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듯이 일상적 이해관계를 다루는 과정에서 솔직, 겸손, 이웃사랑, 동정 등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윤리적 요청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갈등의 해결을 위해 추구하고 발견했던 조정의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드물다. 생존투쟁과 윤리의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을 진정으로 중재하고 합성하는 것은 공손함이다. 공손함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즉 윤리적 요청도, 투쟁을 위한 무기도 아니다. 그렇지만 공손함은 또한 양자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그것을 판단하는가에 따라 전무이기도 하고 전부이기도 하다. 그것은 투쟁의 처절함을 경쾌히 넘어서는 형식, 즉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무에 해당한다. 그것은 결코 엄격한 윤리지침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효력을 상실한 윤리의 대변자일 뿐이다. 생존투쟁에서 공손함이 가지는 가치는 허구적인데 그것은 투쟁을 여전히 미결의 상태로 놓아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손함은 전부이기도 하다. 공손함은 스스로 관습에서 벗어남으로써 과정 전체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마치 중세의 시합장처럼 관습의 장벽에 빙 둘러싸인 담판장소에서 진정한 공손함은 바로 그러한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효력을 발휘한다. 공손함은 투쟁을 무한의 영역으로 확대시키면서 동시에 투쟁에서 배재되었던 모든 힘, 모든 기관을 조력자, 중재자, 조정자로 끌어들인다. 상대방과 함께 처한 상황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승리를 독점하기 위해 과격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그런 사람은 투쟁에서 언제나 불손한 편에 속한다. 그에 반해 상황 속에서 극단적인 것, 희극적인 것, 사적인 것, 혹은 놀라운 것들을 놓치지 않는 감수성은 공손함이 지닌 뛰어난 기량에 속한다. 그러한 감수성은 감수성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교섭의 지휘권을 쥐어주는데, 결국은 이해 관계의 지배권까지 가져다 준다. 놀란 상대방의 눈 앞에 마치 카드놀이의 패처럼 상반된 이해관계들을 늘어놓는 것 역시 그러한 감수성이다. 어쨌든 공손함의 핵심은 인내에 있다. 모든 덕목 중에서도 인내는 공손함을 변질시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덕목일 것이다.
신의 축복을 떠난 관습에 따르면 인내 이외의 덕목들이 그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는 오직 '의무들 간의 갈등'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손함은 중도를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그러한 덕목들에게 돌아갈 몫을 이미 오래전에 돌려주었다. 뒤진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기회를 주는 일이 그것이다.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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