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틀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 간단 감상기


                                                               2013.10.18


<등장 인물>

그랭구와르(Gringoire, 전동석) - 시대상을 풀어가는 음유 시인

에스메랄다(Esmeralda, 바다) - 춤추는 집시 여인

콰지모도(Quasimodo, 윤형렬) -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에스메랄다를 흠모하는 꼽추

프롤로(Frollo, 최민철) - 신과 에스메랄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부

페뷔스(Poebus, 박은석) - 바람둥이 근위대장

끌로팽(Clopin, 조휘) - 에스메랄다를 지키는 이방인의 우두머리

플뢰르 드 리스(Fleur de Lys, 이정화) - 페뷔스의 약혼녀



마눌님이 블루스퀘어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 곳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 티켓 2장(그것도 로얄석으로)을 얻어 와 모처럼 눈과 귀가 호강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막상 좌석에 앉고 보니 로얄석인데도 불구하고 1층 우측 맨 뒷열의 바로 앞으로 무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모든 다른 객석이 만석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무료 증정 티켓으로 나온 이유가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공짜로 이런 자리가 어딘데 하면서 기대를 잔득하고 시작을 기다렸다.


1. 살짝 아쉬운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그랭구와르의 <대성당의 시대>가 장엄한 음악과 함께 불려지면서 2시간 20분여의 공연이 시작된다. 시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 같이 감동적인 무대를 예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 지루해지고 살짝 졸음까지 온다. 물론 어제 밤을 충분히 자지 못한 내 몸 상태가 큰 원인이겠지만, 꼭 이것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대화가 없는 아리아(54곡)만으로 배우들이 뮤지컬을 끌어가니 스토리를 잡아가기가 쉽지 않다. 한국어로 노래를 하는데도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배우들의 표정이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다 노래들도 감정이 배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각 아리아마다 그 상황에 맞는 분위기의 음색과 톤이 묻어 나오지 않고 약간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특히 에스메랄다 역을 맡은 바다의 아리아가 아쉬웠다. 프롤로, 뷔페스, 콰지모도, 그랭구와르, 클로팽, 이 뮤지컬의 남자 배우와 모두 관계하는 중요한 위치의 에스메랄다는 다른 배우들의 감정선을 유지하고 연기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극의 중심이다. 그런데 바다의 아리아나 연기는 배우들간 서로 교합하면서 자연스럽게 극을 끌고 가지 못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 음악이나 무용시험 볼 때 각자가 선생님 앞에서 열심히 연습한 대로 노래와 연기를 최선을 다해 하고 있지만, 일체감이나 상호 감정 교환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뮤지컬에서 바다를 좀 비평하지만, 바다는 시원시원한 외모에 열창하는 모습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한다.)

콰지모도를 맡은 윤형렬도 기대에 못 미치는 듯하다. 꼽추라는 신체적 특성과 신부의 종으로 복종으로만 사는 콰지모도를 연기하는데는 2%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먼저 윤형렬의 목소리, 완전 걸걸한 목소리도 아니고 어쩡쩡한 상태라 오리지널 프랑스 배우가 내는 목소리에 비해 콰지모도를 제대로 표현 못하는 것 같다. (아래에 프랑스 원작의 프랑스 배우들의 공연을 링크하니 윤형렬의 목소리와 비교해 보시라) 얼굴 분장도 문제고 표정과 동작 연기도 내가 보기에는 불만이었다. 공연장에서는 멀어서 윤형렬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어 나중에 SBS에서 잠깐 소개된 윤형렬의 콰지모도 분장을 보았는데 이것도 좀 허술해 보인다. 훤칠하고 깔끔한 외모의 윤형렬이라 콰지모도 분장이 쉽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꼽추의 얼굴 표정으로는 하다 말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동작도 꼽추라는 신체 특성과 충직한 종지기로 이룰 수 없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흠모를 표현한 것 치고는 아쉽다.

그래도 프롤로 역을 맡은 최민철은 돋보인다. 손 동작도 신부의 절제된 모습이고, 목소리도 엄숙하고 단호하여 신부에 어울리는 것 같다. 최민철의 프롤로의 방황과 갈등을 노래하는 <파멸의 길로>도 인상적이다. 내가 한국어 버전의 이번 공연 <노틀담 드 파리>를 프롤로를 중심에 놓았거나 프롤로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 것도 아마 최민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오리지널 공연을 유튜브로 보았을 때는 역시 콰지모도가 주인공이고 콰지모도의 헌신적이고 애절한 사랑이 중심에 있다고 느껴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윤형렬의 콰지모도가 미흡한 것에 비해 최민철은 무난하게 소화해서 그런 것 같다는 내 해석에 토를 달아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오리지널 프랑스 배우들의 아리아는 프랑스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배우들의 그것에 비해 울림이 오고 강렬하고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문화 사대주의에 빠진 탓은 아닌 것 같다.

뮤지컬에 문외한인 내가 함부로 평가한다고 비난해도 좋으나, 예술은 어차피 각 개인의 몫이고 내가 느낀 대로 설을 푸는 것이 양해해 주기 바란다.


2. 뮤지컬과 영화 <레미제라블>, 그리고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

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극장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오리지널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를 유튜브로, 한국어 버전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블루스퀘어(극장)에서 보았다. 내가 받은 감동의 순서를 따진다면, 영화 레미제라블 > 오리지널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 > 한국어 버전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 = 뮤지컬 레미제라블로 매기고 싶다.

영화가 뮤지컬보다 유리했던 것은 입체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장소의 제약이 없어 연기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스펙터클한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일 게다. 뮤지컬은 극장의 한 지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아야 해 원근감과 입체감이 영화보다 덜 하지만, 영화는 배우의 표정을 클로즈업 하거나 극의 흐름에 따라 장면의 포인트를 카메라가 따라 움직여 주어 몰입의 강도를 높여준다. 극장의 뮤지컬은 배우와 무대장치, 그리고 무용수(아크로바트)들을 관객이 스스로 찾아 초점을 움직여야 함으로 어떤 경우에는 무대장치와 무용수에게 시선이나 신경이 옮겨가게 되어 몰입이 방해받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영화와 뮤지컬에서 결정적으로 감동의 차이를 가져온다고 본다. 영화 <오페라 유령>이나 영화 <레미제라블>과 같이 철학적이고 생각하게 만드는 프랑스 뮤지컬이 재미와 즐기기의 볼거리를 위주로 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더 감동적인 것은 어찌보면 모순적이고 역설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런 현상을 낳는 것은 영화가 단순히 보여주는 것을 넘어 더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이나 영화 모두 대화가 있는 노래를 중심으로 되어 있어 극의 스토리를 관객이 노래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반면에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대화가 없는 54개의 아리아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내용을 느끼고 감흥을 받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프랑스어로 내용을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 아리아의 선율에서 묻어 나오는 감정이 오감으로 전달되어 그것이 분위기로 뇌를 자극하고 또 다른 언어로 내용을 이해하고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의 한국어 버전(공연)이 오리지널보다 덜 감동적이었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의 차이도 있겠지만, 음률이 프랑스적인 샹숑을 바탕으로 되어 있어 한국어로 번역해 부르니  프랑스어로 듣는 것보다 느낌이 살 수 없었던 것에 기인했던 것 같다. 이탈리아어가 오페라에 최적화되어 있듯이(오페라가 이탈리아어에 맞추어 발전한 것인지 모르겠다) 원작이 샹송의 음률에 프랑스적 정서를 담아낸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가 아무래도 한국어로 표현될 때는 그 모두를 담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꼭 오리지널 <노틀담>을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유튜브로 보아도 충분히 그 감흥은 들어온다.


3. 패러다임의 전환, 그리고 ANARKIA(숙명)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리지널 <노틀담 드 파리>는 콰지모도의 순수한 영혼과 애절한 사랑을 그린 것이 보인다면 한국어 버전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신부 프롤로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오리지널과 한국어 버전은 똑같은 아리아 54곡이고 무대장치도 무용수와 아크로바트도 동일한데 내가 한국어 버전에서는 프롤로 입장을 중심으로 한 것 같이 본 것은 순전히 최민철 때문이다)

신의 사제로서의 신부의 직분과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갈등하는 프롤로는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가는 혼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중세의 대성당의 시대(신의 시대)를 살아온 프롤로가 에스메랄다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자의식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나는 빅토르 위고가 <노틀담 드 파리>에서 프롤로를 통해 <중세에서 르네쌍스 시대로의 전환>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중세의 윤리도덕은 이성(신)에 의한 정념이나 욕망의 억제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지만, 새 시대(르네쌍스)의 도덕은 인간의 정념이나 욕망이 방해받지 않고 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인간의 도덕은 정념과 욕망의 단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또 그것에 대해 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책임지느냐에 따라 각 개인의 개별적 도덕관이 형성된다. 예전(대성당의 시대)은 정념과 욕망을 억제하느냐에 따라 단순히 도덕성 여부를 판단했다면, 이제(르네쌍스)는 욕망의 종류와 개인의 수용 층위에 따라 다양한 도덕관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욕망이 분출함에 따라 그 욕망들을 관리하고 효율화시키는 방법이 필요하게 되자 “시장”이라는 수단이 대두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맹아가 비로소 싹트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신의 시대>의 마감은 <인간의 시대>를 염과 동시에 자본주의로의 진입을 가져오게 된 것이라 본다.

프롤로는 신과 에스메랄다 사이에서 방황과 갈등을 계속하다 결국 <시대의 숙명>을 거부하고 만다. <인간의 시대>가 마녀의 장난(프롤로는 자신이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경건한 직분을 잊고 에스메랄다에 정념을 가진 것은 에스메랄다가 마녀임으로 자신을 유혹했다고 주장하면서 에스메랄다를 마녀로 몰아 교수형에 처한다)이라며 예전의 <대성당의 시대>로 회귀하지만, 결국 콰지모도에 의해 살해된다.

빅토르 위고는 노틀담 성당의 성벽 한 곳에 적혀 있는 ANARKIA(숙명)라는 단어를 보고 <노틀담 드 파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가 ANARKIA를 개인의 숙명으로만 한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노틀담 드 파리>는 개인의 숙명과 시대의 숙명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세상에 버림받고 평생 남(프롤로)에게 복종하고 살아야 하고 꼽추로서 여성을 사랑할 수 없는 숙명인 콰지모도, 신의 사제로 정념과 욕망을 억제하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신부 프롤로, 이 둘은 각각 개인적인 숙명을 가졌지만, 에스메랄다를 매개로 시대적 숙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이 시대적 숙명(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대성당의 시대에서 르네쌍스 시대로)에 따라 개인의 숙명을 스스로 깨쳐 가기도 하고, 시대의 숙명을 거슬러 개인의 숙명에 매몰되기도 한다. 개인은 시대의 숙명 앞에 나약하고  흔들릴 수 밖에 없지만, 시대의 숙명을 받아들여 개인의 숙명을 개척할 기회이기도 한 것 같다.


4.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노틀담 드 파리>의 마지막은 콰지모도가 죽은 에스메랄다를 안고 함께 죽어 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후에 등이 굽은 사람이 여인을 그대로 안고 죽은 형상의 등이 굽은 뼈가 나왔다는 나레이션으로 끝난다.

나는 마지막 이 장면을 보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생각났다.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연상되어서이다. 신의 아들 예수가 한 시대를 바꾸어 놓았듯,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도 시대 변환의 상징일 수 있겠다 싶고,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콰지모도 역시 매칭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예수가 암흑의 중세를 만들라 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는 <신의 시대, 대성당의 시대>의 시작이었고, 에스메랄다는 인간의 욕망 발현을 긍정하는 <인간의 시대, 르네쌍스>를 여는 단초가 된 시대의 아이콘임은 유사하지 않을까?

<노틀담>은 <Our Lady>라는 말로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고 한다.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의 마지막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키게 함으로써 <노틀담>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한 것은 오리지널 감독의 숨은 배려가 아닐까?


5. 한번 보시라

 <노틀담 드 파리>가 세계 4대 뮤지컬이라고 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작품을 아리아 54편에 담아내면서 관객에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인데 감동과 함께 다각도로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내가 최민철에 꽃혀 프롤로 관점에서 뮤지컬을 느꼈다면, 다른 분들은 또 다른 관점으로 다가 올 수 있고, 내가 다음에 다른 배우들의 아리아를 듣게 된다면 세 명(콰지모도, 프로로, 페뷔스), 아니 네 명(그랑구와르 포함)의 각기 다른 사랑법을 보게 될 지 모른다. 이번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올렸다면, 다음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해 낼지 모르고. 이렇듯 <노틀담 드 파리>는 관객과 배우에 따라 각색의 버전들이 쏟아질 것이다.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힘이고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 버전을 보시고 꼭 오리지널을 유튜브로 통해 보시기 바란다. 아니면 오리지널을 먼저 보시고 한국 버전을 블루스퀘어에 가서 보시든가. 한국 버전에서의 아쉬움을 오리지널이 일부 채워 줄 것이다.

 

* 오리지널 <노트르담 드 파리>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eQAhFNLvd_k 


*(여담)

페뷔스가 에스메랄드에 대한 정념을 표현하는 부분(뮤지컬 중간 즈음)에서 무용수들이 반라의 복장으로 커튼 뒤에서 다리만 내어놓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나는 순간 <소녀시대>를 떠올렸다. 소녀시대가 ‘소원을 말해 봐’인가를 부를 때 제기를 차듯이 발을 올리는 춤이 나오는데, 이 뮤지컬에서도 똑같은 동작이 잠깐 나오는 것을 보았다. 소녀시대가 표절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더라. 오리지널을 보면 소녀시대의 동작과는 약간 다른 듯하고 한국어 버전의 한국 무용수들의 동작은 소녀시대와 비슷해 보인다. 소녀시대가 오리지널을 표절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어 버전 무용수가 소녀시대를 표절한 것인가? 나도 참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 보다. ㅋㅋㅋ

그런데 이 부분의 무용수들의 춤은 오리지널을 꼭 보시도록 권한다. 특히 남자들은. 확실히 오리지널의 관능적 표현이 확 와 닿는다. 다른 부분에서는 무용수와 아크로바터들이 오리지널과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이 부분 만큼은 차원이 다르게 전해온다. 나는 역시 남자인가 보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