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의 고등학교 교과서 <한국사> 때문에 말이 많다. 교학사의 교과서는 보수적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주로 진보 진영에서 여러 가지로 비판하고 있다.

 

명성황후-민비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견됐습니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낮춰 부르는가 하면, 사실과 다른 내용도 적혀 있었습니다.

명성황후를 민비로교학사 교과서 곳곳 오류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972517

 

도 의원은 "교학사는 시해에 앞장 선 낭인의 글을 싣는 것도 모자라 이 낭인조차도 '민후'(민 황후)라고 표현한 제목을 '민비'라고 고쳐 놨다"고 비판했다.

'중공·민비' 정부 금지용어,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5504&CMPT_CD=P0001

 

 

 

명성황후 또는 민비의 본명은 민자영이라고 한다.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 25(양력 11 17) ~ 1895년 음력 8 20(양력 10 8))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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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민자영

http://ko.wikipedia.org/wiki/%EB%AA%85%EC%84%B1%ED%99%A9%ED%9B%84

 

 

 

호칭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다투는 이유는 호칭에 사상이 약간이라도 녹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지배자(좋은 말로 하면 지도자)에 대한 시각.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다. 그리고 지배 계급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한다. 명성황후 또는 명성태황후는 지배 계급의 구성원이었던 민자영을 지극히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나는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 민족주의.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엘스,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레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안토니오 그람시 같이 내가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요제프 스탈린, 김일성처럼 내가 무척 싫어하는 공산주의자들(적어도 자칭 공산주의자이긴 했다)은 대체로 민족주의적이었다. 사실 그들은 국수주의적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자기 민족의 것을 치켜세우려고 한다. 명성황후라는 명칭은 그런 경향을 반영하기도 한다.

 

사실 명성황후라는 명칭은 고종이 스스로 황제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왕비에서 황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 코미디다. 다 망해가는 조그만 나라의 왕 주제에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남들 보기에 정말 민망한 일이다. 민족주의에 빠진 한국 사람의 눈에만 멋있어 보일 것 같다.

 

물론 사실상 왕정인 나라의 이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도 완전 코미디지만 이것은 현재진행형인 나라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불러줄 수밖에 없다. “조선독재주의김씨왕국”이라고 부르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에 적대적인 내가 역사적 인물인 민자영을 굳이 명성황후라고 부를 이유는 없어 보인다. 게다가 “왕비 민자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비”나 “명성황후”보다는 덜 헷갈리지 않을까?

 

 

 

셋째, 여성주의.

 

한국의 여자들은 이름 없이 살 때가 많다. 여전히 여자는 “누구 엄마”, “누구의 아내”로 통한다.

 

민비도 따지고 보면 “고종의 아내라는 뜻이다. 물론 고종이 왕이었기 때문에 고종의 아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고종의 아내라는 점은 알려주어야 한다. 민자영에 대해 다룰 때 맨 앞부분에서 “고종의 왕비 민자영”이라고 알려주고 그 이후에는 “왕비 민자영” 또는 “민자영”이라고 부르면 여성주의자들이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론적 문제에서 여성주의(feminism)에 매우 적대적이지만 “여자가 이름 없이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한다. 누구의 아내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이기도 했던 민자영에 대해 조명하기 위해서는 “민자영”이라고 이름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민자영이 바람직하게 살았든 싸가지 없게 살았든 그는 인간 민자영이었다. 단지 누구의 아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넷째, 평등.

 

나는 대통령과 대통령의 아내부터 맨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되도록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좋다. 호칭도 되도록 평등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민자영이 살던 시절의 최하층민의 호칭과 최고위층의 호칭을 되도록 평등하게 통일했으면 한다.

 

이런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는 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자칭 공산주의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는 그냥 이름을 부르고 누구는 “명성황후”라고 치켜세우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평등도 못 해 주나?

 

 

 

진보라면 보수보다 왕정과 지배 계급과 민족주의에 상대적으로 더 적대적이고, 여성주의(여기서는 이론이 아니라 이상만 따져보자)에 상대적으로 더 호의적이고, 평등이라는 이상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명성황후보다는 “고종의 왕비 민자영” 또는 “왕비 민자영” 또는 “민자영”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진보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진보의 편이라는 사람들이 “명성황후라는 호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나는 도통 이해가 안 된다.

 

진보 진영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인 나만큼 지배 계급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왕정을 조롱하고, 민족주의를 싫어하고, 여성주의자들의 이상에 공감하고, 평등을 애지중지해 줄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소망이 있긴 하지만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정도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하다. 우리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민족의 계급 질서에서 꼭대기(또는 꼭대기에서 두 번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진보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덕하

201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