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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비행소년님이 교황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듯 합니다
비행소년님 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천주교인들조차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 많아서요
교황이나 천주교에서 하는 말을 피상적으로 언론이 보도하는데 천주교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2천년의 전통을 하루아침에 뒤집을만큼 허술한 단체가 아닙니다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고하고 동성애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발언등은 선교적 차원의 립서비스입니다
기본교리는 변한것이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그분들의 입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개신교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도 잘 나와있습니다
제2차 바티카노 공의회 이후 성교회는 교회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선하게 살았다면 천주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의 성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전통적 가르침과도 일치하기는 하나, 제2차 바티카노 공의회에서는 종교 자유에 대한 선언이 있었기에, 전통적 구원관에서 한 보 더 나아가 비신자는 물론 타 그리스도교파나 타종교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선을 지향하고 있다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된다고 보고 이 또한 천주의 자비로 구원에 이를 수도 있다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 안에는 분명 중요한 전제 조건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 조건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신자들은 그런 중요한 전제 조건은 잘 모른 채 선하게만 살면 교회 밖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분명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비신자나 타 그리스도교파나 타종교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교회 밖 구원에 대한 중요한 전제 조건은 무엇인지, 그리고 전통적 구원관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한 전통 신학자의 견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도 틀림없이 모종의 조건에서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그 모종의 조건이란,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즉 이겨낼 수 없는 오류에 속해 있을 경우입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기로 노력한다면 천주께서는 조력성총(助力聖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들이 그 성총에 충실하여 성총과 더불어 생활한다면 천주께서는 결국 그들에게 성화의 성총을 주시어 구원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된다면 그것은 개인으로서 입니다.
예컨대, 그들이 다른 종교에 속한 상태로 구원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속한 그 다른 종교를 통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류가 진리의 왕국으로 이끌어 주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시어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안에 나타나시어 하나인 교회를 세우셨으며, 그로써 계속 생활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교회, 그분의 신부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신 천주께서 당신이 세우지도 않은 거짓된 종교로써 구원되도록 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일컬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부께로 갈 수 없다.” (요한 14, 6.) 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교회에 대해서는 이를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의 거짓된 종교는 천주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세운 것이며, 또 사탄의 숨결의 숨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다른 종교의 일원으로서 혹은 다른 종교로써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언제나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써 주님의 희생과 그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것이지, 다른 종교를 통해 구원된 것도 아니요, 다른 종교와는 무관하게 구원된 것입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영, 즉 성신이 그들의 교회 및 교단을 ‘구원의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이단입니다.
흐강님/자꾸 반칙하실래요? 흐강님은 정치논쟁하실 때는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하시는데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쟁토의 꼭 누구처럼 팩트 편식하시는군요.
자, 아래는 저의 글입니다.
그 이후로 개신교는 배타주의(exclusivism-저는 이 것을 이슬람과 비교를 하면서 maximalism, 즉 근본주의라고 해석을 했습니다만)를 표방하고 천주교는 포용주의(inclusivism)의 길을 갑니다. 상세한 내용은 더 잘 아시리라 믿고 그 상세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천주교의 포용주의 역시 기독교의 절대신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서 훗날 종교 다원주의(pluralism) 학자들에게 개신교의 배타주의와 함께 비판을 받습니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흐강님에게
자, 'Extra ecclesiam nulla salus' 관련하여 논점이 뭡니까? 천주교나 개신교 양쪽 종교의 특성 상 다원주의를 완전히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Extra ecclesiam nulla salus' 관련하여 천주교는 '믿음보다는 선행'이라는 입장인 반면 개신교는 '선행보다는 믿음'이라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지요?
논점은, 첫번째, 천주교 개신교 둘 다 교리 때문에 다원주의에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두번째, 천주교는 그 한계 속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않다.
단도직입적으모 여쭙지요.
'선행'과 '믿음'
님은 천국 가는데 어느게 우선 순위라고 생각하시나요?
개신교 쉴드하기 위하여 택도 없는 이슬람 끌어드리고 천주교 끌어드리고..... 다음에는 불교, 힌두교, 유교..... 차례로 끌어드리실거죠? ^________^
흐강/ 의문이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부께로 갈 수 없다.” (요한 14, 6.)
여기서 나는 예수이겠죠. 교회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예수 자신만을 통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일겁니다. 그런데 은근슬쩍 예수를 교회와 동일시하는 것은 혹시 우상숭배이거나 기독교인들의 오만 아닐까요?
그럼 예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라고 한다지요. 하나님은 교회안에만 존재하는 분일까요? 다른 종교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그런데 기독교의 교리는 하나님은 모든 곳에 역사하시고 존재하는 분이라 하지 않습니까?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예수 말씀 중에 '저 들꽃을 보라. 솔로몬의 옷보다 더 화려하다. 저 하찮은 들꽃조차 하나님이 챙기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은 어떠랴' 라고 하지요. 하찮은 들꽃조차 챙긴다는 하나님이 하물며 인간을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구원의 길을 끊어버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피노키오님/님의 의문 제기는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이며 예수를 우상화시킨, 예수를 모독하는 종교이다'라는 주장의 핵심 중 한 부분입니다.
천주교까지 포함시키자면, '천주교는 베드로의 종교이고 개신교는 바울의 종교이다'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따라서 종교개혁은 천주교의 표현처럼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발명은 천주교에게는 재앙이고 그 것이 종교개혁으로 발전되었다'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라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죠.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하자면)다시 돌아와 '기독교는 바울의 종교'라는 주장(여기서 기독교는 천주교+개신교)에서
바울은 예수의 제자라고 했지만 막상 바울의 사도신경이나 고린도전서 등에서는 예수의 사상을 언급한 부분이 없으며,
님이 제기하신 의문처럼 바울은 신과 인간의 거리를 벌려놓는데 일등공신이라는 것이죠.
독설을 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고기덩어리'라고까지 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타락의 원인인데 즉, 십자가만 있으면 만사형통식의 교리가 바로 그 것이죠.
(액면입니다.)님이 의문 제기를 님이 스스로 추론하여 하신 것이라는 전제 하에.... 감탄이 나오는군요.....
한그루님 바울의 종교와 예수의 종교로 갈라놓는 사람들은 주로 자유주의적인 신학이나 비 기독교인들이지요
천주교 신자시라니 아우그스티노를 잘 아실겁니다
그분의 신학의 기초가 바로 바울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어거스틴에게서 자신의 신학적 토대를 쌓아올립니다
교황제도가 베드로위에 놓여있다고는 하지만 바울은 예수를 해석한 사람입니다
그 해석은 정확하고요
자동차를 분해하면 엔진 미션 차대 차체 이렇게 나누어지고 그 기능은 완전히 제각각이고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따로 있으면 의미도 없고요
기독교 신앙도 마찬사지로 바울 베드로 야고보 따로 이렇게 분해해 버리면 기독교가 아니지요
이 모든것이 합하여 우리가 믿는 역사적 기독교가 된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종교이니 베드로 종교이니 이런건 무의미하고 비판자들의 아전인수격 해석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정통 신학자들의 말을 믿어야지 외부인이나 삐딱선 탄 학자들의 말을 믿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한그루님 논쟁하려고 올린 글은 아닙니다마는 한그루님이 층위가 다른 문제를 같이 놓고 말씀하시니
먼저 포용주의나 다원주의는 종교간 대화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천주교가 포용주의가 맞습니다
그리고 세계 개신교도 절반이상은 포용주의 입장이고 한국은 기독교 장로회는 다원주의 감리교와 예장 통합의 450만명 교단은 포용주의입니다
포용주의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타 종교에도 나름의 진리가 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라는 것입니다.
배타주의는 타종교에는 진리따위는 하나도 없다라는 입장이고
다원주의는 타 종교에도 구원의 진리가 있다라는 것이고
천주교의 공식입장은 유일한 교회는 천주교회이고 교회밖에도 구원은 있지만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양심이나 선행을 할때 구원받습니다
즉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옛날에 죽은 사람이나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이 해당되고 그나마 천주교의 은총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공식교리입니다.
이런문제는 우리끼리가 아니라 천주교의 공식문헌을 통해서 입증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치노키오님/ 예수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고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현재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니 예수가 곧 교회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구원의 문제는 이렇게 봅니다
오마담님처럼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지옥이든 구원이든 아무 의미가 없으니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 밖에 구원이 있다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즉 김정은이나 북한이 아무리 지상낙원이라고 떠들어도 내가 무시하고 나와 상관없으면 신경쓸 일이 없지요
문제는 교회다니거나 하나님을 믿는데 교회는 나가기 싫은 사람들에게 있지요
저는 교회 안나간다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목적이 아니라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였고 교회를 통하여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하고 계승한다고 하였으며 코이노니아 즉 성도의 교제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마땅히 교회생활을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반상회도 안나가고 세금도 안내고 병역을 기피한다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건 아니지만 마땅한 태도는 아니지요
본직적으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느냐라는 논쟁의 시원은 가톨릭교회외 다른 교파 즉 개신교나 동방 정통교회를 인정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기독교 내부의 정통성과 관련된 논쟁이지요
가톨릭교회는 오직 유일하고 보편적인 공교회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고 이것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고 표현하면서 문제가 되고 한스큉 같은 신학자들의 교회론에서 본격화되고 개신교에서도 논란이 되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래에 말한것처럼 교회와 상관없이 종교와 상관없이 창조주를 믿고 그리고 인간의 죄악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그 창조주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은 구원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불교에서도 기독교를 믿어도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으면 좋지라고 기독교만큼 적극적으로 소리를 높이지 않을뿐이지 불교에서 구원은 해탈이고 윤회를 벗어나 니르바나 열반에 이르는 길인데 기독교식으로 신이 대신 해주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 사실상 모든 종교는 구원에 있어서 배타적입니다
자기 방식이 유일하다고 보는겁니다
다만 개신교처럼 큰소리로 니들은 틀렸어 하는 사람들과 불교처럼 속으로만 니들은 틀렸어 하는것의 차이지요
한그루님
여기 근거를 드리는데 핵심은 자기탓이지요
자기잘못이 없이 교회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선하게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고 교회밖 신자인데
자기잘못을 어떻게 정하나요?
다음으로 어떻게해야 양심적이고 선하다고 할까요?
기준이 뭡니까?
사람마다 양심이 달라요
그리고 바티칸 공의회 문서를 보면 인지부조화 같은 소릴 하고있습니다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고 타종교도 구원이 있다고하면서 자기책임이 없어야하고 가톨릭 교회와 연관이 있어야하고 참
어떤 사람은 천억을 먹고도 양심의 가책을 안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백만원 받고도 자책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이 기준이 뭡니까?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니 천주교 신자로서 한그루님이 설명해 주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
.
마침내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플로렌스공의회의 결정을 바꾸고 있습니다.
먼저 선교교령은 간접적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선언 합니다:
“본인의 탓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록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길로 신앙에로 이끄실 수 있으시긴 하지만,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과 성스러운 의무를 아울러 갖는 것이며,
이로 인해 선교활동은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그 힘과 완전한 필요성을 갖고 있다.”(교령7항)
교회헌장은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보편적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비자들의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예비자들은 교회에 결합되려는 소망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된다.’(헌장14항)
다음으로 정교회나 개신교의 구원가능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은 완전한 신앙, 성사,
로마교황과의 일치라는 세요소를 다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그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결합되어 있다.’(헌장15항)
다음으로 불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헌장 16항)
마지막으로 아무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헌장16항)
천주교신자가 아니더라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을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정도'입니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모든 길은 '구원의 예외적인 길'입니다.
구원의 정도인 가톨릭교회의 '참된 신앙'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흐강님/
제가 알기로는 천주교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이 해석을 예전에 리버랄한 교황의 대명사였던 요한바오르 2세가 했다고 하던데, 지금의 교황도 리버럴한 사람으로 알고 있고.... 그러니깐 이 정도의 리버랄을 가지고 있는 교권과 교황이라면 저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냥 문자 그대로 하는 말인 것 같은데요. 교황이 하는 말에 누가 저렇게 토를 이상하게 달아서 비틀기를 하는 거죠? 저는 이게 더 이해가 안되네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달 23일 "다윈의 진화론이 단순한 가설 이상" 이라며 "진화론이 카톨릭교의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선언, 로마교황청 사상 처음으로 1백 30여년만에 진화론을 인정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 바티칸에서 [생명의 기원과 진화] 를 주제로 총회를 열고있던 평신도 단체 [교황청 과학아카데미]에 메세지를 보내 참석 과학자들에게 과학과 신앙의 화해를 촉구하면서 창조를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는 한 진화론은 논리적을 옳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이 메세지에서 교황 비로 12세가 1950년 회칙 [인류]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묵훈령]을 통해 "진화론이 진지한 가설" 이라고 선언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생명의 기원에 관해 과학적으로 도달된 결론들과 계시가 담고 있는 결론들이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진리는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한계를 잘 설정함으로써 성서에 대한 부당한 해석을 배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한 교황은 "회칙 [인류]에서는 진화론을 그 반대의 가설에 대해서와 똑같이 깊이 연구 조사하고 반성할 가치가 있는 진지한 가설로 보았다"며 "이 회칙이 나온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새로운 지식은 우리에게 진화론을 가설 이상으로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교황은 "진화의 이론은 유물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해석도 있고 영적인 해석도 있다"고 전제하고 "영이 생명체의 힘으로부터 출현한다고 보거나 또는 생명체의 부수 현상으로 보는 진화론은 진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비행소년념님 / 교황이라고 마구 혼자생각을 교리로 만들수 없습니다
교회 행정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주도적으로 교황의 역할이 가능하지만 교리는 공의회를 소집해야만 바꿀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과 구원에 관한 것은 전혀 다른문제입니다
진화론을 인정했다고해서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즉 무신론자가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는 신의 존재는 없고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교황이 진화론을 인정하고 이야기할땐 신의 존재를 전제로 신이 진화의 방식을 사용했다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언론에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이나 말로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핵심 교리나 주장을 알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언론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위해 자극적으로 이슈화시키고 교회측에서는 이미지를 위해 적당한 식으로 플레이하는 것이지요
흐강님/
위에 긁어오신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중요한 것은 과학과 (또는 이성과) 종교를 타협할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카토릭이 과학을 자신의 종교의 테두리 - 즉, 진화도 신의 계획의 일부다 - 로 생각하는 것 정도쯤이야 당연히 인정해줄 수 있는 그들의 고유한 생각 아니겠습니까.
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카톨릭에서 원하는 것은 이거 아닙니까. 잘 모르겠으면 착하게 살아라. 그런데, 가장 쉬운 구원의 길은 바로 카톨릭으로 오는 것이다. 네, 그들의 생각이 이 정도면 당연히 인정해 줘야줘. 아니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양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이 두가지를 100%를 양보한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카톨릭 믿을 이유가 없어지죠. 따라서 교황청이 없어져야 되걸랑요. 교권이 땅에 떨어지지요. 비신자들이 그것까지 양보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영역이니까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교회 (특히나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좀 보고 배워라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 완전 배타성으로 똘똘 뭉쳐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창조과학회 같은 것 하시는 분들은 정말 대책이 안서요.
그나저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원래 흐강님의 원글로 돌아가서 과학과 이성에 맹신하는 사람들만큼 개신교의 맹신 - 따라서 다른 것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회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후자가 더 불쌍하고 시한폭탄같아서 불안해보이기는 합니다만. 왜냐하면 전자들은 오만할 뿐 해악이 그리 크지 않은데 반해, 후자인 사람들은 오만함 + 정치권력화마져 이루어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비행소년님 맞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타협이지요
개신교에도 지적설계나 아니면 진화를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했다라고 절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 레토릭이라고 보고요
그들은 성공회 성찬도 인정하지 않는데요 뭐
개신교 교인은 이교도와 같이 취급받습니다
세례도 받아야하고 성찬도 영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은 전통적인 신앙의 주장을 고집할 수만은 없게된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계도 분명하고 목적없이 진화한 결과로 보기보다는 신의 창조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오묘한 메카니즘이 인간의 몸이나 자연속에 있습니다.
저는 진화론이 틀렸다고도 모두 맞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창조론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까지만 믿지 칠일이나 기타등등은 신앙적인 언명이고 용어이지 과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본래 배타성이 있습니다
진리의 최고봉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믿음을 전제로 하니까요
다만 시대에 따라 종교에 따라 표현의 수단이나 강도만 다를뿐이지요
한국 개신교의 배타성은 문제입니다
저는 한국 개신교의 문제가 진화론을 안믿고 배타적이고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방식대로 믿을 권리가 있고 나름의 역사와 전통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걸 타인과 소통할때 사회와 소통할때 고집한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내부에서만 이야기해야 하는데 외부에 강제하려니까 문제지요
교과서를 고치라고 한다든지 말이지요
그리고 이미 입증된 과학적 사실은 받아들여야지요
그런데 개신교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미 은퇴시기후의 차세대 목사들 그리고 신자들 스스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실제적으로는 합리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가 순복음 조용기의 영향이 너무 크고 가장큰 교단이 근본주의적인 합동교단이기에 대외적인 흐름이 그렇게 나타나는데 금년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wcc 총회를 보면 인식이 많이 달라질겁니다
우리나라 보수 장로교단들은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들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아마 3분의1 정도는 될겁니다
그런데 천주교도 보수적인 분들은 장난이 아니더군요
마치 조선시대 임금을 모시는 백성들 같은 태도입니다
교황에 대한 태도가
아래 링크 카페인데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막상 막하더군요 ㅎㅎ
http://cafe.naver.com/ecclesia
흐강님/
저야 무늬만 가톨릭이고 각 종교에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따라 믿어도 상관없다고 믿습니다.
개신교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 어차피 믿는 신은 다 같고 솔직히 각각 경전 내용이야 민족생활적 특성이나 신화적 성격이 강하지 그걸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ㅎㅎㅎ
그런 차이를 갖다가 자기네만 무조건 맞다고 다른 종교를 깎아내리고 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이 악독한거지요.
세계적인 대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와 대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을 모아서 오케스트라를 꾸렸는데 서로 민족적 역사적 경험으로만 보면 철천지원수인데도 막상 같이 모여 있으니까 잘 지냈다는 거 아닙니까.
결국 문제가 생기는 건 돈 토지 정치적 이권 등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결합할 때지요.
종교개혁도 사실 교황청에 헌금하고 면죄부 뜯기기 싫어한 독일 영주들이 지지해서 성공한거고 (결국 그 돈을 다 자기네가 먹었죠)
30년전쟁도 각국 군주들의 세력각축이 없었으면 일어났겠습니까?
십자군도 종교적 동기가 강하긴 했지만 경제적 동기가 상당히 강했고
오늘날 중동에서 분쟁이 있는것도 부족간에 정치적 패권을 누가 장악하느냐갖고 그러는거죠.
사실 종교가 근본적인 해악을 끼친다면 이겁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어떤 확신을 갖고 나쁜짓을 하려고 할때는 자신이 신의 의지에 따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종교분쟁을 보면 그렇게 잔혹하게 전개되는 거 아닐까요?
신을 믿으면서도 신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 이익에 맞춰서 신을 끌고가니까요.
◆ 교회 밖에 구원없다 ◆
한자 敎會~救援~
라틴어 extra Ecclesiam nulla salus
영어 outside the Church no salvation
교회의 유일성을 표현하는 신학 격언, 모든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유일하고 보편적인 중개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의 신비체인 교회도 보편적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이론상 자명한 이 사실이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 ② 교회는 유일한 구원의 성사이므로 누구나 이 교회에 속해야 한다. ③ 그러나 이 교회가 구원의 제도로서는 한계가 있어서 모든 사람을 다 포섭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은 무의미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 신학 격언을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특히 이교(離敎)와 열교(裂敎) 현상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가 하나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내적 이유는 하느님의 의도와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교의 설립과 일치의 원리이신 성령의 작용에 있으며, 교부들은 교회의 유일성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이냐시오, 이레네오, 오리제네스, 치프리아노 등 교부들이 교회의 유일성을 표현하는 신학 격언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교회와 인간 각자의 구원의 문제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이 말을 하고 있다. 특히 니체아 공의회(325년) 이전 교부들은 배교자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객관적 제도와 주관적 개인의 구원을 구별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개인의 탓없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고 또 몸으로는 교회 안에 있으나 실제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다고 여겼다.
중세의 아벨라르, 토마스 기타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미 고의적 무지(無知)와 불가피한 무지의 경우를 구별하지만 순수한 이론에 불과하였다. 15~16세기에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이나 북아프리카 외에 수많은 인간들이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여파는 인간의 진리 인식이란 개인의 성의나 능력에 좌우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여건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선의(善意)의 오류, 또는 불가피한 무지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들의 구원문제가 신학적 파제로 등장하면서 ‘교회 밖에 구원없다’는 격언은 개인의 구원문제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구원의 기관인 제도로서의 교회에 해당시키려고 하였다. 17세기에는 선의의 오류가 교리문답에도 인정되었고 18~19세기에 팽창한 자유주의 또는 종교적 무관심주의(無關心主義)는 이 격언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교도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단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의의 오류 내지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6세는 무관심주의를 배격하였고 비오 9세는 공식문서(Singulari quadam, 1854)에서 처음으로 선의의 무지를 인정하였다. “사도적인 로마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으며 … 그러나 불가피하게 참된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느님 앞에 이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이치이다.” 비오 12세는 신비체 회칙에서 “무의식적 지향과 원의로 구세주의 신비체에 관련된 사람”을 지적하였고 피니(Feeney) 사건에 즈음하여 검사성의 훈령은 이것을 부연하였다. “누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구성원으로서 사실상(in re) 교회에 합체하지 아니한다 하여도 적어도 원의와 지향으로써(desiderio et voto) 교회와 합체해야 하며, 이 원의는 예비신자처럼 명시적인 것이 아니고 불가피한 무지의 경우에는 묵시적인 것이라도 가능하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서 교의헌장은 교회에 완전히 합체된 가톨릭 신자와, 불완전하게나마 교회에 결합된 그리스도 신자(갈라진 형제)와, 유일신에 대한 신앙으로 교회에 관련된 유태교도와 회교도의 구원 가능성을 가르치고,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모를지라도 양심적으로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교회헌장 14, 15, 16).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이 격언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치하여 있기 때문에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교회와 결합하여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교회헌장 14).
② 그리스도께서 가톨릭 교회를 세우신 것을 알면서 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거나 거기서 나가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용인할 수 없다(교회 헌장 14).
③ “교회 안에 완전히 결합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제도와 교회 안에 마련된 구원의 수단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보이는 교회조직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니, 즉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계제도와의 통교(通交)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교회헌장 14).
④ “그러나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교회헌장 14).
⑤ 자기 탓없이 교회에 완전히 결합하지 못한 자 중에 예비신자들은 그 신앙고백과 소망으로써 이미 교회의 자녀이다(교회헌장 14). 그러므로 완전하게 교회에 일치한 자만이 구원된다는 피니의 주장은 배척되어야 한다(검사성성 훈령).
⑥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동일한 신앙고백, 동일한 성사 동일한 교계 종속의 3조건 중 그 어느 하나나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갈라진 형제라고 보며 그들에게도 불가피한 무지를 전제로 하여 구원이 가능하다(교회헌장 15).
⑦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도 참 하느님을 예배하는 유태교인이나 회교도도 교회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구원이 가능하다(교회헌장 16).
⑧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참으로 참 하느님을 모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양심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도 구원은 가능하다(교회헌장 10). 물론 이 경우에도 하느님의 은총의 부여를 전제로 하고 가능한 것이다.
이상의 조항들은 성서의 가르침으로 뒷받침된다. 성서는 단순한 무지를 책하지 않고 고의적인 거부를 단죄한다. “나를 배척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요한 12:48).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25:41, 야고 2:14).
[참고문헌] 鄭夏權, 敎會論 II, 분도출판사, 1981.
[한겨레]
구원의 전제 조건이 믿음이냐, 선행이냐를 놓고, 대립해온 가톨릭과 개신교가 속속 교리적 합의에 도달하고 있다.
오는 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리는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선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 세계감리교협의회가 ‘의화(義化)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에 동참을 결의한다.
의화란 ‘어떻게 해야 의롭게 되는가’란 뜻으로, ‘구원의 조건’을 말한다. ‘인간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한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루터교의 주장이 서로 달라 신-구교는 ‘의화논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가톨릭과 루터교세계연맹은 지난 1999년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양쪽은 공동 선언에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오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 선행을 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는 교리에 합의했다. 그 선언은 “선행을 하라는 권고는 신앙을 실천하라는 권고”라고 했다.
이번에 가톨릭과 감리교 양쪽은 7년 전 가톨릭과 루터교 간 공동선언에 동참한다는 데 서명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톨릭과 다른 교리에 대해 이단으로 정죄해온 가톨릭은 19세기 후반부터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동방교회에 대한 지칭도 ‘이교자’에서 ‘갈라진 형제’로 바꾸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리적 합의는 교황청이 1960년 ‘그리스도교 일치사무국’을 설치한 이래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교리적 합의와는 상관없이 믿음과 선행을 둘러싼 구원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비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을 행했던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이 죽은 사람 등에 대한 구원의 문제가 딜레마로 남았다.
이런 구원관은 그리스도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일신앙을 가진 유대교와 이슬람 등 비그리스도교인들과 끝없는 불화와 갈등의 원천이 돼왔다. 믿음에 대한 교리적 강화는 내부의 결속을 강화시켜 교회 조직은 선교 등에서 큰 이점이 있지만 지상의 평화와 공동선에 대한 협조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때문이다. 더구나 ‘믿음’ 쪽을 가장 강조하는 미국 개신교 복음주의권인 부시 미국 대통령과 무슬림들이 충돌하고 있는 이라크, 유대교인 이스라엘과 이슬람인 팔레스타인 간 무력충돌이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지역 등 곳곳에서 종교적 배타성이 갈등에 일조하는 상황에서 배타적 교리를 넘어선 대안 마련은 시대적 요청이다.
개신교 신학계에서도 다른 견해들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감리교에선 변선환 감신대학장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가 이번에 감리교세계대회가 개최 장소이기도 한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 주도로 종교재판에 회부돼 출교된 적이 있다.
세계감리교대회에 초청받아 17일 방한한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구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며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확실한 교리”라면서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닌 양심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가''(註: "非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여부는 하느님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의 양심적 선택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부합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이라고 본다”면서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기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서>는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서 10장9절)고 돼 있다.
하지만 선행에 대한 강도 높은 표현이 더욱 많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라디아서 5장6절)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보서 2장 22절)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7장 16절)
이 구절들은 예수가 믿음과 선행은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사랑과 선행, 행위를 믿음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흐강님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상담>중에 “교회” 및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아래 요지의 글이 있어서, 이는 <신앙상담>이 아니라 <교리>적인 문제라 생각하여 올바른 이해를 구하고자 이곳에 옮겨서 질문을 드립니다.
(우선 해당 글을 함부로 인용하게 된 점을 양해바랍니다)
아래 글 중에 나와 있는 (1) <교회>에 대한 정의가 옳은 것이고, (2) <교회 밖에 구원 없다>라는 것이 과연 천주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가가 저의 질문의 요지입니다.
특히 <교회>를 “ ‘가견적교회’ 즉 ‘현세의 교회’를 ‘천상의 교회’의 한 부분이다” 라고 정의한 부분이 납득이 잘 가질 않습니다. “현세의 교회”를 지상교회라 볼 때, 지상교회는 천상교회를 指向하고 천상교회와 서로 “통공”을 한다는 것은 들었어도, 지상교회가 천상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금시초문이고, “교회”를 너무 확대해석하다보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좀 헷갈리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로 본인이 검색한 <교회>에 대한 검색 자료도 같이 올립니다.
많은 고견 부탁드립니다.
<신앙상담>에 올라있는 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 '교회'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공의회에서도 가르치고 있듯이 교회란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째, '가견적 교회'이고 둘째, '천상교회'입니다. 가견적교회는 현세의 교회이며 천상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가견적 교회에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양심과 하느님의 천상적 은총 덕분에 '신'의 존재를 믿고 착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산 사람들에게는 '천상교회'의 일원으로 보아 '구원의 문이 닫혀 있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 또한 잘못된 표현입니다.
비록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천상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도 가톨릭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하 생략==
소제님 / 말씀하신 신앙상담의 내용은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교회는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즉 천상의 교회로 나누고 가견적 교회는 현존하는 지상의 교회를 의미하고 이는 불완전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천상의 교회가 천국은 아닙니다.
즉 가견적 교회는 여러 교파와 여러시대의 신학과 신앙실천들이 다르지만 천상의 교회는 영적으로 존재하며 완전한 교회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에 의하면 가견적 교회에 속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천상의 교회에는 소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견적 교회는 불완전하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누가 구원 받은자인지 알 수 없지만 천상의 교회는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인겁니다.
가견적 교회는 천상의 교회의 일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통공은 가능합니다
천상의 교회는 가톨릭교회나 개신교나 동방교회와는 상관없는 개념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오직 유일한 보편교회는 가톨릭이라고 생각하니까 저런말을 하지만 실제 성서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생각한다면 천상의 교회는 지상의 교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왜 천상의 교회 이론이 나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미 성서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1. 하나님은 일반계시 즉 사물의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계시하셨다는겁니다.
2. 율법이 있는자에게는 율법이 심판이 되고 율법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의 양심이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3. 따라서 복음이나 율법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소관으로 구원받습니다. 이순신 장군 공자등등
4. 문제는 복음이 전파된 곳에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 헌장을 보더라도 이것은 명백하게 본인의 잘못에 해당이 됩니다.
복음을 듣고도 거역하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5.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야기는 가톨릭의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는 보조적 수단을 확대해석하여 나온 오류라고 봅니다.
즉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은 천상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6. 저는 가톨릭과 루터교가 합의하고 감리교도 동의한 의화 교리를 지지하고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올바른 의화교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합의문은 전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7. 선행이라는 것을 구원의 근거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 어디까지가 선행인가? 즉 구원의 기준이 되는 선행은 무엇인가? 어느정도 도달해야 구원받을 선행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며 기준이 있기는 한가?
교황이 선행으로 구원받는 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나. 선행을 행하는자가 구원을 받는다면 구태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할 필요가 있었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구원은 선물이고 이 것을 선물로 한것은 인간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인데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라. 교황청은 일반적인 길이 있고 특별한 길이 있는데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길이라고 예외적이라고 하는데 과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한 사건속에서 하나님이 예외적인 구원의 길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라는 문제와 함께 인간이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결국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으며 구원받을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마.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선행을 통하여 구원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교회 당국이 인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본인이 나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알 수 있을까요?
그럴경우 그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을 믿는것이 더 빠르고 쉬운길이 아닐까요
교회 당국은 어떻게 그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교회 [敎會, church]
그리스도교에서의 신앙 공동체.
본문
넓은 뜻으로 사용될 때는 같은 종교를 믿는 신자의 집단 또는 집회소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자로 결성된 단체(가시적인)를 말하는데, 이러한 용법 이외에도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맺어진 공동체(불가시적인)를 가리킨다.
[두산백과사전 및 naver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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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1 ◆
한자 敎會
라틴어 Ecclesia
영어 Church
1. 명칭: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야훼의 백성'(Qahal Yahwe)이라고 부른 것을 70인역 그리스성서가 '하느님의 백성'(ekklesia tou theou)이라고 번역하였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단체를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Ecclesia로 부른 것이 라틴어와 라틴계통 현대어의 어원이 되었다. 결국 교회란 하느님의 백성이란 뜻이다.
2.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교 신자단체가 출현한 것은 그리스도 기원후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경륜으로서 교회는 우주창조에서 부터 암시되고, 구약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준비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설립되고 세상종말에서 완성되는 신비이다(교회헌장 2). 그래서 교회의 기원을 논하자면 단순히 현세 교회의 출현만을 고려할 수 없고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의 실현으로서 교회 기원을 생각하게 된다.
== 중간 생략 ==
3. 교회의 본성 : 성서는 한 번도 교회가 무엇이라고 정의한 일이 없지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원, 건축, 목자와 양떼, 야훼의 짝이라는 표현과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교회를 묘사하였고,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였다.
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 구약의 백성이 계약으로 야훼께 맺어진 백성인 것처럼 하느님의 모든 구원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니(2고린 1:20)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은 그리스도의 성혈(1고린 11:25)과 성령의 힘(2고린 3:6) 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백성이다(1베드 2:9).
== 중간 생략 == .
②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만으로는 교회의 신비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갈라 3:26-29).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세례로써 예수와 일치한 모든 사람은 서로 한 몸이며(갈라 3:26-29)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우리는 한 몸이고(1고린 10:16-17) 그리스도의 지체이다(1고린 6:15-17).
== 이하 생략 ==
[굿뉴스 홈피 가톨릭백과사전]
결국 종교와 과학은 사실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 한계를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것이고 과학은 사실을 사실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종교는 과학을 용납하지 않았고 과학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대립적인 관계였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천주교의 경우 교황 비오 12세는 "진리와 진리는 상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성경과 진화론의 조화를 모색했고,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을 인정한 것은 종교와 과학의 타협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대립이 아닌 상호보완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종교는 과학을 용납하지 않았고 과학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대립적인 관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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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순화나 일반화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서구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을 기독교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긍정적 영향을 받기도 해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은 최근 과학사의 유력한 학설들 중 하나입니다. 뉴턴, 다윈, 맥스웰, 멘델, 르메트르 등등 쟁쟁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쟁쟁하지 않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적잖은 수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쉽구요.
사실 17세기 과학혁명 자체가 기독교적인 마인드의 산물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도 '자명한 진리'를 일깨워주기 위한 신의 손길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뉴턴 등 영국의 과학자들 중 상당수가 17세기 중반에 세상이 망하고 예수의 왕국이 도래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죠.
특히 17세기의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 신의 지도를 받아서, 또는 신의 왕국이 오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서 과학적 탐구에 빠져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력 이론이 신플라톤주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도 이제는 거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고요.
이러한 대립항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면 단순ㅘ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계몽사상가 중 많은 수가 기독교인이었으며 심지어는 수도사와 성직자까지도 계몽사상에 심취했다는 점도 근 20년 정도의 역사 연구에서 부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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