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의 답은 maybe or may not be.

조선선조수정실록의 기록과 당시 왜국(당시의 일본의 명칭은 왜였으므로 그에 맞추어 쓴다. 일본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의 기록들을 보면 누가 경복궁을 불태웠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은 왜병에 의한 조선해방'이라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주장들과 경복궁 화재의 진실에 대한 설명들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전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朝鮮征伐記.2에 수록된 니베시마 가신들에 의한 서신 중 잘못 해석된 것이 증폭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군주가 잡히면 끝. 적의 도성을 아무리 많이 함락해도 군주가 잡히지 않으면 그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의 왕은 왜군의 손에 의하여 잡혀 죽여야 하며 그런 전쟁 문화가 朝鮮征伐記.2에 이렇게 남겨져 있다.

泰長院是琢 (?~?) 
佐賀泰長院住職。文禄元年四月二十三日、朝鮮に渡海。五月七日、釜山に着く。六月、鍋島直茂に同行するため咸鏡道に入る。同地にて加藤清正の書状の草案を作成。この書状は民衆に朝鮮国王誅殺を禁じ、即座に家に戻り農耕に勤しむよう促すものであった。 
(출처는 여기를 클릭) (참조로 조선정벌기.1과 조선정벌기.2 는 각각 여기여기를 클릭 -- 스캔본이어서 검색이 안되어 다른 경로로 찾아봄)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부분

"この書状は民衆に朝鮮国王誅殺を禁じ、即座に家に戻り農耕に勤しむよう促すものであった

(그 서신에는 민중에 의해 조선 국왕이 살해되는 것을 금지시키고 즉각 귀가를 시켜 농경에 종사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문장은,

"民衆朝鮮国王誅殺を禁じ"(민중에 의해 조선국왕이 살해되는 것을 못하게 하고)의 に(~에 의한/by) 조사가 と(~와/and)로 잘못 해석되어 "(왜군이) 민중과 조선국왕 살해를 금지하고, (민중들은)농경 등 생업에 힘쓰게 하라"로 잘못 번역되어 임진왜란은 조선 해방 운동이라는 주장에 '옥의 티'처럼 남겨져 있다. 물론, 당시 왜군의 조선민중을 위한 공약들은 충분히 친민중적인 것이었지만 아직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왜군이 조선민중을 그렇게 보호했는지는 다른 사료들과 비교해볼 때 의문이 있는 사실에서 왜군이 적극적으로 조선 민중을 보호했다는 주장은 성급한 결론이다.



경복궁이 불타 없앤 사실은 선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날짜 인덱스는 여기를 클릭)

선조실록에는 경복궁이 불탄 4월 14일의 기록 자체가 없다.

반면에 선조수정실록 4월 14일의 기록에는 경복궁이 불탄 기록이 이렇게 적혀 있다.

都城宮省火。 車駕將出, 都中有姦民, 先入內帑庫, 爭取寶物者。 已而駕出, 亂民大起, 先焚掌隷院、刑曹, 以二局公、私奴婢文籍所在也。 遂大掠宮省、倉庫, 仍放火滅迹。 景福、昌德、昌慶三宮, 一時俱燼。 昌慶宮卽順懷世子嬪欑宮所在也。 歷代寶玩及文武樓、弘文館所藏書籍、春秋館各朝《實錄》、他庫所藏前朝史草、 【修《高麗史》時所草。】 《承政院日記》, 皆燒盡無遺。 內外倉庫、各署所藏, 竝被盜先焚。 臨海君家、兵曹判書洪汝諄家亦被焚, 以二家常時號多畜財故也。 留都大將斬數人以警衆, 亂民屯聚, 不能禁。

도성의 궁성(宮省)009) 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010) 이 있는 곳이었다. 역대의 보완(寶玩)과 문무루(文武樓)·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 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草稿)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몇 사람을 참(斬)하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亂民)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출처는 여기를 클릭)


그런데 朝鮮征伐記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기록 날짜는 1592년 5월 4일)

임진왜란.png


그런데 같은 부대의 다른 종군 승려인 덴 케이의 기록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임진왜란2.png


따라서, 선조의 거가가 떠난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경복궁은 멀쩡했으며 5월 4일부터 5월 7일 사이에 경복궁이 불탔다는 것이다.


5월 4일부터 5월 7일까지 경복궁을 불태운 주체는 민중일 가능성이 많다.

첫째, 왜군은 조선민중을 해방시켜준다는 공약을 했다. 그 공약에는 당시 인구의 70%에 이르는 노비(중 상당수가 천민)도 평민으로 승급시켜 준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둘째, 그 공약에 들뜬 민중들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있는 것처럼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에 민중해방 시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문서가 있는 경복궁을 불태웠을 가능성이 있다.

세번째, 왜군의 전쟁문화는 주군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경복궁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어서 조선민중들이 불태우는 것을 적극 저지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왜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론 적국의 상징인 경복궁을 불태울수도 있겠지만 임금이 도망간 상태이고 승리가 확실시되는 현실에서 굳이 경복궁을 불태웠을리가 없다. 물론, 당시 왜군이 당나라 군대였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즉, 역사의 기록들은 '경복궁은 조선민중들에 의하여 불태워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5월 4일부터 5월 7일까지 왜군 점령 하였으므로 왜군이 불태웠다'라는 주장의 신빙성을 옅게 한다.


확실한 것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거짓이며 반민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첫째, '이이나 이황 같은 쓰레기 학자가 조선최고의 학자로 자리매김되는 현실은 한국 지배층의 지식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상징한다'라는 내 주장에 비추어 본다면 선조실록에는 이이나 이황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반면에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이나 이황을 최고의 학자로 재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쨰, 정철이 서인이고 정여립 역시 같은 붕당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여립에 대하여 가혹한 평가를 했던(나는 정여립이 조선최초의 공화주의자로서 그가 그의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시라진 것을 안타까와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쨌든, 나의 평가와 관계없이) 것에 비해 정여립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영논리를 시전한다.



물론, 왜군에 투항한 조선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한국인 특유의 특성인 '반도기질' 때문일 가능성도 많다. 즉, 상황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기질이 그런 현실을 낳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혹적인 지배체제에서 마치 일제시대에 신분상승을 노리고 친일파가 되었던 많은 친일파들의 정서와 같이(물론,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개념에서도 용서 못할 행위를 한 악독한 친일파도 많았지만) 당시 민중은 그런 가혹적인 지배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가 왜군에게 협조적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왜군이 내세운 공약들이 그들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실제 실천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공약으로만 본다면 임진왜란은 조선 민중 해방 전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누누히 '이순신은 민족주의 개념에서 보면 영웅이지만 민중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반민중적인 인물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