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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원문의 전문을 어떻게 입수할 수는 없을까요? 독자 여러분들의 도움을 바랍니다. 유물론(materialism, 물질주의, 물질론)과 물리주의(physicalism), 그리고 자연주의(naturalism)에 관한 논의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도 있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전문을 구해서 꼭 읽어보고 싶네요.
Physicists Debate Whether the World Is Made of Particles or Fields--or Something Else Entirely
Physicists speak of the world as being made of particles and force fields, but it is not at all clear what particles and force fields actually are in the quantum realm. The world may instead consist of bundles of properties, such as color and shape
By Meinard Kuhlmann | August 1, 2013
물리학자들의 논쟁 ― 세계는 과연 입자와 장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물리학자들은 세계가 입자와 역장(힘마당, force field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지만, 양자 영역에서의 입자와 역장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세계는 그 대신에 색깔과 형태와 같은 속성들의 묶음들로 구성돼 있을지도 모른다.
마이나르트 쿨만(Meinard Kuhlmann)

Image: Travis Rathbone
Source: Scientific American
It stands to reason that particle physics is about particles, and most people have a mental image of little billiard balls caroming around space. Yet the concept of “particle” falls apart on closer inspection. Many physicists think that particles are not things at all but excitations in a quantum field, the modern successor of classical fields such as the magnetic field. But fields, too, are paradoxical. If neither particles nor fields are fundamental, then what is? Some researchers think that the world, at root, does not consist of material things but of relations or of properties, such as mass, charge and spin.
당연한 얘기지만, 입자물리학은 입자에 관한 과학이고, 사람들 대부분은 입자들은 작은 당구공처럼 공간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주 자세히 파고들면 “입자”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입자는 물체(things)가 전혀 아니고 자기장(자기마당)과 같은 고전적 장의 현대적 계승 개념인 양자장(양자마당) 속에서의 들뜬 상태(excitations, 여기勵起 상태, 흥분 상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마당) 개념 또한 역설적이다. 만약 입자도 장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근본적인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우주는 근본적으로 물리적 실체들(material things)로 구성돼 있지 않고 질량, 전하, 스핀과 같은 관계들(relations)이나 속성들(properties)로 구성돼 있다고 생각한다.
Physicists routinely describe the universe as being made of tiny subatomic particles that push and pull on one another by means of force fields. They call their subject “particle physics” and their instruments “particle accelerators.” They hew to a Lego-like model of the world. But this view sweeps a little-known fact under the rug: the particle interpretation of quantum physics, as well as the field interpretation, stretches our conventional notions of “particle” and “field” to such an extent that ever more people think the world might be made of something else entirely.
물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우주가 역장(힘마당)을 통해 서로 밀고 당기는 아주 작은 아원자 입자들로 만들어졌다고 기술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입자물리학”, 그 연구 장치를 “입자 가속기”라 부른다. 그들은 레고 블록 같은 우주 모형을 믿는다. 그러나 이 우주관은 덜 알려진 미지의 사실들은 덮어버린다. 즉 양자물리학의 장 해석뿐만 아니라 입자 해석에 따르면 “입자“와 “장”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 개념은 우주가 입자나 장과는 완전히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한층 더 유력한 생각으로 확대되는데, 이에 대해선 말이 없다는 것이다.
The problem is not that physicists lack a valid theory of the subatomic realm. They do have one: it is called quantum field theory. Theorists developed it between the late 1920s and early 1950s by merging the earlier theory of quantum mechanics with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Quantum field theory provides the conceptual underpinnings of the Standard Model of particle physics, which describes the fundamental building blocks of matter and their interactions in one common framework. In terms of empirical precision, it is the most successful theory in the history of science. Physicists use it every day to calculate the aftermath of particle collisions, the synthesis of matter in the big bang, the extreme conditions inside atomic nuclei, and much besides.
문제는 물리학자들에게 유효한 아원자 영역 이론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 그들에겐 양자장(양자마당) 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이 있다. 이론가들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 사이에 양자역학의 초기 이론에 아인쉬타인(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통합해 양자장 이론을 개발했다. 양자장 이론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에 개념적 기반을 제공하는데, 그 표준 모형은 물질의 근본 구성 요소들과 그 상호작용을 하나의 동일한 틀 속에서 기술한다. 실험적 정확성에서 볼 때, 그것은 과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론이다. 물리학자들은 그 모형을 이용해 입자 충돌의 결과(여파), 대폭발(big bang) 이론에서의 물질의 합성, 원자핵 내부의 극한 조건들,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손쉽게 계산해낸다.
So it may come as a surprise that physicists are not even sure what the theory says—what its “ontology,” or basic physical picture, is. This confusion is separate from the much discussed mysteries of quantum mechanics, such as whether a cat in a sealed box can be both alive and dead at the same time.
This article was originally published with the title What Is Real?.
그럼에도 놀랄 만한 사실은 물리학자들이 그 표준 모형 이론이 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즉 그것의 “존재론”이나, 그것이 그리는 근본적 물리 세계의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상태는 밀봉된 상자 속의 고양이가 삶과 죽음의 상태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논란이 무성한 양자역학의 신비들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은 원래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Scientific American August 2013 Issue
Source: Pdfmagazines.org
自然 님, 댓글 주셔서 감사했는데요. 왜 지우셨죠?
단 한 문장의 댓글 촌평이었지만,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주는 촌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글 올리려고 했는데요. 갑자기 自然 님의 댓글이 없어지는 바람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自然 님의 그 댓글을 복사해놓은 게 있는데요.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래에 그 댓글을 인용하고, 간단하게 질문하고자 합니다.^^
自然 2013.11.17 08:21:12
오로지 패턴 (정보)만이 영원하죠.
自然 님은 “패턴(pattern)” 개념을, 분명히 위에서 마이나르트 쿨만(Meinard Kuhlmann)이 던지는 세계/우주의 근본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언급한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自然 님의 패턴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패턴 개념을 정보(information) 개념과 동일하게 보는 것인가요?
아시다시피 정보를 우주의 근본적 실체 혹은 그에 준하는 것으로 보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즉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좐 아춰벌드 휠러), 세스 로이드(Seth Lloyd),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 데이빗 차머스) 등등이 그런 논의와 관련돼 대표적으로 거론됩니다.
과연 우주의 근본적 실체로서의 패턴 혹은 정보라는 개념이 어떤 타당성/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自然 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콸리아/ 논의가 간단히 될 일이 아니기에 촌평을 접었는데 그새 읽고 복사까지 하셨다니 한 두 마디 추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날로그이고 디지탈은 이것의 조잡한 복제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으나, 플랑크 이후 우주의 미소한 부분을 관찰하면 양자(quantum)적 세계가 드러남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양자적 파동은 하나의 패턴 (정보)인데, 이 패턴 (정보)은 매체에 독립하여 고유하고 영원히 기록된다고 봅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주역 점을 쳐서 얻은 64괘를 기록하는데 종이에 기록하든 죽간에 기록하든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으며, 기록도 이어진 작대기와 끊어진 작대기로 하든, 플러스/마이너스 기호로 하든, 주역에서처럼 9자와 6자로 하든, 혹은 모르스 부호로 하든, 내용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아인시타인의 주장대로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라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어떠한 실체, 가령 이 별이나 태양, 심지어는 은하계조차도 결국 에너지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주란 에너지 뭉치의 패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터입니다.
논의를 한 인간에 대하여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인간은 약 천 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나, 세포마다 그 유전자는 거의 동일하죠. 체세포 돌연변이나 lysogenic virus 감염같은 약간의 변수를 제외하면 동일한 그 유전자 역시 A-G-C-T 의 조합으로 구성된 패턴(정보)일 뿐입니다. 그 인간의 생각과 말과 함도 패턴이죠.
새끼손톱만한 microSD 카드에 64GB를 담는 시대입니다. 의상조사 법성계게에 나오는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귀절이 그저 종교적 수사인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정보의 전달은 광속보다도 빠르죠.
패턴을 우리말로 옮기면 "무늬"가 가장 가까울 듯 싶은데, 무늬는 공간적 패턴만을 지칭한다는 어감이 있어서, 음열렬(serie)같은 시간적 패턴까지 포함하여 "패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패턴은 정보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지만 보다 더 그 본질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물론 개인적인 표현입니다.
제가 정보(Information) 개념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요. 自然 님의 위 댓글에 대강의 요점이 모두 들어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정보의 유형도 파고들면 여러 가지가 있더군요. 피터 아드리안스와 요한 판 벤뎀(Pieter Adriaans & Johan F.A.K. van Benthem, 2008)에 따르면 정보를 대략 다음과 같은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더군요.[1] [2]
① Information-A, Knowledge, logic, what is conveyed in informative answers
② Information-B, Probabilistic, information-theoretic, measured quantitatively
③ Information-C, Algorithmic, code compression, measured quantitatively
위 요약문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정보-A는 인식적 논리학이나 언어적 의미론의 견지에서 보는 정보로서, 새로운 사실이나 지식을 주는 정보를 가리키고, 정보-B는 클로드 섀넌(Claude E. Shannon)의 수학적 통신 이론의 견지에서 보는 정보로서, 특정 주파수를 지닌 신호나 그런 주파수/전파에 실린 자료(data, 데이터, 데이타)와 같은 정보를 가리키고, 정보-C는 안드레이 콜모고로프(Andrey Kolmogorov)의 콜모고로프 복잡성(Kolmogorov complexity) 이론의 견지에서 보는 정보로서, 컴퓨터 프로그램 혹은 알고리듬적 의미의 정보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정보 유형은 확실하게 구별/변별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중첩되는 측면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정보 속에 담긴 핵심적 본질과 속성을 분석 · 규명 · 판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개념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위 댓글에서 自然 님이 제시한 정보의 다양한 사례들, 즉 양자적 파동, 주역의 점괘, 인간의 유전자 정보, microSD 카드에 저장된 비트(bit) 정보 사례들도 위 개념틀에 근거해 좀 더 명확한 속성들을 파악할 수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보”라는 개념에서 받는 인상은 통상적/일상적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어떤 “실체로서의 정보”라는 개념을 상상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3차원적, 물질적, 물리적 이미지의 실체 개념에 길들여진 우리의 인식 체계로는 실체로서의 정보가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실체로서의 “패턴(pattern)” 개념은 더욱 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自然 님이 굳이 정보라는 개념을 괄호치고 패턴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개념적 정립 작업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自然 님의 위 댓글 내용만으로도 아주 심오한 의미를 끌어내고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저는 自然 님의 위 댓글을 읽고 몇 가지 암시랄까, 심층적 사색의 실마리랄까, 이런 단초나 계기를 얻은 느낌입니다. 거듭 생각 깊은 사유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참고 문헌
[1] Adriaans, Pieter & Johan F.A.K. van Benthem (2008). Introduction: Information is what Information does. In Pieter Adriaans & Johan F.A.K. van Benthem (eds.) (2008). Philosophy of Information, (Handbook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8). Amsterdam, The Netherlands: North-Holland. pp. 3-26.
[2] Adriaans, Pieter (2013). Information. In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3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3/entries/information
[덧붙임]
自然 님 글 가운데 “법성계”는 “법성게(
콸리아/ 법성계는 오타 맞아 고쳤습니다. 음악 용어인 serie는 불어 단어입니다.
"패턴"이라는 단어가 선뜻 와닿지 않는다면 바 코드를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상품 정보뿐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정보를 바 코드 무늬에 실을 수 있죠. 그리고 한 번 실린 패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패턴을 만들면 위험하죠. 그래서 댓글을 지웠던 것인데...)
Pattern ERG, Pattern VEP, pattern-reversal VEP같은 쓰임새도 있습니다. 이걸로 객관적 시력검사가 가능하게 되므로, 영유아 시력측정이나 사병 감별에 쓰일 수 있죠.
지구인들이 "알다(認識)"라는 말을 할 때, 많은 경우 "보다"로 대체 가능한데, 본다는 것은 사실 망막 광수용체들의 흥분 패턴일 뿐입니다. 그 흥분 패턴이 시피질까지 세 개의 시냅스를 거쳐 전달됨이지요. 손가락 - 손 - 팔 - 윗팔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
自然 님, 아하 그렇군요. “serie”가 프랑스어식 음악 용어였군요. 감사합니다.
패턴의 유비(?)로서 바 코드 무늬를 드셨는데요. 그리고 망막 광수용체들의 흥분 패턴을 예시하셨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러한 유형의 패턴 개념으로 곧장 우주적 근본 실체로서의 패턴 개념으로 도약하기엔 (혹은 플랑크 상수에 근접하는 미시 세계로 파고들기엔) 상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이나르트 쿨만(Meinard Kuhlmann)의 문맥을 따르자면, 패턴 개념이 우주의 근본 실체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려면, 현재의 과학적 수준에서 실체 혹은 실체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본 입자들, 장, 질량, 전하, 스핀 등등의 물리적 실체(material things)나 속성들(properties)을 한 묶음으로 수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패턴 개념이 이런 물리적 실체나 속성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렴하고 설명할 수 있을지, 自然 님의 현 설명 내용으로는 거의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지금까지 드러난 自然 님의 패턴 개념(혹은 정보 개념)은 우리의 일상적/통상적 개념에서 한두 꺼풀밖에 파고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상인들은 自然 님의 설명과 예시에 담긴 깊은 함의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가 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전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런데, 저도 인터넷을 뒤져서 외국의 블로거가 원본을 복사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은 판본을 입수해서 비교해보았는데요. 소개해주신 위 PDF 복사본과 블로그 판본이 서로 조금 다르더군요. 특히 끝부분에 있는 “추천 참고 문헌(MORE TO EXPLORE)” 목록이 PDF 복사본에는 빠져 있더군요. 그래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Scientific American》 2013년 08월호의 PDF 원본을 어떻게든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위 원문을 읽고 이곳에 요약해 올리든지, 아니면 전문을 번역해 올리든지 해서, 후속 논의를 이어가보면 좋겠습니다. 근데 원문이 짧은 편은 아니더군요. 번역에는 좀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아무튼 원문을 구해주셔서 김가 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입자이든 입자인 것처럼 보이는 양자적인 에너지 덩어리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인 것은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유물론이 영향받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봄의 존재론 해석과 양자운동이론
위의 링크된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강조는 인용자)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같은 구세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이 잘못된 인식론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 위에 물리학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끝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양자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O1. 세계에 나 이외에 여러 인식 주체들이 존재한다.
O2.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이 존재한다.
O3.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각 인식 주체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O4. 인식 주체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그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여러 개이며, 이것들 사이의 관계는 변화한다.
일부 명상가를 제외하고 O1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 중에 O2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해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외부 사물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그 해가 실제로 매우 크고 매우 뜨거워 그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물리학자들은 O3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물리학자는 지구도 여러 인식 주체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여러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구와 해가 다른 사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변화 중에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물리학자들은 O4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O의 주장들을 “상식” 또는 “상식 존재론”이라고 부를 것이다.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M1. 자기장 발생 장치를 포함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 사용된 장치들은 인식 주체들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실제로 존재한다.
M2. 인식 주체가 없어도, 그가 스크린을 확인하지 않아도, 스크린에 두 줄 흔적이 남겨져 있다.
M3. 원자가 총에서 발사되어 스크린에 흔적을 남길 때까지, 원자, 자기장, 스크린 등의 상호작용은 물리적 상호작용이며 이 모든 과정은 동역학적 과정이다.
M4. 지켜보는 인식 주체가 없다 하더라도, 원자 하나는 총에서 출발하여 자기장 발생 장치를 경유하여 스크린까지 이동한 후 스크린에 한 점 흔적을 남긴다.
코펜하겐 해석 진영은 애써 M4를 부정한다. 하지만 다른 논제에 대해 다소 열린 자세를 취한다. M2를 받아들이는 해석자들은 스크린을 하나의 측정장치로 간주한다. M2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흔적 자체가 인식 주체의 개입과 무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해석자들은 M3까지도 받아들인다. 물론 이들은 소위 붕괴과정이 양자동역학 과정의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M4를 거부하게 되면, 코펜하겐 해석 진영에서 취할 수 있는 합당한 길은 M3을 포기하거나 M2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해석자들은 인식 주체가 스크린 흔적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위쪽에 흔적이 있는 상태와 아래쪽에 흔적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심지어 인식 주체가 스크린을 보기 전에는 흔적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런 대안이 상식 존재론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에라도 누군가 원자가 뚜렷한 궤적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도한 형이상학이 아니다.
맘일몸 님, 좋은 글을 인용해주셔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용해오신 글 「봄의 존재론 해석과 양자운동이론」은 어떤 분의 글인지요? 인용글에서 원저자가 “상식” 혹은 “상식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제가 아래에 다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양자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O1. 세계에 나 이외에 여러 인식 주체들이 존재한다.
O2.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이 존재한다.
O3.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각 인식 주체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O4. 인식 주체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그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여러 개이며, 이것들 사이의 관계는 변화한다.
위에 인용한 O1~O4는 양자역학적 관점과는 전혀 관계 없이, 그냥 객관적 관점의 과학 수준, 이를테면 지각심리학이나 인지과학, 인지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봐도 숱한 오류가 잠복해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하물며 그런 오류 투성이의 “상식” 혹은 “상식 존재론”에 근거해 양자역학의 역설/논란에 도전한다는 것은 좀 무리한 시도로 보입니다.
위 네 가지 명제로 제시한 원저자의 “상식 존재론”은 통상적으로 거론되는 상식 존재론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빠트리고 있는 듯합니다. 즉 인식 주체가 인식 주체 외부(내부도 마찬가지)에 존재하는 대상/사물을 지각하고 인식하려고 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오류가 개입된다는 명제입니다. 이것이 필함하는 바는 인식 주체가 오류를 저지르는 과정을 생략하면 인식 주체는 (그 어떠한 측정 도구도 또한) 외부/내부의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인식도, 발언도 할 수 없다는 역설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상식 존재론” 혹은 “통속 존재론”의 근원적 역설이자 자기파기적인(self-defeating) 운명입니다.
그런데 원저자의 위 “상식 존재론”에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명제/항목이 빠져 있습니다. 원저자의 논증이 처음부터 커다란 허점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사정이 이러한데 그런 유형의 “통속 존재론”으로 양자역학의 난제에 도전한다는 것은 지극히 무리스러워 보입니다.
[덧붙임]
윗글 가운데 “자기파기적인(self-defeating) 운명”에서 “자기파기”는 “자기파괴”의 오타가 아닙니다. “자기파기적 논증(self-defeating arguments ≒ self-refuting arguments)”이나 “인식론적 자기파기(epistemic self-defeat)”와 같은 철학 개념에서 쓰이는 일종의 전문 용어입니다. 자기파괴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qualia님/
어떤 기독교신자가 <인간의 눈에 보이는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나는 오늘 하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라고 말한다면 자기모순인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대로 믿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님의 철학은 그 기독교신자와 유사한 자기모순적 결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님의 주장인 "인간의 실체에 대한 인식과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는 일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식 과정에는 반드시 오류가 개입되므로" 라는 지극히 상식존재론에 입각한 말씀이 왜 상식존재론의 근원적 역설인지를 전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마치 <상식존재론은 옳으므로 상식존재론은 틀렸다> 라는 말씀과 같으니까요.
왜 인식 주체가 오류를 저지르는 과정을 생략하면, 인식 주체는 외부/내부의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인식도, 발언도 할 수 없어요? 자신의 인식과 발언은 오류일 수 있음을 항상 인정하고 전제하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양자역학의 전문가는 전혀 아니지만, 만약 양자역학의 기본 전제가 님의 주장대로라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근원적 역설이 되버리죠. 그 분들은 그럼 무슨 근거로 본인들의 이론을 믿어달라 주장할 수가 있다는건지. 양자역학 역시 존재하는 대상/사물을 지각하고 인지한 결과물에 불과할텐데 말이죠.
그런데 양자역학은 오히려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심지어 인과율에 기반한 추론이나 관념마저 배제하고서 오직 대상을 실험하고 관찰하여 수집된 증거만을 신뢰하겠다> 라는 지극히 철저한 '실험관찰 중심주의' 즉 상식존재론에 입각한 이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자얽힘이니 양자도약이니 중첩이니 하는 인간의 기존 인식이나 관념을 파괴(?)하는 듯한 이론도 주장할 수가 있는거죠.
즉 양자역학 역시 철저히 <상식존재론>에 입각한 이론이라는 말씀. 그런데 어떻게 양자역학적 관점이 상식존재론을 무너뜨릴 수가 있다는거죠? 상식존재론이 무너지면 양자역학도 무너지는건데요. 모순이죠. 그저 양자역학으로 인해 인간의 기존 인식이나 관념이 다른 것으로 바뀔 뿐인겁니다. 지동설과 상대성이론과 진화론이 그랬듯이.
그리고 님이 견지하고 계시는 철학적 입장으로는, 님께서 맘일몸님이 소개하신 글을 <오류투성이> 라고 선언하거나, 원저자의 논증이 처음부터 커다란 허점에 빠졌다고 주장하시는 것 역시 자기모순입니다. 맘일몸님의 소개글 역시 대상/사물이고, 님의 주장은 그것을 지각하고 인지하려 노력한 결과물이며, 필연적으로 오류가 개입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류를 관찰하여 오류라고 말하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철학을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오히려 님의 철학이야말로 외부/내부의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인식도 발언도 할 수 없는 역설을 가진 것이죠. 상식존재론이 아니라요.
말씀대로 인간의 대상/사물에 대한 인지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오류가 개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식과 사물은 일치하지 않고 항상 객관적인 거리가 존재하는거니 당연하지요. 과학은 그 필연적인 오류를 최대한 줄여 인식과 사물간의 거리를 좁히고 일치시키려는 인류의 치열한 노력의 산물 그 자체이고, 따라서 님의 논거는 과학은 언제나 오류가 존재하고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 말고는 그 이상의 철학적 의미는 없습니다. 양자역학 역시 마찬가지일 뿐이고요.
qualia/
1. [물리학과 첨단기술]에 위에 링크된 글과 함께 실린 저자(김명석) 소개입니다.
저자약력
김명석 박사는 경북대학교에서 철학박사(2002)를 수여받은 후 같은 대학의 기초과학연구소 연구초빙교수(2003~2005)와
대통령 직속 중앙인사위원회의 공직적격성평가 언어논리영역 전문관(2005~2007)을 거쳐, 2010년부터 생각실험실 대표로 재직 중이다. 현재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 후기분석철학의 인식론과 언어철학, 물리주의와 경험주의
비판, 의미의 형이상학, 자유의지와 심신인과, 심성의 외부주의, 진리 개념의 원초주의, 학문의 우리말 토착화 등을 연구한다.
(myeongseok@gmail.com)
2. "통속 존재론"의 정의와 문제점에 관련하여 정리된 글이나 자료가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3. "인식 주체가 오류를 저지르는 과정"은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요?
링크된 글에서 "괘적"을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이고, "괘적"자체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문제는 존재의 문제로 보입니다.
다시말해서 인식의 문제 -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정립된 양자역학의 방정식, 존재의 문제 - 괘적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해석하는 것(봄의 해석)과 괘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해석(주류해석, 코펜하겐학파)로 구분해서 봐야할 것 같습니다.
맘일몸/
제가 보기에 이런 문제는 전자공학등의 수식에서 흔히 사용하는 '허수' 의 경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허수를 사용하면 계산하기도 쉬워지고 실제 관측결과와 잘 들어맞긴 하죠. 그렇다해서 허수가 실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허수로 표현되는 공학적 물리량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존재한다고 가정할 뿐인거죠. 허수는 그저 계산의 편의를 위해 도입된 수학적 도구일 뿐인건데 그걸 철학적으로 고민하면서 착각하는 경우와 매 한가지인 듯.
그런데 이건 사실 음수 역시 마찬가지죠. 각종 계산에 음수를 사용하고 있다 해서 자연계와 대칭되는 '음의 세계'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거나 주장하면 낭패. 음수 역시 계산의 편의를 위해 도입된 수학적 도구일 뿐이고, 자연계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0보다 작은 물리량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겠죠.
피노키오님의
설명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던 평범한 아마츄어로서 제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양자역학의
방정식(슈뢰딩거 방정식)은 과거의
어떤 이론보다도 물리적 대상의 동역학 과정<시작 – 운동(변화) – 결과>에
대하여 매우 정확한 예측을 가능 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결과치는 확률적 결과치를 의미합니다.
예측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대상(ex, 전자)을 측정(관찰)하는 경우 그 대상은 특정한 값(확률적 예측치 중의 하나)을 가지게 되고(파동함수의 붕괴), 측정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측정치들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적 분포와 매우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특정한 하나의 결과치(파동함수의 붕괴)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즉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물리적 대상의 동역학 과정에 대한 예측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파동함수의 붕괴(특정한 대상의 특정한 결과값)를 둘러싸고
이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주류해석(코펜하겐)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전자)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수 천만 광년 떨어진 별에서 일어나는 일과 초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여기
한 곳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사건은 우주의 다른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나의 몸무게가 측정 전에는 미리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측정 전에 사물은 아무런 속성을 지니지 않고 있다가
측정 과정을 통해 생성된다! 우리는 정말이지 급진적 코펜하겐 해석자들처럼 실재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버클리의 관념주의 비슷한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김명석, 양자현상과
상황적 실재주의 2003]
주류해석에
따라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맞다면, 물리적 대상이 인간의 의식과 독립적(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기본전제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겠지요.
2004 수능 지문입니다.
고전 역학은 20세기 초까지 물리학자들이 세계를 기술하던 기본 이론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을 포함한다. 물리적 속성에 대한 측정은 측정 대상의 다른 물리적 속성을 변화시키 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정과 물리적 영향은 빛의 속 도를 넘지 않고 공간을 거쳐 전파된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돌의 단단한 정도를 측정한다고 해서 그 돌의 색깔이 변하는 것은 아니며, 돌이 유리창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유리창이 ‘미리 알고’ 깨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 역학의 가정은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양자 역학은 고전 역학보다 더 많은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고전 역학을 대체하여 현대 물리학의 근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역학이 예측하는 현상들 중에는 매우 불가사의한 것이 있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양자 역학에 따르면, 같은 방향에 대한 운동량의 합이 0인 한 쌍의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그 연관을 유지한다. 이제 이 두 입자 중 하나는 지구에 놓아두고 다른 하나는 금성으로 보냈다고 가정하자. 만약 지구에 있는 입자의 수평 방향 운동량을 측정하여 +1을 얻었다면, 금성에 있는 입자의 수평 방향 운동량이 -1이 된다. 도대체 그렇게 멀리 떨어진 입자가 어떻게 순간적으로 지구에서 일어난 측정의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또한 양자 역학에 따르면 서로 다른 방향의 운동량도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수평 방향 운동량과 수직 방향 운동량은 하나를 측정하면 다른 하나가 영향을 받는다. 그 결과 지구 입자의 수평 운동량을 측정하여 +1을 얻은 후 연이어 수직 운동량을 측정하고 다시 수평 운동량을 측정하면, 이제는 +1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1과 -1이 반반의 확률로 나온다. 두 번째 수직 방향 측정이 수평 운동량 값을 불확정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지구 입자는 금성 입자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금성 입자의 수평 운동량을 측정하여 -1을 얻은 후 지구 입자의 수직 운동량을 측정하면, 그 순간 금성 입자의 수평 운동량 값 역시 불확실해진다. 그래서 수평 운동량을 다시 측정하면 -1과 +1이 반반의 확률로 나온다. 어떻게 지구에서 이루어진 측정이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의 물리적 속성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 현상에 대해 고전 역학의 가정을 만족시키면서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처럼 불가사의한 양자 현상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루어진 아스펙의 일련의 실험 이후, 이러한 양자 현상이 미시적인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양자 역학은 이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인과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양자 역학의 한계에 대해 물리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는 양자 역학을 자연에 적용할 때 매우 성공적이었으므로, 이러한 양자 현상이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양자 역학은 미래에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불가사의한 양자 현상도 어떤 형태로든 설명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꼬륵님이 인용한 글 중 "양자 역학은 이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하지만 ////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인과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양자 역학의 한계에 대해..."
전반부의 양자역학의 예측력은 충분히 실험으로 검증되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의 "인과적 설명"은 주류 해석이든 비주류 해석이든 모두 실험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의 저의 댓글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은 후반부에 대한 언급입니다.
(*) 노트북에서도 안되고, 스마트폰에서도, 데스크탑에서도 링크가 안 열리네요..
저만 그런가요???
꼬륵/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두 입자가 공간을 초월해 연결되어 있고, 측정/관찰 행위가 입자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해서 그것이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자연 원리가 존재한다는 증거일 수는 있겠죠.
관찰자의 유물론적 의미는 정확히는 '관찰자의 의식' 입니다. 따라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연결되어있다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겠죠.
1. 관찰자가 측정 행위 이전 어떤 입자의 상태에 대해서 +1 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측정해보니 +1이었다. 이것을 충분할만큼 반복해도 결과가 동일했다.
2. +1 로 측정이 완료된 입자에 대해 잠시후 관찰자가 -1 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측정해보니 -1로 변화해 있었다. 이것을 충분할만큼 반복해도 결과가 동일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실험을 해볼 수 있겠죠. 아직 측정을 하지 않은 미지의 입자가 있는데, 이것을 어떤 과학자에게 "이 입자를 측정했더니 +1 이었다. 다시 측정해서 맞는지 확인해보라" 라고 속인 뒤에 측정을 시켜본다. 그랬더니 정말로 +1 의 측정결과가 나왔다. 그것을 충분할만큼 반복했는데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다. )
이런 경우들이 아니면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따라서 님의 설명이 유물론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인 것도 아니겠구요. 측정/관찰의 행위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측정/관찰행위는 관찰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고전물리학의 가정이 미시세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줄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구에 있는 입자에 대한 측정행위가 금성에 있는 입자에까지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수능 지문의 설명은 신기하긴 하네요. 입자의 불확정성이 빚어내는 눈속임 마술인건지 아니면 두 입자가 실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건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실제 실험 결과가 그렇다니 믿어야겠죠.
다만 문외한으로써 두 입자가 주고받는 정보의 매개체가 뭔지, 입자 사이 정보의 전달은 광속보다도 빠르다는건데 그 현상을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다는건지 사뭇 궁금하네요. 그리고 어떤 입자가 보유한 정보가 우주공간 전체에 동시간에 전달되고 있다는건데 그게 사실인가도 궁금하구요.
꼬륵/
소개하신 영상을 봐도 역시 <관찰장치와 입자는 연결되어 있다> 라고 말하는건 가능해도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연결되어 있다> 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관찰자란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정확히는 "관찰하는 사람의 의식"일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해보면 명확해지는 거죠. 관찰하는 사람은 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행동을 해서는 안되고, 외부에서 조용히 응시만 해야하는 존재이니 당연하겠죠.
만약 영상 속의 이중슬립과 같은 실험으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연결되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예를 들어 이런 경우들이겠죠.
1. 관측실험을 행하고 있는 과학자의 눈을 안대로 가린 경우와 가리지 않은 경우의 결과가 달라지는가?
2. 관측실험이 진행되고 있을 때, 과학자가 해당 실험기계 모니터 앞에 있을 때와 화장실에 갔을 때 등의 결과가 달라지는가?
이런 경우가 아니면 여전히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연결되어 있다> 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입자에 관찰장치를 들이댔을 때와 아닐 때 입자의 행동이 달라진다 밖에 없는거죠. 결국 과학자들이 밝혀내야하는 것은 관찰장치와 입자 사이의 연관성이지 관찰자와의 연관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관찰장치를 곧바로 관찰자로 치환해서 발생하는 혼란이 아닐까 싶은데요. 실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찰행위란 "관찰장치의 행위" 이지 "관찰자의 행위"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영상속의 이중슬립실험에서 관찰장치가 고장난 상태일 때도 여전히 입자의 행동이 달라지는건지, 가짜 관찰장치를 세워놨을 때도 그러한지 등입니다.
1.
실험결과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
(1)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 관찰(측정)
행위가 없을 때 개별 전자는 자기간섭을 통해 간섭 무늬(개별 전자의 양자적 확률 분포)를 나타낸다. 이는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이용해서 매우 정확하게
예측이 가능하며, 그러한 예측력은 차고 넘치도록 검증되었다.
(2)
파동함수의
붕괴 : 관찰(측정) 행위가
이루어지면 개별 전자의 양자적 확률분포가 붕괴되어 특정한 위치나 운동량을 갖게 된다. 이러한 파동함수의
붕괴는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파동함수의 붕괴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2.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결과 특히, 파동함수의 붕괴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해서는 실험으로 검증된 이론(방정식)이 없다.)
(1)
코펜하겐
해석(주류 해석) :
-
전자(모든 물체)는 파동 또는 입자이다.(보어의
상보성 원리) 확률분포(파동함수)만이 전자(모든 물체)의
본질이다.
-
관찰행위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전자는 확률분포 상태로 두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여 자기간섭 효과가 발생한다.(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
그러나
관찰행위가 이루어지면, 관찰행위가 전자의 파동함수에 영향을 미쳐서 파동함수를 붕괴시킨다. 이에 따라 전자는 두개의 슬릿 중 하나만을 통과한 것으로 관찰된다.
-
이는
전자의 입자적 특성이 관찰자의 관찰행위와 독립적이지 않으며, 관찰행위의 결과로 전자의 입자적 특성이
비로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는 관찰대상인 전자의 존재 자체가 관찰자와 연결되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봄의 해석
- 전자(모든 물체)는 파동인 동시에 입자이다.
- 개개의 전자의 입자는 하나의
구멍만을 통과하지만 동시에 전자의 파동(함수)는 슈뢰딩거의
파동함수(확률분포)에 따라 두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해서
자기 간섭 효과를 만들어낸다.
- 측정은 개개의 입자가 실제로
지나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파동함수의 붕괴는 따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 봄의 이러한 설명은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되는 양자퍼텐셜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3) 다중우주 해석, 서울 해석 등등
위에서 설명된 여러가지 해석들은 표준 양자역학에 위배되는 점이 전혀
없지만, 실험으로 이를 검증하기가 매우 어렵다.
(*) 위의 내용은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과 위에 링크된 글을 주로 참조 했는데, 아마츄어가 설명을하려고 하니 여러가지가 익숙하지도 않고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의 닉네임은 맘일몽이 아니라 맘일몸입니다.
입자이든 입자인 것처럼 보이는 양자적인 에너지 덩어리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인 것은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유물론이 영향받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 피노키오 님,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부 번역 소개한 「무엇이 실체인가? What Is Real?」에서 원저자 마이나르트 쿨만(Meinard Kuhlmann)은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의 최신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일반적으로 물리(학)적 실체나 우주의 근본 구성요소(fundamental elements; fundamental constituents; fundamental features)로 간주되어온 입자, 장, 질량, 전하, 스핀 따위는 어떤 구체적인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사실은 일련의 속성들과 관계들의 묶음(bundles)으로 파악하는 것이 과학적으로/철학적으로 더 타당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물론, 그런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실체 개념들보다 예의 그 속성과 관계의 묶음 개념이 양자장론에서 지금까지 밝혀낸 우주의 근본 실체에 관한 역설적 사실들과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런 양자장론에서의 속성/관계 묶음 이론과 일종의 상호 보완 관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근본적 속성 혹은 실체로서의 정보 개념입니다. 즉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July 9, 1911 - April 13, 2008)의 “it from bit” 이론, 마음철학자(심리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 1966-)의 정보 양면 이론(Double-Aspect Theory of Information)은 우주의 근본적 요소로서 정보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1] [2] [3]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정보 혹은 정보 상태가 지닌 이중적/양면적 측면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정보의 물리적 측면과 현상적 측면(physical and phenomenal aspects)입니다. 여기에서 정보의 현상적 측면이 핵심적입니다. 왜냐 하면 그 현상적 측면은 우주의 근본 요소로서 심적/심리적(mental/psychological) 요소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의식의 현상적 혹은 원현상적(phenomenal or protophenomenal) 속성을 우주의 근본 요소 상정하는데, 기존 물리학은 이러한 특징들을 설명하고 파악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물리학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가설/가정은 아직까지는 사변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물리학자/과학자/철학자들이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으며, 아직은 일부지만 세계적 학자들이 그런 유형의 유사한 주장을 담은 논문이나 저작을 심심찮게 발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위와 같은 생각들에 강한 공감을 느낍니다. 꼭 저러한 사변적 생각이 아니더라도 양자장론에서 암시하는 속성/관계 묶음 이론 등등은 유물론(materialism, 물질주의)이나 강한 물리주의(physicalism)의 불완전성을 더욱 더 크게 드러내리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인류가 일종의 이원론(dualism)을 진리로 받아들일 날이 꼭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심리철학/인지과학/신경과학/뇌과학계, 심지어는 물리학계 등등을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의식 탐구 저작의 하나로 꼽히는 데이비드 차머스(데이빗 차머스)의 1996년 저서 『의식하는 마음 The Conscious Mind: In Search of a Fundamental Theory』이 신상규 교수(숙명여대 의사소통센터)의 번역으로 김영사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이 책의 번역 · 출간은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합니다. 이 책이 의식에 관한 철학과 과학에 끼친 영향은 정말로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정말 기대가 큽니다.
■ 참고 문헌
[1] Chalmers, David John (1995/2010). Facing up to the Problem of Consciousness.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2(3): 200-219. Reprinted in his The Character of Consciousn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 3-28.
[2] Chalmers, David John (1996). The Conscious Mind: In Search of a Fundamental Theory, (Philosophy of Mind Seri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3] Chalmers, David John (2010). The Character of Consciousness, (Philosophy of Mind Seri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출현하여 의식과 심리와 마음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우주의 근본 요소가 지금과는 달랐을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데요? 인류가 우주의 근본 요소를 좌우하는 신적 존재일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하구요. 제 독해가 올바른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령 <입자, 장, 질량, 전하, 스핀>이 정보나 관계에 불과한 것이 엄밀한 실험관찰의 결과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그 역시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인류가 멸종하고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멸종하여 일체의 의식 심리 마음이 사라지더라도 <입자, 장, 질량, 전하, 스핀> 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고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죠. 설령 그것들이 정보나 관계에 불과하더라도 말이죠. 그것들이 정보나 관계라는 것이 모든 실험관찰의 결과 더 타당한 결론이라면 과학책에 그렇게 기록해놓으면 그 뿐인거고 달라질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qualia 님이 보시기에 저 피노키오는 님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입니까 아닙니까? 님의 의식 심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피노키오라는 존재의 어느 것 하나 털끝만큼이라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저 피노키오가 입자로 이루어진 존재이든, 입자처럼 보이는 착시를 일으키는 정보나 관계의 현상적 구성물에 불과하든 상관없이 말이죠.
양자역학 역시 그저 인간이 의식 바깥의 객관적 실체를 실험하고 관찰하여 구성한 인식적 결과물이자 과학이론일 뿐입니다. 그 철학적 지위가 뉴튼역학이나 진화론 지동설 심지어 틀린 것으로 판명난 천동설과도 하나도 다를게 없고 달라야할 이유도 없어요.
님께서 견지하고 계시는 철학을 흔히 관념론이라 하는데, 관념론은 간단하게 논파되는 철학입니다. 양자역학이 일반인들 보기에 난해하고 어렵다해서 그것을 관념론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최신 과학이론은 인간의 의식 마음 심리 역시 초월적이고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물리적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많은 실험과 증거로써 입증하고 있고, 그 결론은 양자역학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해서 맞는 정의를 공유하지 않으면 이런 토론은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관념론은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주장을 반드시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플라톤도 헤겔도 그런 의미에서의 관념론자가 아닌 관념론자이며 모든 종교들 역시 그러합니다. 그 주장은 오직 버클리 등이 주장한 주관적 관념론만을 타켓으로 삼을 수 있을 뿐입니다.
관념론은 세계/우주/자연 등등으로 불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법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구가 의식을 지닌 생명체 없이 수십억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 수십억년 동안에도 자연과학이 밝혀내고자 하는 법칙적 운동을 해왔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관념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세계/우주/자연이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세계/우주/자연 등등으로 불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법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사실만 가지고서는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리적 = 물질적'이라는 생각으로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라는 표현을 썼다면 그 표현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플라톤, 헤겔 같은 서양의 대표적인 관념론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기독교같은 세계 종교들 역시 세계/우주/자연 등등으로 불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법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와는 무관해도, 더 정확히는 인간의 의식의 산물은 아니어도 인간을 자기실현/자기의식의 매체로 삼는 어떤 초인간적 정신의 산물이기는 하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꽤 그럴듯합니다. 세계/우주/자연이 무한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속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물질적인 것 - 물질적/물리적 실체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 에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의 무한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제일 그럴듯한 광대무변성/질서/법칙/통일성/생명/유한한 의식같은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유한한 의식, 즉 인간의 의식이 물리적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많은 실험과 증거로써 입증한 최신 과학'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과학이 있다면 심리철학은 유물론자들의 승리로 종결되었을 것이나 저는 그런 소식을 들은 바 없습니다. 최신과학이 입증한 것은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뇌 사이의 어떤 법칙적 관계입니다. 물리주의는 비전이고 기획이고 철학이지 과학적 정설이 아닙니다.
콸리아님의 글이 전하는 주장대로, 정보가 우주의 근본적 요소이고 정보의 현상적 측면이 심적/심리적 성격을 지닌다면, 그것은 분명 유물론보다는 관념론이나 적어도 이원론자들에게 유리한 사실입니다. 더이상 환원할 수 없는 물질의 기본단위에 심적/심리적 성격도 있다는 얘기니까요.
칼도 님, 위 생각 깊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아 보입니다. 유물론(materialism, 물질론, 물질주의, 혹은 드물게 물리주의로 번역하기도 함), 물리주의(physicalism), 자연주의(naturalism) 등등에 대한 정확한 정의/개념 파악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죠. 말씀대로 이들 개념에 대한 최소한의 공동 이해가 선행된다면 좀 더 생산적이고 심층적인 논의로 발전될 수 있을 듯합니다.
위에 소개한 마이나르트 쿨만(Meinard Kuhnmann)의 「무엇이 실재인가? What Is Real?」 전문을 읽어보셨는지요? 독일분이던데요. 영어 문장을 상당히 잘 쓰더군요. 어려운 주제/논제를 알기 쉬운 사례로 풀어, 아주 명료한 문체로, 솜씨 좋게 전달하더군요. 독자분들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부분을 번역해 이곳에 올리려고 했는데, 일이 터지는 바람에 지연되고 있습니다.
위 좋은 글 거듭 고맙습니다.
맘일몸 님, 저는 일종의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과 일종의 이원론(dualism)에 상당한 끌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을 다음 기회에 간략하게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맘일몸 님의 견해도 듣고 싶군요. 흥미로울 듯합니다. 장문의 댓글들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라고 할만한 것은 없지만, 저도 예전에는 일종의 이원론에 끌림이 있었습니다.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책을 본 후에는 장회익 교수의 '일원양면론'에 관심이 있습니다.(장회익 교수는 서울 해석을 창안한 바 있고, '온생명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온생명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아는바도 없습니다.)
장희익 교수는 자신의 '일원양면론'이 스피노자의 사유와 거의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내가 도달한 궁극적인 존재론은 '일원양면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물질이 존재하는데, 이 물질은 물리적 서술대상, 곧 외적 측면만을 지닌 물질이 아니라 주체적 의식의 발현, 곧 내적 측면도 지닐 수 있는 물질이라는 거예요." [이분법을 넘어서, 315]
참고로 저는 과거에도 유물론자였고, 앞으로도 유물론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칼도님의 견해가 더 정확합니다.
다만 통상적으로 심적/심리적 성격이란 인간의 것을 말하는 것이라서 특별한 언급이 없는 이상 qualia 님의 입장은 주관적관념론인 것으로 파악되기 쉽고, 나아가 <의식하는 마음> 라는 문헌을 굉장히 중요하게 소개하시는 부분등이 있어서 더욱 그렇죠. 따라서 주관적관념론만을 타겟으로 삼아도 서로간 토론하는데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만약 quaila 님께서 사용하시는 의식이나 심적/심리적 마음 등의 용어가 어떤 초인간적 정신에 대한 것이라면 그건 종교의 영역에 가까운거라서 제가 굳이 논의에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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