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여러 진화학자들이 수컷의 짝짓기 행태를 묘사할 때 “지배적(dominant)” 또는 “능동적(activ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반면 암컷일 때에는 “수줍은(coy)” 또는 “수동적(passiv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암수의 이런 차이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했다. 이 때 트리버스가 1972년에 발표한 논문이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Trivers, Robert L. (1972), Parental investment and sexual selection, In B. Campbell (Ed.) Sexual selection and the descent of man, 1871-1971, Aldine.

 

수컷은 수 많은 암컷과 성교함으로써 큰 번식 이득을 얻는 반면 암컷은 그런 정도로 이득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암수의 짝짓기 행태가 그런 식으로 다르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여러 여성주의자(feminist)들이 이런 묘사와 설명에 발끈했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암수의 짝짓기 행태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이유는 과학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과학은 포장일 뿐이다. 실제로는 남성을 지배적이고 능동적으로 보고, 여성을 수동적으로 보며, 여성은 정숙해야 한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때문에 진화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잘 정립된 과학 이론과 관찰 사실에서 출발하며 객관적이면서도 가치중립적으로 암수의 짝짓기 행태에 대해 기술했다기보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과학 이론이나 관찰에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진화학자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영향을 주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과학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냥 “영향을 주었다”고 우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기기일뿐이다.

 

어쨌든 트리버스의 1972년 논문의 이론적 모델은 탄탄하다. 그리고 야생에서 관찰해 보면 많은 종에서 수컷과 암컷의 짝짓기 행태에 뚜렷한 차이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통상적인 성차(sex difference)와는 정반대인 경우에도 트리버스의 모델이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 보통 암컷이 수컷에 비해 부모 투자(parental investment)를 더 많이 한다. 즉 암컷이 수컷에 비해 자식을 위해 생리적으로 또는 행동으로 더 많이 애를 쓴다. 하지만 어떤 종의 경우에는 반대로 수컷이 암컷에 비해 부모 투자를 더 많이 한다. 그리고 그런 종의 짝짓기를 보면 통상적인 성차와는 정반대다.

 

 

 

여기까지가 이 글의 본격적인 내용을 위한 서론이다. 이제부터 이 글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암수의 짝짓기 행태를 묘사하는 여러 단어가 있다:

 

수동적 ↔ 능동적

까다로운 ↔ 가리지 않는

소극적 ↔ 적극적

지배당하는 ↔ 지배하는

순종적

수줍은

 

진화학자들이 이전에 이런 단어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애매하게 썼기 때문에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가 생겼던 것 같다. 이런 단어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썼다는 점 자체가 그들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1. passive

 

영한 사전에 따르면 “passive”에는 “수동적인”, “소극적인”, “미온적인”, “순한”, “신중한등 온갖 뜻이 있다. 영영 사전을 보아도 “tending not to take an active or dominant part, receiving or enduring without resistance” 등 온갖 뜻이 나온다.

 

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passive

 

짝짓기 행태를 묘사할 때 “passive” 같은 애매한 단어를 쓰면 혼란과 오해로 이어지기 딱 좋다. 나 같으면 이런 애매한 단어를 되도록 쓰지 않겠다.

 

 

 

2. 까다로운(choosy)

 

트리버스의 논문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수컷(엄밀히 말하면 부모 투자를 적게 하는 쪽)은 양으로 승부하고 암컷은 질로 승부한다. 수컷은 더 많은 암컷과 성교함으로써 많은 자식을 볼 수 있는 반면, 암컷에게는 그런 전략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수컷과 성교함으로써 더 우수한 자식을 낳는 쪽에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 모델이 예측하는 암컷의 짝짓기 행태는 까다로움이다. 즉 여러 수컷들 중 더 나은 유전자를 가졌을 것 같은 수컷들 하고만 성교를 하도록 암컷이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수컷은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아무 암컷하고나 성교를 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까다로움은 수줍음, 수동성, 순종 등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자신과 성교를 해 달라고 덤비는 남자의 아구창을 날리면서 “너 하고는 안 해. 꺼져!”라고 말한다면 까다로움에는 해당하지만 수줍음, 수동성, 순종 등과는 거리가 멀다. 까다롭게 선택하는 것 역시 능동적 행위다.

 

요즘에는 choosy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용어이기 때문이 아니라 좀 더 정확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3. 소극적

 

나는 트리버스의 논문에서 암컷의 “소극성”도 어느 정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컷이 적극적으로 짝짓기에 나서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수컷은 암컷을 찾아내고 구애하기 위해 에너지를 쓴다. 어떨 때에는 짝짓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이런 에너지 투자와 위험 감수의 대가로 수컷은 더 많은 암컷과 성교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번식의 측면에서 보상을 받는다.

 

암컷이 적극적으로 짝짓기에 나서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암컷은 수컷을 찾아내고 찾아낸 수컷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판별하기 위해 에너지를 쓴다. 어떨 때에는 짝짓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이런 에너지 투자와 위험 감수의 대가로 암컷은 더 우수한 정자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번식의 측면에서 보상을 받는다.

 

이 때 수컷이 받는 보상이 암컷이 받는 보상보다 대체로 더 크다. 수컷의 경우 적극적인 짝짓기를 통해 자식의 숫자를 엄청나게 늘릴 수 있는 반면 암컷의 경우에는 자식의 질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수컷이 짝짓기를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고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도록, 즉 짝짓기에 더 적극적이도록 진화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암컷이 짝짓기에 더 소극적이도록 진화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4. 지배 당하는

 

짝짓기에서 “지배 당하는”은 강간에 어울리는 말이다. “순종적”은 자발적 복종을 뜻하는 반면 “지배당하는”은 힘이나 위협 때문에 할 수 없이 당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여러 종에서 수컷이 암컷을 강간한다. 수컷이 암컷을 강간하기 위해서는 힘이 더 세야 한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강간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리고 많은 종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 특히 포유류의 경우 암컷이 수컷보다 큰 종이 거의 없다. 하지만 어류나 곤충 세계에서는 암컷이 더 큰 경우도 꽤 된다.

 

어쨌든 강간을 하는 종은 전체에서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5. 순종적

 

“순종적”은 “까다로움”과 충돌한다. 까다로운 암컷은 열등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수컷의 구애에 퇴짜를 놓겠지만 순종적인 암컷은 수컷이 덤비기만 하면 아무하고나 성교를 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트리버스의 이론에 비추어볼 때 순종적인 암컷의 진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물론 “지배 당하는”과 “순종적”의 구분이 애매할 수는 있다. 힘이 훨씬 센 수컷이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무력 행사”가 뒤따를 것이 뻔하다면 처음부터 순종하는 것이 암컷에게는 더 나은 전략일지도 모른다.

 

수컷이 훨씬 힘이 세고 암컷을 난폭하게 다루는 종의 경우에는 순종적인 암컷이 진화할 가능성도 꽤 크다. 하지만 모든 종의 수컷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수컷이 암컷에게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암컷이 선택해 주기를 고분고분 기다리는 종도 많다.

 

 

 

6. 수줍은(coy)

 

coy” 또는 “수줍음”는 상당히 미묘한 행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실제로 짝짓기와 관련하여 이런 행태가 여러 종의 암컷에게서 관찰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행태에 대해 잘 정식화하여 기술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한 글을 본 기억이 없다. “choosy”라고 써야 할 곳에서 무턱대고 “coy”라고 써서 혼란만 일으키는 경우만 꽤 되는 것 같다.

 

이 글은 아래 글에서 출발했다. 아래 글에서 “coy”와 관련된 “인간 여자의 내숭의 진화”에 대해 약간 이야기했다. 하지만 “coy”와 “소극성”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coy” “choosy”: 암컷의 성 행동을 표현하는 두 단어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407

 

 

 

아래 글도 참조하라.

 

남자는 늑대다: 진화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마음

http://scientificcritics.com/news/view.html?section=83&category=91&no=294

 

공격적인 남자, 겁 많은 여자: 왜 남자는 여자보다 공격적일까?

http://scientificcritics.com/news/view.html?section=83&category=91&no=301

 

 

 

이덕하

201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