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이렇게 호남이 문제일까?

계급성이 모든 사회적 이슈의 핵심이고, 지역 문제 따위는 쁘띠 부르주아적인 사상에 의해 오염된 비과학적인 인식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진보 계열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실 호남 문제는 진작에 사라져야 맞다. 그리고 그 자리에 노동 계급의 이슈, 농민의 이슈가 대신 자리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60, 70년대부터 80년대, 90년대를 지나 다시 21세기가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호남 문제는 해결 및 소멸은 커녕 점점 더 확산되고 심화되고 강고화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70년대까지도 호남 문제는 사회적 소외 및 편견의 문제로서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고 이것이 정치 문제로까지 성장하는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김대중과 박정희의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호남 문제가 '호남'의 문제로 정체성을 확고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치 및 경제적 민주화의 이슈가 전면에 나타났고, 호남은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호남 사람들이나 호남의 이슈가 전면에 나타난다 해도 그것이 호남의 얼굴, 호남의 이름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호남 문제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성격이란 점에서 봤을 때는 이 때가 호남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호남은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 '호남만의 문제'라는 고통스러운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전체 민주화의 과제 안에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한 미분화, 미각성'의 상태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고비로 극적으로 깨어졌고, 이후 두번 다시 복원될 수 없었다. 광주의 비극은 호남에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대한민국 역사가 계속되는 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훈장을 안겨주었지만 그 훈장은 동시에 고립과 고난과 끔찍한 소외의 출발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는 호남의 문제가 일반적인 민주화의 과제로 수렴되어 상호 모순 없이 공동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고 있었다.

물론, 1980년 광주의 희생은 전체 민주 진보 개혁 진영에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했고, 1987년 직선제 개헌에 이르는 민주화 도정에서 '불패의 무기'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386들이 바로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훈련되었다는 점에서 사실 모든 386들은 광주의 자식들, 80년대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1980년대는 광주학살의 기억이 선명한 가운데 온통 학생들과 재야인사, 노동자, 직업적 운동가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투쟁과 시위, 가두투쟁으로 점철된 시기인 것처럼 보이기 쉽다. 특히 당시 운동권의 논리나 정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일수록 그러한 '가상의 기억'에 좌우되기 쉽다. 하지만 1980년대는 운동권의 시각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얼굴도 갖고 있었다.

1980년에는 컬러 TV 방송이 처음 허용되었고, 몇십년을 이어오던 야간 통행금지가 폐지되었다.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 본격적인 대규모 군중 레크리에이션의 세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한편에서 광주학살과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어마어마한 파쇼적 탄압과 폐쇄적 통치시스템이 사회적 분위기를 경직시키고 있었지만 또 한편에서는 본격적인 소비문화의 등장, 중산층의 대두 및 안정화라는 정극단의 현상이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국제 석유위기 등 몇 차례 고비를 겪으면서 거듭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던 중화학공업 업체들은 정책적인 자금 및 제도적 지원과 시장 보호에 힘입어 1980년대에 점차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런 경제 여건의 개선은 사회적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어 확고한 기득권층을 형성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과거에는 커다란 메리트를 누리지 못하던 공무원, 공기업 직원, 교수/교사, 대기업의 사원, 이런저런 전문직 자격증 소지자 등이 가장 먼저 이런 기득권층의 대열에 합세했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파티'는 이후에도 그 수혜층을 계속 넓혀 연예인, 예술 계통 종사자, 스포츠 스타, 자영업자로 범위를 확대해갔다.

표면적으로 보면 1980년대는 386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세력의 전성시대처럼 느껴졌지만, 사회 경제적인 저변의 흐름은 달랐다. 1980년대는 과거 허접해보이던 한국 사회의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적 장치들이 힘과 권위를 확보하고 진입장벽을 높여가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기구나 사회적 장치에 잽싸게 진입하여 확실한 기득권을 확보한 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이슈의 중심에서 밀려나 변방을 배회하는 것처럼 보이던 세력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세대 기준으로 봤을 때 386에 속한 사람들도 많았고 또 상당수는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민주화 개혁 진보의 명분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80년대 투쟁의 중심에서 멀리 서 있던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 투쟁의 대열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온 사람일수록 새로운 기득권층에 참여할 기회가 넓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은 민주화나 개혁의 명분에는 동의하지만, 광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호의적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광주의 문제에 집착할수록 이들이 기득권의 영역에 진입할 기회는 줄어들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명분과는 무관하게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확고하게 대한민국 제도권의 각종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거점을 장악한 것은 70년대에 각종 특혜와 제도적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해온 영남 세력이었다. 이들은 민주화나 진보의 이슈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굳이 나서서 그런 흐름을 방해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사실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로 봤을 때 과거 4반세기 동안 자본 재생산의 사령탑 역할을 해온 군부 세력은 이미 용도 폐기가 가까워진, 유효기간이 지난 존재들이었다. 이제 새로운 사령탑이 필요했고, 민주화와 진보의 흐름은 거기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언론, 검찰과 경찰 등 합법적인 폭력 기구가 새로운 사령탑으로 떠올랐다. 특히 조선일보는 군부 세력의 퇴조로 생겨난 권력의 공백을 가장 효율적으로 장악한 그룹이었다. 과거 군부 세력을 기반으로 한 물리적 폭력으로는 더 이상 개방된 대한민국 사회의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전히 파쇼적이고 수구적인 이념을 중심으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에게 이런 폭력적 이념을 합법적인 수단으로 관철시켜줄 수 있는 조선일보의 존재는 구세주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점차 기득권층으로 편입되는 광범위한 신흥 중산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배권을 비교적 쉽게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오렌지족이니, X세대니, Y세대니 하는 유행어는 과거의 케케묵은 투쟁 모드가 더 이상 젊은 세대의 감성에 호소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서태지는 바로 80년대의 비장 모드와 90년대의 향락 분위기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해도 1980년대의 질풍노도의 영향력은 기득권 세력에게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기득권 세력들은 배가 불렀지만, 투쟁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저 조중동의 선동에 동원되기는 했어도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뭔가 자신들의 지배력을 보다 안정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1980년대 '광주'로 묶여 있는 386과 민주 개혁 세력을 분열/분리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시도는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일차로 먹혀들었고, 1989년 삼당합당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러한 분열을 영구적으로 만드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호남'을 영원히 소수세력으로 분리시키는 작업이었다.


왜 아직도 호남이 문제인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