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인생, 한 방에 떠보자는 게 잘못이야?"
[우리시대의 주인공] <8> 드라마 '서울의 달'의 홍식, 1994년


제비·사기꾼… 꼬여버린 삶 속물은 행복하면 안되나
내가 던진 배신의 칼날에 모질게 외로웠던 난 간다

1994년 10월 17일, 가을 바람이 서늘하고 서울의 달이 자취를 감춘 어두운 밤, 살인사건이 중부경찰서에 접수된다. ‘1963년 7월 12일생, 본적은 충북 청양, 이름은 김홍식. 옥수 9구역 골목길에서 20㎝ 크기의 흉기에 찔려.’
그 해 1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운 서울역 광장에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쪽 밖에 없는, 스물 아홉 살의 나는 서 있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다 끝내 서울역 지하도를 집으로 삼은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백원짜리 동전 몇 개로 전화를 걸었다. 고향인 충북 청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춘섭(최민식)이 기다렸다는 듯 덥석 전화를 받았다.

“춘섭아, 니가 부탁한 취직 건 잘 해결됐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내일 서울 올라와라. 참, 전에 말한 돈은 준비됐지?” “홍식(한석규)아 정말 고맙다. 내 그럴 줄 알고 밭뙈기 팔아 돈 마련해 놓았다.” 춘섭의 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옥수동 달동네에 방 한칸 얻어보려고 고향친구 춘섭에게 취직을 미끼로 돈을 뜯어내려는 참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지하도로 내려간다. 몇 분전까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다른 놈이 차지하고 있다. 인정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댄다. “저리가 이 새끼야.”

이로써 내 죄는 시작됐다. 후회나 부끄러움은 없다. 이래저래 어차피 서울은 ‘절망’일 뿐이다. 아니 돈과 빽이 없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해준 스승이었다. 원수 같은 가난에 쫓겨 고교 1학년을 중퇴하고 상경한지 10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해 나이트클럽 웨이터까지, 가리지 않고 뼈가 빠지도록 일했지만 오로지 실패와 아픔만이 똬리를 틀었다. 그래서 밤이면 어둠에 몸을 맡긴 채 복수를 다짐하곤 했다. ‘세상에게 내가 당한 수치, 가난, 아픔을 고스란히 아니 곱절로 돌려주겠어.’

한 줌, 알량한 도덕은 내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퇴물 춤꾼 박선생(김용식)에게서 배운 사교춤으로 유부녀를 뱀처럼 꼬여낸 뒤, 푼돈을 뜯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꽃뱀 미선(홍진희)와 짜고 스스로의 욕정에 홀린 사내들을 협박하는 사업도 꽤 짭짤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사기를 친 나를 찾아내 씩씩거리며 주먹을 날렸던 춘섭을 비웃으며 일찍이 나는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 새끼야, 뼈가 빠지도록 일해도 서울에 손바닥 만한 집 한칸을 마련하기 힘든 이 더럽고 썩어 빠진 세상에 한 방에 돈을 모은 것 말고는 탈출할 길이 없지 않냐”고. 그런 나를 춘섭은 물론 영숙(채시라)까지 벌레 취급했고, 대놓고 “비열하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내 삶의 유일한 경구(警句), “보이스 비 엠비셔스.”

기회는 뜻밖에 쉽게 찾아왔다. 돈 많은 이혼녀(이미지)는 탈출구 없는 내 삶에 드리워진 황금 동아줄이었다. 그 줄을 잡기 위해 나는 미선을 가차없이 이용했다. 애초부터 내게 사랑 따윈 일개 사업수단에 불과했다. “일단 결혼해서 재산을 빼돌린 다음에 같이 사는 거야.” 이 간교한 꼬드김에 넘어간 미선은 통장을 털어 내 결혼비용을 마련해줬다. 뿐만 아니라, 경찰에게 덜미가 잡힌 나를 보호하기 위해 대신 감옥에 들어가는 희생까지 치렀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쓰라린 배신으로 보답했다.

그래서 그 삶이 즐거웠냐고 묻지마라. 내 몸이 꺼져 버릴 것처럼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깎아주는 과일을 받아 먹으며 대형 TV를 보는 안락한 저녁을 즐겨본 자는 알리라. 더구나 내 꿈은 그보다 웅대하지 않았던가. 아내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다렸다.

그러나 서울의 달이 초생달에서 만월이 되기 직전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년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미선은 복수의 칼을 들이밀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아내는 거꾸로 제비였다는 사실을 들어 나를 집에서 쫓아냈다. 여전히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사기꾼에 불과했던 나. 이 기막힌 불행의 연속에서 나는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미선이 보낸 깡패에게 칼을 맞던 그날 밤. 피칠갑한 몸으로 시멘트 바닥에 누워 나는 상상했다. ‘공장에 취직해서 악착같이 돈 벌고 미선과 결혼해 알콩달콩 자식을 낳고 살았더라면, 그 자식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출세하는 걸 봤더라면 행복했을까?’ 내 신분상승의 드라마는 영원한 꿈인가. 버러지 같은 내 삶이 순식간에 나비로 진화하길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어쩌면 나는 消렝慊낮?그냥 허물 벗기에도 기꺼워하는 인생이었어야 하는지 모른다.

병원 영안실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기 직전 나는 “사랑하니까, 그냥 사랑하니까”를 입버릇처럼 되뇌던 주인집 딸 영숙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너 같은 놈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출을 해야 한다”고 밤마다 독백하지 않았던가. 내 호주머니에 남아있던 건 토큰 6개와 천원 짜리 지폐 2장 그리고 영숙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한 장. “야채장사라도 하며 같이 살자”는 영숙이를 단념시키기 위해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떠난다고 쓴 거짓 편지를 건네주지도 못한 채 나는 죽었다.

내 죽음 뒤 허겁지겁 달려온 영숙에게서 “넌 나쁜 놈이 아냐. 너는 착하고 불쌍하고 외로웠던 거야”라는 속삭임을 들었다. 고졸 경리사원으로 달동네를 벗어나는 게 꿈이었던 그녀. 어쩌면 나는 그녀로 인해 가슴 떨렸는지 모르겠다. 영숙의 입맞춤을 끝으로 ‘악의 꽃’보다 진하고, 선인장보다 독살스러웠던 내 인생은, 가련한 내 영혼은 그렇게 ‘굿바이’였다. 생의 가장 순정한 시간들은 그렇게 끝이 났다. 1994년 10월 17일 밤의 일이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도움말= 작가 김운경






으아따 브로엄을 몰던 한석규 때문에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여자 꼬시려고 억지로 클래식 듣던 장면은 지금도 못 잊습니다.



요즘 응답하라 1994도 그렇고 저도 나이를 처먹는 관계로 
옛날일 생각납니다



그리고 노빠들 이야기는 내일 하려고 합니다만


그건 그렇고 이래뵈도 제가 노무현 죽었을때 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