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채동욱 사건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12/2013091200110.html?news_HeadRel

 

채동욱의 혼외 아들로 지목된 아동과 전혀 무관한 사진이 유포되고 상식을 벗어난 과도한 신상 털기가 온라인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를 유발한 당사자가 마치 먼 산 바라보듯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 조선일보 특유의 아니면 말고식 보도의 전형이다.

 

하지만 어쨌든 채동욱 혼외자 의혹 관련 보도가 불러온 부작용을 보도했다는 것은 조선일보가 이 사건으로부터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오늘자 헤드라인은 현대자동차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공격하는 등 분위기를 바꾸는 방향을 잡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미 채동욱 측에 (정정보도 청구나 민형사상 소송 없이) 원만하게 사건을 마무리하자는 딜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혼외자 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단정적인 판단을 내릴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이번 기사가 언론보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언론의 역할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이 두 가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갖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시정의 장삼이사들도 얼마든지 사실을 말할 수 있다.

 

가령 대한민국의 거대언론 사주 아무개가 혼외자를 수십 명 두었고 어떤 연예인을 농락해서 자살하게 만들었다더라하는 얘기는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보도가 될 수 없다. 입증할 수 없으면 보도하면 안된다. 최소한 입증할 가능성이 있고, 그런 입증을 위해서 합리적인 노력을 했다는 증거라도 뒷받침되어야 보도기사라는 기본적인 자격요건을 갖추게 된다.

 

조선일보의 이번 채동욱 혼외자 의혹 보도는 이런 요건을 어느 것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 의혹의 당사자라는 채동욱과 내연녀라는 임씨 여인 누구에게도 기본적인 사실 확인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조선일보의 이번 기사는 보도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설혹 조선일보가 제기한 의혹이 100%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는 얘기다. 그 기사는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최소한 데스크선에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작문에 불과하다.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라며 보도한 내용 가운데 어느 하나도 카더라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그나마 조선일보의 보도 가운데 유일하게 카더라를 넘어선 근거자료는 바로 내연녀라는 임 여인이 보낸 편지였다. 임 여인에게 통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밝힌 조선일보가 왜 그 임 여인이 직접 보낸 편지의 내용은 (한겨레신문이 보도하기 전에는) 언급하지 않았을까? 자신들도 그 편지를 받았다면서 말이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이 사건을 사실 규명의 관점보다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진행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 거대 언론사로서 공정하지 못한 정치적 목적과 사적인 이익을 위해 보도기능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 대한민국 언론지형의 변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누려온 영향력의 근본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에게 채동욱 혼외자 의혹의 소스를 제공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거론된다. 대표적인 것이 박지원의 입을 통해서 구체화된, ‘국정원의 정국돌파용이라는 의혹이다. 조선일보 보도의 근거라는 것이 대부분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개인의 출입국 관련기록이나 학적기록부 등이라는 점에서 이런 의혹은 상당한 근거를 가진다.

 

하지만 배후세력의 의도와 별개로 조선일보가 이번 보도를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과거 김영삼 시절 장차관 정도는 언제든 목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었던이른바 밤의 대통령으로서의 영광과 영향력의 회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보도로 채동욱이 낙마할 경우 조선일보의 그런 목표는 상당히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인사청문회에서 파도 파도 미담밖에 나오는 것이 없더라는 말을 들은 검찰총장, 최초로 검찰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 검찰총장, 막강한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을 정면으로 수사하는 검찰총장의 목을 뎅강 자르는 언론이라면 대한민국 고위공무원 어느 누가 그 앞에서 오금이 저리지 않겠는가?

 

고위공무원의 오금을 저리게 할 수 있다면 그 고위공무원의 재량권 안에 있는 갖가지 이권과 특혜로 가는 길은 김영삼의 좌우명이라는 대도무문이나 마찬가지다(그 대도무문이 大道無門인지 아니면 大盜無門인지 어느 쪽일지라도 큰 차이는 없다). 종이신문의 막막한 미래에 더해 종편방송의 투자로 먹거리 확보가 시급한 조선일보로서는 군침이 당기는 거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런 식의 계산을 조선일보가 정말 했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거대한 착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를 마무리한 후 조선일보가 이번 보도의 실질적인 책임자(그가 누가 됐건)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도 불문가지다. 왜 그런가?

 

밤의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밤에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대부분을 틀어쥐고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권력 형태이다. , 권력 자체가 국민 대다수의 합의와 무관하게 창출되고, 권력의 운용이나 정보의 유통이 극소수의 손에 좌우될 때 먹혀드는 방식이라는 얘기이다. 군부정권이 국민들의 선거와 무관하게 대통령을 만들어내고, 극소수 언론사를 통해서만 중요한 정보가 전달 유통되고 권력의 실제 운용이 극도로 폐쇄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체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형태이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래서 군사독재 정권의 향배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박정희정권 시절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의 영향력에 한참 못 미치는 2등 신문이었다. 이때는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권의 주역들이 국가 운영에 관한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언론의 존재 자체가 미미했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조선일보 같은 언론의 존재 이유였고 오히려 동아일보처럼 가끔 반항하는 언론이 좀더 신경을 써야 하는 존재였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극적으로 확대되고, 이른바 일등신문이랍시고 거드름을 피게 된 것은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들어서였다. 전두환정권은 광주학살의 원죄 등 출범 자체가 정통성을 갖기 어려웠고 박정희정권에 비해 정권의 기반 자체가 취약했다. 그러한 권력의 취약점을 메우는 도구로서 언론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그러한 군사정권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언론이었다. 철권통치 권력과의 밀착을 통해 조선일보는 일등신문으로서의 영향력을 확실히 다질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는 막강한 구매력을 갖게 된 영남 출신 중상류층에 대한 정치이념적 영향력을 통해 조선일보가 한국의 자본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더욱 강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영향력이 외적으로 극대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이다. 권위주의 체제였던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처럼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권력의 행사나 정보의 유통이 불가능해졌고, 조선일보처럼 비폭력적인 여론 통제력과 사상적 권위를 가진 민간기구의 협조가 매우 중요해졌다. 군사정권이라는 유일권력이 사라지면서 사회 각 분야 이익집단들의 목소리와 자율권이 강해졌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 같은 이념적 도구의 협력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김영삼이 대통령선거 다음날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의 집에서 부부동반으로 당선 축하만찬을 가졌던 것은 당시 조선일보가 국가권력의 행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준다. 특히 김기춘의 초원복집 발언으로 선거판세가 불리해졌을 때 조선일보의 막무가내식 전폭적인 지원사격은 김영삼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김영삼정권의 한완상 통일부총리가 조선일보의 공격으로 사임해야 했던 것은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의 하나였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모든 공직자 그리고 민간인들이 조선일보의 영향력 앞에서 경악했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폭식 자세를 강하게 드러냈다.

 

정권의 성격은 바뀌었는데, 기존의 정권을 유지하던 강압적인 프로세스는 여전히 유효했고, 사회 각 분야의 자율성과 개방화는 점차 진전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동원해서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사회적 가치와 목표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과도기적 체제였고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권력을 운용하는 형식은 보다 자율적이고 개방적이지만 그 권력이 추구하는 가치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그것과 일란성 쌍둥이였다. 이것이 조선일보의 비극이다. 점차 열린 사회구조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면서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탄탄한 독자성과 결정권을 갖게 된 전문가집단들과 조선일보식 언론깡패 행태는 장기적으로 공존하기 어려웠다.

 

90년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던 안티조선 운동은 이러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안티조선 운동이 특별히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각 분야의 여론주도층에게 조선일보가 행사해왔던 절대적인 이념적 영향력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에는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균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조선일보 역시 이러한 상황변화를 어느 정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과 노무현 등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을 만드는 신문조선일보의 약발이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두 명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조선일보가 과거처럼 홀딱 벗고 설치는식의 선거개입을 자제했던 것이 이러한 반성의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번 채동욱 사건은 그러한 반성이 일시적인 전술적 후퇴였고 조선일보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일보는 역시 대통령을 만드는 신문, 밤의 대통령이라는 위상을 통해서만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기본적인 존재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그런 시도는 애초부터 한계가 뻔했다. 이미 시대가 변한 것이다. 조선일보의 시도가 성공하려면 우선 정보의 유통경로가 과거처럼 폐쇄되고 제한적이어야 했다. 인터넷의 존재는 둘째 치고라도 우군(?)이랄 수 있는 동아 중앙 등 보수지들조차 이번 조선일보의 보도에 대해서는 썩 동조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선일보가 의제를 던지면 다른 언론들이 따라오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동아일보는 벌써 <채널A>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조선일보를 공격하는 스탠스로 전환했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03262

 

무엇보다도 조선일보의 이번 시도가 성공해서 조선일보라는 일개 언론이 고위공무원 등 이 나라 각계각층의 리더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상황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본적이 호남 출신인 채동욱을 어떻게든 쓰러트려야 속이 시원하다는 정신병자 무리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무리들은 조선일보의 시도가 성공했을 때 그 칼날이 바로 자신들을 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 이해를 못한다).

 

이런 분위기는 청와대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처럼 조선일보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정국을 운영하고 싶어할까? 박정희정권 시절에 조선일보가 정권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조아렸는지 박근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조선일보를 이용해 채동욱을 제압하고,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구상이 청와대 내부에서 나왔다면 그런 구상을 발의하고 추진한 참모들 역시 이번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고 본다. 아마 청와대에 오래 남아있기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 구닥다리 조선일보를 구닥다리 방식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무리들도 아마 그 옛날 김영삼 시절에 조선일보와 함께 배가 터지도록 단물을 빨아댔던 구닥다리들일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자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종북세력 척결도 좋고, 사이비 좌파들 폭로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허접한 종북세력이나 좌파들보다 더 허접한 도덕성이나 마인드로 대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거야말로 정말 진흙탕에서 물고뜯는 똥개들 싸움밖에 더 되겠나? 시대는 변했는데, 왜 흘러간 시냇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조선일보가 저 멀리 흘러가버린 시냇물이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이해하기 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