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Karl Popper)는 반증 개념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점성술, 역사적 유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이 반증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자연 선택 이론도 반증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자연 선택에 대해서는 입장을 어느 정도 바꾸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자연 선택에 대한 포퍼의 생각을 상세히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포퍼의 팬도 아니며 반증을 포퍼만큼 중시하지는 않는다.

 

 

 

자연 선택 이론에는 핵심(core) 또는 핵심 논리(core logic) 또는 핵심 모형(core model)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조금씩 다른 여러 버전이 있지만 대충 아래와 비슷하다.

 

전제 1: 개체군에 변이가 존재한다.

 

전제 2: 그 변이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유전된다.

 

전제 3: 그 변이가 번식 성공도에 영향을 끼친다.

 

결론: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번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다(positive selection). 또는 번식에 해를 끼치는 변이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negative selection).

 

 

 

핵심 논리만 놓고 보면 뻔한 진리(trivial truth). “왜 나는 이런 뻔한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라고 한탄했을 만하다.

 

자연 선택의 핵심 논리는 반증 불가능하다. 뻔한 진리를 어떻게 반증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반증론(falsificationism, 반증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 선택 이론은 과학이 아니란 말인가?

 

 

 

만약 다윈이 이런 핵심 논리만 제시했다면 뻔한 이야기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에는 핵심 논리 말고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윈은 이런 핵심 논리가 지구상의 생명에 실제로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다윈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유전되며 번식 성공도에 영향을 끼치는 변이가 지구상의 생물 개체군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그런 변이가 잠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당 수준으로 유지되어서 자연 선택이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반증이 가능하다. 만약 개체군의 모든 개체가 서로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다윈의 주장이 반증된다. 설사 개체들 사이에 변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몽땅 유전되지 않는 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다윈의 주장이 반증된다.

 

만약 DNA의 변이가 번식 성공도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DNA 수준의 자연 선택 이론은 반증된다.

 

핵심 논리 자체는 반증 불가능하지만 “핵심 논리가 지구상의 생명에 적용된다”라는 명제는 반증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진화 생물학자는 “자연 선택의 핵심 논리가 지구상의 생명에 적용된다”라는 아주 일반적인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 선택 이론을 적용하여 온갖 구체적인 가설들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눈은 자연 선택의 산물이다”와 같이 진화 생물학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가설도 있지만 “인간에게는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독사 회피 기제가 있다”와 같이 진화 생물학계 내에서도 논란이 되는 가설도 있다.

 

만약 최근 1천만 년 동안 독사가 인간(또는 인간의 직계조상)의 근처에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 고생물학 연구에 의해 드러난다면 그 가설은 사실상 반증된다. 근처에 있지도 않은 독사에 대한 방어 기제가 진화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질투 기제가 있다”와 같은 가설의 경우에도 반증될 수 있다. 만약 질투가 전혀 없는 문화권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이 가설은 완벽한 반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만약 발달 심리학자가 질투가 피아노 연주 능력만큼이나 순전히 후천적으로 발달함을 보여준다면 이 가설은 반증된다.

 

 

 

자연 선택의 핵심 논리만 놓고 보면 상당히 쉬우며 뻔한 진리다. 하지만 자연 선택 이론 전체를 보면 결코 쉽지도 않고 뻔하지도 않다. 적어도 다윈에게는 아주 어려웠던 문제 한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다.

 

다윈은 유전 기제에 대해 아주 잘못 알고 있었다. 다윈은 생물의 유전이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이 섞이면 중간색인 회색이 되듯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어머니의 유전 물질이 아버지의 유전 물질과 섞여서 자식의 유전 물질이 될 때 부모의 중간인 유전 물질이 된다고 본 것이다. 유전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면 수십 가지의 물감을 모두 섞으면 결국 하나의 색이 되듯이 개체군의 변이가 금방 고갈되게 된다. 다윈의 이론에 대한 거부감이 기독교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이론적 문제 때문에 자연 선택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유전 기제에 대해 혁명적 발견을 한 사람은 멘델(Gregor Mendel)이었는데 다윈은 멘델의 논문을 읽지 않은 듯하다.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그 엄청난 함의를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다. 멘델의 연구에 이어 DNA가 발견되면서 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DNAA, C, G, T라고 부르는 네 개의 “부호”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A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C가 만나서 AC의 중간 물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기본 “부호”는 세대가 지나도 유지된다. 따라서 변이는 쉽게 고갈되지 않는다.

 

 

 

이덕하

version 0.1

2013-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