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의 몇 분의 글에서 '필자'라는 표현이 발견되어.... 예전에 내가 내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인터넷 검색해서 내 글을 퍼간 분들의 글을 캡쳐해놓은 글을... 특정 닉을 거론한 부분을 수정해서 다시 올린다..... 



과거의 보도 기사는 기자의 '나'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런 보도 방법은 AP통신이 생기면서 바뀌게 되었다. AP통신은 보도 기사에서 기자의 '나'를 숨기게 되었다. 이러한 AP통신의 보도 자세는 '기사를 객관화 시킨다'라는 측면에서 '팩트주의'에 가장 충실하다는 평가와 함께 그 이후로 보도 기사에서 기자의 '나'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부분은 내가 '손석희의 시선 집중'을 청취하면서 '한국 언론의 문제점'에 대한 언급을 할 때 들었던 내용이다. 지금은 세계 5대 통신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가 높은 통신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초반의 AP통신은 고전일색이었다. 1840년대에 생긴 AP통신은 당시 약소국이었던 미국의 통신사답게 많은 설움을 겪어야 했고 미국 내에서도 반독점 규제법에 걸려 본사를 옮기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그런 AP통신은 이후 몇 개의 AP 지국이 합쳐 오늘 날의 AP가 탄생하는데 그 것이 1970년대였다. 그리고 그 때 바로 기사 속에서 '나'를 숨기는 보도의 하나의 관행으로 굳혀진 것이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갈파하였다.


"한국에 사상이 들어오면 한국의 사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한국이 되버린다"고.


한국의 사상이 아니라 사상의 한국이 되는 대표적인 예가 '근본주의자'가 득실득실한 기독교라는 것은 다시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만 이런 AP통신의 '객관적 보도'에 충실하기 위한 방법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선동성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한국 신문들의 사설은-구조적으로 '나'를 숨기게 되어 있지만- 나를 숨김으로서 선동성에 무게를 싣는데 활용을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필자'는 제 3인칭 시점이다. 글 쓰는 이는 분명히 '일인칭'인데 3인칭 시점인 '필자'라는 단어를 씀으로서 선동성을 더한다. 권위를 더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숨기면서 주관적인 '선동성'을 객관화 시키는 장치로 활용되는 것이다. 권위를 더하려면 '나'라고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감히, 대중 앞에서 누가 '나'라고 표현을 하겠는가? 겸손이 미덕인 한국에서?



뭐, 남 탓 할 필요없다. 나 역시 '필자'라는 표현을 드물지 않게 썼으니 말이다. 물론, 선동성보다는 '객관화'가 필요한 경우에 한시적으로 쓰기는 했지만 지금 변명해 보아야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이다.



'필자'.


AP통신의 보도 태도와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갈파를 결합하면 이 표현은 고약한 선동성의 수단으로 변질이 되었다. 물론, 그 것도 잘 모르고 겉 멋에 들려 '필자'를 남발하면서 '조중동'의 선동성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을 보면서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고민할 때가 있지만 말이다.



'나는 신문을 읽고 싶다. 아니 나는 글을 읽고 싶다'


기사다운 기사가 없고 사설다운 사설이 없고 글다운 글이 별로 없는 선동성으로 '내 편과 네 편' 가르기만 횡행하는 한국에서 나의 작은 소망, 그러나 내 생전에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피력해 본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