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한 나쁜 기억들
 

『진화 심리학의 이론적 기초(version 0.8)』 중 “13. 온전한 자연 선택 이론을 향하여 – 친족 선택, 유전체내 갈등, 발달 체계 이론”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29921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화론과 결합하여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한 사람은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였다. 이 때문에 진화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라마르크는 틀린 이론의 주창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비록 자연 선택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진화론을 옹호했으며 생명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가설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면에서 라마르크의 업적은 만만치 않았다. 이것은 페일리(William Paley)가 비록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이기는 했지만 인간의 눈과 같은 정교한 구조에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 설계의 논거(argument from design)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업적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적 주장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연 선택 이론에 중대한 힌트를 제공한 맬써스(Thomas Malthus)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라마르크, 페일리, 맬써스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이 나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종의 기원』은 6판까지 나왔는데 판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라마르크의 이론에 의존했다고 한다. 즉 획득 형질의 유전으로 점점 더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진화 생물학자들은 6판의 내용이 훨씬 더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1판을 읽으라고 권하기도 한다.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믿음은 20세기 초반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다윈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잘 이해한 것 같지는 않은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진화론을 정신분석과 결합하려고 했는데 이 때 그가 말한 진화론은 획득 형질의 유전이었다.

 

러시아의 파블로프(Ivan Pavlov) 역시 획득 형질의 유전을 믿었다.

 

스탈린을 등에 업은 뤼센코(Trofim Lysenko)의 유전 이론의 핵심에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 있었다. 뤼센코의 활약(?)의 당시 소련에 있던 진지한 유전학자에게는 재앙이었다. 그의 유전 이론은 당시의 소련 농업에도 악영향을 끼친 듯하다.

 

 

 

 

 

라마르크주의의 패배
 

http://en.wikipedia.org/wiki/Lamarckism 에 라마르크주의와 신라마르크주의(neo-Lamarckism)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다.

 

라마르크는 경험을 통해 형질이 좀 더 적응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는 당대의 상식(용불용설)과 획득 형질의 유전을 결합하여 적응에 대한 이론을 만들었다. 역기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많이 쓰게 되면 근육이 더 커져서 힘을 더 잘 쓸 수 있게 된다. 손바닥의 특정 부위를 많이 쓰게 되면 굳은살이 배겨서 더 튼튼해진다. 피아노를 연습하다 보면 더 잘 치게 된다. 만약 이런 특성들이 유전된다면 생물은 점점 더 적응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라마르크의 이 진화 이론에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첫째, 라마르크는 “왜 역기 운동을 하면 근육이 더 커지는가?”, “왜 마찰력을 계속 가하면 굳은살이 배기는가?”, “왜 피아노 연습을 하면 더 잘 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진보를 향한 신비로운 생명의 힘을 가정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 같다.

 

둘째, 역기 운동을 10년 동안 죽어라 한 다음에 자식을 낳으나 역기 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낳으나 자식에게는 차이가 없다. 오른쪽 손에만 굳은살이 아주 많이 배기게 한 다음에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의 오른손과 왼손에 굳은살이 배기는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 연주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획득 형질은 보통 유전되지 않는다.

 

멘델(Gregor Mendel)의 유전학이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과 결합되고 나중 DNA가 발견되면서 라마르크주의는 결정적인 패배를 맞는다. 프로이트나 파블로프는 이런 것들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라마르크주의를 믿었기 때문에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라마르크주의에 대해 떠들면 바보 취급 당하기 쉽다.

 

 

 

 

 

가상의 시나리오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들을 바탕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봤다. 어쩌면 내가 여기서 제시한 시나리오에 딱 들어맞는 사례가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A, B, C, D는 모두 종을 뜻한다. 어떤 동물 A는 유성 생식을 한다. 암수가 뚜렷이 나뉘기 때문에 자식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있다. 암컷과 수컷은 교미를 한 후 자식이 태어나서 한 달이 지날 때까지 같이 산다. 그 한 달 동안 같이 자식을 돌본다. 한 달이 지나면 자식은 부모와 떨어져서 독립한다. A의 내장에는 세균들이 살고 있는데 어떤 세균은 소화에 중요한 도움을 준다. 그런 세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어린 A가 부모와 같이 살 때 엄마의 똥과 아빠의 똥을 먹도록 진화했다. 똥 속에 있는 그런 세균이 자신의 내장 속에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A의 어떤 개체군(population)에 속하는 모든 동물의 내장에 소화를 돕는 세균 B가 있다고 하자. 이 때 그 개체군에 속하는 어떤 동물이 우연히 세균 C가 들어있는 먹이를 먹어서 내장 속에서 C가 번식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C는 B보다 소화를 더 잘 돕는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C를 품고 있는 개체는 소화를 더 잘 할 것이기 때문에 더 잘 번식할 것이다. 그 개체의 자식은 C도 물려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체의 똥 속에는 C도 있는데 자식이 그 똥을 먹기 때문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개체군의 내장들 속에서 C가 점점 더 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일종의 자연 선택이 일어난 것이다. 아주 많은 세대가 지나면 C가 그 개체군의 모든 개체의 내장 속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번식에 유리한 유전자 돌연변이가 출현한 다음에 일어나는 자연 선택과 비슷하다.

 

이번에도 A의 어떤 개체군(population)에 속하는 모든 동물의 내장에 세균 B가 있다고 하자. 이 때 그 개체군에 속하는 어떤 동물이 우연히 세균 D가 들어있는 먹이를 먹는다고 하자. 그런데 D는 소화를 방해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D를 품고 있는 개체는 잘 번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 개체의 자식들도 잘 번식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D는 결국 개체군의 내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자연 선택이다. 이것은 번식에 불리한 유전자 돌연변이가 출현한 다음에 일어나는 자연 선택과 비슷하다.

 

 

 

 

 

유전과 유전자는 동의어가 아니다
 

획득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명제는 DNA나 RNA, 즉 유전자(gene)에 적용한다면 옳다. 하지만 유전자가 유전(inheritance)의 전부는 아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심지어 내장 속에 있는 세균도 유전될 수 있으며 그와 관련하여 자연 선택이 작동할 수 있다.

 

라마르크는 진보를 향한 신비로운 생명의 힘과 획득 형질의 유전을 결합해서 적응을 설명하려고 했다. 이것은 구시대적 이론이다. 반면 자연 선택과 획득 형질의 유전을 결합해서 적응을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가설이다. 위에서 소개한 시나리오의 경우에는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 집단 유전학)의 모델과 상당히 비슷한 모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DNA 또는 유전자에 초점을 맞춘 분자 유전학과 개체군 유전학은 20세기에 아주 큰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는 이런 연구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온전한 진화 이론을 위해서는 유전자 이외의 것도 연구해야 하며 때로는 획득 형질의 유전도 고려해야 한다.

 

밈(meme, 모방자)의 경우 획득 형질의 유전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밈은 수직적으로(부모에서 자식) 전달되기도 하지만 수평적으로(이웃 사람) 전달되기도 한다. 또한 밈은 대체로 ‘고등 동물’에게만 적용된다. 반면 위에서 소개한 시나리오나 그와 비슷한 것들은 ‘하등 생물’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만약 위에서 소개한 시나리오에 나오는 A가 오직 부모의 똥만 먹도록 진화했다면 소화에 도움이 되는 세균은 유전자와 같이 거의 수직적으로만 전달될 것이다.

 

내장 속에 있는 세균에만 이런 시나리오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 다른 기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그리고 세포 속에는 유전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자의 경우에는 거의 유전체만 담고 있지만 난자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 중 일부의 경우에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 적용될지 모른다.

 

 

2010-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