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진화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몇 가지 비유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중 하나인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자.

 

“이론” 개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그 중 하나가 가설과 대비되는 의미다. 수학에 추측(conjecture)과 정리(theorem)가 있다면 과학에는 가설과 이론이 있다. 추측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상태의 명제이며 정리는 증명된 명제다. 가설은 아직 입증(confirmation)되지 않은 명제이며 이론은 상당한 수준으로 입증된 명제다. 물론 과학의 입증이 수학의 증명처럼 엄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가설 설정은 돌연변이 생성과 비슷하고 검증은 자연 선택과 비슷하다. 여러 돌연변이 중에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자연 선택되듯이 여러 가설 중에 진리에 더 가까운 것이 검증을 통해 선택된다. 만약 돌연변이가 없거나 빈약하면 진화가 일어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가설들이 풍부하게 제시되지 않는다면 과학이 발전하기 힘들다. 만약 자연 선택이 없다면 고도로 적응된 기제가 만들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검증 과정이 없다면 훌륭한 이론이 선택될 수 없다.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정상 과학에 대한 쿤의 이야기에 불만이 많았다. 쿤에 따르면 정상 과학 시기에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도전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옳다고 가정하고 작은 이론에 매달린다. 쿤이 그리는 과학자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 변칙(anomaly)이 있을 때에만 패러다임을 의심한다. 파이어아벤트는 패러다임 수준이든 작은 이론 수준이든 늘 기성 이론에 도전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파이어아벤트의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과학자 개인이 패러다임이 옳다고 전제한 후에 작은 이론에 매달리기로 선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과학 공동체에서 미친 사람처럼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런 저런 가설을 시험해 보려는 사람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일 때 생긴다. “증거가 없으면 가설에 대해 말도 꺼내지 말라” 또는 “검증 방법을 제시하지 못할 거라면 가설에 대해 말도 꺼내지 말라”는 식의 고압적 태도는 과학적 상상력을 억압할 수 있다. 이러면 돌연변이가 고갈되어 진화의 동력을 잃는 상태와 비슷해질 수 있다.

 

아직 검증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과학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 때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패러다임 수준이든 작은 이론 수준이든 기성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황당해 보이는 가설을 시험하려고 할 때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 상상력을 장려해야 한다. 가설에 대해서는 혼자서만 상상하고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증거를 대야 한다는 식의 핀잔도 문제가 있다. 검증 방법을 찾지 못해 아직 가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착상이라 할지라도, 아직 검증을 받지 못한 가설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되도록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개적 토론은 검증할 때에도 도움이 되지만 가설을 만들 때에도 도움이 된다.

 

가망성이 아주 큰 참신한 가설의 경우 과학자가 지적 우선권(priority) 문제 때문에 비밀로 할 수 있다. 자기가 비밀로 하겠다는 것이야 말릴 수 없겠지만 일단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환영해야 한다.

 

가설 공간(hypothesis space,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설들의 집합)에서 더 넓게 탐색할수록 훌륭한 이론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친 듯한 상상력만 있으면 예술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학은 아니다. 과학에서는 결국 검증을 거쳐야 한다. 나는 과학적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파이어아벤트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검증 문제에서는 파이어아벤트에 거의 공감하지 않는다.

 

입증되지도 않은 가설을 마치 잘 입증된 이론인 것처럼 포장하려고 할 때에는 따끔하게 비판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때로는 과학적 상상력을 억압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가설을 이론인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상력 자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착상일 뿐이다” 또는 “이것은 가설일 뿐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상상력을 펼치려는 사람과 입증되지도 않은 것에 대해 확신에 차서 떠드는 사람을 구분해서 대응해야 한다.

 

 

 

정상 과학은 안전하다. 잘 입증된 패러다임 안에서 작은 이론에 몰두한다면 대단한 혁명을 이루기는 힘들지만 헛고생을 할 가능성도 작다. 반면 기성 이론들을 비웃으면서 미친 듯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복권과 비슷하다.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정상 과학보다 낮다.

 

안전한 길과 대박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순전히 과학자 개인의 몫이다. 어느 길이 좋은 길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천재성이 부족한 사람이 대박의 길을 가다가는 평생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점 정도는 충고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가겠다고 선택한다면 “그럼 행운을 빈다. 열심히 해 보시길”이라고 한 마디 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은 상상력과 검증이라는 양 날개로 난다. 심리학계에는 두 날개 중 한 쪽이 부실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두 사례가 있다.

 

정신분석은 상상력만 열심히 발휘했다. 정신분석가들은 검증을 개판으로 하거나 아예 검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온갖 엉뚱한 이론들만 만들어냈다. 정신분석 이론들이 예술적 가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거의 쓸모가 없어 보인다. 결국 정신분석은 과학적 심리학계에서 왕따 당하고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당장 검증되지 않으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들은 대담한 가설을 만들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미 있는 과학적 성과는 거두었지만 매우 앙상한 결과로 이어졌다. 만약 인지 심리학과 진화 심리학이 출현하여 더 대담한 상상력을 펼치기 않았다면 20세기의 과학적 심리학은 강화(reinforcement)에 대해서만 떠들어대는 빈약한 심리학에 머물렀을 것이다.

 

 

 

기존 과학 교육은 “기성 이론 배우기”와 “검증 방식 배우기”에만 치중하는 것 같다. “과학적 상상력 펼치기”는 순전히 개인의 천재성에 맡기는 것 같다. 과학적 상상력을 펼치는데 도움이 되는 교육 방식에 대해 고심해보고 과학적 상상력을 어떻게 장려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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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