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차칸노르님과 디즈레일리님의 '국민성 논쟁'에 있어서 언급된 사회학적 용어에 포함된 개념을 100% 이해하지 못하지만 디즈레일리님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굳이 언급하자면, 차칸노르님의 주장은 '일반성'이고 디즈레일리님의 주장은 '보편성'이라는 것이죠.

다시 언급하자면, 우유끼워팔기에서 1 + 1 = 2 에서 차칸노르님은 '+'를 언급하시는 것이고 또한 국민성에서도 '+'를 언급하시는 것이며 우유끼워팔기에서 저는 '=' 를 그리고 민족성 논란에서 디즈레일리님 역시 '='를 언급하시는 것이죠.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1 + 1 = 2는 1 x 2 = 2라는 수식으로도 쓸 수 있고 따라서 '+'는 '=' 우변에 쓸 답을 도출해내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 '일반성'이고 '='는 우변에 답을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죠.


국민성에 대하여는 제가 디즈레일리님에게 지적드린 내용을 차칸노르님에게 그대로 지적해드릴 수 있겠네요.


"현재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라는 나라들의 대게는 과거 제국시대의 식민지 착취로 쌓아올린 부를 누린 역사의 결과이다"


그럼 과거 노예를 팔고 살던 영국이나 미국이 지금은 인권을 중요시하는데.... 저는 그게 아주 역겨운 민족성이라고 보거든요?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국민성보다 영국과 미국의 국민성(미국이야 다문화 국가이지만)이 더 한심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지금이야 '안그런 척'하지만 자신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노예를 팔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아주 역겨운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저의 이런 시각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나요?


닥치고, 강준만의 글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강준만은 민족성에 대하여 '보편성'을 언급하면서 '일반성'을 같이 언급했죠. 

국민성․지역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준만의 책읽기] 

(사례 1)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다가 어떤 학원들이 비싸게 교재를 판매하여 원생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도 정부는 이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정말 이 정도는 정부를 탓하기보다 개인이 학원에 등록하기 전에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호등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은 차도 다니지 않는 조그만 골목길까지 정부가 나서서 신호등을 설치해 주길 원한다.…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가 설치해 주는 신호등을 너무나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특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 2009.7.6)

 (사례 2) “커피를 비롯한 모든 먹는 것을 캠퍼스 벤치는 물론 논밭에까지 배달해 먹는 나라는 세상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한국이야말로 편리주의를 완벽하게 실현한 나라, 돈만 있으면 모든 서비스가 가능한 나라다. 그래서 호모 머니, 호모 이코노믹스, 호모 서비스, 호모 컨비니언스라는 말이 대한민국이 세계에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21세기 인간상일지 모른다. 그래서 철학의 선진화에 앞장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순간의 편리한 행복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감각과 이성의 마비라는 불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박홍규 영남대 법대교수, 경향 2009.7.16)

 (사례 3) “앞서가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을 끌어내리려는 우리 사회 일부의 악마성(惡魔性)은 정말 우리 모두를 절망케 한다. 댓글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저질 비방과 거짓의 남발은 남 잘나가는 꼴, 남 잘사는 꼴을 그냥 두지 않는 우리 사회 어둠의 한 단면이다.”(김대중 고문, 조선 2009.8.3)

 (사례 4) “최근 한국의 지방도시들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한국인의 성격은 일본인에 비해 훨씬 낙관적이며 직선적인 것 같습니다.”(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인문-환경학 연구과의 오구라 기조 교수, 경향 2009.8.6)
 (사례 5) “우리나라 국민 중 ‘개인과 국가 모두 성장이 중요하다’는 물질주의자(개발연대형) 비중은 56.84%로 미국(45.93%), 스웨덴(39.17%), 일본(37.47%), 멕시코(35.18%) 등 비교 대상 4개국보다 훨씬 높았다.”(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한국 사회통합의 미래’ 보고서, 경향 2009.9.1)

 최근 신문에 나온 ‘국민성’ 관련 기사들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한국인은 어떻다’는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국민성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런 게 있는 걸까?

오랫동안 국민성은 인종․민족 차별주의의 근거로 악용되었기 때문에 국민성 연구는 한때 금기시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외국 여행을 다녀보면 특정 국민․민족의 유별난 특성이 포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민성에 대해 말하길 즐겨 한다.

 한국이야 사회문화적으로 단일민족․단일언어 국가이기 때문에 국민성을 말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겠지만, 전 세계 모든 인종과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의 경우엔 어려운 게 아닐까? 그러나 미국은 국민성 연구가 가장 활발한 나라 중의 하나다. 흥미롭지 않은가.

 좀 묵은 책이지만, 루터 S. 루드케(Luther S. Luedtke) 등 24명의 미국 학자들이 쓴 『미국의 사회와 문화』(고대 영미문학연구소 옮김, 탐구당, 1989)라는 책은 미국 국민성 연구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의 필자들은 누가 뭐래도 국민의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고 미국이 형성되어 온 과정을 서술하고, 그 형성에 작용한 자연적․문화적․사회적․이념적 힘들을 평가하고 있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그 종복이었거나 시민이었던 외국의 모든 왕이나 군주, 국가 혹은 통치자에 대한 충성과 신임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버리고 포기할 것과, 나는 미합중국의 헌법과 법률을 지지하고 대내외의 모든 적들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신뢰의 신의를 변함없이 간직하며 법이 요구할 때 미합중국을 위하여 무기를 들 것을 맹세한다.…신이여 도우소서.”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을 때에 하는 선서 내용이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살던 한국인이 그런 선서를 한다고 해서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될까?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러나 2세들의 경우엔 처음부터 미국의 교육체계와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기 때문에 미국의 국민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들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자라나게 된다. “신속한 전국적 통신체제, 끊임없는 유동성, 동질화하는 대중문화 그리고 대량생산과 고도로 기술화된 문화에 의한 표준화”에 의해 새로운 미국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읽으면서 대체적으로 동의하긴 어렵지 않다. 다만 내내 한가지 궁금했던 건 국민성 형성의 메커니즘이다. 국민성은 살아가면서 저절로 형성되는 점도 있겠지만, 의도적인 형성의 과정도 있다. 정부․언론․지식인 등이 자국의 긍정적인 가치를 세뇌에 가까울 만큼 반복적으로 역설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사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가치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무난할 것이다. 이게 바로 국민성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미국인들이 개인주의와 순응주의라는 일견 상반되는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치로 설명할 수 있다. 

 미국에서 국민성 연구가 주로 전쟁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심리전을 수행하면서 일치단결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애국주의 메시지가 홍수 사태를 빚기 마련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의 ‘애국주의 논쟁’이 잘 말해주듯이, 진보적 지식인들은 애국주의를 불온시한다. 그러나 애국주의에도 여러 얼굴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현실적일 것 같다. ‘진보적 애국주의’가 가능하냐 하는 건 두고두고 뜨거운 쟁점이 되겠지만, 애국주의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곤란한 사태가 발생한다. 우선 당장 국경을 근거로 해서 발생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성 개념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어느 지역 사람은 어떻다’는 식의 지역성까지 인정하게 된다. 이 또한 특정 지역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최악만을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특정 지역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산의 지역공동체에 아무런 관심과 긍지와 애정이 없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 때에 그 사람들에게 삶의 자신감과 보람을 안겨줄 수 있는 건 지역 정체성이다. 지식인의 책상머리에선 그들이 곧장 ‘세계시민’으로 도약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현실세계에선 그런 초현실적 진보성은 지역을 망치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전북은 어떻다’는 정체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형성해보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셈인데, 그래도 국민성․지역성 개념이 내키지 않는다면 ‘일시적 필요악’ 수준으로나마 타협을 보자. 우리에게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는가? 그걸 열심히 꼽아볼 일이고 영 시원치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만들고 가꿔보자. 부정적인 게 있다면 그건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보자.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