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안철수와 최장집의 결별이라는 사건에 맞추어 생각나는 점이 있어 한마디 풀어볼까합니다.

시대흐름과 동떨어진 과거의 이념을 아직도 신성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옛말에도 있는데 이는 환경이 변화하면 그 변화된 환경에 맞춰서 모든 사물들이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물뿐만아니라 사상이나 종교, 문화도 나라를 건너 들어보면 그 풍토에 맞게 변할수 밖에 없는게 세상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도 좀 관찰해보면 묘한 일련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종교나 이념들은 대체적으로 교조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예가 조선시대 성리학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조선을 지배하는 지배사상으로 성리학이 자리잡게 되면서 교범의 한자한자까지도 그의미를 씹어가며 탐닉하게되면서 점차 교조적으로 변해가게 되었는데 제사하는 방식이라던지 매니아에게나 의미를 가질만한 단순한 문자해석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서로간의 죽여야만하는 투쟁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면 조선의 성리학이 아니라 성리학의 조선이었다고해도 과연이 아니었을 정도로 성리학이 조선을 잡아 먹었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되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해방공간에서의 좌우익의 대립, 그리고 기독교 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수준의 전도와 같은 이성보다는 신념이 우선시되어 글자하나하나에 목메게 되는 한국에서의 역사가 오래되면 될수록 교조주의로의 변이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상기될 만한 것으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사회 문제인 것입니다. 

위와 같은 맥락으로 486 운동권이 가지고있는 노동개념도 얼마나 교조주의에서 해답되어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들고 나왔을때의 노동이란 개념이 자본주의아래 핍박받고 인권을 무시당하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인간애에서 비롯하여 어떻게 인권을 신장시킬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에서 들고 나온 것인데 그래서 그 시대흐름에 맞춰진 문제해결을 고민해서 나온 사상인데 시간이 상당기간 지난 지금 상황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스의 시대 관점에서 씌여진 노동개념에 아직도 얽매여 그것을 관철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리학에 얽매여 교조적으로 흐르게 되면서 시대흐름을 놓쳐버린 조선의 고루한 선비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든 완전하지 않은 이상 그 사상이 나온 시대의 환경을 개선하기위해 나온 시도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그 시대에서 먹혔던 사상이 다른 공간이나 시대에서 그대로 적용될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무모함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환경이 달라진 것에 맞추어 유연하게 사상도 맞춰 변해가야 할진데 80년대 운동권들의 마인드가 과연 얼마나 교조적인것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21세기에 맞춰 따라 변화했을지 의문이 갑니다. 중공도 변화해서 서방보다 더한 자본주의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에서의 변화하는 성격과 불변성격을 구분할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운동권 스스로 노동의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불변 성격과 가변성격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변성격은 어떻게 현실에 맞춰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대중들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현실을 바꿀수 있다라는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면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지지율을 높이는데 애로사항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국내 운동권은 너무 우물안의 개구리로 오랫동안 안주해와서 세계흐름을 따라잡는데 실패한 그래서 현실의 문제점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비판적으로 말할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한마디로 화석화된 유물로 전락했다라는 인상이고 변화무쌍한 현실의 문제점을 제대로 해결해 나갈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회의가 드는 존재가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이제 본론이네요.
나는 현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동자의 권익확보가 아니라 차별의 고착화로 봅니다.

나는 노동에서도 차별을 봅니다. 일반 노동자들과 귀족노조와의 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귀족노조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라하고 사용자에게 고함치지만 귀족노조의 관심은 일반 노동자에게까지 미치지 않습니다. 같은 노동자이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볼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노동자들을 나누고 차별대우를 해서 노동자의 단합을 물타기 합니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효과적이고 통합된 구심점이 생기기 어렵게 합니다. 여기까지 노동의 측면에서의 차별을 얘기했다면 다른 쪽의 차별은 더욱 규모적인 면에서나 영향크기 측면에서 더 큰 차별입니다.

가장 큰 차별은 지역차별입니다. 사람을 쓰는데 지역을 가려서 차별합니다. 그결과 고위공직에서의 경상도출신이 비대하게 많아졌습니다.
경제개발에 있어서 지역차별입니다. 정부예산을 우선적으로 경상도로 배분합니다. 그 예산을 먹고 경상도 기업이 자라나 30대 대기업의 과반수 이상이 경상도 기업입니다. 쿠데타를 두번이나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경상도 출신 대통령들이 해놓은 경상도 위주의 지역차별정책으로 인해 고통받은 비경상도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현재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능력이 출중한 우리의 자식들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태어납니다. 아직까지 유전적으로 어느 지역의 유전자가 다른 지역의 유전자보다 뛰어나다 라는 통계를 본적이 없습니다. 이말은 여러분들의 자식들도 충분히 재능을 갖고 태어날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들 중에 누군가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고 교수가 될수 있고 고위공직에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있을 겁니다.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차별받지 않고 오로지 능력만으로 도전하고 쟁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여러분들도 자식들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수 있는게 우리가 지향해야할 민주주의 사회인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비경상도 출신이라면 포기해야 할 부분이 있을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고위공직에 공석이 생겨 도전하려고 한다면 비슷한 능력을 가질 경우 심지어 훨씬 뛰어날 경우에도 경상도출신에게 집니다. 현재 통계가 실증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제일가는 기업이자 경상도 기업인 삼성에서 호남출신의 임원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통계가 실증하고 있습니다.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단지 외부 면피용의 얼굴마담을 약간하고 쫒겨나가듯이 나가야 합니다. 정부예산또한 경상도에 우선적으로 배분합니다. 왜냐하면 이나라는 국호만 대한민국이지 실질적으로 경상민국이니까요.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심지어 TV의 사투리까지도 온통 경상화가 대세입니다. 경상도만 우대받는 시대를 보는 우리같은 비경상도민들은 그 시작이 마지막 황군이었던 경상도 출신군인의 쿠데타로 시작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족을 학살했던 경상도 출신의 대통령 또한 지역차별을 확고화시켰던 것도 잘 기억합니다. 심지어 노무현의 내부배신행위도 잘 기억합니다. 차별의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언제쯤 상처가 아물게 될지 아직도 상처를 덧내게 하는 행태가 인터넷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고 심지어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나서서 조장하는 현실을 볼때 예상하기 힘들게 하지만 그래서 더 간절하게 느껴집니다. 지역차별이 해소될때 비로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허무하게 느껴지지않게 될겁니다.