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최고의 히트상품을 뽑으라면 단연코 '지역감정' 또는 '지역구도'라는 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해외의 사례를 잘 알지 못하기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이만큼 히트한 정치 상품을 다시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상품의 특징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피해자에게 책임 소재를 찾는 뒤집힌 논리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상품의 최대 특징이자 강점이다. 이렇게 뒤집힌 논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거론하면 거론할수록 피해자의 피해가 더욱 커지고, 피해자의 입장이 더욱 약화되고, 이 문제가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제공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유리해진다. 특정 정치 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는 데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품인 셈이다.

이 정치 상품 또는 서비스의 기획 및 판매자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제도 언론이라고 봐야 한다. 이념적 소재를 가공하고 의제를 설정하며, 그 배포(delivery)까지 가능한 막강한 인프라를 갖춘 이들 제도권 언론은 이 상품의 기획/제조/판매의 최고 적임자였다. 그리고 그 상품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개 신문사에 불과한 조선일보가 '대통령을 만드는 신문' '밤의 대통령'이라는, 결코 과장이 아닌 평판을 갖게 된 것은 이 상품의 성공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 상품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일보라는 이념/여론/의제/이미지 가공의 전문집단이 지닌 전문성도 매우 큰 역할을 했지만 이들의 전문성도 기본적으로 상품의 재료가 우수하지 못했다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우수한 재료 2.탁월한 가공 및 제조 전문성 3. 이 상품을 제대로 사용/소비할 수 있는 성숙한 소비자 집단 등 3자의 결합이 이 히트상품을 만들어냈다.

우수한 재료란, 호남과 호남 사람들의 이미지를 말한다. 이러한 현상의 역사적 근원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너무 복잡한 논의가 수반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한다.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된 일제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이 문제의 출발점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역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박정희가 주도한 1960년대 이후의 중화학공업 정책의 추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50년대 이전부터 호남과 호남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이 전국 각지에 존재했다는 조사 자료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적대감은 질적이라기보다 양적인 차이였고, 다른 지역에 비해서 좀 심하다는 정도였지 근본적으로 호남만을 대상으로 노골적인 왕따나 소외를 만들어내는 형태는 아니었다. 경상도 충청도 서울 경기 심지어 북한 지역들도 일정한 호평과 악평을 골고루 지니고 있었고 특별히 호남만 대상으로 이미지 공격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노골화되는 호남 혐오감은 과거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호남은 대한민국 어느 지역과도 뚜렷이 구분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특정 분야나 요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고, 말 그대로 전국적이고 전방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거치면서 단 한번도 완화되지 않고 오로지 계속 확대 강화되는 방향으로만 치달아왔다.

한 나라 또는 사회의 경제적 기반은 그 상층 구조인 정치 사회 문화적인 구조를 결정한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아무래도 농업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앞선 대규모 농업 생산 인프라를 갖추고 있던 호남과 호남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될 조건이 비교적 적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는 호남 사람이나 호남 사투리 등이 이 사회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적대시 또는 배척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호남 출신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의식하는 현상도 지금보다 현저히 적었다. 대중 문화의 경우 70년대의 TV 드라마에서는 식모나 깡패 등 부정적인 캐릭터들이 주로 호남 사투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본격화되었지만 60년대까지 대중 문화의 중심이었던 영화에서는 호남인이나 호남 사투리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탤런트 박준규의 아버지인 영화배우 박노식은 거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로 많이 등장했지만 그 배역은 주로 '의리 넘치는 주먹'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가수 남진도 1970년대에 나훈아와 쌍벽을 이루는 가요계의 슈퍼스타로 활약했지만 당시에는 그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부감을 나타냈다는 얘기는 들려온 적이 없었다. 요즘 문근영이 그 선행에도 불구하고 오직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공격의 대상이 되고, 거기에 대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현상은 적어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 요인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제적인 인프라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60, 70년대까지도 모내기와 추수 등 농업의 주요한 일정이 언론에 보도되고 대통령의 주요 행사 일정 가운데 하나가 농사 현장을 찾아 농민들의 일을 도와주고 점심 식사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쌀농사 작황이 해마다 국민적 관심사로 논위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중화학공업 정책 추진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화는 농촌 지역의 생산 기반을 파괴하고, 농민층을 해체해 도시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킨다. 1960년대까지 농업 생산의 중심이었던 호남 지역은 이러한 변화의 타격을 가장 집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것은 경제 패권의 교체를 의미했고 나아가 정치 사회 문화적인 리더십의 이전을 의미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농업과 농민을 나타내는 이미지는 전근대적이고 낙후된 것 심지어 반역사적이고 타도되어야 할 퇴보의 상징으로 형상화되었다. 반면 공업과 자본주의, 노동자 계층은 근대화의 상징이며 진보와 개선, 발전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60년대 이후 반세기 이상의 과정을 거쳐 진행된 과정이고, 현재도 여전히 확대 강화되고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 변화는 곧바로 호남과 영남의 이미지로 치환되는 효과를 나타냈다. 즉, 호남이 농업과 봉건성을 상징하고, 영남은 진보와 개선의 상징으로 이미지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 전환은 1차원적이고 즉물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매우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가령 영남은 일종의 봉건성 즉, 유교 문화를 기반으로 한 보수성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진보와 개혁의 이미지로 치환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전체적으로 영남은 안정적이고 신뢰성이 있으며 경솔하지 않고 진중하며 보다 고급스러운 문화라는 이미지로 전환될 수 있고, 이것은 보다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영남은 진보와 개선, 선(善)이라는 이미지의 재료로서는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고, 실제로 활용되었다.

호남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일반적인 농업의 이미지가 격하되는 현상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호남의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는 또다른 조건도 있었다. 즉, 공업화의 진전과 함께 농촌 사회가 쇠락, 해체되면서 농민층이 대거 도시 빈민 또는 임금 노동자 계층으로 유입되면서 발생한 현상이 그것이다.

1960~1970년대의 이농층은 대부분 전통 농촌 사회에서도 가장 하위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거주 지역에서도 정치 문화적으로 품위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새로 이주한 지역에서도 이들은 저임금 노동자 또는 도시 빈민층으로서 노점 등 3D 직종에 종사했다. 주거 지역 역시 생활 인프라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달동네 등이었고 그나마 도시 재개발로 말미암아 안정된 정착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변두리로 이동하는 처지였다. 이런 조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고급스럽고 청결하고 신뢰가 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은 상스럽고 저열하고 야비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된다.

특히 호남 출신들의 이미지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이들이 새로 이주한 도시나 공업지역에서 비슷한 생업에 종사하는 원래 거주민이나 다른 지방 출신들과 생존 경쟁을 벌여야 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어느 지역 출신이나 비슷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호남 출신들의 이주 규모가 가장 크고, 이들이 새로운 이주민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대표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층민끼리 싸움이 벌어져도 거기 호남 출신이 포함될 확률이 제일 높았고, 전반적인 범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향후 조중동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조직적으로 생산해내는 호남 혐오 조성용 문화상품권이 매우 효과적으로 팔리는 기반을 형성했다.

이런 현상은 1960년대 박정희의 등장과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속도가 빨라졌지만 실제로는 50년대부터 점차 가시화된 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1950년대에 이미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호남 혐오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호남의 농업 생산 기반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호남 출신 이농층이 전국 도시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이주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회 포스트에서 밝힌 것처럼 호남은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의 훈장을 쟁취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본격적인 고립과 소외 현상이 노골화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과 1988년 서울올림픽, 무역흑자, 중화학공업의 발전, 제도적인 측면의 민주화와 개혁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산층의 확산과 소비문화의 확대는 호남이 매달려온 저항과 소수자 권익 추구 운동의 논리적 정당성을 근저부터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그리고 호남의 저항과 투쟁력, 명분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려는 기득권층은 호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신종 무기를 만들어냈다. 지역감정, 지역주의, 지역구도라는 '지역'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80년대 변혁 운동의 동반자였고 그러한 협력을 통해 역사적인 승리와 성취를 이끌어냈던 호남과 진보 개혁 진영(특히 당시의 학생운동 즉 386)을 분리시키는 데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한 핵폭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 이후 호남은 이러한 지역구도와의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오고 있으며 여전히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 승리의 가능성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여년에 걸친 지역구도와의 싸움에서 확실해진 것이 있다. 실은 이 경험과 성찰이야말로 호남이 이 더럽고 야비한 구도와의 피흘리는 싸움에서 유일하게 얻어낸 성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호남을 패배시켰고, 패배시키고 있고, 앞으로도 패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지역구도, 지역감정 외에는 없다는 사실의 역사적 확인이다. 민정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영남 보수세력의 본류부터 상도동(YS)과 꼬마민주당, 노빠로 이어지는 영남 비주류에 이르기까지 호남을 상대로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효과를 보는 무기는 오직 하나 바로 지역구도 뿐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호남이 자신의 역사적 정치적 정당성을 검증받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역주의자들은 지역주의를 통해 호남을 철저하게 패배시켜왔지만 그것은 또한 호남의 정당성과 자신들의 반역사적 본성을 점차 확인해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왜 아직도 호남이 문제인가 (1)
왜 아직도 호남이 문제인가 (3)

*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