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되었을 때 막상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은 단 한 명"


프랑스 대혁명이 현대 민주주의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겠느냐마는 역사라는 것이 예상되는(후대에서 평가하기에) 흐름대로 간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한 상황들로 점철되어 역사의 변곡점들이 발생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호사가들이 프랑스대혁명을 '조롱조'로 언급할 때 언급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호사가들이 이야기한 '정치범은 단 한 명'이라는 언급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대혁명 후 일년 뒤에 세상에 탄생한 길로틴(단두대)을 판단해 본다면 당시 정치범이 단 한 명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짐작, 그러니까 정치범들은 구속, 수감되는 족족 저승으로 보냈던 것에 대한 보복 심리의 발현은 아닐까? 오히려 당시의 프랑스 정치 상황을 판단해볼 때-프랑스 혁명 전 얼마나 많은 정치범들이 사형장의 이슬로 화했는지는 자료가 없다- 정치범 단 한 명에 대하여는 나는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다.


"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되었을 때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단 한 명의 정치범은 극적으로 살아남은 역사 상 가장 운이 좋은 정치범"


초반에 썰렁한 농담을 한 이유는 바로 내가 디즈레일리님께 드렸던 질문에 대한 나름의 짧은 답변이다.

님께서 역사책을 읽으신다면 '진실이 무엇일까?'에 주목하시나요? '사실이 무엇일까?'에 주목하시나요?


역사에서 '사실'과 '진실'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또 다른 예는 바로 명성황후를 짓이긴 '김완섭의 역사 기술'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김완섭의 명성황후에 대한 기술들은 최소한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완섭은 관련 기술에서 사실을 기술했을지 모르겠지만 진실을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일종의 역사의 과잉 해석이라는 것이다. 내 판단의 근거에 대한 역사적 사실 기술은 생략하기로 하고 명성황후와 관련된 사실과 진실의 어긋남은 또한 명성황후를 어떻게든 부인하고 싶어하는 뉴라이트적 역사 해석에서 발견된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의 실질적 인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뉴라이트적 역사 해석에 대입한다면 뉴라이트의 역사 해석은 명성황후를 변호해야 그들 역사 해석의 맥락에 맞는다는 것이다. 즉, 역사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역사 해석에의 입장이 일관되어야 하는데 뉴라이트의 역사해석은 자신의 입장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수시로 바꾼다는 것으로 그건 역사해석도 아니고 그냥 똥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똥글이 역사해석의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설쳐져지는 작금의 현실은 고소를 지어낼 수 밖에.



큰 맥락에서 볼 때 인류가 고안해낸  제도 중 가장 훌륭한 제도라는 민주주의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기여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화학 그리고 물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통탄할만한 역사적 사실'도 양념처럼 기록되어 있다.


바로 산소의 존재를 발견한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유명한 이 라부아지에는 연소 반응 시에 산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원소라는 것을 정의하였다. 그런데 이 라부아지에는 부패혐의로 단두대에 올라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 당시의 상황은 과학도라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 충분할 것이다.


라부아지에 : 실험하던 것이 있는데 2주면 충분하니까 사형을 2주만 연기시켜 주시오
재판장 : 프랑스 공화국은 과학자 따위는 필요없다.


만일 2주만 연기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물리화학의 역사와는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르다'라는 것은 현재보다 더 나은 상태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였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뭐 안타까움 이상의 감정을 표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물리와 화학의 연구의 자유를 더 많이 보장해주는 제도이니 말이다.



프랑스 대혁명 후 발생한 미국독립전쟁과 독립 쟁취 후 득달같은 왕정주의자들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왕정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채택한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 와싱턴. 그의 고뇌와 선택은 현 시점에서 파악하면 인류가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 중 최상위에 위치시켜도 반발할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도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도박은 히틀러의 도박보다 더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의 민주주의는 이제 겨우 실험 단계에 불과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했지만 길로틴의 위세는 여전했고 공포정치로 대변되는 정치의 불안정성은 대다수의 국민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에는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지 와싱턴의 민주주의 채택은 히틀러의 도박보다더 위험한 도박이었고 조지 워싱턴이 그러니까 음모론의 최상위 정점에 위치하는 프리메이슨의 멤버라는 주장이 대두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지 워싱턴의 복장과 휘장 그리고 장식물들은 프리메이슨의 멤버로 추측되는 인물들의 그 것과 아주 똑같다는 점을 들어 조지 워싱턴인 프리메이슨의 맴버이며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민주주의? 쳇.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이 있잖아?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는 마그나카르타 헌장이 선포된지 미국 독립전쟁까지 500백년의 역사가 흐른 영국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로 보았을 때 미국이 벤치 마킹하기에 충분한 것 아니냐구?"


마그나카르타의 존재를 거론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을 분들에게 살포시 이 글의 제목인 세익스피어 작품들 중 특히 희곡은 몰론 그가 쓴 서극들 중에서는 마그나카르타와 연관된 왕이나 인물들이 있는데 막상 그의 작품들 중에서는 마그나카르타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주겠다.


"세익스피어 작품들 중에서는 저 위대한 마그나카르타가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물론, 세익스피어의 실제 정체에 대한 논란과는 달리 세익스피어는 기록에만 의한다면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세익스피어의 정치에 관련된 활동은 훗날 만유인력의 창시자 뉴턴의 소심함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의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된 뉴턴은 국회기록 중에 단 한마디만 기록이 되었다니까.


"문 닫아. 춥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범인으로는 추측한다는 것조차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그가 저 감격스러운 마그나카르타를 작품 중에 단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하다. 특히, 그의 서극 중에서는 마그나카르타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관련 인물들이 꽤 등장하니 말이다.


우선, 마그나카르타를 민주주의의 효시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마그나카르타는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패배한 영국에서 왕권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결국 왕과 귀족들의 권력 구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일 뿐 마그나카르타 어디에도 국민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차라리, 사간원과 사헌부 등의 존재를 통해 왕권을 견제하려 했던, 그러니까 마그나카르타처럼 귀족들이 왕을 협박하여 권력 구조를 나눈 것보다 아예 제도적으로 만들어낸 조선의 제도가 훨씬 민주주의 적이었다....라고 하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내가 노무현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 표출을 삼가하지 않으면서도 노무현의 권력 분점 시도에 대하여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와 아주 같다.


거의 비슷한 시기(조선의 건국은 마그나카르타 헌장 선포 후 벽여년 후에 이루어졌다)에 있었던 두 '권력 분점의 시도'는 그 이후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조선의 권력 분점 시도는 그 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정쟁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결국 조선 패망의 단초를 제공한다. 


반면에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는 5백여년 동안 잊혀진 역사적 사실이 된다. 바로 마그나카르타 선포 이후 4백년 후의 세익스피어는 마그나카르타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 것이 세익스피어의 작품들 중에서는 마그나카르타가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그렇게 잊혀진 마그나카르타 헌장은 마치 노무현-김정일의 NLL 대화록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부활한 것처럼 장미전쟁을 기점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영국의 청교도의 존재가 영국 왕권의 지나친 집중의 결과라면 장미전쟁의 경우에는 스타워즈의 '돌아온 제다이'처럼 왕권에 휘둘렸던 귀족들의 '돌아온 귀족들'의 존재를 합당화 시키기 위한 역사적 실증 존재로 부활한다.


그리고 조선과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영국이 망하거나 피폐해지기는 커녕 번영을 구가한 역사들을 기록한 이유는 바로 제국시대의 도래 때문이다. 바로 식민지의 착취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페미니즘의 발현이 바로 서구 유럽의 넉넉한 살림살이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여자, 너희들이 앙탈해 봐야 얼마나 하겠느냐?'라는 심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었다면 페미니즘은 애초에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해석인데 이 사회학자들의 해석을 고스란히 반영된 것-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이 바로 김수현의 드라마들이다.


김수현의 드라마들은 방영되면 남성들에게 '지나친 페미니즘을 구사한다'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막상 페미니스틀에게는 '가부장 제도에 여성들이 굴복하라는 마초주의적 발상의 드라마'라고 양 진영에서 비난받는 이유이다. 넉넉한 가부장 아래에서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데 김수현의 드라마에서는 여성들의 발언이 무척 세다. 그러나 김수현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주부들은 가정에서 헌신적인 며느리, 아내 그리고 엄마로만 그려질 뿐 경제적으로 독립한 주부들은 거의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식민지 착취로 쌓아올린 감당 못할 부는 민중들에게 나누어주어도 충분할 정도였고 그런 부의 적절한 배분은 오히려 통치하기에 편했으며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내가 '민주주의는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귀찮은 동전을 국민들에게 던져주면서 체제 유지를 꾀하는 사악한 제도'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제도는 인류가 만들어낸 제도 중 가장 훌륭한 제도이다...라는 주장에 흔쾌히 동의를 하지만 말이다.



글쎄? 준법 정신..............? 한국인은 서구 선진국보다 준법 정신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한국인은 아직 자본가들에게 길들여진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한국의 현실은 한국의 자본가들은 국민들 길들이는 방법을 넉넉해진 재산을 나누어주는 노블리스 오블리쥬(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역시 별로 안좋아하는 개념이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대신 배고프고 굶어본 설움을 겪게 만드는 '노예 길들이기'를 추구하는 것이 또 하나의 '진실'이라면 내가 한국의 자본가들을 너무 폄훼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한국의 자본가들이 꿈꾸는 사회는 바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걸 정치인들이 열렬히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법정신을 들어 한국의 국민성을 비판하는 논자들에게는 '국민성을 높이기 위하여 현재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한다'라는 주장을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그런 논자들을 칼 마르크스에 버금가는 혁명을 꿈꾸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감히 칭하고 싶다. 물론, 그런 '칭함에는' 빈정거림이 반은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