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알아보는데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일이다.
그 방법 중에 최상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을 그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나는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으나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건 내가 심어준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던 무언가가 발현된 것일 뿐.

사람이 동물임을 여실히 보고 싶으면 곁에 아무도 두지 않고 갈등을 처리해보면 된다. 허나 나는 권장하지 않는다. 지옥을 보게 될 터이니까. 어지간한 이들이 그 지옥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보지도 않고. 사람(개체)은 동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집단, 대중)은 동물이다. 대중 속에서, 집단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챙길 수 있는 이란 드물다. 어쩌면 결코 다다들 수 없는 이상향.

살아가며 다들 잘못과 실수를 저지른다. 대개는 그런 반응을 보인다. 바로 시점에서 잘못을 지적하면 융통성이 없다거나 포용력이 없다거나 사람이 까탈스럽다거나(이건 다들 약자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다). 시간이 좀 흘러 지적을 하면 반응은 이렇다. '왜 그때 지적을 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 난리냐고". 역시 약자들 반응이다.알고 있으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탓에, 또 하나 잘못 보아 생사람 잡을 수 있다는 걱정에, 근거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 이게 비단 불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겠는가. 고래로 세상 어디에나 대나무숲에 바람이 일 때면 들리는 소리다. 우하하! 나는 간혹 정말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사소한 실수나 잘못에도 잔혹하게 상대를 대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내 보기에 인간은 약자다. 허나 '상황' 앞에서만 약자이다.

제대로 된 식자란 그런 것이다. '신독'

집단으로서, 개인으로서 보이는 행동이 그토록 천양지차일 수 있다는 걸 실은 우리들 모두는 알고 있다. 집단으로서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그 광기의 원천은 공포, 더 들어가면 타인에 대한 불신이다.

나는 나와 갈등이 이는 약자들 옷을 하나씩 벗긴다. 그들은 수치심을 느낀다. 한꺼풀, 한꺼풀 벗겨질수록. 그들이 나체가 되어갈수록 내 업보는 커진다. 내가 그들의 옷에 손대지 않는다. 그들이 직접 떨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속옷까지 벗어내려가지도 않는다. 그 옷은 그들의 손도, 내 손도 타지 않은 채 저절로 벗겨진다. 해서 이 업보 덕에 나는 내가 천당에 가기란 애시당초에 글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옷을 벗은 그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평온하드라. 그 자장에 끌려들어간 내 마음도 평온해진다. 이게 내가 아는 정다운 땡초의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개이다.

나이 들어 제일 힘든 것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는 걸 알면 그 것만으로도 된사람이다.

나와 악연으로돈, 선한 인연으로든 만난 이들은 내게 스펙트럼의 중앙값이다. 어느 사람이든 그 사람을 중앙값 삼아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

어지간하면 대리인을 쓰지 마시라. 백척간두 진일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돈 앞에, 늘씬한 나체 앞에, 상대를 폭력으로 밟아버리겠다는 욕망을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임이네 그 사람 얼마나 싱싱하고 아름다운가. 용이의 '아아나 쑥떡'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주 개차반으로 세상 권력을 탐하던 년놈들이 또 불쌍해지는 것은 저 문장 속 '유미주의'에 그들이 다다르지 못한 탓이다. 아주 끝까지 그럴 일이지 추궁하면 왜 또 불쌍하단 생각이 들게 만드는가. 그래도 사람 새끼라고 밑바닥에 그 놈의 양심이란 게 있긴 있어 가지고.

오늘 갈등에서도 전화통화에서도 내가 했던 핵심은 하나. "문제 풀고 싶으면 혼자 나를 만나라. 양아치/창녀는 절대 혼자서 나를 만나지 못한다". 나는 갈등 당사자만을 겨냥했으냐 애석하게도 나와 같이 사는 동료, 내 옆에서 전화통화를 들은 그 역시 그 말에 상처를 받았을 게다. 나는 동료를 겨냥하지 않았으나 그 미사일엔 눈이 달리지 않았다. 원래 세상은 그렇게 모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거, 내가 적어도 그들만큼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세뇌를 시켜 부인한다. 나는 그 파훼법을 아는 게 아니라 실천한다. 혹자의 눈에는 내 방식이 잔인해보일 수도 있겠다.



"문제 풀고 싶으면 혼자서 나를 만나러 와라. 양아치/창녀는 절대 혼자서 나를 만나지 못한다"

이게 내가 아는 세례이다. 기독교식의 세례, 침례. 자신을 자신이 마주하는 것.


하지만 오늘도 생명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생명이라는 프로그램의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