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에서 영남중심 군부세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후, 전두환정부의 공식 발표에 반하는 모든 의견들이 금지당했다. 정치인 언론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의 입에도 재갈이 물려졌다. 광주의 진상은 은폐되었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모두 위험한 반체제로 간주되었다. 이 때 우리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광주의 편에 서서 전투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당대의 대학생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486이라고 부른다.

돌이켜보면 광주는 486들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당시 캠퍼스에 범람하던 모든 현수막 운동가요 유인물 대자보 구호들의 주어는 광주였다. 그들의 주관심사는 학점이나 전공지식이 아니었고, 광주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다. 광주는 그들에게 불의와 정의를 가르는 도덕이었으며,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는 창구였고, 세계관이었다. 광주에서 왜 그런 학살이 벌어졌는지를 논하고, 학살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반미주의가 등장하고 사회주의도 등장했다. 우리는 그런 특별한 486들을 NL과 PD라고 부른다.

호남민중이 그런 486들을 자신들의 편이라 여기며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486들이 전두환정부를 항복시킨 6월항쟁의 행동대를 자임하면서 그런 관계는 더욱 더 깊어졌다. 많은 호남민중들이 486들에게 부채의식을 가졌던 것 같고, 그것은 이후 정치에 입문한 486 운동권 엘리트들이 손쉽게 금뱃지를 달고 공직에도 진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486들의 역사적인 소임도 오래전에 끝이 났다. 평범한 486 다수는 이제 더 이상 486이 아니고 40대가 되었다. 윗세대가 비워주고 물러난 자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차지가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광주와 호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486스러운 문화는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이제 옛시절 운동가요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486으로 분류되는 일단의 정치인들 뿐이다. 포크송을 그리워하는 50대가 더 이상 청바지를 입지 않듯이, 운동가요를 그리워하는 486들도 더 이상 머리띠를 묶지 않는다.

호남민중과 486들의 관계 역시 오래전에 끝이 났다. 호남은 486들에게 진 정치적 부채(?)을 충분하고 넘치도록 갚아주었고, 각자의 이익은 더 이상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호남과 486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유독 예민한 반새누리당 정서뿐이고, 호남민중들의 그것이 현실적인 요구에서 출발하는 반면, 486들의 그것은 화석화된 추억일 뿐이다. 호남과 486은 서로 반새누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이 다르다.

이제 호남이 갚아야 할 정치적 부채는 남아 있지 않다. 호남에 내미는 청구서는 <혁신과 통합>, NL과 PD들의 <야권연대 요구서>가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영남 민주화세력과 시민단체들에게는 노무현과 문재인을 통해 차고 넘치도록 갚았고, 486들에게도 역시 그렇다. 정치 역시 정당한 거래여야 하고, 일방적인 청구서를 내미는 자들에게 붙여줄 수 있는 이름은 양아치밖에 없다.

짱돌은 버릴지언정 양아치가 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