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이 정상 과학에서 위기와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그리는지 살펴보자. 정상 과학을 하면서 변칙(anomaly)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변칙은 패러다임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이 때 변칙이 생기는 이유가 패러다임의 문제 때문인지 패러다임과 현상을 이어주는 작은 이론(또는 실험 도구, 실험자)의 문제 때문인지 알아내기가 만만치 않다.

 

작은 이론을 수정해서 변칙을 패러다임에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즉 패러다임과 수정된 작은 이론의 결합이 변칙으로 보였던 현상을 잘 설명한다면 잠시 술렁이던 정상 과학은 다시 평온을 찾는다.

 

어떤 변칙은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해결하려고 덤벼드는데도 계속 변칙으로 남을 수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런 “고집스러운” 변칙이 더 발견될 수도 있다. 이럴 때 과학자들은 작은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가 문제라는 불길한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된다.

 

변칙의 “고집스러움”이 커져서 임계점을 넘어서면 결국 위기의 시기가 찾아온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심각하게 의심하게 된다. 그들은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 그러다가 대안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중 하나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크게 인기를 끌게 된다. 그 인기가 압도적이라면 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부터 새로운 정상 과학이 시작된다. 혁명 후에 평온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쿤의 그림이다.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변칙은 포퍼의 반증 사례에 어느 정도 상응한다. 그것은 패러다임 또는 거대 이론을 버리도록 만든다.

 

 

 

고집스러운” 변칙 또는 강력한 반증 사례에 부닥치면 패러다임이 타격을 받는다는 점은 대다수 과학 철학자들이 인정할 것 같다. 나도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타격의 성격에 대해서는 쿤과 생각이 다르다.

 

변칙이 “고집스러울수록”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논의의 편의상 변칙이 “무한대로 고집스럽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패러다임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것은 패러다임이 진리가 아니라 기껏해야 근사적 진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을 싫어하는 사람은 “진리(truth)” 개념이나 “근사적 진리(approximate truth)” 개념을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개념이 대충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실재론과 관련된 그 모든 논란을 접어두고 이 개념들을 그냥 쓰기로 하자.

 

만약 과학자가 수학적 엄밀성에만 엄청나게 집착한다면 근사적 진리에 불과한 이론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볼 것이다. 따라서 기껏해야 근사적 진리에 불과한 이론은 당장 버려야 한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근사적 진리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은 더 나은 대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근사적 진리에 불과하더라도 강력함이 이미 입증된 이론을 버리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느긋한 과학자는 아무리 “고집스러운” 변칙이 나온다고 해도 길 잃은 양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위기에 빠질 필요도 없다. 그런 사람은 “더 나은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패러다임을 갈아타겠지만 지금은 그냥 이 패러다임 속에서 정상 과학을 하겠다”라고 속 편하게 말할 지도 모른다.

 

 

 

물론 기존 패러다임이 진리가 아니라 근사적 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더 나은 패러다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쿤이 그리는 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정상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패러다임을 신뢰한다. 처음부터 패러다임이 진리라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진리가 아님이 밝혀진다고 해도 크게 당황할 것이 없다. 아직 반증되지 않았을 때 “아직 반증되지 않았으니까 이 패러다임이 혹시 진리일지도 모르지” 정도로 생각했다면 말이다. “아직 반증되지 않았으니까 이 패러다임이 진리임이 분명하다”라고 확신할 정도로 바보 같은 과학자들이 대다수라면 그 과학 공동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에 대한 여전한 신뢰”와 “더 나은 패러다임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 문제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 근사적 진리에도 만족하면서 정상 과학을 할 정도로 느긋하다면 말이다.

 

 

 

쿤은 한편으로 “고집스러운” 변칙이 반드시 위기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집스러운” 변칙이 있어야만 위기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적어도 그것이 과학 역사의 대세라고 본 것 같다. 위에서는 전자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후자도 문제가 있다.

 

자신의 천재성을 신뢰하는 과학자일수록, 모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과학자일수록 정상 과학보다는 패러다임 수준에서 놀고 싶어하는 것 같다. 즉 꿈이 더 크다. 거대한 이론을 교체한다면 작은 이론을 교체할 때보다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기존 패러다임이 상당히 확실히 반증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대안 패러다임을 찾아 나설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고집스러운” 변칙은 패러다임 교체를 노리는 과학자의 숫자를 증가시킬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강력한 변칙 또는 반증은 혁명을 촉진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의 필요 조건도 아니고 충분 조건도 아니다. 즉 기존 패러다임이 확실히 반증되어야만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기존 기존이 확실히 반증된다고 해서 반드시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촉진 요인일 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쿤이 그리는 과학자는 수학적 엄밀성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현대의 과학자들은 수학적 엄밀성이라는 무모한 희망을 버렸다. 과학의 목표는 진리에서 근사적 진리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이 패러다임이 진리가 아니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군”이라면서 절망하는 과학자도 사라졌다. 이제 과학자는 “역시 이 패러다임도 근사적 진리에 불과했군. 세상 일이 그런 거지 뭐”라고 한 마디 한 후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정상 과학을 계속하거나, “이 패러다임이 거의 확실히 반증되었단 말이지. 그럼 내가 한 번 대안 패러다임으로 대박을 터뜨려 볼까”라며 투지에 불태우거나 한다. 이런 과학자들 속에서 위기감은 찾기는 힘들 것이다.

 

 

 

이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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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