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의 반증론(refutationism, 반증주의)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여기에서는 포퍼의 반증론을 단순무식하게 해석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귀납법은 연역법처럼 확실하게 증명(proof)할 수 없다. 증명보다는 약한 입증(confirmation)에 머물 뿐이다.

 

이전에 골트바흐의 추측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과학 철학 강의: 005. 수학적 엄밀성

http://cafe.daum.net/Psychoanalyse/Kz8I/5

 

무려 4 × 1018까지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아직 증명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가 없다. 혹시 그보다 더 큰 숫자의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귀납법의 한계다.

 

골트바흐의 추측처럼 무한히 많은 것에 대한 명제의 경우 아무리 많은 입증 사례들을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4 × 1018는 엄청나게 큰 숫자지만 무한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숫자일 뿐이다. 반면 단 하나의 반증 사례만 찾아낼 수 있다면 골트바흐의 추측은 무너진다.

 

무지막지한 반증론 또는 순진한 반증론은 이런 비대칭에 목숨을 건다. 수학의 추측(conjecture)의 경우에 하나의 반증 사례로 무너질 수 있듯이 과학의 가설의 경우에도 하나의 반증 사례로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의 차이 때문에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1. 첫째 문제

 

목성에 대한 관찰을 통해 뉴턴 역학(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중력 법칙)을 검증한다고 상상해 보자. 논의의 편의상 관찰을 해 보니 목성의 운동이 뉴턴 역학의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뉴턴 역학이 완전히 반증된 것일까?

 

아니다.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관찰한 사람이 사기를 쳤는지 모른다. 어쩌면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관찰 기구가 고장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논의의 진전을 위해 이런 요인들을 무시하기로 하자. 사기도, 실수도, 고장도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뉴턴 역학은 반증된 것일까?

 

여전히 아니다. 과학 가설은 직접 검증할 수는 없다. 직접적 관찰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른 이론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망원경으로 목성의 운동을 관찰한다면 망원경의 작동과 관련된 법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문제는 뉴턴 역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의 작동과 관련된 법칙 예컨대 광학 법칙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뉴턴 역학에 문제가 있는지 광학 법칙에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광학 법칙이 옳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번 관찰에 응용된 다른 모든 이론들이 모두 옳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다면, 뉴턴 역학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귀납법의 한계 때문에 과학 가설을 수학 정리(theorem)만큼이나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과학 가설의 검증이 항상 다른 과학 가설에 의존한다면 완벽한 입증이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완벽한 반증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과학 가설의 검증을 다른 과학 가설의 도움 없이 직접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뒤엠-콰인 테제(Duhem–Quine thesis)를 참조하라.

 

http://en.wikipedia.org/wiki/Duhem%E2%80%93Quine_thesis

 

 

 

2. 둘째 문제

 

설사 첫째 문제가 없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첫째 문제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뉴턴 역학을 목성의 궤도 관찰을 통해 확실히 반증했다고 가정하자.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뉴턴 역학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까?

 

확실한 반증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얻어낸 것은 “뉴턴 역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일 뿐이다. 하지만 과학자는 근사적 진리(approximate truth)에도 만족할 줄 안다.

 

뉴턴 역학이 절대 진리가 아님을 아무리 확실히 증명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더 나은 이론을 찾아야겠다”라는 동기 부여로 이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러니까 뉴턴 역학을 버려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뉴턴 역학처럼 훌륭한 이론의 경우에는 더 나은 대안이 나올 때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뉴턴 역학은 결국 더 나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폐위(왕좌에서 몰아냄)일 뿐이며 폐기(쓰레기통에 버림)가 아니다.

 

논의의 편의상 일반 상대성 이론이 목성 관찰을 통해 확실히 반증되었다고 하자. 이 때에는 폐위도 폐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더 나은 이론을 찾아야겠다는 욕망이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불타오를 뿐이다.

 

 

 

3. 셋째 문제

 

과학의 용어나 명제는 수학처럼 엄밀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럴 때에는 첫째 문제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하나의 반증 사례로 이론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질투 기제는 인간 본성이다”라는 진화 심리학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논의의 편의상 질투 기제 개념과 인간 개념이 애매하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질투 기제가 없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질투 기제는 인간 본성이다”라는 명제가 확실히 반증된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본성 개념에 애매성이 있기 때문이다. “질투 기제는 인간 본성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인간에게는 질투 기제가 있다”라는 명제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질투 기제가 없는 인간이 한 명이라도 발견된다면 확실히 반증된다. 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인간 본성”은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위가 의심 받는 진화 심리학에만 이런 애매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애매한 본성 개념은 생리학에서도 (적어도 암묵적으로) 쓰인다. 생리학 교과서나 해부학 교과서에 인간의 손가락이 열 개로 나올 때 그것은 “모든 인간의 손가락은 열 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인간 본성이다”라는 의미다. 즉 정상적인 유전체를 갖춘 인간이 정상적인 자궁에서 발생하고 사고나 질병으로 손가락이 손상되지 않을 때 손가락이 열 개라는 뜻이다.

 

 

 

과학이 수학적 엄밀성을 포기한다면 하나의 반증 사례로 해당 이론을 확실히 끝장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입증의 방향으로도, 반증의 방향으로도 늘 불완전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덕하

version 0.1

2013-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