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적응 가설이 실패하면 더 적응 가설을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이 적응 가설을 만들었다가 실패하면 저 적응 가설을 만들고, 그것도 실패하면 또 다른 적응 가설을 만들고, 그것마저도 실패하면 또 다른 적응 가설을 만든다고 비판한다.

 

적응 만능론 또는 범적응론에 빠져서 오직 적응 가설들만 양산한다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자가 적응 가설만 만든다고?
 

진화 심리학자들이 오직 적응 가설 만들기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은 터무니 없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대체로 빈 서판론자들에 비해 적응 가설을 더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빈 서판론자들에 비해 그럴 뿐이다. 진화 심리학자들도 빈 서판론자들도 선험적으로 진리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따라서 누가 옳은지는 오직 과학적 검증이라는 고된 절차를 거쳐야 알 수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대체로 적응 가설보다 부산물 가설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이전에는 동성애를 적응이라고 보는 가설들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일개미처럼 직접적인 번식을 포기하고 친족 돌보기에 매진하는 전략이라는 설명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고, 질투하는 다른 남자들을 속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명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화 심리학계에서 대체로 동성애를 부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둘째, 현대 산업국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피임을 해서 자식을 아예 낳지 않거나 한 두 명만 낳는 경우가 흔하다. 콘돔 사용이 적응이라고 주장한 진화 심리학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의견은 부산물 가설을 지지한다.

 

셋째, 미적분이나 양자 역학에 대해 적응 가설을 제시하는 진화 심리학자는 없다. 즉 미적분이나 양자 역학에 전문화된 어떤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보는 진화 심리학자는 없다. 사냥-채집 사회에는 미적분이나 양자 역학이 없기 때문에 적응 가설은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글쓰기, 피아노 연주, 타자, 자동차 운전 등 부산물 가설이 대세인, 학습과 관련된 현상의 목록을 만들자면 한도 없다.

 

진화 심리학계에서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팽팽히 맞서는 경우도 많다. 이번에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어떤 진화 심리학자는 강간이 적응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진화 심리학자는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부산물 가설 지지자에 따르면 강간은 남자가 여자보다 섹스를 더 하고 싶어하며 힘이 세다는 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지 강간에 전문화된 어떤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것은 아니다.

 

둘째, 살인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살인 메커니즘과 살인 방어 메커니즘이 공진화했다고 보는 진화 심리학자도 있지만 살인을 폭력의 극단적인 발현으로 볼 뿐 특별히 살인 메커니즘이 진화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진화 심리학자도 있다.

 

셋째, 규범의 내용에 대해서도 진화 심리학계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어떤 진화 윤리학자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해치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라”와 같은 규범이 인간 본성이며 그런 식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본다. 반면 다른 진화 윤리학자들은 그것이 문화적 구성물이라고 본다.

 

 

 

 

 

가설을 바꾸는 것도 죄인가?
 

하나의 가설이 명백히 실패했는데도 그 가설에 집착하는 것은 과학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하나의 적응 가설이 실패했을 때 그 가설을 수정하거나 다른 적응 가설로 바꾸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나의 적응 가설이 실패했을 때 다른 적응 가설을 만들어내고, 그것도 실패했을 때 또 다른 적응 가설을 만들어내고, 이번에도 실패했을 때 또 다른 적응 가설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잘 정립된 이론이 없을 때 과학자들이 헤매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어려운 과업일수록 헤매는 것은 당연하다.

 

 

 

 

 

적응 가설이 계속 실패하면 그 다음에는 부산물 가설을 만들어야 하나?
 

동전 던지기를 해서 열 번 연속으로 앞면이 나왔다고 하자. 그 다음에는 뒷면이 나올 차례인가? 아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앞면이 나올 차례인 것도 아니다. 조작된 동전이 아니라면 이전에 어떤 면에 나왔든 앞면이 나올 확률도 뒷면이 나올 확률도 50%다.

 

과학자가 어떤 현상을 설명하려고 적응 가설을 열 번이나 만들었는데 모두 반증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해당 표현형이 부산물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아니다. 동전 던지기처럼 적응 가설이 맞을 확률과 부산물 가설이 맞을 확률이 각각 50%인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 연구와 동전 던지기는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비슷한 점이 있다. 열 번 연속으로 앞면이 나왔다고 해서 다음에는 뒷면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듯이 열 번 연속으로 적응 가설이 실패했다고 해서 부산물 가설이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것은 열 번 연속으로 부산물 가설이 실패했다고 해서 적응 가설이 옳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가설을 만들 때에는 감에 의존한다. 그냥 감이 아니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직관(educated guess)이다. 사람마다 직관이 다르기 때문에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적응 가설을 선호하고 어떤 사람은 부산물 가설을 선호한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가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자 만든 열 개의 적응 가설이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적응 가설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 진화 심리학자가 그러는 이유는 해당 표현형이 적응일 것이라는 직관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진화 심리학자가 열 개의 부산물 가설이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부산물 가설을 만들었다면 그 학자에게는 해당 표현형이 부산물이라는 직관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직관에 따라 가설을 만들 권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든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과학적 검증이라는 골치 아픈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선험적으로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적응 가설이 여러 번 실패해도 여전히 해당 표현형이 적응인지 부산물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또한 어떤 과학 가설은 당대의 직관으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증되기도 한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이 처음 제출되었을 때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직관을 뒤엎는 이론들은 보통 대박을 터뜨린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가 직관에 비추어 볼 때 황당무계한 가설에 골몰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대박이 될지 꽝이 될지는 오직 과학적 검증에 달렸다.

 

과학 공동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의 직관을 비판하지 말고 논리적 일관성이나 실증적 검증 과정을 비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빈 서판론자들이 진화 심리학자들의 직관에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럴 때 진화 심리학자들은 “남이사”라고 외쳐도 될 것이다.

 

 

 

2010-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