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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상대주의에서 유일한 가치절대적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먼저 상대를 부정하는 가치관은 나쁘다. 그런 가치관은 용납할 수 없다"입니다. 가치상대주의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는 사이비 자유주의자입니다. 모든 자유주의자는 가치상대주의를 견고하게 지지합니다. 디즈레일리님과 하하하님은 자유주의에 대해서 눈꼽만큼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가치상대주의를 얼마나 철저하게 고수하는지를 디즈레일리님과 하하하님은 모릅니다.
북유럽 문화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독일, 스위스,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게르만 문화에 아시아계인 핀란드 문화를 더한 것을 말합니다. 이들의 문화적 원형은 민속설화와 북유럽 신화 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종말론적이고 비관적 세계관이 뚜렷합니다. 현세를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영원불멸한 그리스로마 신들에비해서 북유럽신화의 신들은 자기와 동등한 거인과 싸우다가 다 죽습니다. 그렇게 현세에서 모든 세상이 파멸하고 내세에서 선하고 완벽한 신 발두르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북유럽 신화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결합되었습니다. 장엄하고 어둡고 서정적이죠.
국민성과 특정 사회제도의 도입. 그렇게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와는 다르게 강준만 교수나 이규화 융합산업연구소장 같은 사람들은 국민성을 연계시켜서 고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합당한지는 사회과학의 특성상 단언할 수는 없고... 국민성이 사회제도의 성패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무튼 제가 남유럽국가 국민으로서 그 나라에 살면서 기본소득제에 관해서 국민투표를 한다면 저는 반대에 한 표를 던집니다.
국민성이라는 개념은 1950년대 이전까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악용돼 왔다가 최근에는 다시 재조명된다는 정도로만 이야기 하고 그만합니다. 제가 웃기지 않았는데 웃으시는 것은 저로서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죠. 그냥 그만할 수 밖에. 님은 님의 주장을 계속하세요. 저는 이만...
근면하지 않고 준법태도가 약하고 개인주의 및 자유주의(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않는다는 주의)가 약한 사람들이 많다 적다... 이런 것은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적으로 조사를 요즘도 많이 합니다. 특정 제도를 수용하는 특정 집단에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사회주의적 제도는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ps: 스위스에서 되는 게 한국에서는 안되고... 그 역으로도 가능하고 등등의 언급은 이미 한 바 있습니다.
ps : 거의 뭐 토론상대방을 낙인찍기 위해서 혈안이 돼 있는 것 같군요.
저한테 국민성이니 뭐니 하고 따지실 거면 강준만 교수나 언론사에서 활동하면서 국민성론을 읊고 있는 수많은 진보언론인들한테 따지세요.왜 아무런 말빨없고 영향력 없는 저를 물고 늘어지십니까? 저는 그나마 가치상대주의와 문화인류학상의 신기능주의로 국민성 개념 사용의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시도는 했지만 강준만 교수나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그것 조차 아예 없어요. 강준만 교수가 무슨 가치상대주의나 신기능주의 같은 이론적 보완책을 마련하려고 하기나 했습니까? 그냥 자기의 진성성을 담보로 주장하는 것 뿐입니다. 진정성 그거 어떻게 믿습니까?
"한국인들에게는 남 잘되는 거 보면 배아픈 국민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에게 그 국민성에 무슨 근거가 있냐고 근거대라고 따져보세요.
그리고 말 조심 하시고. 님같은 매너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댓글도 달아주기 싫습니다. 반론의 수준이 있어야 답글을 달 생각이나지. 신기능주의와 가치상대주의로는 문제점이 해결 안된다는 것을 근거를 대면서 주장하는 반론이면 몰라도 무슨나라의 국민성은 뭐냐 이런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유치한 반론을 하니 참... 깝깝합니다.
지구인들 제민족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견종이나 묘종에 따른 고유 특성도 부정할 듯 싶습니다.
보더 콜리는 총명하다, 시추는 멍청하다, 골드 리트리버는 온순하다, 로트와일러는 폭력적이다; 샤미는 장난꾸러기이다, 러블은 겁장이이다, 래그돌은 온순하다, 페르샨은 까칠하다, 뭐 이런 것조차도.
유럽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유럽 속담 하나 소개합니다.
"영국사람은 뛰기 전에 생각하고,
프랑스사람은 뛰면서 생각하고,
스페인사람은 뛰고 나서 생각한다."
이 속담을 소개했더니, 一人 曰, "한국사람은 뛰고 나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天孫族인데 굳이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와 절대적으로 틀린 가치는 분명히 존재하고, 두가지가 혼재되어 이거다 저거다 할 수 없는 가치들도 존재한다는게 제 입장입니다.
http://theacro.com/zbxe/586472
당시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어떤 특정 행위에 있어 그 가치의 옳음과 그름은 가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를 묶어서 일반화할 경우 그 가치는 절대화할 수 없다. 즉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가 나쁠 수는 있지만 일괄적으로 살인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는 소리다" 였습니다.
차칸노르씨가 관심법으로 저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소위 가치절대주의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겠군요. -_-a
그런데 가치상대주의라는게 처음에는 좋고 나쁨을 이야기 하다가도 종국에는 결국 옳고 그름으로 빠지는 경우가 참 많단 말이죠.
상대적 상대주의는 절대적 상대주의를 또 부정하더군요.
저는 상대의 신앙이나 세계관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제 신앙이나 세계관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의 세계관이나 신앙을 공격할 뿐이지. 그 때는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상대의 세계관과 신앙을 공격 해야 합니다. 그 때는 상대의 세계관과 신앙을 공격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이것은 관용(톨레란쯔 사상)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관용을 지키면 서로를 공격하거나 싸울 일이 없어요. 사회(과학)은 다양성과 관용이 존중되며 당위와 관점이 중시되는 공간입니다. "아.. 내가 보기엔 차칸노르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덴마크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없더라. 혹은 이런 경향이 있더라"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고 하잖아요.
상대의 가치관과 세계관, 관점. 신앙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관, 관점이나 신앙 등과 다르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계가 불행하고 어수선한 겁니다. 누가,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자인의 영역과 졸렌의 영역을 엄밀히 구분해주세요.
차칸노르/
이런 저런 논거들을 사용하여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종말론적 염세적 세계관이 좀 더 강한 경향이 있다 혹은 그런 국민성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본소득제도>라는 현실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정책의 성패나 결과를 예측하거나 비판하는 논거로 사용하시는 것은 굉장히 무리한 주장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데이터의 제시가 없다면 그런 세계관과 기본소득제도 성패 사이의 상관성이나 인과성 주장은 아전인수라고 공격당해도 대항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어떤 분처럼 진화론을 논거로 <야한 옷이 성폭행을 유발한다> 라는 결론을 도출하고서, 정책적 판단의 논거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가 아닐까요?
두번째는 한국인들 역시 얼마든지 (북유럽 사람들 이상으로) 종말론적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답변이 궁색해질 수 밖에 없겠지요.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의 미륵사상,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정도령 강림이나 개벽사상, 백백교 신앙촌 통일교 오대양 휴거설 기독교 심지어 주체사상과 맑스주의까지 유독 종말론과 염세주의를 강조하는 종교나 사상들이 평균 이상의 인기를 얻었던 사실을 근거로 한국인들의 국민성 역시 종말론적 염세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구체적인 현실의 정책에 접목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요?
이런 예언 예측은 엄밀성을 가지는 게 아니고 수 많은 변수가 있습니다. 잘 안될 것 같지만 잘 되는 것으로 결과지어질 수도 있고요. 그런 데이터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기본소득제 도입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부족한 데이터를 가지고 반대의 근거로 삼으면서 여론전을 펼칠 수도 있고요. 반대진영에서도 마찬가지. 그런 결과를 내놓으면 사람들은 또 곧장 잘 믿습니다.
2. 얼마 전에 보니 한국인이 물질에 대한 욕망이나 물질적 행복에 대해서 가치를 두는 정도, 결혼 시에 조건을 따지는 정도 등등이 세계 각 나라들 보다 훨씬 높다고 하더군요. 이런 조사를 두고 염세적 세계관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3. 사회현상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대학교 교양시간에는 이런 것을 두고 사회현상에는 sein(사실,존재)이 아니라 sollen(당위)이 지배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회과학은 당위에 중점이 가 있는 학문이라고... 정답이 없습니다.
현세주의적 국민성은 오히려 기본소득제 도입에 더욱 유리한 환경 아닌가요?
염세주의 -> 이까짓 세상 열심히 살면 뭐해. 기본소득으로 적당히 놀다가 떠나면 그만이지 -> 기본소득제도 실패
현세주의 -> 기본소득에 월급까지 더하면 더 많은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해야지 -> 기본소득제도 성공
애초 종말론적 염세적 세계관이 왜 기본소득제도 성공에 유리한 환경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갑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놀고 먹기 좋아하는 국민성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근면한 것으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고 하던데요. OECD 최장시간 노동과 학업에 열중하는 나라의 국민들을 그렇게 평가하시는건 무리가 있으신 듯. 준법의식도 마찬가지구요. 한국인들은 조선시대부터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과 법치제도하에서 살아온 사람들일겁니다. 현 단계의 시민의식이 선진국들과 비교해 그리 부족해보이지도 않구요.
대부분 <온대지방 농경국가의 국민들이 가장 부지런하다> 라고 하는거 같은데;;
뒷부분은 동의가 안됩니다. 한국처럼 어릴때부터 온갖 규칙에 적응해야 무사한 나라는 흔치 않을 듯 싶은데요. 3살짜리 아이들 모아놓고 신호등 규칙을 훈련시키는 나라 아닙니까? 해도 되는 일과 아닌 일을 엄격하게 나누고, 규칙을 어겼을 때 강도높은 훈육을 실시하구요.
여성들은 담배피면 안된다는 가공할만한 사회 규칙을 당연한 듯이 지키면서 사는 나라입니다. 남성들은 군대가서 규칙에 대한 절대 복종을 훈련받구요.
꼼수를 부리는 거야 규칙위반의 이득에 비해 처벌이 약한 경우 어느 나라 국민들이나 다 그런거구요. 한국인들의 기질적 특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메뉴얼과 규칙준수성은 별개의 개념 아닐까요? 그건 아직 필요와 훈련이 부족해서이지 메뉴얼로 통제받는걸 싫어하는 기질때문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일본의 2차대전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메뉴얼이 없는 나라라서 그랬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는데, 일본의 메뉴얼 사랑은 그거에 대한 반성 때문이 아닐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일에 대한 만족도, 업무집중도 등은 OECD최하 수준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업무 시간 중에 20%정도만 일에 집중한다고... 업무집중도가 다른 나라들의 절반 이하 ~1/3수준이니까 다른 나라들보다 두 배 이상 일해도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 저는 이것을 일은 하기 싫은데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향락적 소비문화도 우리 나라 처럼 발달한 나라가 없다고 알고 있고요.
현세적 욕망이나 향락추구를 범죄시하는, 금욕주의로만 따지면 이슬람국가들이나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이 세계최강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구의 종말론적 염세적 세계관에 기초한 금욕주의쯤은 가볍게 찜쪄먹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금욕주의와 근면도는 별무상관일 듯. 인과나 상관성은 다른 것에 있겠죠.
향락을 즐기려면 더 많은 소득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더 많은 향락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할 것 같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과 향락주의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요.
한국인들의 업무집중도가 낮은 것은 국민성때문이 아니라 업무집중도 대비 보상체계가 빈약해서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이번 국민성 논쟁은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고 저렇게도 해석이 가능한 것을 무리하게 끌고 오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언론학자인 강준만 씨는 넘어서야 할 한계로서 국민성을 언급했습니다.
그 자신도 그걸 깨려고 많이 고단해 했지요.
지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고개를 힘겹게 걷는 중이지요. 그런데 아마 넘을 겁니다. 그렇게 힘들어 햇으니까요.
왜 힘드냐구요?
넘어서야 할 한계는 인정할 때만 그 한계를 넘어널 수 있습니다.
그 정점에 강준만 씨가 있죠.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강준만 씨 같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토대가 쌓이길 기다릴 수 있을 뿐이죠.
차칸노르 님 꽤나, 아니 정말이지 배운 사람인데... ... .
내 결론은 똑같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
이런 경우 몇가지 해법을 생각할 수 있는데, 1. 강준만 교수의 의지를 반영하는 사회적 관계를 확장해가면서 계속적으로 강준만 교수의 지역성 아젠다를 퍼뜨려 차별주의자를 압도해나가는 방법. 2. 지역성 개념을 포기하고 대체할 다른 개념을 찾는 방법 방법 3. 지역차별주의자의 지역성 개념을 가지고 펼치는 공작에 맞서는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연구하는 방법...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지역성 국민성에 관한 언급은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응에서 2는 당장 대체개념을 찾지 않으면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지역차별주의자에 지역성 개념이 널리 활용되면서 압도되지요. 이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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