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가 던진 떡밥은 이전 직업을 통해 본 대통령들의 스타일 연구였는데 엉뚱한 곳으로 불씨가 붙었군요. 하기야 전 국민에게 헌재의 위력을 알린 수도 이전 위헌 판결이 더 중요한 떡밥이라는 점엔 동의합니다만...

일단 문외한으로서 헌재의 판결에 대해 몇가지 정리해보겠습니다.

1. 수도가 과연 헌법적 사안이냐.
예. 전 헌법적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85개국에서 헌법에 수도를 명문화한 점도 그렇고 정서적, 문화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숭례문 화재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애통해했던 걸 기억해보세요. 한 나라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그만큼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성과 문화적 중요성에서 역사적 의미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의 여부를 떠나 헌재가 경국 대전을 들고 온 것은 타당하지요. 당장 통일후 독일의 수도 이전이 그렇습니다. 수십년간 본이 수도 역할을 했지만 그건 임시였을 뿐, 역사적으로 베를린이 수도였다는 상징성과 역사성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이지요. 즉 독일의 경우 '관습적'으로 베를린이 수도였기에 이전을 추진했던 겁니다.

물론 여기엔 두가지 반론이 따를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헌법적 사안이라는 것은 논쟁 대상이다. 따라서 성문화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불문화되어있던 우리나라에서까지 헌법적 사안이라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두번째는 그 중요성은 인정하며 따라서 관습적으로 '헌법적 사안'이라는 것까지도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관습은 어디까지나 관습인 바, 관습헌법의 개정은 반드시 성문 헌법의 예를 따를 필요는 없다. 즉, 관습은 다른 관습으로 대체될 수 있으므로 이의 확인을 위해 국민투표를 통한 개정으로 충분하다.

이 두가지 반론이 사실은 수도 이전 위헌의 핵심 쟁점이라 봅니다. 자, 그러므로 나머지 쟁점을 통해 이 두가지 반론을 다뤄보겠습니다.

2. 관습헌법이라니, 왠 듣보잡이냐?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헌법학회에서도 관습헌법 자체는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뀐 걸로 압니다. 가령 프랑스에서도 100여건 이상 관습헌법을 적용하여 위헌 판정이 나왔다는군요. 모든 법엔 관습법이 적용되기 마련이고 헌법도 예외가 아니지요.

3. 그러면 여성이 집안일한다, 성매매도 오래됐다 등도 관습헌법이겠네.
전 이런 식의 비아냥은, 아고라 수준에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관습이 바로 관습법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며 또 규정된다 할지라도 그 수준이 다릅니다. 즉 관습헌법이 인정되는 경우는 헌법적 사안일 때만 그렇습니다. 또, 일반 법률에서 인정되는 것도 성문화되지 않은 경우로 한정됩니다. 자꾸 이런 이야기 꺼내며 헌재 비판하는건, 이쪽 진영 수준이 한심하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습니다.

4. 성문화되지 않은 전제에서 과연 수도 이전이 헌법적 사안이냐.
전 이 문제는 논쟁거리라고 봅니다. 다만 그 논쟁을 할 수 있는 주체는 법률 전문가들이겠지요. 제가 '논쟁거리'라고 한 점에 주목해주세요. 즉 이를 관습적으로 헌법적 사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답을 알 기 어려운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므로 일반인들이 헌재를 비아냥거리며 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고라 수준에서 떠드는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만.

다만, 한가지. 헌재는 '수도' 이전이 위헌이라 판결했지, 행정부처의 이전이 위헌이라 판결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세요. 헌재는 국가 구성의 중요 사안으로서 수도 이전이 헌법적 사안이라 보았을 뿐, 행정부처의 이전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 및 입법부의 고유 권한이라 본 것입니다. 따라서 헌재 판결을 놓고 서울의 독점을 공고화하려는 음모로 비난하는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청와대나 대법원, 국회가봐야 행정부처 이전만큼 경제적 파장이 있겠습니까? 물론 여기엔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수도 이전이고 어디까지가 행정부처 이전이냐? 그 경계가 모호하지 않냐?'란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반론은 인정하지만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선 살짝 빗겨나므로 생략. (솔직히 제가 어떻게 알겠냐구요.)

5. 그렇다고해도 관습은 또다른 관습으로 대체하여 수정 가능하니 국민투표로 갈음해도 되지 않느냐.
예. 이제야 밝히자면 저도 이 부분에 많이 동의합니다. 심정적으로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도 그런지는 제 능력 밖입니다만.

다만,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국민투표로 했을 경우 그 후유증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령 참여정부 당시 이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에 붙였으면 - 장담합니다만 압도적 표차로 부결돼었을 것이며 그 순간 참여정부는 파산으로, 노무현은 하야할 지경에 몰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붙이면요? 역시 부결될 겁니다. 행정 부처 이전이 아니라 '수도 이전'을 놓고 국민투표로 붙인다면 말이죠.

까짓, 화끈하게 끝내자구요? 장담하건대 그 후유증은 상상초월입니다. 부결되는 순간 행정부처 이전은 물론이요, 숫제 지금 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수정안조차 추진할 동력을 잃을 겁니다. 당연히 충청도에선 폭동 나구요, 그 외 지역에선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부치며 무시하려 들 테니 가히 국민 분열 양상이 극점으로 치솟겠죠. 진보개혁 진영이요? 장담합니다.

파.산.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한 주범으로 몰려 가히 초토화될 겁니다.

전 사실 지금도 궁금합니다. 노무현이 선거 유세에서 행정 부처 이전을 공약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커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반신 반의하면서도, '음, 지역 균형을 내세우니 부처 몇개는 이전할 수 있지.' 정도였지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농담처럼 '다 내려 보냅시다'하면서 수도 이전을 공약해 버린 겁니다.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미 조짐이 있었죠. 수도 이전을 장난처럼 공약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습니다. 민주당은 수습하느라 정신없었죠. 전 사실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때 장난처럼 내걸었을 때 노무현은 정말로 무슨 생각하면서 걸었는지. 재미 본 김에 브레이크가 고장났던 건지, 아니면 이 모든 혼란과 논란을 계산했지만 정말로 수백년간 이어온 지배 체제 교체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했던 것인지.

자..... 많은 분들이 제 글을 비판하셨지만- 미안한 말입나다만- 사실 제가 이야기하려던 핵심을 비껴가셨다고 봅니다. 제가 말하려던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는 법과 시스템이 주도하는 사회다. 따라서 진보 개혁 진영은 단순한 정책이나 이념이 아니라 법과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고 장악할 것인가에 대한 비젼을 가져야 한다."

더 미안한 말을 하겠습니다. 전 헌재를 놓고 '투표로 뽑힌 대통령이 결정하고 국회가 추인했는데 감히 헌재가 브레이크를 거는건 말이 안된다'는 주장, 미안하지만 달라진 시대를 모른채 박정희 이래의 경험을 반영한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박정희때 봅시다. 헌법? 그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헌법 자체도 박정희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나마도 긴급조치 한방에 기능 정지되는 거였지요. 두환이, 태우요? 애시당초 총으로 권력 쥔 애들입니다. 따라서 당시에도 권력은 헌법이 아니라 총에서 나왔습니다.

저 셋 다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즉, 헌법보다 대통령이 결심하면 국회와 국민이 따라야 했던, 아니 따르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시댑니다. 

이 점은 디제이와 영삼 때도 비슷했습니다. 헌재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요. 그렇지만 민주화 시대로 접어든 만큼 슬슬 조짐을 보였습니다. 군 가산점 위헌 판결이 대표적이었지요. 그리고 탈권위 시대라는- 전 이게 꼭 좋은건지는 의문이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서 헌재의 위상이 부각됩니다. 대통령이든 국회든 헌법을 무시할 수 없다는, 숨어있던 사실이 부각된 것입니다. 

이건 아주 역설적입니다. 노무현은 대통령 개인의 권위보다 법치와 시스템을 내걸었지요. 그런 그가 바로 법치와 시스템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법치와 시스템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장단점이 존재하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건 대통령 개인에 따라 국가 운영이 마구 오르락 내리락하는 국가보다는 시스템 중심으로 굴러가는 국가가 더 고도화된 국가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국가 자체가 선진화, 고도화 될 수록 법치와 시스템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헌재는 가진 자의 편이다, 보수다, 강남 살아 저런다는 식의 비난은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고라는 제쳐두고- 지양해야 합니다. 저도 수도 이전 위헌 직후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뒤 헌재의 논리를 살피면 살필 수록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한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전 개혁 진영이 한국 보수 만만히 보는 거 - 헌재는 당연히 체제 유지를 위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한계를 갖습니다- 언젠가 큰 코 다칠 거라 봅니다. 당장 미디어 법 판결에서 드러났죠? 헌재는 원래 저래서 당연히 한나라당 손들어 줄거야라는 선입견으로, 판결 나자마자 맹렬히 헌재 비난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야 헌재 취지는 '재의결'이란 걸 알았지만 이미 버스 지나간 뒤가 되버렸죠. 아래와 같은 기사를 읽고도 헌재를 저쪽 편이라 무조건 간주하는 게 최선이라는 태도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손해인지는 모른다면, 전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이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헌재를 모조건 옹호하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헌재는 싫든 좋든 상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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