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증하지 못할 주제의 글쓰기는 피한다. 내게 실증이란, 타자와 함께 공유 가능한 수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치 판단이 최대한 배제된 자료를 통한다면 적어도 정보의 공유는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성에 대한 담론은 내게 피곤하다. 그러나 충분히 흥미롭고 주관적으로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될 지 개념을 세워보는게 재미있을까 떠오르는대로 써 본다.


ㄱ. 기본소득제는 국민성에 따라 시행에 어렵고 쉬움이 따르는가?


이번 국민성 담론이 나오게 된 물음이다. 나는 이것은 실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려하는 걸 포기한다. 다만 이 논제에 대해 1. 기본소득제가 좋은 것으로. 2. 좋은 기본소득제를 적용하는게 쉬운 것은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게 흥미롭다. 내게 있어 기본소득제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으므로, 무작정 그걸 적용하기 쉽거나 나쁜 것이 국민이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만한 요소가 되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한국에서 이 담론이 정치적으로 다뤄져 몰매를 맞지도 않았기 때문에 실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기본소득제의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ㄴ. 국민성


국민성을 정의 내리는 것에 매우 흥미가 생겨 글을 쓰게 되었다. 과거에 누가 국민성을 어떤 식으로 정의 내렸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 입장은 국가가 상상의 공동체라는 가라타니 고진과 상당히 가깝다. 지역이 행정적 구분선을 따라 구성되듯, 국가 또한 인간의 가상적 분할에 따라 존재한다. 국민이란 교육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경계선으로 구분되어 있는 지역은, 그 구분에 의거해서 자료가 만들어진다. 즉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경계선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립적으로 자신을 이뤄낸다. 예를 들어,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가 만나는 경계선에서 몇 개 군을 묶어 행정구역을 만들고 몇 십년이 흐른다면 그 지역-성을 띄는 자료를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는 서로 경계선이 맞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행정경계를 건너서는 선 양 편으로 지지층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 경계선 가까이, 1m나 200m, 1Km 내에 사는 사람들 서로의 차이는 어디서 일어나는 것일까?) 아마 이러한 예는 세종특별시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입지를 쌓아올려나가느냐를 보면 대략적으로 논제의 구상은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개인적으로 인구학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국가를 이루는 요소는 개별 인간이다. 죽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다. 즉, 한국에서 가장 나이 먹은 인간이 113세라면, 한국의 "국민성"은 1900년까지 소급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라는 틀 안에서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 그것이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국민성이란 최저선이다. 500년이고 1000년이고 소급하는 건 남아있는 껍데기 뿐이다. 인간 이외의 것으로 전승되는 것들이 재해석되서 교육으로 채워진다. 한국에서 일어난 100년 이내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그것들이 한국인의 국민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인구학적으로는 세대로 미분된다. 10년 단위는 이해하기 쉽도록 잘라내는 것 뿐이고, 50대에게는 50대 만의 기억이, 40대에게는 40대만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같은 기억이더라도 다른 나이에서 경험할 때 다른 추억으로 남는다. 결국 이런 식으로 접근 할 때, 다른 국가의 국민성을 따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뿐이다.


내게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게으르다. 왜 게으르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몇 십 번의 지각, 몇 십 번의 번복, 몇 백 번의 유보를 예로 들 것이다. 내게 외국이 하나 있다. 그 외국은 게으르다. 왜 게으르냐고 생각햐고 묻는다면, 국가에 인성을 심는 것이 국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쉽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국가는 적게는 수 백명부터 많게는 수 억명으로 이루어진 단체인데 몇 개의 동사와 형용사로 인격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매우 편의적인 모양새라 할 수 있겠다. 분명히 그것이 기억하는데 편하긴 하다. 내게 있어서도 독일은 칼같이 물건을 만들며, 영국은 음식을 맛 없게 만들며, 캐나다는 착하다는 이야기는 쉽게 생각난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천 개 이상의 수치를 모아놓은 그 무엇이 아무리 표준편차가 작다 하더라도 그건 그렇다, 라고 확정지어 말할 용기는 내게 없다. 하지만 집단 밖에 있는 사람은 그런 것이 충분히 편한 것이다. 예컨데, 아크로는 조잘댄다, 라고 말하면 기억도 잘 나고 편할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개개인들의 편차를 생각해볼 때 단일한 형용사로 전부를 지칭하는 것은 무례하고도 무리한 일일 것이다.


분명 통계는 국가나 지역 단위로 이루어진다. 허경영식으로 전경도/경전도/충강도로 묶어서 통계를 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또는 하동과 광양을 묶고, 장수와 함양을 묶어 통계를 낸 후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행정편의적임을 잊지 않는다. 한국의 국경선을 넘기란 꽤 힘든 편이고, 다른 언어와 문화의 인종이 주변에 사는 것도 흔하지 않다. 한국은 외국에 비해 꽤나 균질한 요소로 이루어진 국가인 것이다. 그런 한국 치고도 서로가 다르다 주장하는 것을 질리도록 봐왔다. 어떤 집단을 묶고, 다른 집단을 묶으면 서로 같기보다 다르기가 쉽다. 그것이 유의미하느냐를 실증하는건 다른 이야기다.


(유럽에 대해 알수록 이상한 느낌이 든다. 한국은 30년 식민 통치 받고, 전쟁으로 인해 기반이 싹 날아간다. 유럽의 경우 그 식민 통치를 하다가 2번의 전쟁으로 기반을 많이 날린다. 전후사를 생각했을 때 같은 지점에서 시작했다 봐도 무방할 곳도 있다. 한국은 왜 아프리카와 동병상련을 나누지 않고 유럽에 친밀감을 느끼는 걸까.)


ㄷ. 지역성


차별에 대한 담론에 접근하기 싫은 이유는, 그 존재를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위에도 말했듯 집단을 두 개 이상으로 묶었다면 A 집단과 B 집단은 분명한 통계적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역 차별이라는 것은 지역이 서로 함께 만날 때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A 집단에 있는 a가 B 집단에 있는 b를 마주하지 않을 때 차별이 발생할까? 집단 내에서 서로를 욕해봤자 상대를 장수하게 할 뿐 직접적인 차별은 불가능하다. a가 B로 가거나 b가 A로 가야만 발생할 수 있다. 최창집도 말했지만 한국은 C가 존재하기 때문에 a와 b의 차별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이 차별이 지정학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과연 c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난 채동욱의 지역성-분란은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c를 존재하지 않도록 만드는 요인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한국은 지역-성을 따지기에 앞서 서울+수도권이 3천4백만 명이다. 서울만 따진다 하더라도 천만 명이다. 수도권이 지역성을 균질하게 다림질 해버린지가 (서울+수도권= 2천만 달성) 벌써 30년이다. 이주민과 원주민을 어떤 식으로 구별할런진 몰라도, 아크로에서의 최저선을 따져볼 때 적어도 2대 째는 불가능하고 3대 째 쯤 되어야 원주민으로서 이해해주는가 보다. 태어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서울과 지방 대립이 올라오고 지방간 대립이 내려갈 시점은 약 30년 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게 서울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다.


ㄹ. 정치


미시적인 것을 다룰 때는 확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던가,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던가, 둘 다 아니라면 단촐하게 정리한 논제들의 목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뿌듯함을 느끼며 성과를 얻었다 생각할 수 있으나 정치 관련 논제는 피로감 뿐이다. 나는 논제가 주어지면 관련 책 목록과 함께 도서관의 장서를 열람하는 버릇이 있는데 DDC 320번대의 많은 책들을 훑으며 생각했다. 이 중 20권을 읽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들 밥벌이에 요 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겠구나. 차라리 그 20권 읽을 바에 경제학을 읽지.


+ ㅁ. 최소단위


내 직관에 의하면 국민-성이라는 것은 문화인류학과는 거리가 좀 있다. 사회학자들은 틀을 짜고 그 틀에서 공통성을 찾아낸 후 서로를 비교하는 방식을 주로 쓴다. 범주화가 맥락의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생학 이후 인종으로 나누는 것은 금기가 되었고, 국가를 단위로 하기엔 정치와 거리를 두기 쉽지 않다. 그래서 탈국가적인 모둠을 문화라는 모호한 이름을 붙여 크게 잡고 그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한다. 그것이 문명-권이란 단어를 만들어 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우생학이 진화를 사회학과 접목시키는걸 절멸시키다시피 했는데 어떠한 부분에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예컨데 문학진화론 같은 경우 우생학을 바탕으로 했으나 형식의 부분에 있어만 진화를 접목시켜보는건 어떤가 싶다. 그런 연유 하에 도킨스의 밈은 다시 한 번 사회학적인 요소에 진화를 덮어씌울 매개체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크기가 정해지지 않는 대상을 사회학은 연구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가치판단의 늪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