽(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세계가 각 민족국가의 대립과 각축, 전쟁으로 얼룩진 난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 시기는 백화제방적 정치, 사회 사상의 발전, 사회적 생산력과 기술의 급속한 진전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럽 전체의 외부적 팽창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며, 바로 이 점에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하는 면이 분명 있다. 과거 수신사를 다녀온 김홍집이 세계 정세의 형편이 과연 어떠한가를 묻는 고종의 질문에 19세기 서구 열강의 세계적 각축을 제꺽 '춘추전국시대'의 난세에 견주어 설명한 바 있는데, 이게 과연 우연이었겠는가?
그럼에도 중국의 경우 통일제국의 형성 및 이에 수반되는 관료제도의 발달이 (유럽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던 원인은 뭐였을까?
생각해봄직한 가설 1) 문화적 차이에서 이를 구하는 설명 - 계약문화 등등 (미루라고라님의 추측 중 하나)
그러나 이것보단 차라리 본문에서 첫번째로 언급한 동양적 생산방식의 특수성에 지리적 특수성을 더하는 것이 어떤가. 지중해를 접해 있는 희랍지역은 두 말할 나위 없거니와 서유럽 대륙 역시 중국의 중원과 비교하면 뻥 뚫린 평야지대가 흔치 않다. 중국대륙과 같이 외부에 열린, 즉 이민족 침입의 저지에 도움이 될 만한 지리적 방벽이 드문 지역에서라면 (만리장성을 굳이 건설한 사실이 이를 증명), 정치적 지배체제의 영역과 규모의 대형화에 대한 유인이 더 강력해진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이는 중세 일본의 봉건제 장기지속의 원인 중 하나를 (한반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달된 지리적 방벽 (산세...등)에서 구하는 시각과 동일한데, 차리라 이 편이 문화적 차이에서 설명요인을 구하는 시도보단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저 역시 거의 동의합니다. 다만,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열국 쟁패 현상과 근세 유럽의 열국 대립각축 현상이 비슷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제후국가(편의상 이렇게 표현합니다)들의 내적인 지배 체제는 철저하게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적인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즉, 여러 나라로 나눠져있기는 했지만 그들 국가는 모두 그만그만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들이었고, 이들 나라의 분열 대립 상태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조만간 하나의 중앙집권 국가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니었을까요?
근세 유럽의 경우 대륙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같은 중앙집권적 체제, 원심력보다 구심력이 강한 시스템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국과 유럽의 구조적 차이는 현재 중국과 유럽의 상태를 보면서 유추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중국은 지금 가령 몇십개 나라로 나뉘어도 결국 하나의 국가로 통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동질성이 강한 나라인 데 반해, 유럽은 아무리 단일 국가 형태로 통합한다 해도 언제든 각 민족국가로 분리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요?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체제에서 어느 쪽이 좀더 안정된 구조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중국은 단일국가 체제가 좀더 안정된 시스템 같고, 유럽은 그 반대 같습니다.
지리적 특성(물론 크게 보면 마르크스가 말한 동양적 생산방식의 특수성도 여기에 포함됩니다만)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다만, 저런 요인이 핵심적인 결정요소였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표면적인 국가 체제(즉 중앙집권형 국가인가 아니면 봉건적 분산권력 형태인가)도 이 문제의 중요한 판단 요인이지만, 언어나 문화, 풍습의 동질성도 이 문제의 중요한 판단 기준일 것 같습니다.
즉, 일본의 경우 오랜 기간 봉건국가 체제가 유지됐지만 언어나 문화, 풍습 등은 일찍부터 매우 높은 동질성을 이룩했고, 비록 실권은 없지만 천황가가 흔히 지들이 말하는 만세일계의 단일 왕조체제를 유지해온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유럽처럼 민족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를 유지해온 권역으로는 보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 인도의 경우 전형적인 평야국가임에도 실제적으로 민족국가로의 형성은 매우 늦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도가 민족국가로 완성된 것은 역설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배의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대륙적인 지형의 차이보다는 말 그대로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차이가 보다 본질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차이가 계약문화의 정착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지 않았을까 한번 가설적으로 생각해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계약의 성립 여부는 시간적 간격에 의해 매우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즉,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서로 떨어져 있거나, 계속 같이 붙어있게 되면 계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계약이란 기본적으로 상대방과 내가 잊기 쉬운 내용을 서로 확인하는 문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지중해를 통한 교역은 계약문화가 가장 효과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계약문화의 중요성 역시 기본적으로는 지형상의 특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이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미뉴에님과는 접근하는 방식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만, 유럽과 동양의 세부적인 조건에 대한 가치 판단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아닌가 싶군요.
지리적 환경의 차이가 생명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지리적 차이가 인류문화의 차이를 만드는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레미 다이아보석 아저씨의 주장처럼요. (정작 그 분의 책은 읽어보진 않았다능..)
미투라고라님의 대륙문명, 해양문명도 큰 의미에서 지리적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단지, 지리적 차이가 전부라고 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 카오스 이론이라고 하는 개념을 차용해 설명할수 있습니다.
초기의 사소한 차이(지리적 차이)가, 환원이 어려운 복잡한 상호작용을 거쳐,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차이로 증폭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지리적 차이에서 출발했지만, 그 논리를 완벽하게 환원하기 어려운,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리적 특성을 말하신 뉴에님과, 문화의 차이를 말하신 미투라고라님 말씀 모두 맞다고 보입니다.
문화를 진화의 관점에서 서양 동양 차이를 써보겠습니다. (저도 평어체를 쓰겠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부분 중 하나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이다.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고, 지배적 패러다임이 없다.
여기에 국제관계학 전공에 진화심리학 저술가로 유명한 로버트라이트의 의견이 있다. 서양과 동양의 결정적 차이는 문화 진화의 속도였고, 그것은 문화적 돌연변이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환경에 차이에서 비롯됬다는 주장이다.
생명체를 다양한 유전자들이 사는 유전자풀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처럼, 문화를 다양한 문화유전자인 밈들의 웅덩이인 밈풀memepool로 볼 수 있다. 사람과 집단은 밈을 담는 그릇인 셈이고, 국가는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그릇으로, 그릇 안에 살고있는 밈들의 생존과 발생을 손에 쥐고 있는 환경이다. 그래서 서양,동양,국가별,민족별 문화의 차이는 그들이 담고 있는 밈들의 종류와 분포차이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로 대표되는 시기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각 국가와 제후국들이 담고 있는 밈은 상대적으로 비슷했다는 것이다. 표의문자인 한자 문화권에, 단지 잠깐 황제자리를 둘러싼 권력분쟁을 할 뿐인지, 큰 의미에서 천하라고 불리우는 중국문화에 있다는 인식이었다. 오랑캐인 북방민족은 중국에 제공할 문화적 다양성은 적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서양보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
반면에, 서양도 기독교와 로마라는 공통기반이 있지만,
동양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문화적 돌연변이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
로마도 중국제국에 비하면 중앙집권이 약했고, 로마 이후에는 유럽이 제대로 통일된 적이 없었다. 지중해 아래에는 아프리카, 옆에는 중동, 북쪽에는 바지입는 게르만 민족, 중동은 나중에 이슬람으로 변했고, 멀리 동양에서 훈족이 왔었다. 근세에는 유럽의 균형추 역할을 하며 이리붙었다 저리붙었다 하던 섬나라 영국이 있었다. (근세 맞나요?) 아, 그리고 신세계정복 시대도 있었다.
한쪽이 한쪽을 완벽하게 정복함으로써 밈들을 학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약간씩 이질적인 그릇안에서 이질적인 밈들의 돌연변이가 빠르게 생겨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럽의 특성 상, 국가는 서로서로 교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 혼자서 모두 만들기에는 시간이 오래걸리는 이질적인 밈들을 분업생산하였고, 공유함으로써 문화의 진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열 수 있었다. 서양철학이 그리스에서 탄생하고, 르네상스가 다양한 공국들로 쪼개져 경쟁과 화합을 하던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국은 잘 모르겠다.)
다양한 밈풀 그릇의 존재와, 그릇 간에 섞임이, 문화의 진화를 가속했다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는 중국도 충분히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단지 그 속도가 유럽을 따르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산업혁명이 발생한 시점에 중국은 너무 평화로웠다.
(동양보다 속도가 더 딸렸던 문화로는, 고립되서 독자적으로 모든 문화를 길러야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있다. 너무나도 느린 문화는 고립된 원시부족이 있겠다.)
+
계약의 문화라는 것도, 한쪽이 한쪽을 완벽하게 정복할 수 없고, 경쟁을 바탕으로 균형과 화합을 해야했던 유럽의 문화적 특성에서 나왔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동양보다 속도가 더 딸렸던 문화로는, 고립되서 독자적으로 모든 문화를 길러야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있다. 너무나도 느린 문화는 고립된 원시부족이 있겠다.)
-> 여기서 '속도가 딸리다'는 표현에는 '뒤처졌다'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진화에 진보의 개념을 포함시키지 않는, 즉 순수한 변화의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발전의 개념이 들어가는 경우을 종종 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마야인들은 당시 유럽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천문학적 성과를 갖고 있었습니다. 멕시코 등지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에서는 발달된 기하학과 건축술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들의 철학까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립된 원시부족의('원시'라는 용어 자체에도 미발전, 미개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어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만...) 경우에도 느린 문화로 보는 것은 서구 중심적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로버트 라이트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 분의 주장과 근거를 제대로 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흥미있는 주장이라 차츰 이 분 책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삿갓님. //
자연과학적,사회적 기술이 모여서 산업혁명을 잉태하기에 가장 알맞은 환경이 영국이었나 보네요. 그것이 석탄이었군요. 그래서 조상님을 잘만나야해요. 지리적 환경도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행운이니까요.
lotus님 //
맞습니다. 다양한 생존전략을 단순하게 우열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추구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단세포는 단세포대로, 다세포는 다세포대로 살아가고, 심지어 극단적인 단순함을 생존전략으로 가진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보의 정도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되, 하나의 생존전략의 발달 정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능력을 볼 때, 팔에 나있는 깃털로 점프하며 파닥거리는 수준인 공룡에 비해, 지구를 횡단하는 철새가 진보했습니다.
인간이 지적능력과 사회문화를 생존전략으로 삼았을 때, 두뇌용적이 적은 원시인과 현대인을 비교하면, 현대인이 진보했습니다. 사회문화에서 언어, 복장, 요리방법 등은 진보를 논하기 어려운 다양성의 측면이 강합니다. 하지만 생산증대를 위한 정치행정기술, 사회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기술은 진보를 논할 수 있습니다.
진화의 목적인 생존과 번식이라는 궁극의 평가기준으로 봤을 때, 살아남고 번성한 쪽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니라, 유럽인이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담고 있던 밈들의 생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것도 환경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고립된 환경, 중국에서 화약기술을 수입할 수도 없었고, 쉽게 쇠를 구할수 없었고, 구대륙의 다양한 세균에 대한 면역력도 약했고, 타고다닐 말도 없었습니다.)
진보라는 단어를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이 글에서 진보를 '더 좋은 방향'은 빼고 ' 나아감'의 의미만을 취한다는 전제 하에서 받아들입니다. 유전자 측면에서 보면 인디오의 유전자는 타 인종과의 혼혈 등을 통해 여전히 전승되고 있으니까 살아남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번성한 쪽'이 유럽인이라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이 되네요.
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친절한 설명 정말 고맙습니다.(^_____^) 더 궁금한 것도 있는데요. 짬 날 때 질문하겠습니다.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 민요 모음(Suite Populaire Bresilienne) No.1 들으며 댓글 썼는데요. 오늘 날씨와 참 잘 어울리네요...
1. 제가 혹시 “목적론, 목적의지”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판단이 되셔서 쓰신 것 같습니다. 진화는 당연이 자연의 무의지적인 현상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학자가 진화는 다양성의 증가 이다. 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의 댓글에서는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의 번식을 추구한다.” 라는 흔히 쓰이는 비유적인 말에서 “추구한다.” 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유전자가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니니까 진화현상도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화는 유전자의 생존전략이 통하는 곳이라면, 고염분의 뜨거운 온천수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을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긴 시간에서 봤을 때, 진화는 만들 수 있는 다양성이라면, 당연히 그 다양성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2. 저는 한 가지 능력의 진보만을 얘기했습니다. “하나의 생존전략의 발달 정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쓴 것입니다. 글을 명확하게 못써서 그런것 같네요.
나는 능력에 있어서는, 새의 조상 공룡보다는 현대의 새가 훨씬 발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익룡과 비교해도 헬리곱터처럼 자유자재로 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는 현재의 새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가지 능력만으로 하나의 종이 다른 종보다 진보했다. 라고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3. 호미니드의 진화에 있어서, 뇌용량의 증가가 지능의 증가의 근거라는 것은 일반적인 내용 아닌가요? 단순용적에 앞서서 뇌-신체 비율과 기타 신경회로 등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요.
4. 저의 댓글에서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 밈의 생존과 번식을 별다른 구분없이 썼습니다.
계약사상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간의 계약(구약)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계약사상의 연원은 고대 그리스·로마 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계약사상을 최초로 구체화한 것은 '사회계약설'의 원조로 알려진 에피큐로스 학파입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상을 전제로 하여 국가성립의 기초를 계약으로 설명합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개인들간의 상호관계에서도 이기적인 개인 간의 침탈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자기보존의 욕구를 상정하면서 계약을 자연법적 가치보다 더 높은 최고의 가치로 두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국가론(politica)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사교성을 바탕으로 서로 결합하여 국가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계약사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에서는 각 개인은 '인간본연의 성질상' 자연스럽게 개인이 국가에 흡수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에피큐로스 학파는 국가 이전의 개인을 상정하고 '각각의 이기적인 개인의 필요성에 의해'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고 이 때문에 에피큐로스 학파의 사상이 계약사상으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구체적인 법의 형태로 계약사상이 나타난 것은 로마입니다. 로마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사상이 지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私法의 발달, 자유는 국민의 가장 찬미하는 德), 로마의 12표법에서 '계약의 자유'를 천명합니다. 그리고 12표법의 발전한 형태인 시민법, 그리고 이민족을 정복하며 제국으로 확대해가는 동안 상거래가 확대되면서 여러 이민족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만민법을 만들어내면서 계약을 생활화 합니다.
그런데 이민족 정복과 제국으로의 확대는 동양의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유독 서양, 즉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계약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까닭은 그리스 로마에 개인주의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의 원인을 찾아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농경문화(벼농사문화)와 유목문화의 차이까지 올라가겠습니다. 즉 공동체가 중시되는 농경문화보다는 개인이 중시되는 유목문화에서 계약사상이 더 쉽게 적용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차이가 발생한 원인까지 찾아올라가면, 서양이 동양에 비해 계약사상이 구체화된 원인은 결국은 지리적 환경적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피쿠로스 사상은 존 로크와 벤담 그리고 프랑스 혁명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나 기존에는 국가가 개인과 무관한 것으로 봤는데(특히 플라톤. ) 개인의 쾌락추구를 위해서 국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사회계약설과 비슷한 면이 있는 듯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토아학파는 덕 자체를 지고지순의 존재로 보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덕을 쾌락을 추구함에 있어서 사려깊에 행동하는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국가도 개인이 쾌락을 추구하면서 사려깊게 행동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식의 설명을 합니다. 한마디로 세속적 국가관의 시초가 되죠.
시민법과 만민법 자연법의 관계가 문제되는데, 12표법으로 대표되는 법률은 평민의 민법상 권리를 귀족과 동등하도록 함으로서 귀족공화정하에서 평민의 사법적인 권리의 확대를 시도한 것입니다.(다만 로마 공화정이 근본적으로 귀족공화정일뿐 근대민주주의로는 볼 수 없는 이유가 귀족의 신분적 특권이 유지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상원에 행당되는 원로원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종신이었고 일정한 귀족적 특권이 인정되었음.) 다만 12표법이 확대된 시민법은 초기 엄격한 형식주의가 적용됩니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고대법률의 일반적 특징이었는데 아직 개인주의적인 발전이 더딤을 반영합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이후 로마 사회는 보다 개인주의적인 사회로 변화되었고 동시에 농업국가에서 상업국가화 됩니다. 그 가운데 자영농민이 몰락하고 그들 대신에 라티폰티움과 같은 대농장에서 노예들이 생산을 담당하게 되죠. 아무튼 초기 시민법의 형식주의는 점점 무너지게 되는데 나아가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나아가 관습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만민법이 등장할 무렵에는 거의 사라지고 의사의 합치를 매우 중요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연법사상의 영향이 큽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법 사상은 스토아학파의 영향이 크구요.(5현제중에 하나이고 스토아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법이 적용되는 국가를 이상시했습니다. 자연법의 대표적인 내용이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임)
그리고 이러한 로마법은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됩니다. 그리고 이 로마법 대전은 법학제요, 학설휘찬, 칙법휘찬으로 구성됩니다. 학설휘찬에서 유명한 사람이 울피아누스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법 대전은 나중에 프랑스 민법 즉 나폴레옹 민법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원래 로마법 대전이 프랑스 남부에서는 중세시대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쳤었고 프랑스 북부와 게르만지역은 그에 비해 관습법이 주류였습니다. 아무튼 근대 민법전은 크게 프랑스민법전, 독일민법전으로 나뉘어지는데 프랑스민법전이 부동산 거래에서 의사주의를 독일민법전이 형식주의를 취하는 이유도 프랑스는 자연법적 전통이 강한 로마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반면 독일은 로마법의 학설휘찬에 영향을 받은 독일보통법이 있었지만 란트법의 영향이 잔존하는 상태에서 역사법학파(대표자 사비니)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물권법 친족법은 역사법학파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는데 물권법만 보면 부동산 거래에서 등기제도와 형식주의, gewere적 요소, 부동산과 동산의 구별, 선의취득, 상린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에피쿠로스의 학설뿐만 아니라 스토아 학설도 '계약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어쩌면 양자 모두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좋은 정보를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하는 함무라비 법전에도 계약의 정신이 매우 강력하게 반영돼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결국 중동지역에서는 고대부터 계약의 정신과 관행이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이미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법률 자체가 사실은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는 사회적 계약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법률 이전에 사회문화 경제적 인프라에서 계약의 정신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따져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로마법이 나중에 나폴레옹의 법전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압니다만, 그보다 앞서 계약의 정신이 유럽 사회의 저변에서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검토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영향이 꽤 크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리스 문명의 영향도 적지 않았겠지만, 중세 1천여년 동안 사실상 그리스 문명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문헌 자산으로만 전승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회 저변의 광범위한 일상생활에서는 기독교의 정신이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 같습니다.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차이에 대한 지적,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어딘지 농경민족보다 유목민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되더군요. 정확하게 어느 부분이라고 짚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런 느낌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목자인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는데, 농사꾼인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는 얘기가 소개되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성경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에서 계약의 정신이 갖는 비중의 차이는 개인과 집단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계약이 필요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접촉의 빈도 즉, 제가 말한 접촉 주기가 보다 큰 영향을 준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개인-개인, 집단-집단 사이에 일상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는 농경문화에서는 계약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개인(유목)과 집단(농경)의 구성 차이라면 사실 그 반대의 해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즉, 집단 속에서 계약의 필요성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중동지역에서는 고대부터 '계약'이 일상 생활 속에 이미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중심의 계약문화'와 대비되는 '집단중심의 관계문화'에서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약보다는 관계자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의와 윤리가 중요해진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삼강오륜 같은 것으로 대의를 강조하면서 임금이나 아버지나 남편은 마땅히 어떠어떠한 행동을 해야한다는 식으로 각자의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와 그에 따른 윤리를 강조할 필요성이 높아진다고 봅니다. 불교의 正命 사상이나 유교의 正名 사상 같은 것이 서양의 계약 사상을 대체한다는 거죠. 때문에 서양에 비해 동양 문화에서의 법은 민사법이 부실하고 주로 형법 중심으로 이해되는 까닭도 올바른 행동을 못한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질서를 잡는다는 正命的 혹은 正名的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양에서는 그 관계를 직접 법이 규정하다보니 민사법과 계약이 발달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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