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민자영(민비)을 명성황후로 표기하지 않고 민비로 표기했다고 비난한 SBS(기자)에 대해 제가 그 역사인식의 졸렬함과 무지함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더니 아크로의 주류 논객들의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http://theacro.com/zbxe/913267#25


1. 인수대비, 혜경궁 홍씨라고 부르거나 표기하면 문제가 되나요?

명성왕후로 꼭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묘호를 받거나 추존된 칭호를 역사서에 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인수대비는 소혜왕후로, 혜경궁 홍씨는 헌경왕후로 부르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우리 역사교과서나 역사서에는 인수대비, 혜경궁 홍씨로 쓰고 있는데 이것도 잘못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사도세자는 장조로, 이하응은 흥선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장조나 대원왕으로 역사교과서에 표기해야 합니까?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이은’은 반드시 ‘황태자 이은‘으로 표기해야 하나요? 순종은 대한제국의 최후의 황제인데 우리는 ’조선왕조 27대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고 ‘순종 황제’라고 꼭 쓰야 합니까?


2.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게도 꼭 대통령을 붙여야 하나요?

아크로의 어느 회원은 전두환이 5.18의 악행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역사서에는 전두환이라 표기하지 않고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쓰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관직을 꼭 붙여야 한다는 허접한 역사인식에 참 어이가 없어서 그 땐 반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께 되묻지요. 현재 발행된 검정 역사교과서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표기된 서술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학사 역사교과서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표기된 것이 있나 없나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발행된 역사교과서 8종과 교학사 역사교과서 모두에는 대통령이라는 호칭 없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도 함께 표기하고 있죠.


3. 민비(민자영), 이승만, 박정희로 표기하는 교과서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

기존 8종의 역사교과서에는 민비를 ‘명성황후’로만 표기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교과서에 민비, 이승만, 박정희로 표기되어 나오는 교과서가 저는 오히려 객관적이며 중립적이고 교과서로서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SBS 주장대로 명성황후로만 표기하고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정희로 표기했다면 이것이 오히려 객관적이지 못하고 형평성을 결여한 서술이라고 봅니다. 물론 민비(민자영)을 좋게 평가하고 이승만, 박정희는 부정적으로 보아 명성황후, 이승만, 박정희로 표기한 그 서술자의 시각이나 역사관에 대해 존중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서술을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 민비, 이승만, 박정희로 표기한 역사교과서에 대해 ‘명성황후’로 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4. 조선왕조실록에도 민씨, 왕후 민씨라고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민자영에 대해 민씨, 왕후 민씨, 명성왕후, 명성황후, 폐서인 민씨 등 다양한 호칭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역사서에 민자영을 ‘명성황후’만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명성황후로 꼭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설명 좀 해 주세요.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B%AA%85%EC%84%B1%ED%99%A9%ED%9B%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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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자영을 꼭 ‘명성황후’라 불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민자영을 민비라 부르든, 왕후 민씨라 부르든, 명성왕후로 부르든, 명성황후로 부르든 왜 시비를 거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민자영의 행적을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민자영이나 민비로 부를 것이고, 민자영의 후손이나 민자영의 덕을 본 사람이나 민자영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명성황후로 부르겠지요. 명성황후로 불렀다고 시비하지 않듯이 민자영이나 민비라고 불렀다고 시비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닌가요?

민비라는 칭호가 일제가 명성황후를 격하하기 위해 불렀다는 속설은 근거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설사 일제가 그런 의도로 불렀든 말든, 우리가 민자영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호칭을 그에 걸맞게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됩니까? 일제에 의해, 일본인에 의해 죽었다고 해서 살인자도 애국자나 독립투사로 불러야 하나요?


6. 조선왕조실록은 실제의 역사를 그대로 기술했나

이번 논쟁을 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 보았는데, 민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보고 어이가 없더군요. 조선왕조실록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는지에 대해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물론 조선왕족실록이 모든 사실을 100%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민비에 대한 기술을 보고는 그 신뢰도가 곤두박질쳤습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이 민비(명성황후)에 대해 기술한 내용입니다.


황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행동하는 것이 떳떳하였으며 과격하게 말하거나 웃는 일이 없었다. 처녀들이 꽃을 꺾어서 벌레를 희롱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벌레들이 새끼를 부리고 숨쉬게 하고 잘 기르는 것은 너희 부모가 너희를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순간공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심오한 뜻의 어려운 것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조목조목 통달하였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상한 사물이라도 한 번만 듣거나 보면 빠짐없이 모두 알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 정사에 대한 득실(得失)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았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 혹은 《사승(史乘)》이나 《보감(寶鑑)》에 실려 있지 않은 것까지도 황후는 능히 말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정의 견문이 본래 있었기 때문이니 다른 집은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왕비(王妃)의 자리에 올라서 도운 것이 많은 것은 평상시에 공부한 힘이다. 9세 때 순간공의 초상을 당해 곡읍(哭泣)의 초상 범절은 마치 성인(成人)과 다름없었다. 염할 때에 집안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여 잠깐 피할 것을 권하자 정색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남의 지극한 인정을 빼앗으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양례(襄禮) 때에도 일을 끝마치고 곡을 실컷 한 다음에야 물러갔다. 부부인(府夫人)의 초상 때에도 장례와 관련한 모든 자재들을 집안에서 마련하였고 도가 넘도록 슬퍼하였으며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초상 때에도 마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이 슬퍼하였다. 황후의 효성과 우애는 대체로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을축년(1865)에 안국동(安國洞) 사제에서 꿈을 꾸었는데 인현 성모가 옥규(玉圭) 하나를 주면서 하교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고 하였다. 부부인의 꿈도 역시 같았다. 성모가 하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크게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가묘(家廟) 앞에 소나무가 한 그루 쓰러져 있었는데 이 해에 묵은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났고 옥매화가 다시 피었다. 황후의 집은 바로 인현 성모의 집이다. 대청이 있었는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하였다. 옛날 우리 영조(英祖)가 여기에 와서 우러러보고 절한 다음 친필로 현판을 써서 성모가 일찍이 있던 곳에다 걸어놓았다. 덕 있는 가문에 경사가 나고 상서로움을 보여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병인년(1866)에 선발되어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등의 책을 공부하는데 밤이 깊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천성(天性)이었다.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왕비로 책봉되고 다음 날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왕후(王后)가 입궁하여 우리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지성으로 섬겼고 크고 작은 일을 환히 알아서 반드시 먼저 문의한 다음 그 의견대로 하였다. 성모가 늘 말하기를, ‘곤전(坤殿)은 효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성모가 나이 많아지자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것 외에도 일상생활과 접대하는 절차를 반드시 적절하게 하였다.

경인년(1890) 환후(患候) 때에도 황후가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픈 부위를 손으로 안마하였다. 성모가 그의 수고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돌아가 쉬라고 말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침전(寢殿)의 탕제(湯劑)와 수라(水剌)를 황후가 권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면 들지 않았다. 때문에 올리는 시간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성모가 손을 잡고 하교하기를, ‘나는 늙고 또 병이 심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은 오직 백성들과 나라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있고 안의 일에 대해서는 곤전에게 부탁했으니 내가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성모의 초상을 당하자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일을 반드시 효성스럽게 하였고 궤전(饋奠)을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다. 또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더없이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힘썼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B%AA%85%EC%84%B1%ED%99%A9%ED%9B%84


황현의 매천야록의 민자영(민비)의 행적과 위 조선왕조실록의 명성황후의 모습 중에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울까요?


7. ‘데만버’님의 글을 링크하니 참고로 읽어 보세요.

<명성황후 민자영을 민비로 부를 자유를 허하라>

http://blog.naver.com/athina?Redirect=Log&logNo=40196974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